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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6굴림실패 님의 서재입니다.

치킨 없는 판타지에 구원은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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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D6굴림실패
작품등록일 :
2019.10.28 19:34
최근연재일 :
2021.03.04 14:24
연재수 :
28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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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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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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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5쪽

업보(業報) (完)

DUMMY

업보(業報) : 전세(前世)의 악한 짓에 대한 죄값. 행위[業, karma]의 결과(보報, vipāka)로서 받는 것을 가리키는 불교용어. 과보, 업과(業果)로도 불림



간신히 케트라 산으로 돌아온 포이부스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구르고 구르고 또 굴렀고 결국 종전 선언이 나오고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포이부스가 케트라 산으로 복귀하고 며칠 뒤, 새로운 가족이 태어났고 모두가 아이를 축복해주었다.

이난나 여신은 포이부스의 막내 딸 아리아나를 자신의 다음 교황으로 세우겠다고 하였지만 포이부스는 나중에 아이가 성장했을 때 스스로 선택하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전후처리를 하고 새로 태어난 딸 아리아나를 돌보는 일을 하면서 몇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마침내 그토록 염원하던 코카트리스 개량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독샘이 없이 태어난 코카트리스들을 선별하여 교배시킨 결과 그 중에서 거듭하여 새끼를 낳아도 그 자손들 모두가 독샘이 없는 변종이 나타났고, 거기에 더해서 변종의 자식들 사이에서 석화광선 능력을 상실한 개체들이 나타난 것이다.

포이부스는 독샘과 석화광선이 없는 개체들을 애지중지하며 기르면서 동시에 팔라딘 제니스와 파일라에게 지시한 번식주기를 짧게 만드는 약물 개발에도 성공하여 드디어 전투용 코카트리스와 식용 코카트리스의 유의미한 종족 분리가 끝냈다.


거기에 제니스의 연구성과가 폭발적으로 나오기 시작하여 카론의 육신을 되찾을 호문쿨루스 제조기술에도 큰 성과가 나왔다.

그렇게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그는 어느 날, 신들로부터 제3시대가 종료되고 제4시대가 시작될 거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양계장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려고 할 때 트러블을 일으킬 수 있는 신들이 간섭할 수 없는 시기가 다가오는 것은 분명 시대가 그에게 웃어준다는 증거로 보였다.

포이부스는 신들로부터 제3시대가 조만간 끝날 거라는 통보를 받고 이제 몇 년 동안 미뤄왔던 일을 처리하기로 하였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막둥이 아리아나를 안은 채 정겹게 손을 흔들어주는 아내 스틸리나와 여전히 털을 뿜뿜 흘리는 커다란 대형견으로 보이는 아들 카론, 장녀 헤카, 그리고 수많은 사람과 동물들의 배웅을 받으며 포이부스는 케트라 산 꼭대기의 첫번째 신전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가볍게 말했다.



"그럼 헬스 조지는 것처럼 후딱 끝내고 돌아올게!"


"괜히 가서 이상한 짓 하지 말고 당신! 그리고 아까 혹시 몰라서 보험용으로 챙긴다던 물건들은 잘 챙겼어?"


"주머니에 잘 들어있어."


"에라스 만나면 딸내미는 언제 보러 올거냐고 타박 좀 해주세요! 분명 연차생겼다고 말한지 몇 년이나 지났는데 어떻게 처자식을 한 번도 보러 오지 않는건지 원!"


"알았어 알았어"



마가렛은 자신이 낳은 딸 실비아를 품에 안고 포이부스에게 말했고 포이부스는 흔쾌히 퀘스트를 수락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신전 안에는 하로나스의 영역으로 통하는 통로가 열려있었고 포이부스가 그 안으로 들어가자 잠시 후 포이부스는 신들이 강림해있는 황금빛 벌판 위에 서 있게 되었다.



"준비는 끝났냐?"


"예"



본체가 강림해있기에 평소처럼 신성함이 넘쳐나며 웅웅거리는 목소리가 아니라 평범한 생명체의 목소리를 내는 이그니의 말에 포이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만신전에 소속된 신들은 포이부스를 둘러싸고 힘을 불어넣으면서 나지막히 말하기 시작하였다.



"탄'메펫이여 올라가라!"


"신들의 메시지여 올라가라!"


"폰티펙스 포이부스 막시무스여 승천가라!"


"불꽃 부족의 떠도는 어둠이여 승천하라!"


"■■■여 올라가라!"



이전에 다른 신들에 의해 승천당할 때와는 달리 이쪽 세상에서 이그니와 여러 신들이 그에게 부여해준 이름을 외치고 하로나스가 다른 신들에게 들리지 않게 포이부스의 진명을 외치자 저항없이 인력에 몸을 맡기자 그는 금세 천상의 영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문을 통과하면서 쌓여있던 신들의 권능 포인트가 전부 힘으로 변환되며 포이부스의 몸에 있는 필멸성을 떼어내고 대신 그 자리를 채우기 시작하였고 모든 과정이 끝났을 때 포이부스는 첫번째 달에 마련된 신들의 거처의 명예의 전당 한복판에 서있었다.



"후우"


"기분이 어떠냐?"



어느새 다가온 이그니가 포이부스의 어깨를 두드려주었고 포이부스는 속의 내용물이 완전히 교체된 자신의 몸을 보며 말했다.



"뭔가, 그... 아직 덜 채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우리가 지상 근무 반신으로 보직 선택해서 아마 스테이터스가 좀 많이 까여서 그럴 거다. 게다가 아직 특성 선택도 안했으니 평소보다 힘이 많이 부족한게 느껴지는게 당연하다."


"아, 그러고보니 그런 것도 있다고 했었죠. 저는 역시 요리나 생육의 반신 아니면 치킨의 반신이 되겠죠?"


"솔직히 우리 만신전 전투력은 충분하니 생산 쪽을 선택해도 괜찮지. 게다가 이번 게임에는 요리의 신이 없어서 잘만하면 그쪽 신앙을 전부 빨아먹을 수도 있고 말이야."



이그니는 예상 외로 그쪽도 나쁘지 않다는 듯이 포이부스를 격려해주었고 저 멀리서 만신전에 소속된 다른 신들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자, 그럼 갑시다."



만신전 소속 신들이 모이자 하로나스가 모두를 인솔하여 어딘가로 향했고 그녀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다름이 아닌 거대한 재판장 같이 생긴 장소였다.

재판장이 있을 만한 자리에는 창조신, 대지모신, 진실의 신 이 세명의 최고 신들이 앉아있었고 창조신과 대지모신은 지루하다는 얼굴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진실의 신은 흥미진진한 일이 벌어지기를 기대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로나스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포이부스의 어깨를 두드려주었고 포이부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중앙의 증언대처럼 보이는 곳에 서서 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창조신은 매우매우 피곤하다는 얼굴로 심드렁하게 말했다.



"자 그럼 오늘 처리할 반신 승천 및 새로 태어난 반신의 특성 선택에 대한 행정 절차를 진행하겠다."



창조신이 손을 휘두르자 포이부스의 앞에 은회색의 물결치는 원형 거울 5개가 나타났고 그곳에는 각각 요리와 생육, 타락과 회유, 말살, 치킨, 손재주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규정대로 반신을 승천시키는데 포인트를 쏟아부었거나, 이자의 행보에 크게 관여한 신들은 투표를 하시오."



포이부스가 고개를 돌리자 방청석에 있는 하로나스의 만신전 소속 신들의 앞에 버튼이 달린 리모콘이 나타났고 신들은 여유로운 얼굴로 리모콘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버튼을 누르자 순식간에 요리와 생육이라고 적힌 은회색 거울 밑에 0이었던 숫자가 쫘르륵 올라가더니 10에서 멈춰섰다.


포이부스는 치킨의 반신이 아니라 아쉽지만 그래도 요리와 생육이 더 넓게 치킨을 포괄하는 개념이기에 딱히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다.



"뭐 볼 것도 없구만 그럼 이것으로..."


"잠깐!"



그때 갑자기 방문이 열리면서 수십 명의 신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방청석에 앉았고 진실의 신은 올게 왔구나 하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이의있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발라테아를 필두로 한 얼마 전 포이부스에게 거하게 한 방 먹은 신들이었다.



"아직 그놈이 승천하는데 필요한 포인트 절반을 채운 우리들이 투표를 하지 않았다!"


"지난 몇 년동안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



수십 명의 신들이 방청석에 앉아서 포이부스의 앞에 떠 있는 거울에 적힌 글자를 본 순간 새로 나타난 신들은 떠들어대기 시작하였다.



"뭐 골라야 해?"


"지금 요리와 생육에 제일 표가 많으니까 다른거 찍어!"


"치킨도 안돼! 저놈이 제일 원하는 거야!"



순식간에 치킨과 요리를 제외한 나머지 선택지의 표가 하나씩 올라가기 시작했지만 그때 신 중 한명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타락과 회유랑 말살은 엄청 전투적인 쪽이라 되려 쟤네 좋은 일만 시켜주는 거 아니야?"


"그런가?"


"생각해보니 그러네?"


"차라리 그냥 치킨으로 밀어주면 저 녀석은 만족하지만 하로나스 쪽의 세력 증가에는 아무런 메리트도 없는거 같은데?"


"아! 나 이미 타락 찍었는데!"



그 말에 포이부스에 대한 원한보다는 하로나스 세력 약화가 목적인 신들 일부가 회유되었다.

물론 그 신의 바로 옆에 개인용 메시지창이 떠 있고, 거기에 대화상대로 알고로스가 들어가 있다는 걸 다른 신들은 몰랐다.

알고로스는 은근슬쩍 자기한테 감사하라는 의미가 담긴 턱짓을 포이부스에게 했고 포이부스는 알고로스 쪽으로 감사하다는 시늉을 한 뒤 투표 상황을 지켜보았다.



요리와 생육 10

타락과 회유 7

말살 3

치킨 9

손재주 5


"남은 신들은 빨리 결정하시오."



창조신은 이 흥미진진한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일하기 귀찮다는 분위기를 팍팍 내고 있었고 결과가 어떻게 되든 별로 상관하지 않을 걸로 보였다.



"다들 진정해! 저놈이 한 짓을 잊었어? 저놈 지금 치킨에 표 올라가니까 입꼬리도 같이 올라가고 있다고!"


"옳소! 하로나스 쪽이 강화되는 건 내버려둘 수 있어도 저놈 좋은 꼴은 못 봐!"


"그럼 뭐가 제일 좋냐?"


"아마 말살이나 손재주 쪽이겠지 그쪽은 상위호환인 신들이 있어서 견제하기 편하니까"


요리와 생육 10

타락과 회유 7

말살 3

치킨 9

손재주 8



그 말에 순식간에 말살과 손재주 쪽으로 표가 올라갔다.

이제 남은 신은 몇 명 없었고 그중에는 놀랍게도 발라테아가 포함되어 있었다.



"포이부스"


"왜요?"


"오해하지 마라. 공적인 이해관계 때문이 아니야. 이건 순수하게 내 사적인 감정이다."


꾹! 꾹!


요리와 생육 10

타락과 회유 9

말살 3

치킨 9

손재주 8



볼룬드 신과 발라테아는 주저 없이 같은 선택지에 표를 행사했다.

이제 남은 신들은 3명이었고 그들은 포이부스와 크게 척을 지거나 친한 신들은 아니었으나 몇 년 전 신대륙에서 포이부스에게 자신들이 키운 영웅들이 살해당한 이들이었다.


아직 표 차이가 그리 심하지 않았기에 사실상 포이부스의 미래는 이들 셋에게 떠넘겨진 셈이었고 3명의 신들이 투표를 하려고 할 때 포이부스가 급히 그들을 향해 손을 뻗으며 외쳤다.



"기다려주십시오!"


"뭐냐? 마지막으로 남길 유언이라도 준비해뒀냐?"



자신들이 키우던 영웅들이 죽은데다 포이부스의 승천에 포인트를 쏟아부었기에 심사가 매우 좋지 않았던 신들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고 포이부스는 그런 신들의 얼굴을 세심하게 살피다가 그들 중 한명이 예전에 본 적이 있는 얼굴이라는 걸 깨닫고 급히 챙겨온 보험용 도구 중 하나를 꺼내들었다.



"제가 원하는 쪽을 골라주시면 사죄의 의미로 책갈피 카드게임의 초회 알파버전 트리플 팩을 뿌리겠습니다!"


"에라타 적용 안되는 초회 한정 생산 카드가 들어있는 트리플 팩?"


"그거 지금 장터에서 부르는 게 값인 유니크 수집템이잖아!"


"야야야! 우린 치킨 찍어줬는데 안 주냐! 업적 깨야 한다고!"



포이부스의 말에 관중석에 있던 치킨에 표를 던진 신들 사이에서 폭동에 가까운 소란이 일어났고 포이부스는 주머니에서 나머지 팩들을 꺼내며 말했다.



"여러분께는 제가 치킨의 신이 되는 기념으로 희귀 일러스트가 수록된 베타 버전 카드팩을 드리겠습니다."


"으음... 베타 버전이면 에라타를 빡세게 받아서 성능이 좀 애매한데 희귀 일러스트 버전이면 나쁘진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어차피 수집용 카드 공짜로 받는건데 뭐 어때?"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공짜는 아니잖아. 저 녀석 승천시키는데 우리들 권능 포인트가 들어갔다고"



포이부스의 말에 치킨에 표를 던진 신들의 폭동은 잠재워졌지만 그들은 어째 보상이 영 애매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우린 카드게임 안하는데?"


꾹! 꾹!


요리와 생육 10

타락과 회유 11

말살 3

치킨 9

손재주 8



그러나 남은 신 중 2명은 바로 타락과 회유에 표를 던지고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포이부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순간, 옆에서 버튼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투표함의 숫자가 바뀌었다.



요리와 생육 11

타락과 회유 11

말살 3

치킨 9

손재주 8


"호텝! 어째서 감히 배신을?!"


"끅끄끄끄! 트리플 사죄팩은 어쩔 수 없지. 그것도 알파 버전이면 더더욱!"


"야이 씹쌔꺄!"


"아 어쩔 수 없었다고 지금 비공식 장터에서 저거 가격이 얼마인줄 알기는 하냐?"



결국 포이부스에게 매수된 마지막 신이 요리과 생육 쪽으로 표를 던지면서 타락과 회유, 요리와 생육이 동률이 되어버렸다.

신들이 투표를 끝내자 창조신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투표자격이 있는 신 더 없나?"


"...."


"진실의 신! 최종 투표결과에서 동률이 나왔을 때 우리가 어떻게 했었지?"


"무효! 제발 무효!"



창조신 부리 아우둠라의 물음에 포이부스 반대파 신들은 제발 투표 무효 후 재투표를 원했으나 진실의 신 아드보카투스는 이제 하이라이트가 시작되었다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대답하였다.



"최고 득표가 된 항목들을 전부 합쳐서 단일 속성으로 2개가 되었으면 2개의 속성 전부를, 만약 3개 이상일 경우 승천할 자의 손으로 자신의 특성을 선택하도록 되어 있지."


"아!"


"으아아아! 호텝 이 새끼가 배신을 때려서 망해버렸어!"


"사죄팩 주는 거 맞지?"


"사죄팩이라니요? 제 승천 기념팩입니다. 자 여러분 팩 받아가세요!"



포이부스를 증오하는 신들 사이에서는 탄식이, 포이부스를 어쩌다보니 옹호하게 된 신들에게는 환호성이 나오면서 포이부스는 주머니에 넣어놨던 카드팩들을 뿌리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팩 배부가 끝나고 포이부스는 당당하게 특성들이 적혀있는 은색 거울들의 앞에 서게 되었다.

당당하게 요리와 생육이라고 적혀있는 은회색 거울 앞에 선 포이부스는 창조신과 대지모신, 진실의 신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소감 한마디 해야 합니까?"


"그런거 없으니까 빨리 하기나 하? 너 뭐하냐?"



창조신은 귀찮다는 듯이 포이부스에게 빨리 끝내라고 말하려다가 포이부스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해졌고 포이부스는 갑자기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창조신의 시선의 끝을 천천히 따라가고는 자신의 오른손이 어느새 타락과 회유라고 적힌 거울 앞에 있는 걸 보고는 기겁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어휴, 저한테 가끔 벽에 손대고 기대는 버릇이 있었나봅니다. 당장 어? 이게 왜 이래?"



포이부스는 하마터면 큰 실수할 뻔 한 것을 막아준 창조신께 감사를 표하며 손을 떼려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오른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발라테아 님! 장난치지 말아주세요! 투표 결과는 정해지지 않았습니까!"


"지금 저놈이 무고한 신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우려고 하네? 나 아무것도 안했어 새꺄!"



포이부스는 당장 의심가는 신에게 그만두라고 했으나 발라테아는 되려 화를 내면서 욕을 날렸다.

이 이상사태에 신들은 당황하면서 서로를 바라보았으나 그 누구도 권능이나 수작을 부리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닫고 다들 포이부스에게 장난치지 말라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아무도 장난 안치고 있어! 너야말로 장난 그만하고 빨랑 끝내기나 해!"


"장난치는 것 아닙니다! 지금 뭔가가 제 손을 자꾸 당기고 있단 말입니다!"


"신들 중에 장난치는 신 없어!"



포이부스는 온 힘을 다해서 통제를 벗어난 오른손을 빼내려고 했으나 오른손은 되려 점점 타락과 회유라고 적힌 거울을 향해 다가갔고 포이부스는 지상 근무 반신이 되는 바람에 반토막난 힘 때문에 끌려다가가 외쳤다.



"누구냐! 대체 누구기에 이런 짓을 저지르는 것이냐! 감히 신성한 신들의 모임터에서 이런 흉악한 짓을 저지르다니! 신들의 분노가 두렵지 않더냐! 정체를 밝혀라!"


-그래, 그렇게 원한다면


"???!!!!"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와 함께 포이부스는 자신의 오른팔 위에 떠오른 희끄무리한 형체를 보고 너무 놀라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

나타난 것은 다름이 아니라 2천년 전에 포이부스에게 죽은 고룡 니드호그였다.



"너, 너너! 어떻게?"



영체 상태의 용들의 차남은 증오로 얼룩진 눈으로 포이부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놈이 내 심장을 먹어치웠을 때, 내 혼의 일부가 뜯겨나가 네놈에게 빨려들어갔다. 하지만 용들의 아버지이신 그림자의 신께서 내게 부여한 이 힘으로 내 혼은 완전히 소멸하지 않고 네놈에게 붙어있었다.



포이부스가 니드호그를 쓰러뜨리고 그 심장을 먹어치웠을 때 들어온 스킬 중 유일하게 불과 번개의 신 이그니가 제대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이 하나가 있었다.


[용의 혼] : 거듭하여 강해진다.


아주 단순하고 심플하지만 제대로 설명이 안 붙어있는 능력이었기에 포이부스가 니드호그의 심장을 먹어치우고 이 능력을 얻었을 때 불의 신은 그저 이 스킬을 지닌 포이부스가 거듭하여 강해진다고 생각했으나 지난 세월동안 강해진 것은 포이부스가 아니라 포이부스에게 뜯어먹힌 니드호그의 영혼 조각이었다.

그저 파편 조각에 불과했던 용의 영혼은 마침내 자아와 기억을 되찾을 만큼 강해져서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것이다.



-네놈과 스목의 싸움을 보면서 생각했다. 죽음조차도 네놈에게는 형벌이 아니라 그저 성가시기 짝이 없는 거쳐가는 과정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걸. 허나 네 주변 사람들에게 분노를 돌리는 건 진정한 복수자가 할 일이 아니지. 그래서 나는 정확하게 네놈 한 명에게 복수를 할 수 있을 기회를 기다렸다.


"대체 언제부터냐? 언제부터 숨어서 기회를 보던 것이냐?"


-나는 지금까지 꿈을 꾸는 것처럼 그저 네놈의 행동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만 네놈이 무고한 북부의 용가족을 잡아먹었을 때 그들의 비명을 지르는 혼의 조각이 날아들어 나와 합쳐지면서 나는 완전히 각성하였다. 그리고 몇 년 전, 네놈이 강제로 승천당할 때 네놈에게 원한이 있는 영혼들을 명계로부터 불러들였지만 실패했지.


"갑자기 나한테 죽었던 놈들이 망령이 되서 나타난 게 네놈 짓이었나!"



포이부스는 몇 년 전 갑자기 영혼들이 불려나와 그를 천계로의 게이트로 밀어넣으려고 시도했던 사건을 떠올리며 그 혼들을 불러들인 장본인이 니드호그였다는 것에 벌컥 화를 내려다 정신 집중이 흐트러져서 하마터면 거울에 오른손이 닿을 뻔했다.



"이거 놔!"


"어허! 진정해 하로나스. 어디까지나 본인의 '손'이 저러는 거잖아? 규정에 본인의 의지가 깃들어야 한다는 조항은 없다고"


"외부 개입이잖아!"


"저 녀석은 처음부터 포이부스와 같이 있었어. 그리고 지금 방척석에 있는 네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진짜 외부 개입이야. 그렇지 않습니까 창조신이시여?"


"궤변 늘어놓으면서 막지마!"


"아 크크크큭! 조금만 기다려보라니까? 포이부스가 훨씬 강하니까 저런 망령 같은 건 금방 떨쳐낼 수 있을 거야!"


"아오 진짜! 빨리 비켜!"


"도와드리겠습니다 하로나스 님!"


"에라스! 이놈이 어디서 신참 주제에! 네 자리로 돌아가!"



한편 포이부스를 돕기 위해 하로나스와 만신전의 신들이 증인석으로 뛰어들려고 했으나 포이부스의 반대파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그 앞을 가로막았다.

포이부스는 신들에게서는 도움을 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최고신들이 앉은 자리를 바라보았으나 창조신은 귀찮으니 알아서 하라는 얼굴이었고 대지모신은 남편 눈치를 보느라 가만히 있고, 진실의 신은 그저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니드호그의 영혼은 스스로를 연료삼아 타오르면서 포이부스의 오른손의 통제권을 단단히 거머쥐었고 포이부스는 불안감에 흔들리는 눈빛으로 니드호그에게 말했다.



"이런 짓을 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아니, 충분히 많은 게 바뀐다. 앞으로 너의 남은 반신으로서의 삶동안 그 이름 앞에 타락과 회유가 붙고, 거기에 덤으로 네놈이 만들어낸 치킨 앞에 붙을 이름은 확실하게 바뀌지. '요리와 생육의 신이 개발한 음식'이라는 이름과 '타락과 회유의 신이 개발한 음식'이라는 이름의 무게가 얼마나 다를지 생각해봐라.



그 말대로 온 세상에 치킨을 알리고 국민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구원의 상징으로서 치킨을 보급하려는 포이부스에게 타락과 회유를 부르는 치킨이라는 수식어는 결코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포이부스는 필사적으로 눈을 굴리다가 방금 떠올랐다는 듯이 니드호그에게 외쳤다.



"그래! 아직 우리에게 적대하고 있는 용족들도 보호해주마! 브리트라와 그 일파만이 아닌 이성이 없는 네 친척들도 전부 감싸주겠어! 아직도 반항하고 있는 스목도 제대로 치료해서 석방할 거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라 니드호그!"


-내 동생들의 자손의 안위라? 매력적인 제안이긴 하지만 난 단순히 그것만을 위해 지금까지 버틴 게 아니다!



니드호그의 영혼은 포이부스가 승천할 때 기생충처럼 빨아들인 권능 포인트의 힘으로 빛나고 있었다.

포이부스가 10배가 넘는 포인트가 소모되는 반면 니드호그는 제한으로부터 자유롭기에 더 적은 양만으로도 충분한 힘을 얻을 수 있었던게 분명했다.


허나 정식 루트를 통해 신성력과 권능을 받은 게 아니라 편법으로 몰래 소량의 권능 포인트를 빨아들인 니드호그의 영혼에는 한계가 있었고 기생충으로서 본체인 포이부스에게 달라붙어있는 니드호그는 포이부스의 의지에 반항할 수록 점점 영혼이 깎여나가 소멸하고 있었다.



"그만둬라 니드호그! 너에게는 기회가 있다! 우리 함께 반신으로 승천해서 용족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보자! 너는 신을 잃은 용족을 위해 새로운 신이 될 수 있어! 즈뮤도 즈메이도 드라콘도 세르피누스도 옛 원한은 잊고 함께 보람찬 나날을 보내고 있다! 너에게도 그 길은 열려있어!"


-포이부스, 폰티펙스 포이부스 막시무스! 불꽃 부족의 떠도는 어두움! 신들의 메시지 탄'메펫! 지금 네 모습과 말하는 꼴을 봐라! 지금 네가 하려는 회유와 타락에 대한 종용을 봐라! 이런데도 네가 요리와 생육의 반신이 되는 게 맞다고 생각하나? 너에게는 타락과 회유의 신이 어울려!



그 말에 포이부스는 깨달았다.

지금 니드호그는 몇 년 전, 던전을 몰래 만들다가 걸려서 세상에 대숙청을 몰고 온 자신의 신들을 바라보는 자신과 똑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이그니와 알고로스의 허리를 조각내면서 감동을 눈물을 흘리던 자기자신의 모습이 니드호그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포이부스는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깨닫고 발악하며 외쳤다.



"복수에 눈이 멀었군! 완전히 미쳤어!"


-영혼 조각 상태로 너에게 달라붙어 있으면서 너에게 배운 것이다. 복수를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뼈아픈 교훈을, 나는 너에게서 배웠다. 그래, 나는 여기서 소멸하겠지. 내게 드워프들을 학살하며 쌓은 업이 있으니 설령 너의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나에게 좋은 결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여기서 네놈에게... 으윽!



포이부스는 이젠 니드호그의 영혼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몰래 흡수한 권능포인트와 자신의 혼을 불사르며 반신 승천으로 인해 힘이 반토막 났음에도 불구하고 포이부스와 니드호그의 힘 차이는 압도적인 것이었고 포이부스는 크게 웃으며 외쳤다.



"넌 날 이길 수 없어! 내 권유를 받아들여라 니드호그! 그럼 용서해주겠다. 같이 반신이 되는 영광을 누릴지 지금 여기서 소멸할지 선택해!"


-그래, 나 혼자는 널 이길 수 없지.


-하지만 혼자가 아니라면?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나 포이부스의 오른손 위에 자신의 손을 덮었다.

포이부스가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희끄무리한 영체상태의 헤이메 왕국의 웰란드 왕자가 있었다.

포이부스에게 아바리투스의 봉인을 깰 마력폭탄이 되어 사망한 왕자는 평온한 얼굴로 포이부스의 오른손을 눌렀다.

아니, 영혼에는 무게가 없기에 그 손은 포이부스의 몸을 그냥 통과해버렸다.

니드호그의 힘으로 명계로부터 불려나온 웰란드 왕자의 손은 니드호그에게 닿았고, 그는 자신의 영혼 일부를 깎아내며 니드호그에게 힘을 불어넣어줬다.



"젠장! 이대로 끝날 수는 없어!"


-우리들 하나하나는 이미 육신을 잃은 망령에 불과하지.



웰란드가 사라진 뒤 나타난 것은 삼두룡 일족의 장로이자 즈뮤와 즈메이 남매의 삼촌인 마자타브였다.

그를 죽인 것은 확실하게 누구의 개입도 없이 포이부스 자신의 의지였다.

삼두룡 원로 마자타브의 두툼한 발톱이 달린 손이 포이부스의 몸을 지나쳐 니드호그에게 닿자 포이부스의 손바닥이 1cm 정도 밑으로 훅 내려간 뒤 영혼은 힘을 잃고 저승의 시스템에 흡수되었다.



-하지만 모두의 마음과


"그만둬! 그만!"



마자타브 다음으로 나타난 것은 지금까지 포이부스에게 살해당한 용들이었다.

그들 역시 포이부스의 선택으로 생사가 결정된 이들이었고 그들은 마자타브보다 힘이 약했기에 모두 한꺼번에 손을 포개고 포이부스의 오른손을 지나쳐 니드호그에게 닿았다.

그들 대부분이 억울하게 죽은 이들이었기에 그들은 자신들 이전에 니드호그에게 힘을 보탠 이들과 달리 영혼이 깎여나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영혼까지 태워버리면서 힘을 낸 것은 아니었지만 그 수가 꽤 많았기에 니드호그에게 꽤 많은 힘이 전해져서 포이부스의 손이 조금 더 내려갔다.



-모두의 소원과


"이럴 수는 없어!"



용들 다음에는 포이부스가 내린 명령에 의해 팔라딘들에게 죽은 이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포이부스의 명령이 없었다면 죽지 않았을 이들 중 죄가 가벼운 이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이 사과주스 창조주문을 빼내는 과정에서 첩보부 팔라딘들에게 살해된 이들이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아주 조금 깎아내는 것으로 포이부스의 손을 아주 조금 내려가게 하고 사라질 수 있었다.



-모두의 원한을 모은다면 분명!



사람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어느틈에 힘을 많이 소진해서 영혼조차 너덜너덜한 카르바노그가 있었다.

놈은 포이부스만큼이나 쌓은 죄와 업이 많았기에 이곳에 불려나온 상태에서도 놈에게 원한이 있는 원혼들에 의해 혼을 갉아먹히고 있었다.

그렇기에 스스로의 영혼을 대량으로 깎아내지 않고는 포이부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지금껏 본능만으로 살아가면서 수많은 생명을 해쳤던 괴물은 죽음을 맞이하고서야 희생된 이들의 고통을 이해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자신을 죽이고 먹어치운 포이부스에 대한 증오만으로 행동한 것이었을까?

녀석은 몇 년 전에도 그랬듯이, 기꺼이 포이부스를 엿먹이기 위해 원혼들의 방해를 받아가면서도 자신의 혼을 깎아내며 니드호그에게 힘을 빌려주었다.



"으갸갸아아아악!"



카르바노그가 스스로의 영혼의 쇠락을 감수하며 힘을 전해주고 소멸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이부스의 손바닥과 거울 사이에는 아직 꽤 거리가 남아있었다.

니드호그는 스스로의 영혼을 불사르고 있었지만 힘이 부족했고 포이부스는 다시 여유로워져서 입을 놀리기 시작하였다.



"후, 후, 후하하하하하! 이제 끝이냐? 카르바노그가 널 도와줬을 때는 좀 흠칫했지만 네놈의 힘만으로는 이 거리를 채울 수 없어! 더 강한 놈은 안 남았냐?"


-그래, 강한 힘을 지녔던 이들은 이게 끝이다. 강한 힘을 지닌 자들은 말이지.


"서, 설마"



그 다음에는 포이부스와 오리스가 개발한 궤도폭격에 희생된 수십 만명의 인간들의 혼이 불려왔다.

그들은 포이부스가 무기를 제공하지 않았다면 분명 죽지 않고 살아있었을 이들이었기에 개개인은 약해도 그 원한과 숫자로 포이부스의 손을 꽤 많이 내려가게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나타난 이들 중에서 가장 정당한 복수의 권리가 있는 이들이었기에 그 어떠한 힘도 소모하지 않고, 영혼도 깎여나가지 않고 니드호그를 통해 포이부스에게 죄의 무게를 상당히 얹을 수 있었다.



"끄으으으아아아아아!!!"



타락과 회유라는 글자가 적힌 은색 거울과 포이부스의 손바닥 사이에는 이제 머리카락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틈만 남게되었다.

포이부스가 젖먹던 힘까지 끌어내서 간신히 멈춰세웠지만 아직 니드호그가 남아있었다.


이제 더 이상 니드호그에게 힘을 실어줄 망령들은 남아있지 않았지만 지속적으로 힘을 소모하느라 극도로 약해진 니드호그의 영혼을 소모하는 것만으로도 아슬아슬하게 파멸을 향한 손도장을 찍게 할 수 있는 상황이 닥쳐오자 포이부스는 다시 애원하기 시작하였다.



"안돼! 안돼! 제발 그만둬! 역사에 치킨을 타락의 음식이라고 기록되게 할 수는 없어! 그런 치욕을 견딜 수는 없다고! 치킨은 내 이전 세상에 대한 추억 그 자체야! 이 미쳐돌아가는 세상에서 하로나스 님과 내 가족들과 함께 날 지금까지 버티게 해준 구원의 상징 그 자체란 말이다! 그 상징을 이런 식으로 더럽힐 수는 없어!"


-아직도 깨닫지 못했나?



니드호그는 그런 포이부스의 반응에 기가 찬다는 듯이 외쳤다.



-너의 그 구원의 상징이 우리들의 눈물과 발골된 뼈 위에 이루어진 그 순간부터 치킨은 우리들에게 구원이 아닌 파멸의 상징일 뿐이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다. 치킨을 위해서라고 외치며 우리를 학살하던 너의 행동이 치킨을 우리들의 파멸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치킨의 의미를 더럽힌 건 앞으로 붙을 신으로서의 너의 직함이 아니라 지금까지 네가 해온 행동 그 자체다!


"그..."



포이부스는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진실의 신을 바라보았다.

그는 몇 년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던 것일까?

그렇기에 바다 밑에 숨겨진 자신의 영역에서 죄인들을 장기말로 삼은 보드게임판을 통해 자신에게 경고를 해줬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후회를 하기에는 너무 멀리와버렸다.

그는 이미 너무 먼 길을 나침반과 지도도 없이 헤메면서 와버렸다.



"그래도 잘 생각해봐라 니드호그! 지금 날 악신으로 만든다고 너에게 무엇이 남겨지겠냐! 날 악신으로 만들고 치킨을 타락의 상징으로 만든 다음 너에게 무엇이 남느냔 말이다! 아무것도 없다! 반면 내 손을 잡았을 시에 너에게 돌아갈 혜택들을 생각해봐라! 신들의 곡조에 맞춰 움직이는 꼭두각시에서 당당하게 스스로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거다!"


-알고 있다. 이대로 계속하면 난 이 자리에서 소멸되서 윤회조차 하지 못하고 영원히 공허의 일부가 될 거라는 걸. 하지만 이건 단순히 나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도, 신에게 엿을 먹인 필멸자로서 내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도 아니다. 지금까지 네놈의 이기심에 희생된 모든 이들을 기리기 위해서이며, 동시에 비록 이 장난감 상자 속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우리들이 태어날 때 운명이라는 이름의 주입된 명령으로 움직이는 인형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다! 신이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 스스로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란 말이다!


"그.. 그그..."


-다시 말하지만 이 모든 것을 내게 알려준 건 다른 이가 아니다 바로 너였다 포이부스! 너였단 말이다! 너는 스스로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지금은 자신이 얻은 답을 부정하는구나.



니드호그는 할 말을 잃어버린 반신을 앞에두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영혼을 완전히 불살라 그가 거울에 손도장을 찍게 하며 외쳤다.



-내 원수, 내 멘토, 내 숙적이여! 타락과 회유의 신 폰티펙스 포이부스 막시무스 탄'메펫이여! 그대가 지금껏 쌓아온 업보가 불러온 결과를 목도하라! 그리고 참회하라! 나는 이제 사라지지만 너와 치킨에 새겨질 타락이라는 단어는 영원토록 남게 될 것이다!


"갸아아아아악아아아아아!!!!"



마침내 니드호그의 혼이 연료로서 불타오르며 머리만 남겨졌을 때, 포이부스의 손이 거울에 닿으면서 포이부스의 안으로 전능한 힘의 일부가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새롭게 탄생한 반신은 눈과 코와 입으로 힘이 응집되어 나타나는 빛과 비명을 내뿜었고 마침내 목적을 달성한 용의 혼은 반신의 몸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허공에 그대로 녹아내리며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사라지고 있는 용의 혼은 만족한 듯이 천천히 눈을 감았고 그 자리에 남겨진 타락과 회유의 반신은 그저 분노에 찬 절규를 내뱉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신들의 전쟁에 껴서 신들에게 원한을 사고 신들의 부하들에게 증오를 받은 건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만약 그가 니드호그와 싸운 뒤 가만히 있던 용들을 찾아가서 잡아먹지 않았더라면, 만약 대량학살 병기로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키지 않았더라면, 이중에서 단 하나만이라도 업보를 덜 쌓았다면 니드호그에게 전해진 힘이 부족해서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가 제3시대에 들어와서도 용을 잡아먹지 않았다면 니드호그가 다른 용의 영혼 파편을 통해 힘을 얻을 일이 없었고,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키지 않았다면 그들의 영혼이 니드호그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있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일이 일어났다.

필멸자가 신적 존재에게서 완벽한 승리를 거둔다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새로이 태어난 반신을 무너뜨린 것은 강력한 힘도, 온 세상을 뒤흔드는 마법도 아닌 그가 치킨을 만들기 위해서 행하면서 탑처럼 쌓인 악행이었다.

그 악행의 탑은 업으로 쌓였다가 마침내 니드호그라는 이름의 망치가 균형을 무너뜨리자 와르르 무너져 내리며 반신을 덮쳐버렸다.


비록 치킨은 세상에 나타나겠지만 그가 바라던대로 구원의 음식이라고 불리지는 않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타락과 회유를 퍼트리는 신이 만든 요리라는 꼬리표가 따라붙게 될 것이다.


그토록 치킨을 통한 구원을 추구해왔으면서 다른 이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신은 비통함을 참지 못하고 울기 시작했고 그의 어미가 달려와서 그를 위로했지만 소용없었다.

비록 몇몇 혼백들이 지금 이 일을 위해 스스로를 바치며 소멸했으나 더 많은 숫자의 영혼들에 새겨져서 다음 생에도 계속될 것 같았던 상처는 치유되었다.


진실의 신이 늘 말하고 다닌대로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타락과 회유의 신은 자신의 업보대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피할 수 없는 것은 운명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행동의 결과라는 걸 이 세상을 설계한 신 중 한명에게 직접 들었으면서도 업보 청산보다 자신의 구원과 욕망을 추구하던 타락과 회유의 신은 아이러니하게도 자기자신에게 날아든 과보로 진실의 신이 옳았다는 걸 증명하게 되었다.


어느새 이미 멸망한 중부 아카이아의 여신 일마타르가 가져다 놓은 스스로 음악을 연주하는 하프가 카르미나 부라나의 제1장을 연주하기 시작하였고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신들은 그 연주를 듣고 정신을 차리고 떠들기 시작하였다.



"와, 업보 풀스택 터지는거 보소"


"2천년 존버한 용의 복수 개쩔었다. 이건 애들한테 말해서 대대손손 전해줘야 해!"



구름으로 가득찬 어두운 하늘이 활짝 열려 빛이 내리쬐는 것으로 겨울 땅의 눈을 녹여 물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쌓여온 업보가 강한 자를 쓰러뜨리고 눈물을 흘러내리게 하였다.



"이건 말도 안돼애애애애애!!!"



타락과 회유의 반신의 절규는 지상에까지 퍼져나갔고, 케트라 산의 지하 감옥에서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흑룡 스목은 그 절규를 듣고는 지금까지 그를 괴롭히던 원한이라는 이름의 악몽에서 벗어나 편안한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비록 포이부스가 추구하던 야들야들한 살과 맛있는 튀김옷에 감싸인 치킨의 형상은 아니지만 이 판타지 세상에 인과응보라는 이름의 구원은 확실하게 찾아왔다.


작가의말

xochipilly 님 후원감사합니다.


나중에 시간날 때 짤막한 에필로그를 쓸 예정입니다.

지금까지 응원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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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 없는 판타지에 구원은 오는가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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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부족한 부분을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12 19.11.29 7,852 0 -
287 에필로그 +29 21.03.04 1,855 86 15쪽
» 업보(業報) (完) +53 21.02.10 2,004 88 35쪽
285 결착의 시간 #12 +17 21.02.09 1,119 48 21쪽
284 결착의 시간 #11 +13 21.02.04 1,181 53 14쪽
283 결착의 시간 #10 +6 21.02.02 917 49 14쪽
282 결착의 시간 #9 +12 21.01.28 992 42 17쪽
281 결착의 시간 #8 +7 21.01.26 899 44 17쪽
280 결착의 시간 #7 +12 21.01.21 930 45 12쪽
279 결착의 시간 #6 +10 21.01.19 938 45 18쪽
278 결착의 시간 #5 +9 21.01.14 963 49 15쪽
277 결착의 시간 #4 +10 21.01.12 920 43 12쪽
276 결착의 시간 #3 +6 21.01.07 967 41 12쪽
275 결착의 시간 #2 +3 21.01.05 953 51 12쪽
274 결착의 시간 #1 +12 20.12.31 1,002 48 13쪽
273 카르바노그 #10 +18 20.12.29 1,036 50 23쪽
272 카르바노그 #9 +6 20.12.24 928 42 14쪽
271 카르바노그 #8 +12 20.12.22 960 41 18쪽
270 카르바노그 #7 +10 20.12.17 935 38 13쪽
269 카르바노그 #6 +6 20.12.15 993 38 11쪽
268 카르바노그 #5 +6 20.12.10 937 40 15쪽
267 카르바노그 #4 +5 20.12.08 918 41 12쪽
266 카르바노그 #3 +14 20.12.03 949 48 11쪽
265 카르바노그 #2 +9 20.12.01 943 44 15쪽
264 카르바노그 #1 +5 20.11.26 984 42 12쪽
263 혈마인 #11 +4 20.11.24 948 39 16쪽
262 혈마인 #10 +4 20.11.20 949 46 14쪽
261 혈마인 #9 +8 20.11.17 952 48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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