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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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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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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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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5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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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275화

DUMMY

시계는 물려받은 조이조차 제대로 쓴 적이 없었으므로 그녀가 대충 손목시계라고 여겼던 것과 다르게 그저 회중시계에 불과했다. 그녀가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살펴본 적이 없었단 것을 반증하는 부분이었다.

시계는 고장이 몸통의 칠도 벗겨지고 긁힌 자국이 꽤 있어서 시간조차 자신의 연속에 불과한 세월을 이기지 못했음을 우습게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렇게 시간이 본래의 기능을 잃어버리는 편이 그 주인에게는 퍽 어울리는 듯했다. 공교롭게도 모든 침이 12라는 숫자 하나만을 가리키는 바람에 초영은 시계를 열어보고는 꺼림칙한 기분을 더욱 떨칠 수 없게 되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감정이 상한 것 그 이상으로 인상을 쓴 그녀가 한참 뒤에 시계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도진이 손을 뻗자 그의 손등을 때리기까지 하며 그를 만류하기도 했다.


“만지지 마. 이건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될 거니까.”

“백면의 사랑 이야기에 말입니까?”


이따금 몇몇 성인이 초영의 잔소리를 싫어하거나 그녀의 기에 눌려 찬바람을 맞는 경우를 보기는 했어도, 자신이 직접 당하는 상황은 처음이었기에 역시나 많이 놀란 도진이 손등을 문지르며 물었다.


“그건 아니야. 지금까지 본 바에 의하면 둘은 애초에 시간을 약속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만났던 거죠?”

“몰래 만나야만 했으니까 당연히 밤이지.”

“하지만 밤은 어느 계절에는 너무 길고, 어느 계절에는 너무 짧지 않나요?”


도진은 자신이 직접 글을 써야만 하는 입장인지라 지금의 이야기를 단순히 민담을 듣는 것 정도로 취급할 수 없었다. 감정에 의해서만 되살아나는 호기심을 꺼트리고서 합리적 이성에만 따르기란 쉽지 않았음에도 그는 최대한 언어에 의존해서 판단의 중심을 잡고자 노력했다.


“흐음, 여기에는 그 기억이 없는 것 같은데.”


고장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지만, 고장난 과거 역시 그러할까. 그것을 이렇게 빨리 다시 만지고 싶지 않았던 초영은 어쩔 수 없이 도진이 원하는 대로 행동해야만 했다. 어쨌거나 그를 도와주기로 나섰기에 시계를 수리할 수 없다면, 세월의 병명이 무엇인지 밝혀내기 위해 진단하기라도 해야 한다.

원래 눈을 감으면 제일 그리운 사람이 보이는 것이라 한다. 헌데 그녀는 자신이 제일 그리워하는 존재라고 확신할 수는 없어도, 그 존재가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장면을 들여다보고 말았다.

늦가을인 모양인지 홍자색의 꽃이 그리 싱그럽지는 않은 배롱나무 밑이다. 그곳이 정확히 어디인지 장소를 짚을 수는 없을 만큼 주변 역시 비슷한 풍경을 유지하고 있다. 그속에서 백면은 자신의 머리 위로 드리우는 그늘에 상당히 흡족해하는 얼굴이다. 그의 아래턱이 보이는 게 대부분인 각도였지만, 그의 입가에는 그늘이 지지 않았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백면은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망부석이 되지 않고서는 사랑을 이룰 수 없는가 보다. 기다림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인지 그는 눈알이 곤두설 때까지 근심한다기보다는 눈을 감았다. 때로는 나무에 기대거나 괜히 그 옆에 서서 제 키와 나무의 키를 비교하는 등 우스운 짓거리를 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그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래, 저 애가 몇 살 무렵이었을까. 도대체 시간은 언제 흐르는 거냐고 탓할 무렵에 초영의 뜻에 따라 추억은 밤을 맞이하였다. 뒤에 자리한 한 그루 나무마저 비밀스러운 만남을 눈치채고 그만 물러난 것처럼 어두컴컴해졌다.

그나저나 인간이 사랑을 하기 제일 좋은 때가 언제였지? 그걸 정의하기 어렵다면 저렇게 사랑에 빠진 얼굴인데도 그걸 숨겨야 할 나이 말이야. 어쨌거나 숨길 수 없는 게 사랑이라는 숙명에 맞설 듯이 더더욱 제 마음을 숨기면서도, 마침내 운명을 거부하지도 않는 묘연한 태도로 진실되게 사랑을 고백할 줄 아는 때를 비로소 인간은 언제 맞이하냔 말이야. 초영이 감은 눈에 의문이라는 힘을 주었다.


‘지금이야.’


여자가 나타났다. 아니, 그런데 이건 백면이 낸 말소리였다. 그는 여자가 이렇게 무작정 기다릴 것이 아니라 만날 무렵을 정하자고 하는 권유게 이렇게 대답한 것이다.


‘어딘가에는 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거든.’

‘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요?’

‘밤이 오지 않으면 달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있어. 그래서 달을 보기 위해서는 하루를 전부 버티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연관성을 찾아낼 수 없는 소리에 여자가 입을 다물어버린 듯하다. 별다른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백면은 상처를 받지도 않고서 계속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우리도 이렇게 언제나 밤에 만나면 돼. 달이 더 잘 보일 때 말이야.’

‘달은 항상 하늘에 걸려 있잖아요.’

‘내 말을 믿어도 좋아. 달은 밤에 더 잘 어울리니까. 그러니 우리도 밤에 만나면 돼. 지금 이렇게 말이야.’

‘그럼 자시(子時)가 좋단 말씀이셔요?’

‘아니, 달이 뜨고 저물 때까지의 밤이 좋단 거야.’


그는 여자를 데리고 어딘가로 떠났다. 아마 이 밤에 더 걸맞은 어둠 속으로 그녀를 인도했으리라. 그 빛깔은 칠흑일 수도 있겠으나, 되려 먹물로 물들이지 않고서는 의미를 얻을 수 없는 닥종이의 색을 닮았을지도 모른다.


“밤이라서 그렇대. 달이 잘 어울리는 때가 밤이라서 말이지. 무슨 뜻인지 알겠니?”


사랑은 이유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유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그 이유는 금방 설득력을 잃고 만다. 대개는 그 존재마저도 상실하고 마니 논리를 따지고자 한다면 사랑 그 자체가 되지 않으면 사랑에 맞설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 말을 그대로 옮기려는 초영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도진에게 밤의 까닭을 전해야만 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평생을 언제 어디서라도 달을 보고서 자랐기 때문에 알 턱이 없다. 설령 이제 와서 해를 보고서 달을 본다고 해도 그 차이를 통해서 뭔가를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도진은 스스로 판 구덩이에 들어간 것처럼 눈앞이 막막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차라리 이것을 밤이라고 한다면 매번 같던 그 달은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나도 그래. 달이 뜨고 지는 시계에 대해서 모르는 게 아닌데도 이 아이의 논리를 모르겠단 말이야. 하기야 사랑에 논리를 따지는 연인들이 어디에 있겠니? 그런 사람들은 처음부터 사랑하지 않았거나, 처음에는 사랑했거나. 둘 중에 하나일 테니.”

“달리 알 방법은 없을까요? 다시 한 번 더 시계를 봐주신다거나.”

“그건 사양할래. 그리고 이 시계는 내가 따로 가져가도 되겠지? 요긴하게 쓸 데가 있거든.”

“그 시계는 제가 받은 게 아니라 제가 허락을 따로 드릴 수가 없습니다.”

“알아. 그런데 괜찮을 거야. 이걸 받은 애도 어지간히 이 시계에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니까.”


어렴풋이 조이의 속내에 대해 알고 있던 도진은 적극적으로 사양할 수 없었다. 결국에 그는 초영이 회중 시계를 아예 자신의 팔꿈치 밑에 가져다가 놓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만 봐야 했다.


“다른 분들과 관련된 거라고 있는 건가요?”

“응. 그래서 그러니까 혹시 왜 돌려주지 않냐고 묻거든 도진이 네가 알아서 잘 대답해 줘. 알겠지?”


도진이 멋쩍게 고개를 움직이는 사이에 초영은 그 움직임 속에서 기발한 대안을 떠올렸다. 그래서 하마터면 시계를 반대편으로 건네줄 뻔한 정도로 그녀의 손짓은 과감했다. 다행히도 그러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은 그녀는 상대방이 놀랄 만큼 탁자를 내리쳤다.


“그래, 밤에만 달을 볼 수 있는 사람한테 직접 물어보면 되겠네. 역시 등잔 밑이 어둡다니까. 그렇지 않니?”

“나나 씨 말씀이신가요?”

“맞아. 지금 안에 있지?”


이미 나나가 방에 틀어박혀 있는 것을 알고 있던 초영이 일어섰다. 눈동자만이 그녀를 쫓으려던 것에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은 도진은 엉거주춤 일어나다 말고 도로 앉았다.


“아마······ 지금은 좀 그렇지 않을까요? 아마, 그러니까 아마 안 될 겁니다.”


그리고는 단번에 알아듣기 어렵게 소리쳤다.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274화에 오류가 있어서 알려드립니다.

(혹시 이와 같은 설정 오류를 발견하셨다면 언제든 알려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기존에 마련한 구상에 맞추어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으나, 간혹 이렇게

수사법의 중요성을 잊지 않으려고도 하니 이런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이는 결코 자랑거리가 아님에 그저 면목이 없습니다.)


초영이 도진의 속마음을 듣고 있는 것으로 제가 묘사했는데,

이는 명백하게 제가 저지른 실수입니다.

‘도진의 속마음을 천천히 알아채고 있던 초영이 아주 자연스레 스며들었다.’로

제가 표현했더군요.

아무래도 기억을 읽는 존재는 초영뿐이기에

여러 명의 심리와 행동을 그려내던 중 제가 잠시 헷갈려서 표현한 듯합니다.

부끄럽게도 이를 오늘에서야 확인하였습니다.


‘도진의 속마음을 눈치껏 알아채고 있던 초영이 아주 자연스레 스며들었다.’로

수정하였으니, 부디 너그러운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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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 265화 21.02.23 26 1 9쪽
265 264화 21.02.22 27 1 9쪽
264 263화 21.02.21 24 1 9쪽
263 262화 21.02.20 25 1 9쪽
262 261화 21.02.19 25 1 9쪽
261 260화 21.02.18 26 1 9쪽
260 259화 +2 21.02.17 29 1 9쪽
259 258화 21.02.16 30 1 10쪽
258 257화 21.02.15 26 1 9쪽
257 256화 21.02.14 24 1 9쪽
256 255화 21.02.13 28 1 9쪽
255 254화 21.02.12 24 1 9쪽
254 253화 21.02.11 25 1 9쪽
253 252화 21.02.10 29 1 9쪽
252 251화 21.02.10 29 1 9쪽
251 250화 21.02.09 29 2 9쪽
250 249화 21.02.09 31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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