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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6굴림실패 님의 서재입니다.

치킨 없는 판타지에 구원은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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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D6굴림실패
작품등록일 :
2019.10.28 19:34
최근연재일 :
2021.03.04 14:24
연재수 :
287 회
조회수 :
765,799
추천수 :
28,911
글자수 :
2,157,900

작성
20.12.0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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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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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글자
12쪽

카르바노그 #4

DUMMY

불은 참 복잡한 면모를 지녔다.

누군가는 불을 강력한 산화작용의 연쇄에 불과하다고 말하나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전해주고 제우스에게 처벌을 받게 된 원인도 불이었고, 올림포스의 최고신 중 하나이자 오랫동안 튼튼한 신앙으로 사랑받은 헤스티아가 담당하는 것 역시 아궁이 혹은 화로의 불이었다.


불은 단순한 산화와 연소 작용을 넘어 문명과 발전을 상징하는 존재였고 전생의 인류와 현생의 종족들 역시 불을 통해 발전을 해왔다.

비록 마력 덕택에 이전 세상과는 달리 조금 의미가 퇴색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은 여전히 여러 곳에서 사용되는 문명의 상징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빡치네"


"아르드바르, 넌 분노조절장애가 있나?"


와구와구



포이부스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정령들을 데리고 용들과 고기를 뜯고 있었다.

불의 정령들을 마석으로 매수해서 완벽한 불조절로 구워낸 초거대 황소 안심 스테이크에 발라진 온갖 향신료를 배합한 붉은 소스의 향과 풍미가 제대로 올라오는 상황에서 포이부스가 뜬금없이 분노하는 걸 보고 세르피누스는 고기를 뜯으면서 물었고 포이부스는 불판 옆에 달린 작은 테이블 위에서 살이 덜 발라진 뼈를 들고 말했다.



"아니, 생각해보니 다른 불과 관련된 신들은 다 착하고 선량한 편인데 왜 내 상관만 성격 그 지랄이지?"


"고기 뜯다말고 주인을 생각하다니 아주 지극정성이군."



처음에는 이게 뭐하는 짓인가 생각하며 연신 동생의 등짝을 꼬리로 치던 세르피누스도 결국 유혹에 넘어가 딱 한입만 먹자고 생각하고 뜯어먹더니 그 뒤로는 동생 등짝을 치는 걸 멈추고 함께 고기를 뜯고 있었다.

세르피누스는 밥 먹다 말고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포이부스를 보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다시 고기를 뜯었고 아직도 비몽사몽한 상태로 열심히 고기에 얼굴을 처박고 포식 중인 드라콘은 아예 말도 없이 턱과 목만 움직일 뿐이었다.


포이부스가 이렇게 열심히 욕을 하고 안달복달 해봤자 지금 이 세상에 있는 불의 신은 이그니 하나였으니 결국 포이부스는 자신의 주인과 뗄레야 뗄 수가 없는 관계일 수밖에 없었다.

요리를 하는 이들 대다수는 불과 가까이 지낼 수 밖에 없고 치킨을 다시 세상에 재림시키려는 게 목적인 포이부스로서는 결국 이그니에게 속박된 신세인 것이다.



"그냥 에어프라이어를 만들면... 그것도 결국 전기로 움직이지 참"


[너는 나약하다아아아]


[논 자유의 모미 아뉘야 여태까지 그래와꼬 아패로도 꼐쏙]



신들은 좌절하는 포이부스를 놀리면서 낄낄댔고 포이부스는 하늘을 바라보며 입을 삐죽내밀며 말했다.



"저도 알고 있으니까 굳이 상기시키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니까 그만 놀리세요!"


[에붸붸베]


[X까!]



포이부스는 악신들의 유치한 놀림에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불조절은 잊지 않았다.

세르피누스는 포이부스가 신들과 투닥거리는 걸 어이없다는 듯이 보다가 중간부터는 그냥 무시하고 고기만 뜯었고 드라콘은 고기를 먹으면서 점점 힘이 회복되는 건지 반쯤 감겨있던 눈꺼풀이 점점 올라갔다.


포이부스는 고기를 구우면서도 이그니가 틀림없이 불의 안좋은 면인 파괴적인 성향이 뚜렷한 신이 분명하다고 생각하였고 그렇게 고기가 무한정 추가되어 마침내 해가 저물어 화로와 불판에 있는 불의 정령들이 유난히 밝게 보일 정도로 주변이 어두워지고 케트라 산의 식량 저장고의 소고기 칸이 싹 비워지고서야 드라콘은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벗어나 날개를 활짝 폈다.



"꺼억~ 오랜만에 잘 먹었네"


찰싹! 찰싹! 찰싹!



드라콘은 비몽사몽한 상태로도 고기의 맛은 기억하고 있는 건지 잠에서 완전히 깨어난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꽤 만족스러운 얼굴이었고 세르피누스는 자기 옆에 쌓인 뼈무더기를 보고 완전히 유혹에 넘어갔다고 자책하며 꼬리고 자기 머리를 계속 내리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쪽은 누구?"


"먹다보니 바빠서 통성명도 안했군. 나는 폰티펙스 포이부스 막시무스. 불꽃 부족의 주술사다."



포이부스는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밀었고 드라콘은 작은 깃털을 앞세워서 악수를 받아주었다.

다만 포이부스의 이름을 들으면 경악, 혐오, 분노를 드러내는 다른 용들과 달리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누구더라? 내가 기억 못하는 거 보니 그리 유명한 거인은 아닌거 같은데?"


"아르드바르의 본명이잖아 이 새대가리야!"



평소에는 근엄한 태도를 유지하던 세르피누스는 이미 자존심이고 뭐고 다 뭉개진 상황에서 더는 가식적인 태도로 포장하지 않으려는 건지 아니면 남동생을 대할 때는 이게 기본상태인건지 몰라도 평소보다 사납게 동생을 쏘아붙였고 동생인 드라콘은 잠깐 생각하다가 그제야 기억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 의지박약인 동족들 조지고 다닌다던 살용마? 그런 자가 깐깐한 누나랑 같이 날 찾아온 걸 보면 날 죽이는게 목적인 것 같지는 않은데 무슨 일이지?"



드라콘은 포이부스에 대해 신랄한 평가를 내렸지만 그 말을 하는 드라콘의 모습에서는 딱히 원한이나 증오, 분노 같은 걸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포이부스가 지금까지 동족을 죽이고 다녔는데 '그래서 나한테 어쩌라고?'라고 말하는 것 같은 드라콘의 태도에 포이부스는 이 용이 혹시 사회에 섞이지 못한 반사회적 성향이 강한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의지박약? 너 지금 뭐라고 그랬냐 드라콘?"


"왜 뭐, 뭐? 내가 틀린 말 했어? 카르바노그에 대한 복수도 포기하고 신의 은혜도 잊고 서서히 쇠락해가는데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게 의지박약이 아니면 뭐야? 카르바노그 뒤에서 버티고 있는 여신이 무섭다고 아무것도 안하는 것들을 그럼 뭐라고 불러?"



드라콘의 대꾸에 세르피누스는 단순히 남동생을 보는 누나가 아니라 진짜로 원수를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드라콘을 쏘아보았고 말리지 않으면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드라콘이 동족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은 사이코패스나 반사회적인 면모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카르바노그에 대한 복수를 해결하려는 시도 중에 서로에게 쌓인 감정이 많아서였던 것이 분명했다.


평소 같았으면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서 싸움 구경을 했겠지만 포이부스는 지금 이곳에 남매 싸움을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었기에 남매 사이에 중재를 들어갔다.



"즐겁게 고기 뜯고 분위기 안 살게 이게 뭐야 다들 진정해"



술자리에서 술취한 동행자 말리는 사람 같이 세르피누스를 밀어내면서 둘 사이를 갈라놓은 포이부스의 태도에 세르피누스가 발끈해서 한마디를 던졌다.



"말리는 건 상관없지만 애시당초 원인 제공은 네놈이 했잖나 아르드바르. 스목이 잡혀가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스목 형을 잡아간 게 아르드바르였어?"



드라콘은 아무래도 그동안 다른 용에 대한 소식을 별로 듣지 않았던 건지 지금 처음듣는다는 얼굴로 말했고 세르피누스는 아틀란 대륙에서 있었던 일이 악몽처럼 떠오르는 것인지 고개를 숙였고 포이부스가 조심스럽게 드라콘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이번에는 절대로 내가 먼저 용들한테 선공한 건 아니다. 신들의 개입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그래서 오늘은 화해를 위해 찾아온 거다."


"화해?"



드라콘이 지금 가지고 있는 정보를 생각해본다면 드라콘 개인은 몰라도 용족과 포이부스 사이에는 절대로 메울 수 없는 양극이 있는 상태였다.

이미 예전에 용들을 죽이고 다닌 것만으로도 원한이 쌓일 만큼 쌓인 상태인데 최근에 용족의 수장인 스목까지 포로로 잡았다?

그 과정에서 몇 마리나 되는 용들이 희생되었을지 직접 보지 않은 드라콘조차 쉽게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분노하고 있을 세르피누스가 그를 대동하고 자신을 찾아온 걸 보면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는 게 분명했고 드라콘은 포이부스가 무슨 말을 꺼낼지 머릿속으로 먼저 생각하면서 포이부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우리 두 세력의 미래를 위한 화해지! 이미 즈뮤와 즈메이는 신들께 많은 선물을 받았고 스목도 원래대로라면 처형해서 효수했어야 했지만 지극정성으로 치료를 해놨고 무엇보다도 용족 전체에 의미가 있지만 너 개인에게 더더욱 의미있는 선물을 줄 생각이다."


"그게 뭐지?"


"카르바노그를 죽이기 위한 지원!"



즈뮤와 즈메이가 그토록 증오하던 아르드바르의 주인들에게 선물을 받았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마지막으로 포이부스가 제안한 것은 확실히 용족 전체로 봐도, 드라콘 개인으로봐도 의미가 있는 선물이었다.

하지만 입발린 사탕발림만으로 덥썩 제안을 받아들일만큼 드라콘은 멍청하지는 않았다.



"지원을 어떤 방식으로 할 거지?"


"우리 만신전에서 선발한 최고의 전사들과 정령들, 정령왕에 스목조차 기겁한 전략 폭격 병기에 수만에 이르는 보조 병력들과 장인들이 오로지 카르바노그 하나를 죽이기 위해 투입될 거다. 물론 나 역시 참가할 거고 이 모든 것을 신들의 이름과 명예를 걸고 약속할 수 있다."



일개 필멸자가 신들의 이름과 명예를 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 세상에 있는 이들은 다들 잘 알고 있었다.

용들이 아르드바르라 부르는 포이부스가 하로나스의 만신전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고 있는 드라콘은 지금 이 제안이 결코 가벼운 게 아니라는 걸 알았고 자신도 모르게 누나 쪽을 바라보았다.

동생과 눈이 마주친 세르피누스의 얼굴은 고통과 굴욕과 슬픔에 젖어있었으나 그 속에서 체념의 기색을 느낀 드라콘은 아틀란 대륙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얼굴로 다시 포이부스를 바라보았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 후 너희가 원한다면 용족과 불가침 조약을 맺거나 동맹, 더 나아가 신들의 휘하로 들어가는 것으로 너희는 우리 만신전의 힘이 뻗어나간 모든 지역에서 모든 종족에게 존중받게 될 것이다. 신을 잃고 사냥당하는 짐승 신세에서 당당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종족 중 하나로 돌아가는 거다."



제 아무리 용족이 강력하다고 할지라도 그림자의 신이 떠나가고 신을 잃은 종족이라고 비웃음 당하며 때로는 퇴치당하는 해수와 다를 바 없이 취급되는 용족에게 지금껏 후원자를 자처하는 신이 없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사기계약이나 무조건적인 복종으로 그들을 얽매려고 하였고 스목은 그런 신들의 제안을 계속 거부해왔다.



"대가는?"


"포기한 자유의 양에 비례해서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물론 최소한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세력에서는 존중 받을 수 있을 거다. 스목의 석방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이루어질 것이고 카르바노그를 죽일 지원은... 조금 비싸겠지."



카르바노그는 세상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괴물들 중에서도 최상위권으로 평가되는 끔찍한 존재였다.

지금까지 용족과 드라콘이 번번히 죽이려고 시도했음에도 녀석이 살아있는 게 그 증거였고 그런 존재를 죽이는데 대가가 저렴할 리가 없었다.

드라콘은 잠깐 고민하다가 어두운 하늘에 펼쳐진 별들을 한번 바라보고는 다시 누나를 바라보았고 세르피누스는 이미 동생이 무슨 선택을 할지 짐작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라콘은 잠깐 침묵의 시간을 가진 뒤 포이부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언제나 밖을 떠돌아다닌 나한테 다른 동족의 운명을 선택할 권리는 없다."


"그럼?"


"하지만 나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내 자유를 대가로 어디까지 지원해줄 수 있지?"



그 말을 들은 포이부스는 씨익 웃으면서 모르테스 쪽으로 손을 내밀었고 모르테스는 미리 준비한 텅 빈 양피지를 포이부스의 손 위에 올렸다.



"카르바노그를 죽이는데는 충분한 대가다. 하로나스 님의 만신전에 온 것을 환영한다 친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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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 결착의 시간 #8 +7 21.01.26 900 4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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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 결착의 시간 #6 +10 21.01.19 939 45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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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 결착의 시간 #4 +10 21.01.12 920 43 12쪽
276 결착의 시간 #3 +6 21.01.07 968 41 12쪽
275 결착의 시간 #2 +3 21.01.05 954 51 12쪽
274 결착의 시간 #1 +12 20.12.31 1,003 48 13쪽
273 카르바노그 #10 +18 20.12.29 1,036 50 23쪽
272 카르바노그 #9 +6 20.12.24 928 42 14쪽
271 카르바노그 #8 +12 20.12.22 961 41 18쪽
270 카르바노그 #7 +10 20.12.17 936 38 13쪽
269 카르바노그 #6 +6 20.12.15 994 38 11쪽
268 카르바노그 #5 +6 20.12.10 937 40 15쪽
» 카르바노그 #4 +5 20.12.08 919 41 12쪽
266 카르바노그 #3 +14 20.12.03 950 48 11쪽
265 카르바노그 #2 +9 20.12.01 944 44 15쪽
264 카르바노그 #1 +5 20.11.26 985 4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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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 혈마인 #10 +4 20.11.20 949 46 14쪽
261 혈마인 #9 +8 20.11.17 953 48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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