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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6굴림실패 님의 서재입니다.

치킨 없는 판타지에 구원은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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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D6굴림실패
작품등록일 :
2019.10.28 19:34
최근연재일 :
2021.03.04 14:24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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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157,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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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9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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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글자
23쪽

카르바노그 #10

DUMMY

카르바노그가 지난 수천년 동안 최강의 괴수로서 군림해올 수 있었던 이유는 강했기 때문이었다.

머리가 좋다거나, 꾀가 많다거나, 운이 좋다거나 하는 것이 아닌 그저 별다른 이유 없이 강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운명이란 수레바퀴와 같아서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가는 때가 있는 법이다.

더군다나 기묘하게도 올라가는 속도가 빠르거나, 올라가 있는 시기가 길면 길수록 그에 비례해서 떨어지는 속도 역시 아주 급격한 경우가 많다.

그걸 알고 있는 많은 위정자들은 그 떨어지는 속도를 늦춰서 어떻게든 중간에 걸치려고 발버둥을 친다.


하지만 지금까지 카르바노그는 그 내려가는 때를 경험해보지 못했다.

아니, 애시당초 운명이나 생의 변곡점 같은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카르바노그 자신의 힘과 여신 메데이나 메자 마테의 가호로 불행을 피할 수 있었다.

제1시대의 강렬한 형상을 지닌 괴수들로부터 살아남을 때 그러했고, 용들의 복수가 행해졌을 때 그러했다.


자신이 한낮 미물이라는 자각 없이 그저 영원히 생태계의 정점으로 군림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는 괴물은 여신의 개입이 없이도 수많은 난관을 이빨로 찢어발기며 달려왔기에 그 운명의 내리막길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몰랐다.


허나 신이 아닌 존재가 영원히 살아가며 언제나 위에 머물고 있을 수만은 없는 법.

상대가 무슨 계략을 걸어오든, 상대가 얼마나 되던 모든 것을 정면돌파로 해결해온 괴물에게 지금의 위기를 옆으로 회피한다는 선택지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안돼 뽀식아!]



붉은 거인을 죽이는데 실패하고 상처를 입은 카르바노그는 그저 분노를 터트리며 무작정 돌진할 뿐이었다.

귓가를 시끄럽게 울리는 메데이나 여신의 비명조차 분노로 눈이 뒤집힌 카르바노그에게 있어서는 그저 시끄러운 소음에 지나지 않았다.



[조져!]



그런 카르바노그에게 잔혹하기 짝이 없는 사랑의 여신의 선고가 떨어져 내리자마자 사방의 벽을 뚫고 화염과 빛줄기가 날아들었다.

벽을 관통하고 카르바노그를 덮친 공격들 대부분은 카르바노그의 앞니에 찢어발겨져서 사그라들었으나 그중 셋은 카르바노그를 중심으로 합쳐져서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고, 카르바노그는 그 눈부신 섬광에 한순간 시각과 청각을 빼앗겨버렸다.



"천상에서 우리는 굽어 살피는 주인들이시여! 이 도끼를 축북하사 당신들의 은총으로 적을 산산조각 낼 수 있게 해주소서!"



그 안에서 선명하게 들려오는 붉은 거인의 목소리를 따라 카르바노그는 허공의 마력을 발판 삼아 돌진하였다.

시각도, 청각도 마비되고 오직 마력감지와 공간탐지만을 믿고 무작정 돌격하는 괴물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이빨로 갉아먹으며 나아갔다.

카르바노그의 망막에 맺힌 빛덩어리가 만든 푸른 점이 사라졌을 때 카르바노그는 자신이 던전의 벽을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고 그때는 이미 무언가가 카르바노그의 등짝을 거칠게 가르는 중이었다.


카르바노그는 소리를 지르며 굽히고 있던 뒷다리를 뻗어 뒤에 있던 자를 후려쳤고 도끼를 든 거인은 튕겨나가 반대편 벽에 부딪쳤다.

도끼는 카르바노그의 가죽을 가를 수는 있었지만 놈의 흉폭성을 떨어뜨리지는 못했고 카르바노그는 등에서 피를 흩뿌리면서도 사납게 울부짖으며 공격을 준비하였다.



"시조님을 보호하라!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거인이 튕겨나간 뒤 기계룡과 고룡들의 발톱과 채찍처럼 내리쳐지는 꼬리를 피해 거인을 끝장내기 위해 돌진하는 카르바노그의 앞을 코카트리스에 올라탄 템플리 나이트들이 가로막았다.

그들은 빛나는 미스릴과 마나메탈 합금으로 만든 방패와 창, 폴암을 들고 방진을 짜서 카르바노그에 맞섰다.


다른 금속과 합쳐지면 단단해지면서 부정한 기운을 정화하는 힘이 있는 미스릴과 마력을 머금고 조직구조가 더 튼튼해지는 마나메탈의 합금으로 된 장비들은 카르바노그의 이빨 앞에서 검게 물들며 무참하게 뜯겨나갔다.

피와 금속가루와 팔다리가 허공에서 춤추었고 카르바노그는 그들이 쓰러지는 걸 보지도 않은 채 붉은 거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벌레를 잡는 정도의 노력조차 없이, 그저 정글을 헤치고 나아가는 탐험가처럼 카르바노그는 템플리 나이트들을 나뭇가지를 옆으로 치우는 것보다 더 적은 수고를 들여서 통과하였다.


그러나 아예 의미가 없는 일은 아니었다.

카르바노그가 템플리 나이트들에게 시간을 잡아먹는 사이 벽에 부딪쳤던 포이부스는 다시 일어나 자신의 부하들이 무참하게 도륙된 걸 보고 분노의 함성을 내지르며 신성력과 마력을 조합해 사악한 주문을 짜내기 시작한 것이다.


바람 한점 없는 던전 내부에서 마력의 응집과 편재가 생겨나며 마력에 의한 폭풍이 생겨났다.

순수한 질량 자체는 가볍기 짝이 없는 카르바노그는 평소처럼 마력의 발판을 만들어서 발판을 박차고 폭풍을 빠져나가려 했으나 마력의 고저차를 이용해 생성된 마력 폭풍은 괴수가 만들어내는 발판을 바로 지워버렸다.


그러나 당황도 잠시, 카르바노그는 마력 폭풍 자체를 발판으로 삼아 폭풍을 발로 차서 회오리바람 안쪽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다들 숙여!"


퍼어어어엉!!



그러나 그 순간, 주술사이자 사제인 붉은 거인은 고룡들과 함께 일제히 마법을 발동시켰다.

한순간 마력, 아케인, 마나, 대양의 기운 등으로 불리는 모든 종류의 신비로운 힘들이 한 순간에 터져나갔다.

마나 강제 연쇄 폭발이라는 멋없는 이름으로 불리던 끔찍한 마법은 카르바노그의 밑에서 소용돌이치던 마력 폭풍을 연료 삼아 마력과 함께 공기를 소거시키면서 먼저 해당 지역을 전부 압축시킨 뒤, 이내 진공폭탄처럼 충격파를 발산하였다.


고룡들은 필사적으로 그 전염성 있는 폭발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방벽을 유지시켰고 한순간 방벽 안쪽의 공간이 뒤틀려 모든 것이 일그러져 보였다.



"아직이다! 방심하지마!"



그 끔찍한 충격 속에서도 카르바노그는 죽지 않았다.

허나 천하의 카르바노그조차 상처부위에 가해지는 엄청난 압력의 변화와 마력 폭발의 충격으로 인해 피를 토해내야했다.



"이 주위 마력을 강제로 터트리는 쓸데없는 기능만 없었어도 더 자주 쓸 텐데!"


"온다!"



마법의 신이 만들어낸 이 끔찍한 주문을 단순하게 마력을 제거하는 마력 소거가 아니라 공격력을 가지면서도 신뢰성이 높은 대마법인 마나 번, 아케인 해체로 가공하기 위해서는 아직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게 분명하였다.

주변의 마력의 흐름이 워낙 심하게 뒤틀려 마력의 흐름을 통제하던 팔라딘 오리스와 템플리 나이트 소속의 마법사들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 땅에 무릎을 꿇었고 그것 때문에 난 틈을 카르바노그는 놓치지 않았다.


놈은 본능적으로 한동안 마법이 날아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룡들을 난도질하며 이동했다.

고룡들은 마력의 흐름의 뒤틀림으로 인해 방어마법을 전개하지 못하고 카르바노그의 이빨에 비늘이 난도질 당하며 피를 흘렸지만 그때 갑자기 카르바노그가 이동하던 사선 상에 눈부신 빛이 날아들었다.


그 빛의 기둥은 카르바노그에게 명중한 것도 모자라 녀석을 후려쳐서 벽에 밀어붙였고 벽에 등을 댄 채 엄청난 마력과 신성력을 압축시킨 브레스에 타들어가는 카르바노그의 귓가에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하하하! 명중! 어때 내 사격 솜씨가?]



주변의 모든 마력이 한순간에 소거되고 뒤틀렸지만 애시당초 외부의 마력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봉인으로부터 힘을 뽑아내는 마도 공학 메카 공룡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없었다.

이난나 여신은 메카 공룡의 입에서 뿜어져나오는 브레스가 카르바노그는 산산조각 내버릴 것을 의심치 않았지만 그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브레스가 카르바노그보다 먼저 던전의 벽을 박살내버리는 바람에 카르바노그는 브레스에서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고 몸 절반의 털이 다 타버려서 핑크빛의 화상을 입은 살갗을 노출시켰다.



[도망쳐!]



그러나 고통보다도 먼저 카르바노그를 공격한 것은 다름 아닌 허기였다.

상처를 다스리고 회복할 에너지를 위해 먹을 것이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어제 저녁에 고기를 먹은 뒤로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배꼽시계가 울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 확실한 건 슬슬 카르바노그에게 영양공급이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상처입은 괴물은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면서 고통과 허기에 이끌려 당장 잡아먹을 수 있는 것을 모색하였다.


하지만 이미 처음 카르바노그가 죽인 코카트리스들과 엘프 기사들의 시체는 벌써 다른 엘프들이 회수해서 던전 방에서 끌고 나간 뒤였고 고룡들이나 포이부스는 잡아먹기는커녕 되려 카르바노그를 잡아먹을 기세로 천천히 포위망을 좁히고 있었다.

카르바노그는 지성 없는 괴물이긴 해도 사냥의 우선순위를 헷갈리는 뇌가 없는 단세포생물은 아니었기에 당장 먹기 쉬운 사냥감인 남은 템플리 나이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안돼! 저거 함정이야! 가지마!]



메데이나 여신의 비명에 가까운 말이 들려왔지만 안타깝게도 허기와 고통에 시달리는 카르바노그에게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동굴 벽에 반사되는 메아리에 불과하였다.

카르바노그는 도망친다는 선택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당장 피로 목을 축이고 살점으로 배를 채우기 위해 코카트리스 기병대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그 순간 허공에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탓!


"간파된 건가?"



허공에 쳐진 투명한 무언가를 감지하자마자 공중에서 순수한 힘으로 허공답보를 시전해 방향을 꺾은 카르바노그가 본 것은 다름 아닌 마법으로 짜낸 투명한 그물이었다.

엘프들은 혀를 차면서 즉시 허공에 마법 대신 투명한 실로 고정되어 있던 그물을 잡고 카르바노그에게 투척했으나 카르바노그는 그야말로 섬광 같은 속도로 움직여 그물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것도 모자라 코카트리스 3마리의 목을 물어뜯어버렸다.


목의 살점을 떼어먹힌 코카트리스들이 비명 대신 눈에서 석화광선을 내뿜으며 발광하였으나 코카트리스들의 시선이 카르바노그에게 닿는 것보다도 빠르게 카르바노그가 움직이며 공격을 가했다.

놈은 피로 목을 축이면서 조금 냉정해졌지만 지친 상태에서 맛본 감미로운 피에 홀려 조금 속도가 느려졌다.



[나와나와! 저리 비켜!]


쾅!



이난나 여신은 잠깐 입에 들어간 살점을 먹기 위해 머뭇거리는 카르바노그를 짓밟아버리려고 했으나 기계룡의 발이 바닥에 닿는 것보다도 빠르게 카르바노그는 벌써 다른 곳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카르바노그는 입에 들어온 살점을 맛볼 시간도 없이 삼켜버린 뒤 기계룡의 발목을 스쳐지나가며 장갑판을 물어뜯었으나 먹을 수 없는 녀석이라고 판단한 건지 노골적으로 기계룡을 피하기 시작했고 이난나 여신은 장갑판에 이빨 자국이 남아서 삐걱거리자 화를 내며 외쳤다.



[저놈 잡아! 당장 잡아와!]


"카르바노그!"



슬슬 주변의 마력의 흐름이 안정화되자 가장 먼저 나선 것은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였다.

위대한 그림자의 신의 힘을 이어받은 첫번째 용의 재림은 수많은 조명과 그림자가 비춰지는 던전의 방의 환경을 이용하여 최대한 많은 그림자를 지면과 벽과 천장에서 뽑아내 카르바노그에게 쇄도하였다.


카르바노그는 그림자 일부는 피하고, 일부는 이빨로 찢어발겨 그림자를 조종하는 마력의 선을 끊어버리며 대응했으나 워낙 많은 그림자가 날아들고 있었기에 결국 뭉툭한 꼬리의 털 일부가 잘려나갔다.



"다리! 다리 노려! 아니면 좀 더 열심히 몰아넣어! 피를 흘리고 있으니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끝난다!"


[제발 내 말 좀 들어! 거기서 나와!]



포이부스는 사냥의 신의 양날 도끼에 담겨있는 사냥의 신의 상처 악화 저주로 인해 카르바노그가 지나간 자리에 점점 많은 핏자국이 남겨지는 걸 보면서 말했고 메데이나 여신도 그 말을 들은 것인지 다급하게 카르바노그에게 외쳤으나 남는 권능 포인트가 없는 건지 명령을 강제로 듣게 하지는 못했다.

다만 카르바노그는 제 아무리 지성이 없는 괴물이라도 슬슬 목숨이 위험해지니 지금까지 어디에 처박혀서 직무유기 하고 있던 것인지 모를 생존본능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체 어디로 도망친다는 말인가?

지성이 없는 카르바노그조차 지금 이 상황에서 도망친다는 게 말도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카르바노그는 난생 처음으로 두려움에 사지가 굳어가기 시작하였다.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초식 동물이 사지가 굳어버리는 것처럼, 카르바노그의 마음 속에 두려움이 스며든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 백수의 왕으로 군림한 괴물은 자긍심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애써 태연한 척하며 용들과 거인을 향해 이빨을 딱딱거리며 위협을 가했다.



[이난나, 제발 한 번만 봐줘 이렇게 빌게!]


[어머나, 난 이쪽 대표가 아니라서 협상할 권한이 없다네~ 상담은 우리 만신전 대표 ARS 번호로 하셔]


[날 차단했잖아!]



메데이나 여신은 지금까지 자신이 투자한 것들 중에서 최고의 걸작이 날아갈 판국이 되자 지상에 직접 내려와 끔찍한 전쟁병기를 조종하는 여신에게 빌었지만 이난나는 사악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태연하게 메데이나를 조롱하였고 카르바노그는 최후의 돌격을 감행하였다.



"캬아아아!"



포효를 내지르며 달려든 카르바노그는 먼저 삼두룡의 옆구리를 관통하며 나아갔다.

감미로운 용의 피와 살점파편이 입에 들어왔지만 그것들을 맛보기도 전에 그림자 촉수가 왼발을 감아버렸고 잠깐 그림자에 이끌려 속도가 줄어들자마자 용들의 발톱이 날아들었다.



쾅쾅쾅! 쾅!! 콰과과광!



용들은 카르바노그를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한번 발톱이 내리쳐질 때마다 피와 살점과 피묻은 하얀 털이 공중에 휘날리고, 카르바노그의 반격에 용들의 앞발의 발바닥이 갈라져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뼈가 드러났지만 용들은 멈추지 않았다.



"카르바노그!"


텁! 콰지직! 우드드득!



분노한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앞발에 부상을 입은 동료들이 물러난 잠깐동안 움직임이 멎은 카르바노그를 거대한 턱 안에 집어넣고 이빨로 질겅질겅 씹기 시작하였다.

입속에서 혀에 굴려져 빙그르르 돌아간 토끼 괴물이 용의 송곳니에 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으나 카르바노그는 그저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카르바노그는 용의 송곳니에 꿰뚫려 배와 옆구리 쪽의 뼈가 부러지고 뱃가죽에 구멍이 뚫렸음에도 불구하고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의 윗턱을 뚫고 튀어나왔다.

드라콘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구멍이 뚫린 얼굴의 상처를 부여잡고 휘청거릴 때 카르바노그는 드라콘의 목을 물어뜯으려 했으나 그때 옆에서 새하얀 도끼가 날아들었다.



"첫번째로, 성스러운 도끼를 뽑을지어다. 그리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셋까지 헤아릴지어다. 하나둘다섯!"


퍽! 퍽! 퍼버벅!



도끼가 휘둘러지고 다시 뽑혀나올 때마다 카르바노그의 피로 물든 털이 살점과 함께 뽑혀져 나왔다.

카르바노그는 앞발을 휘두르며 저항했으나 거인은 되려 새끼 손가락이 잘려나갔다가 간신히 꿰맨 왼손을 카르바노그의 입 안에 쑤셔넣고는 아래턱을 단단하게 붙잡고 오른손으로 도끼를 내리쳤다.

카르바노그는 있는 힘껏 이빨로 입안에 들어온 손가락을 끊어버렸지만 카르바노그의 이빨은 약지와 중지를 끊어버렸을 뿐이었고 새끼손가락과 검지가 여전히 카르바노그의 아래턱 안쪽을 잡고 있었다.



콱!


"끼이이잉익!"



카르바노그는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잘려나간 손가락들은 비명과 함께 뱉어냈다.

거인은 잘려나간 자신의 두 손가락을 끈적한 토끼의 침이 달라붙은 왼손으로 잡고 뒤로 물러나서 뒤늦게 달려온 팔라딘들에게 응급처치를 받기 시작했고 카르바노그는 한쪽 발이 잘려나간 다리를 질질 끌면서 도망치려고 하였다.


발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바닥에 선을 그리고 있었고 뒤늦게 괴물들의 왕이니 뭐니 하는 것과 관계없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와 몸을 지배한 괴물은 무언가 거대한 그림자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것을 깨달았다.


그곳에는 성스러운 오라를 내뿜고 있는 상처입은 고룡 세르피누스가 있었고 세르피누스는 입에 잔뜩 머금은 홀리 브레스를 카르바노그를 향해 토해냈다.

눈부신 섬광이 피를 흘리는 토끼를 감쌌고, 섬광이 잦아든 뒤 그곳에는 반쯤 잘려나갔던 양쪽 귀가 완전히 떨어져나가고 온몸에서 피를 흘리는 토끼 괴물이 한쪽 눈이 새하얗게 백내장에 걸린 것처럼 된 채 남겨져 있었다.



촤좌좍!


"커억!"



괴물은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처를 입은 채로 성스러운 칸헬의 수장 세르피누스에게 돌격해 세르피누스의 아름다운 몸에 수많은 상처를 남기며 돌풍처럼 몰아쳤다.

입천장에 구멍이 뚫린 드라콘이 그림자 촉수를 불러내 누이를 보호하며 뒤로 물러나게 하고서야 카르바노그는 세르피누스에게서 떨어져나갔고 그때를 놓치지 않고 즈뮤가 달려들었다.



뻐걱!



인간의 형태로 폴리모프한 즈뮤는 집요하게 카르바노그의 상처들을 향해 주먹과 발을 날리며 공격을 가했고 카르바노그가 반격했으나 즈뮤가 걸치고 있는 갑옷의 일부가 박살날 뿐이었다.



빡! 뚜뚜둑!


"그...갸아아아아아!"



그리고 마침내 즈뮤가 걸친 갑옷이 완전히 박살나고 카르바노그의 이빨에 찔려 오른쪽 어깨부터 팔꿈치까지 이어지는 찢어진 상처를 입은 순간, 즈뮤는 카르바노그의 옆구리에 주먹을 날렸다.

그 주먹은 카르바노그의 부러진 갈비뼈를 강타했고 뼈가 완전히 으스러져 분리되면서 뼈조각이 카르바노그의 내장을 찔렀다.


즈뮤는 카르바노그의 추가 반격이 날아들기 전에 물러났고 카르바노그는 이제 자신이 자랑하던 속도를 내지 못하고 토끼가 아니라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기어갔다.

상처입은 팔라딘들과 템플리 나이트들과 고룡들이 카르바노그를 에워싼 채 절대로 살려보내지 않겠다는 듯이 포위망을 굳히기 시작했고 하늘에서 메데이나 여신의 외침이 들려왔다.



[에라 모르겠다! 제발 나와줘!]


[이 와중에 1슬롯당 100포인트짜리 4슬롯 강화를 돌려? 너 미쳤어? 아니, 그보다 포인트는 어디서 얻은 거야?]


[투오넬한테 빌렸어!]



여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장을 뚫고 하늘로부터 빛이 내려왔다.

그 빛은 카르바노그를 감싸더니 이내 카르바노그 위에 슬롯머신 같은 계기판으로 변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고 있는 이난나 여신의 외침을 들은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카르바노그는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창, 칼, 폴암, 발톱, 주먹이 차례대로 카르바노그에게 날아들었고 카르바노그의 머리 위의 4개의 계기판이 차례차례 움직임을 멈추며 그림이 나타났다.

처음 그림은 7에서 멈췄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그런데 넌 이 상황에서 일발 역전급 대박이 나올 거라고 생각... 당장 죽여!]



카르바노그의 남은 뒷다리가 잘려나갔을 때 두 번째 계기판이 멈추고 7이 그려진 그림을 드러냈다.

슬롯머신의 칸 중 2개가 7에서 멈추는 걸 본 이난나는 웃음기가 사라진 목소리로 당황하며 외쳤고 여신의 명령에 급히 공격을 계속한 이들에 의해 카르바노그의 앞발이 모조리 잘려나갔다.



[제발!]


[이거 왜 이래!? 잭팟 뜨기 직전이잖아 당장 녀석을 죽여!]



그리고 세번째 계기판이 레몬과 7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다가 마침내 7로 바뀐 채 멈춰섰다.

만약 3슬롯 짜리 강화를 돌렸다면 틀림없이 이 상황에서 일발역전의 찬스가 왔을 것이다.

천하의 이난나조차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으나 천만다행이도 메데이나 여신은 이 와중에 욕심을 부려서 3슬롯이 아닌 4슬롯을 돌렸기에 아직 시간이 남아있었다.



[이 바보 멍청이! 왜 4슬롯을 돌린 거냐 과거의 나! 조금만! 조금만 더!]



메데이나 본인도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것인지 눈을 부릅뜨고 광기와 간절함이 함께 느껴지는 목소리로 외쳤고 카르바노그는 그 목소리에 반응한 것인지 사지가 잘려나간 상황에서도 필사적으로 공격을 피해가며 최대한 급소에 맞는 걸 저지하였다.


카르바노그가 죽지 않고 계속 버티는 것에 당황한 것도 있고 서로 합을 맞춘지 얼마되지 않았던 이유도 있어서 고룡들과 팔라딘들은 그만 서로 앞다퉈 공격하려다가 서로를 방해해버렸다.

그러나 네번째 계기판이 멈추려고 할 때, 갑자기 고룡들과 팔라딘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고 메데이나 여신이 공격이 멈춘 것에 기뻐하려고 할 때 공기를 가르는 파공성이 들려왔다.



쌔애애애앵! 퍼석!


[안돼애애애애애!!!!]



갑자기 날아든 도끼가 카르바노그의 배와 목을 뚫고 안으로 파고들었고 괴물 토끼는 눈을 뒤집고는 입에서 피거품을 내면서 잘려나간 사지가 달려있던 발목을 덜덜 떨었다.

그렇게 마지막 네번째 계기판이 완전히 정지하기 전에 포이부스는 도끼에 연결된 사슬을 잡아당겼고 사지가 잘려나가 무력화된 토끼 괴물은 거인의 앞으로 끌려갔다.



"이제 끝을 내자"


철퍽! 콰직! 와그작와그작!


"끼아아악 푸훕! 끼에에에에!"


촤아악!



포이부스는 마지막 계기판이 7과 레몬 사이에서 7로 기울어지려는 걸 보고 그 즉시 토끼의 뱃가죽을 뚫은 도끼를 뽑아내고는 그 틈새로 얼굴을 처박았다.

카르바노그는 산채로 심장이 뜯어먹히는 고통을 맛보며 입에서 피와 비명을 토해냈다.

수천 년을 살아오며 모든 것을 잡아먹던 괴물이 최후의 최후에 되려 산채로 잡아먹히며 내지른 끔찍한 단말마 속에서 계기판은 완전히 7로 넘어가기 전에 그대로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정지하더니 스르륵 녹아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붉은 거인이 토끼의 뱃속에 처박은 얼굴을 들어올렸을 때 최악의 괴물 카르바노그는 눈과 코에서 피와 눈물과 콧물이 섞인 액체를 줄줄 흘리며 입을 벌린 채 더는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대상이 소실되어 강화가 취소되었습니다. 메데이나 메자 마테 회원님의 소모 포인트가 포인트 지갑으로 환급됩니다.


+400


[아아아앍아아라락! 으아아아아! 잭팟인데! 잭팟인데! 이럴 수는 없어! 이건 말도 안돼! 잭팟이었다고! 환불해주지마! 제발 내 포인트 가져가! 취소! 취소! 캔슬! GM님 제발요! 으허허헣헝!]


후웅! 콱!



그때 메데이나 여신의 눈앞에 대상 소실로 인한 강화 취소 메시지가 뜨면서 권능 포인트 환급 메시지가 뜨자 메데이나 여신은 급히 모든 수단을 동원해 포인트 회수 취소를 시도했으나 그녀가 만들어낸 끔찍한 괴물의 목이 도끼에 잘려나가는 걸 막아주지는 못했다.

얼굴 전체에 피를 묻힌 거인은 아무런 주저도 없이 도끼를 휘둘러 카르바노그의 목을 참수하고 귀가 잘려나가고 화상과 상처로 일그러진 토끼의 머리를 위로 들어올렸다.



"고오오오오오!"


"크롸아아아아!"


"오오오오오오!"



그걸 본 고룡들은 일제히 포효를 내질렀고 그 포효소리가 던전이 지하로 파고들며 낸 구멍을 통해 지상으로 뻗어나가며 세상 전체에 울려퍼졌다.

전 세계에 퍼져있던 용들은 그 승리의 포효를 듣고 마침내 오랜 원수가 쓰러진 걸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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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 없는 판타지에 구원은 오는가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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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 결착의 시간 #11 +13 21.02.04 1,181 53 14쪽
283 결착의 시간 #10 +6 21.02.02 917 49 14쪽
282 결착의 시간 #9 +12 21.01.28 992 42 17쪽
281 결착의 시간 #8 +7 21.01.26 899 44 17쪽
280 결착의 시간 #7 +12 21.01.21 930 45 12쪽
279 결착의 시간 #6 +10 21.01.19 938 45 18쪽
278 결착의 시간 #5 +9 21.01.14 963 49 15쪽
277 결착의 시간 #4 +10 21.01.12 920 43 12쪽
276 결착의 시간 #3 +6 21.01.07 967 41 12쪽
275 결착의 시간 #2 +3 21.01.05 953 51 12쪽
274 결착의 시간 #1 +12 20.12.31 1,002 48 13쪽
» 카르바노그 #10 +18 20.12.29 1,036 50 23쪽
272 카르바노그 #9 +6 20.12.24 927 42 14쪽
271 카르바노그 #8 +12 20.12.22 960 41 18쪽
270 카르바노그 #7 +10 20.12.17 935 38 13쪽
269 카르바노그 #6 +6 20.12.15 993 38 11쪽
268 카르바노그 #5 +6 20.12.10 936 40 15쪽
267 카르바노그 #4 +5 20.12.08 918 41 12쪽
266 카르바노그 #3 +14 20.12.03 949 48 11쪽
265 카르바노그 #2 +9 20.12.01 943 44 15쪽
264 카르바노그 #1 +5 20.11.26 984 42 12쪽
263 혈마인 #11 +4 20.11.24 948 39 16쪽
262 혈마인 #10 +4 20.11.20 948 46 14쪽
261 혈마인 #9 +8 20.11.17 952 48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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