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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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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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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4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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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화

DUMMY

양실에 침묵이 돌았다. 바람이 있었다면 모두 다 날아갔을 것이고, 햇살이 들었다면 모두 다 찡그린 눈을 감히 뜰 생각도 못 한 채로 고개를 숙였을 만한 그런 극심한 침묵이었다. 자연, 아니라면 운명이라는 것이 실로 감정을 농락하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인간은 침묵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침묵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 비존재적 존재를 알아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견딜 수 없는 침묵의 상태를 부정하기 위해서 안수가 편지를 탐독하는 나나에게는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저에게는 마땅한 힘이 없습니다. 밖에서 아무리 교수라고 해봤자 실상은 조교수라서 그만한 일을 혼자서 처리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섣불리 공개하여도 되는 일 같지도 않고 그러니······ 참으로 어렵군요. 증거가 없으니 말입니다.”


물론 학자의 명예를 걸고 이 표절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설 각오는 이미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유도했던 것은 자신이 이런 무기력한 말을 살짝 흘림과 동시에 모두에게 슬그머니 동기를 부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안수의 눈빛에는 그의 말투와는 다르게 의기가 넘쳤다.


“증거라면 차고 넘치는데.”


태강이 편지를 내려놓는 나나를 아주 지루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야담이 저번에 나한테 다 말해줬거든. 아니지, 거의 다라고 해야 하나? 잘 모르겠네. 솔직히 나는 듣는 일만 하고 귀찮은 건 야담이나 초영이 처리했던 것 같거든.”

“그런 거 같은 게 아니라 분명히 그랬을 것 같네요.”

“나 지금 매우 진지하단 말이야, 백나나.”


팔짱을 끼며 몸을 의자의 등받이에 파묻은 태강이 여전히 지루해 보이는 얼굴로 심드렁하게 나나의 비소에 대꾸했다. 그는 잠시 불편한 자세로 자신을 바라보는 세 명의 백면을 불평스럽게 응시하다가 허리를 곧추세우고는 중대한 발표를 앞둔 사람처럼 들뜬 표정을 보였다.


“실은 말이지. 그러니까 말이야. 들어는 봤어? 아마 이런 건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을지 몰라. 증거가 없는 재판 있잖아. 어때?”


태강은 어깨를 자꾸만 들썩거리며 뭔가를 고대하는 듯한 여운을 풍겼다. 다른 두 사람이 태강의 말뜻을 이해하려는 사이에 도진이 나서서 의문을 제기한다.


“증거가 없는 사건이라면 미제 사건으로 정말 많지 않던가요? 태강 님께 죄송하지만, 그건 월계에서도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맞아요. 그렇거든요.”


옆에서 도진을 자신만만하게 거드는 나나를 순간이나마 배신자처럼 처량하게 쳐다본 태강이 머리를 저으며 두 사람의 의견을 한꺼번에 부정했다. 안수가 별다른 군말을 덧붙이지 않은 데다가 뚜렷한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으니, 어쩌면 세 사람의 의견일 수도 있긴 하다.


“으음, 아냐. 증거가 없는 사건이야 많지. 그건 나도 모르지 않아. 내가 그렇게 기억에 충실하지는 않지만 그런 상식을 말한 건 아니거든. 기억에 충실하지 않으면 상식에 성실하기라도 해야지. 안 그래? 그러니까 내 말은 말이야. 대부분 증거가 없는 사건이라는 것들에는 심증이 없는 걸까, 아니면 물증이 없는 걸까?”


이 질문은 그의 기대에 걸맞게 시간을 오래 끌지는 않았다.


“물증입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안수가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말한 증거가 없는 재판이란?”


태강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여유로운 미소를 보였다. 자칫 모르는 이가 본다면 아버지에게 건방을 떠는 철없는 청년 같이 보일 수도 있었으나, 그에게 있어 오해라는 것은 이해는 물론이고 몰이해만큼의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물증이 없다는 거 아니에요?”

“아니야! 틀렸어. 백나나 자꾸 실망시킬 거야?”


나나는 자꾸만 자신에게 불쌍해 보이는 얼굴을 들이미는 태강의 저의에 대해 좀처럼 감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뭐라고 따지고 들며 공동의 대화를 별로(別路)에 빠뜨리는 대신에 자신도 상당히 언짢음을 알리는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심증이 없다는 거군요.”


아랫입술을 깨물며 도진은 일이 복잡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자신들과 전혀 상관없는 일에 나나가 휘말리게 된다면 뭔가 차질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예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니까! 심증이 없어, 심증이. 그래서 야담이 처음에 얼마나 당황했다고. 막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더라니까?”


태강이 과장된 손짓을 더해가며 허풍을 떨었다. 그런데도 모두 미덥지 못한 시선으로 넘기며 방금 그가 한 이야기를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진실이 아니었기에 태강은 오히려 마음놓고 이를 한 번이다 더 강조할 수 있었다.


“정말이라니까, 왜 다들 못 믿는 눈빛이지? 우리도 사람인데 눈물을 흘려. 백면부터 봐. 걔 눈물이 없으면 우리 목숨은 끝장이라니까. 아! 그래, 말이 나와서 이건 좀 물어봐야겠다. 야담은 어디에 있어?”


도진과 나나, 더불어 12성인의 행방에 대해 그다지 근심하지 않고서 여름을 나고 있던 안수까지도 이 질문은 주객이 전되되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만약에 야담을 찾아야 한다면 그건 저쪽이 아닌 이쪽일 테니 말이다.


“그걸 왜 저희한테 물어요?”


티격태격거리는 사이에 태강과 아무 말이나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가 되어버린 나나가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는 식으로 물었다.


“왜냐니? 야담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으니까 묻는 거지. 여기에도 없는 것 같던데. 더 찾아봐야 하나? 진짜 어디에 있어?”


사람이 앉은 자리를 제외하고는 지나치게 텅 빈 듯한 느낌이 드는 양실을 둘러보며 태강이 아쉬움의 감정을 잔뜩 끼얹은 얼굴빛으로 나나에게 대답했다.


“저희도 모릅니다. 제가 알기로는······ 제가 한 번 심연도에 따로 들른 적도 있었는데, 그때도 계시지 않았었으니까요.”


도진이 꺼낸 이야기에 근거가 있는 듯하자 태강은 골치가 아픈 모양인지 자신의 뒷머리를 마구 헤집어 놓았다.


“아, 곤란하네. 야담이랑 만나야 하는데 말이야. 어디에 있을까? 짐작이라도 가는 사람 없어?”


이번의 침묵은 그래도 견딜 법한 것이었다. 모두 입밖으로 말을 꺼내지는 않았으나 저마다 고개를 움직이거나 입술을 부정적으로 비트는 식으로 해서 의사 표현은 확실히 했기에 그리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어떡한담. 일부러 초영이 한 말 어기고 수도로 오자마자 야담부터 찾았는데 보이지도 않더라고. 그래서 여기에 있을 줄 알고 그때서야 초영이 하라는 대로 내생을 다 데리고 여기로 온 거지. 그런데도 야담이 보이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이제 여기저기 다니는 거 좀 피곤해졌는데.”

“내생을 다 데리고 오라고 했다고요?”


그러기에는 너무나도 조촐한 모임이지 않던가. 나나가 자신을 포함하여 도진과 안수의 그림자라도 인물에 쳐주는 것인지 싶어 순간적으로 바닥을 쳐다보았다. 더 어둡기는 했으나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응. 아, 지금 전부 다가 아니라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걱정하지 마. 내가 말했잖아. 내가 또 충실하지는 않아도 성실한 구석이 있다니까. 초영이 조조이랑 고여명은 안 데려가도 된다고 했어.”


태강이 하품을 하며 나나의 속마음에 답했다.


“한 명이 더 있는데요.”


도진이 자신으로서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그 한 명을 기억해내며 말했다.


“아, 그렇지. 걔도 제외야. 걔는 아직 어려서 무슨 말이라도 제대로 하겠어?”


태강이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연속으로 하품했다.


“저희를 모아서 뭐 어쩌려고요?”


나나가 그런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어쩌려는 건 아니야. 너희가 각자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렇거든.”


아직도 하품이 멈추지 않는 것인지 입술 근처를 귀찮다는 듯이 손날로 누르며 태강이 이야기했다. 그다음에 그는 익숙하게 눈을 비볐다.


“이 인간, 아 그런 이름 말하기 싫은데 말할 수밖에 없겠네. 착오는 없어야 되니까. 이 인간 권기현에게서 심증을 받아내야 하거든. 당연히 물증은 다 있긴 해. 그런데 초영이 그건 필요 없다고 하더라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도로 하품하면서 태강이 말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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