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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6굴림실패 님의 서재입니다.

치킨 없는 판타지에 구원은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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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D6굴림실패
작품등록일 :
2019.10.28 19:34
최근연재일 :
2021.03.04 14:24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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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28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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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프롤로그

DUMMY

매슬로우의 욕구 이론 개정판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7가지 욕구가 있다고 한다.

배터리의 욕구, 와이파이(데이터)의 욕구, 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소속과 사랑 욕구, 존중 욕구, 자기실현 욕구 이 7가지 욕구는 불완전하며 때때로 순위가 바뀐다.

그래서 나는 이 7대 욕구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떠도는 어두움 뭐한다"


"떠도는 어두움! 세룸 이빨 안 빠진다! 우리 힘들다!"



지금 나는 7가지 욕구 중 그 무엇도 채우지 못하고 있다.

내 옆에 반쯤 파먹힌 샤벨 타이거의 시체에서 어금니를 뽑아내려고 낑낑대는 이 원시인들이 그에 대한 증거다.

이들이 나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친구들이라는 사실만 알려줘도 누군가는 이 상황에 대해 깊은 고찰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충 죽은 동물의 썩은 시체에서 벗겨낸 가죽을 대충 하반신에 두르고, 신발조차 없이 기름으로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을 자랑하는 이들은 많이 먹는 자, 멀리보는 수염이라고 불리고 있다.

많이 먹는 자는 부족의 사람들 중에서 가장 음식을 많이 먹을 수 있었고, 멀리보는 수염은 시력이 굉장히 좋은데 2차 성징이 빨리와서 수염이 일찍나서 그리 불리게 되었다.



"멀리보는 수염, 내가 말한 짐승 못 봤나??"


"너가 말한 작은 바위 크기, 깃털 달린 날지 못하는 새는 못봤다."



친구들과 함께 치킨과 맥주 그리고 보드카를 들이키다가 잠들었는데 다시 일어나보니 원시부족의 갓난아이가 되어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절망하였다.

15살이 된 오늘까지 치킨은 고사하고 평범한 돼지나 소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나에게 얼마나 큰 좌절로 다가왔는가?

늘 치킨의 재료를 찾아 밖으로 나돌아다니다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어두운 표정으로 움막에 돌아오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떠도는 어두움이라 불렀다.


처음에는 부정했고, 그 다음에는 분노가 식지 않았으며, 그 다음엔 타협하려고 했으나 내가 원하는 게 아무것도 없는 이 원시시대는 나에게 끝없는 우울만을 남겨버렸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 원시시대에 반드시 치킨을 재림시키고 말리라.

그 어떠한 시련도 나를 굴복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판테라! 판테라!"


"도망쳐!"



갑자기 멀리보는 수염이 소리를 지른다.

아직 부족민들이 세룸이라고 불리는 샤벨 타이거의 송곳니를 하나밖에 얻지 못했음에도 당장 도망치자는 말이 나올 정도로 판테라는 강한 존재다.


내가 동굴사자라고 기억하는 이 생물은 동굴곰, 샤벨 타이거와 함께 이 세상에서 인간에게 가장 위협적인 동물 중 하나였다.

솔직히 저게 정말 동굴사자인지 학식이 부족한 나로서는 알 수가 없으나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설령 놈이 내가 아는 동굴사자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놈은 우리를 따라오는 대신 우리가 버리고 도망친 샤벨 타이거의 시체 위에 우뚝 선 채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다.

녀석은 울음소리를 내지 않았건만 포식자로서의 우월함을 내비치는데는 충분하였고, 녀석의 태도에도 우리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몸을 돌려 돌아가려고 하자 녀석은 그제야 시체에서 내려와 게걸스럽게 썩어가는 샤벨 타이거의 가슴팍에 얼굴을 처박고 포식을 시작했다.

이미 동굴 하이에나나 다른 녀석들이 한 번 뜯어먹고 남은 시체조차 놈에게는 힘들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훌륭한 한 끼 식사였다.



##



이곳은 이상한 세상이었다.

내가 처음듣는 단어들이 그들에게는 다른 말로 들리는지 그들은 내가 설명하는 걸 알아들을 수 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잘만 알아들었다.

예를 들어 우리 부족에서 칼돈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른 부족이 카다보라고 불러도 그들은 서로 그게 무엇인지 알아듣는다.

이제 막 처음만난 부족인데 서로 다른 언어가 통하는 것이다!

나만 빼고!


그래서 내가 서로 다른 단어를 쓰는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직접 그 칼돈, 카다보라고 부르는 걸 보여달라고 했고 멀리서 왔지만 우리 부족에 친선을 원한 부족은 이상한 얼굴을 하며 날 바라보았으나 우리 부족 사람들은 내 궁금증에 흔쾌히 칼돈을 보러 가자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이 내게 보여준 것은 강에 사는 커다란 악어였다.

그건 엄청 큰 망할 원시 고대 악어였다!


내가 칼돈, 카다보라고 부르면 그들은 알아들었다.

우리 부족의 족장이 칼돈을 사냥해 멀리서 온 부족에게 악어가죽을 선물해주는 동안 내 의문은 깊어만갔다.


그들이 악어가죽을 받고 좋아하며 떠난 뒤 나는 족장에게 카다보라는 말을 어떻게 아냐고 물었다.

그러자 족장은 칼돈에 대해서만 말하며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그 두 개의 단어가 다르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 어디까지 갔다?"


"굽이치는 강을 손가락 3개 건너고 언덕을 손가락 2개, 벌판을 햇님 기지개 피는 데로 달린다. 거기 세룸 이빨 있다. 근처에 마만투스도 있다."


"족장, 그곳 위험. 판테라 있다."



어쨌든 망할 원시 고대 악어 이야기는 그만하자.

지금 우리는 동굴사자에게 사냥감을 빼앗기고 몇 시간이나 지나서 부족민들이 있는 움막촌에 돌아와 가장 큰 움막 안으로 들어왔다.

움막에는 커다란 체구의 남자가 앉아있었고 그는 우리 부족의 주술사이며 동시에 족장이며 종종 나를 돌봐주는 아저씨였다.

그의 이름은 웃는 팔뚝이었다.


매머드(마만투스)가 있다는 멀리보는 수염의 말과 샤벨 타이거의 어금니를 보고 웃고 있던 주술사는 동굴사자가 있다는 많이 먹는 자의 말에 이마에 살짝 주름이 졌다.

아마 동굴사자의 활동범위와 부족민들의 채집 장소가 생각보다 멀지 않다는 것에 걱정이 든 게 분명했다.



"판테라 있다? 생각한다. 점을 봐서 하늘에 물어본다."



주술사는 지금까지 족장으로서는 훌륭했으나 주술사로서는 별로 활동하지 않았다.

애초에 점이라는 것도 그냥 자기 위안이나 보여주기용 이벤트 같은 것이 아닌가?

그보다 지금 평소처럼 족장 주변에 불씨가 다리 달려서 지멋대로 돌아다니는 광경을 최근들어 더 자주 보는 것 같은데 왜 다들 저건 신경 안 쓰는지 모르겠다.

내가 표정이 굳어져서 그런지 족장은 내 얼굴을 보며 물었다.



"뭔가 떠도는 어두움?"


"그 점이라는 게 도움이 되나? 난 못 믿겠다."


"무슨 소리, 떠도는 어두움!"


"족장은 맞다! 족장 똑똑하다!"



내 말에 친구놈들이 화를 벌컥낸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마법이고 뭐고 없는 이 원시시대에 뭔 점이냐고 생각을 굳히고 있는데 갑자기 족장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좋다 주술 보여준다."


"족장?"



족장이자 주술사인 웃는 팔뚝은 그 이름처럼 화도 안 내고 움막 안쪽을 뒤적거리더니 돌도끼로 결을 따라 잘라놓은 나무 판과 나무 막대기를 가지고 왔다.

참나무를 결을 따라 잘라낸 판은 잘 말라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쪽이 밝은 상아색을 띠고 있었고 나무 막대 역시 굵은 나뭇가지를 잘라낸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걸로 점을 쳐서 미래를 보는 건가?

뭐 판 위에서 나무 막대를 쓰러뜨려 물건이라도 찾겠다는 건가?

그러고보니 웃는 팔뚝이 점치는 광경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봐라. 주술! 흐읍!"


불끈!



그리고 내가 본 것은 내 예상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것이었다.



탁! 화르륵!


"하늘의 빠른 불이 알려준 주술, 불 피우기다!"


"족장! 대단하다!"


"불 내려면 나무 계속 흔들흔들 한다! 족장 탁 하고 치는 거로 불났다! 역시 주술 대단하다!"



족장의 팔뚝에서 근육이 급격히 팽창했다고 생각한 순간 족장이 막대를 판에 내리치자 갑자기 불이 붙었다.

내 친구들은 그저 감탄만 하고 있었지만 나는 이게 얼마나 무식한 짓이었는지 알고 있다.


족장은 보통 사람의 눈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막대를 회전시키며 내리쳤다!

나도 간신히 마지막 순간에 막대와 판이 닿은 순간에만 족장이 손을 빠르게 움직여 막대를 비빈 것만 봤다!

대체 얼마나 근력을 키워야 저런 미친 짓을 주술처럼 보이게 할 수 있는거지?

족장 이름이 웃는 팔뚝인 이유는 팔뚝의 근육이 꿈틀대는 게 웃는 얼굴처럼 보여서 그런 게 틀림이 없다.

지금 족장 근처에서 돌아다니던 발 달린 불씨들도 족장을 '이 미친 놈이?!'라는 표정으로 보고 있다.

얼마나 어이가 없었으면 불씨조차 나랑 똑같은 표정을 짓겠는가?



"떠도는 어두움 주술 보고 놀란다."


"대단하다는 얼굴이다."


"떠도는 어두움 주술이 잘 보인다?"



친구놈들과는 다르게 주술사는 나를 흥미롭다는 눈으로 보고 있는데 아무래도 내가 주술의 트릭을 깨달았다는 사실을 눈치 챈 것 같다.

그게 아니면 진심으로 내가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거 주술(물리)인데 이거 쓸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샤벨 타이거도 맨손으로 때려잡겠다.

그쯤되면 그냥 아무거나 주술이라고 말해도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떠도는 어두움! 오늘부터 주술 쓴다!"


"그... 알았다 족장"



거절하고 싶은데 족장의 꿈틀대는 근육이 찡그린 표정이 되었다!

얼굴은 웃고 있는데 근육이 화난 표정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얼굴은 위장이고 근육 쪽이 본체가 틀림이 없다!

내가 수락한 건 절대 저 근육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



나는 웃는 팔뚝, 불꽃 부족의 족장이자 주술사다.

족장이란 무엇인가?

이끄는 자다, 가장 웃어른이다, 현명해야만 하는 자다.


차가운 바람과 뜨거운 바람이 한 손하고도 두 손만큼 지나기 전, 내 어머니의 마지막 딸은 아이를 낳고 땅으로 돌아갔다.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를 위해 아름다운 색을 내는 껍데기를 마른 덩굴로 엮은 주술도구를 만들러 짠 물로 들어갔다가 물 냄새나는 커다란 아가리에 삼켜졌다.


내 어머니의 딸의 아들, 여동생의 아들은 혼자 남았다.

그러나 부족 사람들은 모두가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아들과 딸들이다.

모두가 내 어머니의 마지막 딸의 아들을 위해 힘냈다.


하지만 아이, 떠도는 어두움은 늘 혼자였다.

떠도는 어두움에겐 친한 벗들이 있다.

일도 잘한다.

어른들도 떠도는 어두움을 훌륭하다 말했다.


그래도 떠도는 어두움의 안쪽 깊은 곳에서 떠도는 어두움을 움직이는 것, 위대한 하늘의 빠른 불이 정신과 영혼이라는 요상한 말로 부르는 것은 떠도는 어두움을 홀로 있게 했다.

주술사이자 족장인 나는 알 수 있다.


떠도는 어두움은 언제나 새로운 걸 만들고, 가져왔다.

떠도는 어두움은 뾰죡귀 부족이 쓰던 활을 혼자서 만들었다.

떠도는 어두움은 불에 구워 만드는 진흙으로 된 통을 더 잘 만드는 법을 알아냈다.


하지만 떠도는 어두움은 괴로워했다.

가지고 싶은 걸 가지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떠도는 어두움은 전과는 다르게 주술을 보며 무언가 힘세고 대단한 거 만들어냈을 때 같은 얼굴이 되었다.

내 근처를 떠도는 정령님들 쪽으로 종종 시선이 가고 있다.

분명 떠도는 어두움도 나와 같은 걸 보고 있으리라.



"떠도는 어두움! 오늘부터 주술 쓴다!"


"그... 알았다 족장"



나, 웃는 팔뚝은 믿는다.

떠도는 어두움은 힘세고 대단한 주술사가 될 수 있다.

분명 나처럼 하늘의 빠른 불의 말을 들을 수 있다.

짠 물에, 높은 언덕에, 축축한 흙에 있는, 시원한 바람 모두에 있는 작은 알갱이들을 마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팔과 다리와 배를 크게 해야 한다.

울퉁불퉁한 살을 만들어야 한다.

떠도는 어두움은 내 어머니의 마지막 여동생의 아들이니 내 어머니의 아들인 나처럼 울퉁불퉁한 살을 만들 수 있다.


울퉁불퉁한 살은 무거운 돌을 들 때 잘 만들어진다.

코가 긴 마만투스의 고기를 먹어도 잘 만들어진다.

물론 마만투스만 먹으면 안된다.

무거운 걸 많이 들어야 울퉁불퉁해진다.

마만투스만 먹으면 울퉁불퉁이 아니라 탱탱해진다.



##



인간이 문명을 세우는 것은 우연인가 본능인가?

전쟁과 원한은 인류 문명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나는 그에 대한 해답을 알지 못하건만 세상은 내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내가 주술사이자 족장이자 친척인 웃는 팔뚝에게 주술사 훈련을 빙자한 헬스 트레이닝에 강제 참가를 당한지 벌써 10년이 흘렀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되는 흉악한 트레이닝을 수 년동안 받은 끝에 나는 흉기와도 같은 몸을 얻게 되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트레이닝을 버티지 못했다면 나는 진작 몸의 뼈와 근육이 박살나 폐인이 될 뻔한 걸 버텨낸 것이다.


웃는 팔뚝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헬스 트레이너로서는 2류, 아니 3류였다.

보통 인간은 그의 훈련을 절대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사실 나도 한계라고 느끼고 위험에 처한 적이 꽤 있었으나 그때마다 내 친한 친구들이 몰래몰래 도움을 주었고 다행히도 그것으로 위기를 벗어났다.


망할 이 원시시대의 레그 프레스 비슷한 물건으로 훈련을 할 때가 제일 위험했지.

웃는 팔뚝이 족장 업무 본다고 잠깐 내 다리에 바위 하나를 더 올려놓고 갔는데 내 다리가 버티질 못해서 원시 레그 프레스에 다리가 엿가락처럼 휘기 직전, 내 친구들이 나를 도와 바위를 밀어내주지 않았다면 정말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다.


어쨌든 지금까지 우리 부족에 이 무식한 방식의 훈련을 버틸 수 있는 아이도, 성인도 없었다.

이것이 우리 부족에 웃는 팔뚝말고 주술사가 없던 이유였다.

트레이닝을 전부 끝마치고 내가 공식적으로 주술사가 되자 웃는 팔뚝은 나에게 주술사 자리를 넘기고 족장 일에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막 태어났을 때는 20명 정도에 불과하던 부족은 아이들까지 합쳐서 40명 정도로 늘어났고 우리 부족은 채집보다 목축업과 농업에 더 많은 인원을 할당하기 시작하였다.


아직은 작은 토끼들을 어설프게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우리에 넣어서 기르는 정도지만 웃는 팔뚝은 내 의견을 받아들여 이미 멧돼지 새끼를 포획할 계획을 짜고 있었다.

소나 닭이 있었다면 베스트겠지만 지금까지 이 둘은 우리 부족이 발견하지 못한 동물들이기에 계획이 없었다.


웃는 팔뚝은 족장으로서 훌륭한 사람이었고 수많은 문명의 이기에 대해 어중간하게 알고 있는 내 기억력보다도 훨씬 부족에 도움되었다.

내가 생각만 하고 있을 때 웃는 팔뚝은 그 생각을 실현할 수 있었다.

내가 한 가지 의견을 제시하면 그 의견의 불완전한 부분들을 전부 보완해서 현실적인 방식으로 부족에 도움이 되게 실현하였다.


하지만 치킨에 관련된 것만큼은 웃는 팔뚝도 이해를 하지 못했고 닭도 발견되지 않아서 내 상실감은 커져만 갔다.

이래서는 치킨을 만들 수 없다.

뭔가 더 근본적인 발전과 혁신이 필요했다.



"친구가 된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던 중, 커다란 하천 너머의 숲에 살고 있는 뾰족귀 부족이 우리를 찾아왔다.

나의 붉지만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은 몇 번이나 물에 헹궈도 빛은 나지 않는다.

윤기는 날지 몰라도 그건 잠깐뿐이다.

하지만 그 잠깐동안의 윤기가 그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족장과 회담을 하는데 그 뒤의 수행원들이 내쪽으로 몇 번이나 시선을 보내오고 있는 걸 보면 그게 맞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우리 돼지랑 싸운다. 너희 돼지랑 싸운다. 돼지 놈들 큰 나무 작은 나무를 심하게 괴롭힌다. 돼지들 너희 괴롭혔다."



뾰족귀 부족은 인근 부족들 중에서 가장 먼저 활을 만들어 쓴 부족이었다.

사냥실력도 아주 훌륭했고 기술력도 있었으나 그들에게는 크나큰 단점이 있었다.

그들은 정신병이 있는지 아니면 애니미즘 신앙에 심취한 것인지 아무 나무나 붙잡고 대화를 하는 이상한 행동을 자주 보였고 나무를 베려고 하면 발광을 하며 못하게 막아서 인근 부족들에게 원한을 사고 있었다.


우리 부족의 아이 하나가 강 너머로 건너가 그곳의 숲에서 돌도끼로 나무를 베려고 하자 아이를 두들겨 패서 우리 쪽으로 쫓아냈던 일 때문에 뾰족귀 부족에게 이를 가는 부족민이 있을 정도였다.


물론 돼지라 불리는 놈들, 아무리 생각해도 중간계 오크에 돼지코를 붙인 걸로 생각되는 험악한 부족 놈들이 똑같은 짓을 했다가 사망자가 나왔을 정도니 그냥 두들겨 패서 쫓아낸 정도면 뾰족귀 부족이 우리 부족 아이를 많이 봐줬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면 돼지 부족 놈들이 평소에 다른 부족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끔찍한 풍문 때문에 뾰족귀 부족이 더 과민반응한 것인지도 모르지.



"힘세고 좋은 일인지 주술사 점보라 한다."



족장 웃는 팔뚝의 말에 뾰족귀 대표의 시선이 나에게 옮겨왔다.

뾰족귀 부족의 대표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내 머리카락을 힐끗힐끗보면서 자기들끼리 눈빛을 주고 받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기르고 싶어서 기른 게 아니라 간석기로 머리카락을 자르기에는 모발이 너무 심하게 상해서 안 자른 거였는데 다른 부족 사람들은 간석기로 자르고 다니니 혼자서 머리카락을 기른 내가 이상해보인 모양이었다.



"정말 주술사? 나무님 힘 안 보인다."


"나무님이 아니다! 정령님이다! 계시가 내려왔다! 왜 나무님이라 부르나!"


"미안하다 사브리테. 나 잘못했다. 앞으로 정령님이라고 부른다."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군.

이 부족은 아무리봐도 애니미즘 신앙에 지나치게 심취한 것 같다.

보통은 자기 부족 체면을 위해서라도 이런 회담장소에서 같은 부족 사람을 혼내지는 않던데 말 한 마디 잘못했다고 허리춤에 끼고 있던 활로 때리려는 걸 보니 유전자 단위로 폭력성이 내재된 부족인게 틀림없다.



"조용! 하늘의 빠른 불님께 많은 나무 부족, 불꽃 부족이 같이 돼지 부족을 사냥하는 거 말한다!"



내가 지금까지 주술사 업무를 하면서 얻은 노하우는 '좀 있어보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팩트를 말하는 것보다 뭔가 그럴싸하고 엄숙한 목소리로 분위기 잡으며 말하는 걸 잘 들어먹는다.

특히나 종종 주술사용 반짝 가루 뿌릴 때마다 보이는 발 달린 작은 불씨들이 환호할 정도로 그럴싸하면 더 좋다.

대충 근처에서 사냥하다 발견한 검치호(세이버투스) 해골로 만든 뼈투구를 쓰고 움막 안쪽에 있는 모닥불에서 엄숙하게 손짓을 몇 번 하고 아무렇게나 생각해낸 주문을 외운다.



"위대한 빠른 불이여! 만약 두 부족이 친구가 되어도 좋다면 넓고 넓은 짠 물 같은 색으로! 그냥 해와 달이 미소를 짓고 잠드는 것처럼 예전과 같으면 나무들 같은 색이나 달과 황금 같은 색깔로 빛내주소서!"



여기서 주문을 엄숙하게 외우면서 몰래 준비해놓은 금속가루를 슬쩍 뿌리는 게 포인트다.

보통 지팡이 같은 걸 들어올려 시선을 위로 향하게 한 뒤 밑으로 내린 손으로 슬쩍 뿌리면 대부분은 속아넘어간다.

활용할 기초적인 기술이 없는 현재, 특정한 암석 덩어리를 긁어내서 극소량만 얻을 수 있는 금속가루들은 이런 때말고는 쓸 일이 없다.



화르륵!


"계시가 내려졌다!"



금속 반응에 의해 한 순간 붉은색으로 타오르던 불꽃의 색깔이 변한다.

너무나도 푸르고 푸른 그 색깔에 불꽃을 숭배하는 관습이 없는 뾰족귀 부족마저 즉각 엎드렸다.


이건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내가 뿌린 가루들은 금속의 불꽃 반응에 의하면 노란색으로 타올랐어야 했다.

그것도 한 순간만 타올랐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청색의 불꽃은 지금도 계속 타오르고 있었다.



"그럼 해와 달이 달리기를 4번 한 뒤에 강 건너에서 만나자"


"알았다."



뾰족귀 부족은 돼지 부족과의 싸움에 대한 논의를 4일 뒤에 시작하자고 말한 뒤 돌아갔다.

그러나 파란색으로 타오르는 불꽃은 여전히 남아있었고 웃는 팔뚝은 부족민들에게 싸움이 있을 거란 사실을 알리러 간 동안 나는 움막의 뒷정리를 시작하려고 했다.



[나의 계시를 받고도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지 않다니 주술사 실격이도다 그러나 자비로운 본 신은 너를 용서하겠노라]



어째서인지 파란색 불꽃이 사람 얼굴처럼 타오르며 나한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가 뿌린 금속 가루 중에 마약 성분이 많이 섞여있던 모양이다.

앞으로는 뒷산에서 나오는 은백색 암석에서 긁어오지 말고 좀 피곤해도 저 멀리 강을 2번 건너야 나오는 천연 동굴에서 긁어와야겠다.



[그리고 지금 생각났는데 너 공물 바칠 때 성의를 좀 보여라. 주술사란 놈이 신한테 제물바치는데 성의가 없잖아 성의가]



마약 성분이 만들어낸 환상은 어째서인지 근엄한 모습을 던지고 바로 본색을 드러냈다.

말투와 어조에서부터 뭔가 양아치 같은 티가 팍팍나는 이 환상은 대체 얼마나 지속되는 걸까?

혹시 본드 빠는 게 지금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걸까?



[너 지금 이 불의 신님께 시비거는 거냐? 주술사라는 놈이 신을 보고도 경의를 안표하네?]


"이런 미친! 난 마약 같은 거 안하는데!"



아무래도 내가 긁어온 가루가 상당히 심각한 환각제였던 모양이다.

다행히도 중독성은 없는 것 같은데 조금 태운 연기를 들이마신 정도로 이런 환상과 환청이 생길 정도면 독성이 엄청난 녀석임이 틀림없다.

아, 나랑 같은 공간에 있다 나간 엘프들과 족장이 걱정된다.



[하! 나중에 니 녀석이 어린 꼬마들한테 '어린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새퀴들아 내가 신 직접 만난 썰 풀어준다'라고 자랑할 개쩌는 시츄에이션을 만들어주려고 했건만 뭐? 미쳐?]


"아니 애초에 하늘의 빠른 불이면 번개인데 뭔 불의 신이 나와? 좀 말이 되야지. 번개가 떨어진 다음 불 붙는다고 다 같은 불이야?"



어, 평소에 잘 보이던 발 달린 불씨들이 없어진 걸 보니 뭔가 좋지 못한 일이 벌어지려는 게 틀림이 없다.

나도 정신이 나갔지 왜 환각 성분 때문에 보이는 말하는 불꽃이랑 대화를 할 생각을 했을까?

마약이 내 정신과 뇌의 시냅스를 교란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더 이상해지기 전에 움막을 환기해야 한다.



[이 힘만 올려서 지능이 약간 모자란 힘법 녀석! 증거를 보여주마]


콰르르릉!!



갸아아악! 갑자기 번개가 움막을 뚫고 나한테 박힌다!

피뢰침 용도로 움막 옆에 박아놓은 나무도 소용없잖아!

그런데 이거 환각 아니잖아!

뭐, 뭐야? 설마 이거 진짜인가?

나는 지금까지 말하는 파란불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게 맞단 말인가?

아니면 이건 꿈인가? 현실에서 자고 있는 내가 꾸는 기나긴 꿈인가?



"뭐뭐뭐, 뭐야 이거! 번개가 왜 천막을 뚫고?!"


[얼씨구? 지금까지 찍은 힘이랑 맷집 스탯은 폼이 아니구만? 지푸라기랑 나뭇잎이랑 가죽으로 만든 허접한 천장을 하나 통과했다고는 해도 번개를 맞고 멀쩡하네? 보통 전류가 흐르면 전기신호에 반응하는 메커니즘의 신경 쪽이 조금은 마비되야 정상인데 바로 움직여? 신경줄이 얼마나 두꺼운 거냐?]



방금 그 고통은 절대 환상통 같은 게 아니었어!

뭐야 설마 진짜 신인가?

우리 부족 주술사들이 모셔온 하늘의 빠른 불 본인이란 말인가?

웃는 팔뚝이 주술사 업무를 할 때는 이런 현상 없었는데?!



[니 녀석이 모시는 신으로서 충고하는데 힘 스탯만 너무 찍지 말고 엘프 놈들한테 마법 좀 배워서 써먹어라. 그리고 앞으로 공물은 잘 익은 매머드 스테이크말곤 안 받는다. 누린내나는 멧돼지나 스밀로돈 고기 바치면 진짜 뒤진다]



파란색 불꽃은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남기고 다시 평범한 빨간 불꽃으로 되돌아갔다.

나는 한동안 발에 못 박힌 것처럼 멍하니 화톳불을 바라보았고 그 동안 내가 있던 움막에 번개가 떨어진 걸 보고 허둥지둥 달려오는 부족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움막 천장에 번개가 낸 커다란 구멍만이 내가 본 것이 환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야 모든 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방금 막 마을을 나가려던 뾰족귀 부족 사람들의 어깨에 올라탄 작은 녹색의 꼬마들이나, 바위 위에서 잠자는 흙인형, 바다에서 놀고 있는 물로 된 꼬마아이, 내가 종종 보던 발 달린 불씨 같은 절대로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기괴한 것들은 단순한 환각이 아니었다.


아이는 어린 시절의 기억 대부분을 잊어버린다.

자아가 확립되지 못한 채 본능에 따라 시간의 흐름을 타는 아이들에게 강렬하지 못한 사건들은 그저 지나가는 바람과 같은 것이다.

허나 나는 내 인생의 대부분을 기억하고 있다. 심지어 태어난 순간의 일들마저도 전부 기억하고 있다.

나는 이것이 그저 꿈이나 환각 같은 거라고 은연 중에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전부 기억하는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내 생각과는 다르게 이 세상은 내가 원하던 세상이 아니며, 지독하고 잔인하고 위험하나 나는 이곳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걸 25년이 지나서야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작가의말

문피아에 가입한지 시간이 좀 지났는데 연재는 안하고 눈팅만 하다가 이번에 한번 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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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 결착의 시간 #2 +3 21.01.05 954 51 12쪽
274 결착의 시간 #1 +12 20.12.31 1,002 48 13쪽
273 카르바노그 #10 +18 20.12.29 1,036 50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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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 카르바노그 #8 +12 20.12.22 960 4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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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 카르바노그 #6 +6 20.12.15 994 38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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