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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커피
작품등록일 :
2023.12.03 18:10
최근연재일 :
2024.02.13 23:5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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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6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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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글자
12쪽

#38 지킬 것이 있다. 삶의 기쁨 3호

DUMMY

화친 파운드리, 서진태 사장.


100만 카피라고 해봤자, 9,190만 원만 주면 합법 생산이 되는데, 푼돈이나 아끼자고, 멋대로 생산했다.


“칩, 작동하지 않습니다.”


생산 주임이 당황해하며 보고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무단 카피한 100만 개 모두 작동하지 않았다.


“공정 이상인가? 잘 만들었어야지!”


서진태 사장은 버럭 화를 냈다.


“현미경으로 비교했지만, 잘못 인쇄된 거 없습니다. 계약된 두레칩은 정상 작동하지만, 무품은 안 돼요.”


“똑같이 생긴 두레칩인데, 계약하고 생산된 건 제대로 작동하고, 무품은 모조리 고장이다? 이유가 뭐지?”


“계약 제품은 마지막 품질 검사할 때, 슬기에서 인증받습니다. 암호화된 무늬인지 숫자인지 뭔지 모를 걸, 입력해 주는데, 그걸 ‘숨결’이라고 합니다.”


“숨결 인증을 받아야 두레칩이 작동한다는 거네.”


“네.”


“지금이라도 받으면 되지. 받아. 뭐가 문제야?”


“그게 ···. 두레칩 생산은 순서가 있는데, 선계약 후, 계약에 맞춰 생산해야 합니다. 순서가 바뀌면, 숨결 인증 안 해줍니다.”


“순서 바뀌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우리 공장에서 일어난 일인데?”


“저도 방법은 모르지만, 슬기텍은 알던데요?”


“백만 개 날렸네.”


서진태는 아쉬웠다.


슬기택 ···. 호구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숨결 인증 우회 방법을 찾기 전까지, 어쩔 수 없이, 백만 개 계약하고 다시 생산해야 했다.


“그게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슬기에서 우리가 무단 카피했다는 이유로 단가를 올렸습니다.”


“얼마나?”


“열 배 오른, 피당 919원입니다.”


서진태 사장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



기수는 공원 근처에 있는 빵집에 들렀다.


빵집 이름은 ‘소금과 빵’


소금과 빵은 서울 등대로 이사 와서 발견한 ‘삶의 기쁨 3호’였다.


흔한 프랜차이즈가 아니라, 제빵사가 반죽부터 마지막 데코까지 직접 하는 곳이었다.


빵 종류도 많지 않고, 가격도 싸지 않고, 맛도 심심했지만, 프랜차이즈와는 확실히 달랐다.


“자주 찾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방사랑 사장은 소금빵 하나를 더 넣으며 말했다.


그는 이름 때문에 빵집을 하기 전부터 ‘빵사랑’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감사히 나가려던 기수가 멈췄다. 늘 버터가 쌓여 있던 냉장고 선반이 텅 비어 있었다.



“가게 옮기나요?”


“눈썰미 좋으시네요. 이번 달 말에 문 닫아요.”


이유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장사가 안되니깐.


슬기수는 빵집 장사가 되든 말든, 삶의 기쁨을 잃을 수 없었다.


“문 닫지 마세요. 제가 빵집 살게요. 한 달에 얼마 버세요?”


“네?”


“월급 줄 테니, 빵집 계속해요.”


“네?”


빵 사장은 되물으면서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님이 농담한 줄 알지만, 말만 들어도 고마웠다.


그 정도로 내가 만든 빵을 좋아해 주셔서 고마웠다.


“빨리 대답해줘요. 한 달 벌이만큼, 맞춰 줄 테니.”


“벌긴 뭘 벌겠어요? 매달 적자예요.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그래요? 그럼 그 적자도 살게요. 그럼 ···. 다시 물을게요. 한 달 얼마 벌고 싶어요?”


기수는 빵 봉투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빵사장은 넋 나간 사람처럼 기수를 쳐다봤다.


저 남자! 농담하는 게 아니다.


“삼백 ···. 오십만 원 ···.”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적자 나는 빵집이다. 너무 많이 부른 것을 바로 후회했다.


“하루 몇 시간 일하시는데요?”


“적어도 열두 시간은 ···.”


“12시간이면 돈 쓸 시간도 없겠네요. 월급은, 그냥 구백십구만 원으로 하죠. 휴대폰 번호 이거 맞죠?”


기수는 계산대 옆에 있는 현금 이체용 번호를 가리켰다.


“네.”


그는 곧바로 오천구백십구만 원을 입금했다.


“구백십구만 원은 이번 달 월급이고, 나머지 돈으로 급한 불 끄고, 버터도 사서 채우시죠. 자세한 건, 내일 다시 이야기해요.”


빵사장은 그의 결재용 휴대폰으로 오천구백구십구만 원이 입금된 걸 확인하곤, 눈물을 발칵 쏟았다.


세상에! 살다 보니깐, 이런 일이 다 있구나! 날 알아주시는 분이 계시는구나!


“슨상님!!!!!!”


그가 나가려는 기수를 불러 세웠다.

기수가 뒤돌아보자,


“우리 집 빵 어떤 부분이 그렇게 좋으셨어요?”


적자 나는 걸 빤히 알면서, 투자할 정도라면, 분명히 엄청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올 때마다 사람이 없는 게 좋았어요. 그럼.”


기수는 살짝 손을 흔들어주곤, 밖으로 나갔다.



뜻밖의 돌직구!에 맞았지만,


빵사장의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잘 설명할 순 없었지만,


굉장히 기분 나쁜 소릴 들었는데도, 가슴이 설렌다.



슬기수는 정해진 루틴에 따라 여의도 공원을 가볍게 돌았다.


둘레길에서 메르세 비스트를 봤는데,


연못 앞에 검은색 정장을 입은 천주가 있었다.


그는 최근 아내를 잃고 몸과 얼굴이 많이 상했다.


“드시겠어요?”


기수는 빵사장에 받은 서비스를 자연스럽게 천주에게 건넸다.


마치, 오늘 만나게 될 줄 알았다는 듯.


천주는 눈앞에 있는 소금빵을 받지 않고,


“제 아들과 저를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허리를 깊이 숙였다.


“회장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거 안 드실 거면, 봉투에 다시 넣겠습니다.”


“네. 입맛이 없네요.”


“그럼.”


기수는 가볍게 인사하고, 천주를 지나치려 했다.


천주가 오성 전자 CEO였지만, 기수에겐 영양가 없는 존재였다.


오성 직원도 아닌데, 천주를 살갑게 맞아줄 이유도 없었고, 천주를 기다려 줄 필요도 없었다.


지금, 천주는 슬기수의 앞을 막아선 행인에 불과했다.


기수에겐 오성 전자 CEO보다 ‘삶의 기쁨 3호’를 지켜줄 빵사장이 더 소중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주가 따라왔다.


“슬기수 사장님. 제가 부탁드릴 ···.”


기수는 못 들은 척, 슬그머니 속도를 냈다.


남의 집안일에 간섭하지 않는 게 그의 철학이었다.


응어리진, ‘관련자’를 내친 건 고마웠지만, 그에 상응하는 정보는 이미 줬다.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



간신히 슬기수를 따라잡은,


“아내는 임신 중이었습니다.”


천주는 참담했다.


오성 가족회의에서 덮기로 해서,

외부인에게 말하는 건 금지였지만, 슬기수는 예외다.


슬기수 사장이라면,

가족보다 더 많은 것을 알 것이다.


“유전자 검사해보시죠.”


“했습니다. 제 아이는 아니었습니다.”


기수는 그럴 줄 알았다.


“아내는 ‘그들’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했는데, 그들이 누굽니까?”


“모릅니다.”


깔끔하게 잘라 말했다.


내가 정신과 의사도 아니고, 왜 자꾸 인생 상담 들이대는지.


명색이 한반도 최고 재벌 집안 맏아들이면, 넘치는 자본력으로 재주껏 알아보면 될 것을.


기수에겐 ‘바글’ 집안 문제보다 메타에 집중하는 ‘메타 라이프’가 더 소중했다.


바글과의 관계는, 그 바글이 최고 재벌일지라도, 메타 라이프에 도움 되지 않는다.


메타에 집중하면 마약으로도 도달할 수 없는 황홀경에 이른다.


마약은 약효가 지나면, 비참한 고통이 찾아오지만,


메타 황홀경은 ‘작품’으로 남는다.


화가가 원하는 그림을 그려냈을 때와 비슷했다.


그 어떤 바글도 메타 라이프의 ‘나르바나’를 주지 못한다.


나르바나는 산스크리트어로 해탈과 열반을 뜻했다.


바글 집안일은 바글 집안에서 해결하면 된다.


천우가 살려달라 매달려서 엮였지만, 이제 끊어내자!


기수에게, 오성 가문을 돕는 건, 길고양이에게 먹이 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공원 표지판에 크게 쓰여있다.


‘동물에게 먹이를 주지 마시오.’


천주에게, 기수의 ‘선 긋는 태도’는, 문화 충격에 가까웠다.


퇴직자가 겪는다는, 인간관계 단절이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천주가 상대한 ‘사장’들은 어떻게든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애쓰는 분들이었다.


더군다나 천주는 가족을 잃었다.


슬픔에 공감하고 도움 주려는 게, 인지상정인데, 저리도 매몰차게 가버리다니!


이유야 어쨌든, 국민 사모님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는데,


진상을 밝혀, 정의 구현에 힘써야 마땅할 것 같은데,


멀어져가는 기수의 뒷모습을 보노라니, 여러 감정과 생각이 얽히고설켰다.


···.


그동안 만나왔던 사람들과 차원이 다른 분이시다.


미련 없이 내게 등을 보이고, 거침없이 앞서가는 저 모습 ···.



실로 놀랍고, 존경스러웠다.



저분은 맥라렌 사고의 진실을 알려 주셨고, 아들과 나를 구해주셨다.


저분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희생은 나와 아들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손예림은 전문가도 찾지 못한 자동차 조작으로 아들을 노렸고,


쉽게 구할 수 없는 독약으로 날 죽이려 했다.


그녀의 마수가 어디까지 뻗쳤을지, 생각만으로 등골이 서늘했다.


오성 가문 천씨가 교묘하게 학살당했을 것이다.


체로키 인디언처럼.


따지고 보면, 슬기수님은 나를 도와줄 이유가 없다.


손예림과 손잡고 이익 챙기는 게, 남는 장사였을 것이다.


모른 척해도 그만이었을 테고.


잠시 착각했다.


나와 슬기수와의 관계를, 오성 CEO와 일반 기업 사장의 위치라 여겼는데,


높게 솟은 서울 등대가 보인다.


인간의 능력을 높이로 나타낸다면, 슬기수는 서울 등대였다.


어쩌면, 서울 등대 위, 뜬구름일지도 모른다.



슬기수는 금강 천재의 아버지이자, 두레칩 설계자셨다.


슬기 테크트리가 주식시장에 상장되지 않아, 그 가치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주식시장에 상장된다면,


오성 전자 시가 총액보다 높아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



메타에 빠져드는 경로는 무한에 이른다.


식물인간이었던 슬기수는 ‘움’을 통해 메타에 이르렀다.


‘움’은 ‘동작 경로’ 중 하나였다.


외상으로 인한 뇌염으로 뇌가 녹아버린, 기수에게 남은 것은 ‘의지’뿐이었다.


그 의지를 움직임과 연결하려면, 자연현상을 뛰어넘는 매개체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메타 연산이었다.


그의 의지가 움을 통해 ‘경로’를 활성화했고, 실낱같은 매듭이 맺혔다.


메타 연산은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경지에 있다.


다다랐어도, 쌍소멸로 사라진다.


하나의 삶은 하나의 깨달음과 함께 사라진다.


운 좋게, 살아서 메타 매듭을 맺어도, 모르고 살다 간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흔한 것은 통념에 자신을 맞추기 때문이었다.


손에 쥔 메타 매듭을 스스로 버리는 꼴이었다.


슬기수에겐 아들이 있었고, 아들이 아버지의 메타를 알아보았다.


알아보았다고 해도,

통념에 허물어지는 게 보통이지만,


아들은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를 택했고,


아버지를 위해 통념에 맞서 버텼다.


아들은 세상에 맞서 아버지를 지켰다.


아들은 힘들 때마다 중얼거렸다.


‘나에겐 아버지가 있다!’


그랬다!


찬이 힘든 시기를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지킬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켜야 할 것을 지켜내는 것!


대륙을 통일한 칭기즈칸도 이루지 못한 업적이었다.


칭기즈칸은 제국을 얻었지만, 지켜야 할 많은 것들을 잃어야 했다.



찬은 아버지의 메타를 보고 배워, 자신만의 메타에 이르렀다.



찬은 아버지가 디자인한, 두레칩의 회로도와 코어를 감상했다.


아버지는 슬기 테크트리를 통해서,


일주일에 하나씩 새로운 버전의 두레칩을 선보이고 있다.


아버지는 칩 디자인에 푹 빠져 계셨다.


‘메타 라이프 초기에는 ···. 나도 그랬었지.’


그때 빠져든 분야는 수학이었다.


1령 코어 라바(larva, 애벌레) 시절에는 모든 게 화창하고 밝게 느껴진다.


그래서 메타 연산을 네이처에 투고했었다.


천문학에서는 블랙홀을 별의 최종단계로 여기지만, 사실은 블랙홀부터 시작이다.


‘블랙홀이 시작이다.’라는 무거운 진실을 3령 코어에 이른 후에 보았다.


1령 코어 시절 화창하게 느꼈던 세상은,


짧다.


동쪽 발코니에 서면, 아버지와 함께 지냈던 산동네 반지하 집이 보이고,


서쪽 발코니에 서면, 아버지가 뛰어들었던 중랑천이 보인다.


아버지가 이사 가서, 위층이 비었는데,


작은 방 천장과 벽을 터서, 복층으로 만들어야겠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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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59 넘어지면 잠시 누웠다 가자 +21 24.01.13 688 40 13쪽
58 #58 모르셨구나 +14 24.01.06 872 52 14쪽
57 #57 메타 부족은 인생을 불안하게 한다 +6 24.01.04 825 41 12쪽
56 #56 바다 꿈틀이 +8 24.01.02 843 45 13쪽
55 #55 화려하게 떠오르는 직업 +12 24.01.01 846 47 12쪽
54 #54 벽에 던져진 토마토 +8 23.12.31 907 42 12쪽
53 #53 오늘의 농업 일기 +10 23.12.30 993 53 11쪽
52 #52 봄날은 간다 +8 23.12.29 1,034 52 11쪽
51 #51 기수가 잠든 조용한 밤 +10 23.12.28 1,031 48 12쪽
50 #50 인생은 아름답다고? +12 23.12.27 1,085 54 12쪽
49 #49 슬기텍 차례였다 +14 23.12.26 1,133 46 12쪽
48 #48 그냥 한국인 +12 23.12.25 1,198 6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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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45 뭐가 좋을까요? +8 23.12.22 1,389 57 11쪽
44 #44 슬기텍, 슬기수입니다 +22 23.12.21 1,491 58 13쪽
43 #43 소중한 존재 +14 23.12.20 1,562 58 12쪽
42 #42 메타 연산자라 했던가? +16 23.12.19 1,627 60 13쪽
41 #41 망령 깃든 인공지능 +14 23.12.18 1,720 67 12쪽
40 #40 나는 항상 네 생각을 하는데 +24 23.12.17 1,765 72 13쪽
39 #39 삶의 기쁨 3호 소금과 빵 +12 23.12.16 1,747 79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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