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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들맨 님의 서재입니다.

운명의 사람이 소원을 이룰 때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드라마

완결

레이들맨
작품등록일 :
2021.05.15 22:05
최근연재일 :
2021.07.22 08:16
연재수 :
5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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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108
글자수 :
335,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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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14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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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제3장 (1) 그 옛날 필이와 하얀이

DUMMY

‘그때’ 나무탈의 머리와 마음에 구멍이 뚫린 듯 감정이 빠져나가 사라졌을 때, 그에겐 아무런 의욕이 남아있지 않았다.

의욕이 사라지자 그의 머릿속은 점점 뿌옇게 되어 갔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안개는 두꺼워져만 갔고 수많은 기억을 먹혀버리고 말았다.


그녀, 하얀이의 기억조차 말이다.

행복과 사랑을 지탱할 감정이 남아있지 않은 나무탈은 하얀이마저 잊고 말았다.

그건 아주 오래전 일이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모든 감정이 다 채워 쳤다는 것을 느꼈다.

하건의 잠재의식 안이었다.


생생한 감정들은 서로 연결 지어졌다.

단편적으로 떠다니던 나무탈의 모든 기억을 유기적으로 되살려 주었다.


나무탈은 자신이 누군지, 어떻게 하다 여기까지 왔는지, 왜 나무의 모습이 되었는지 모조리 기억이 났다.


태어날 때부터 성씨가 없던 그의 이름은 ‘필이’였다.


* *


필이는 광대패 이외의 인생을 몰랐다. 부모 형제도 없고 거처도 없는 삶이었다.

그의 패거리는 늘 자기들끼리 다투면서도 또 서로 없어 못 살겠다고 난리였다.

온 마을 사람들을 들썩이게 하는 거한 놀이판을 벌릴 때처럼 말이다.


어려서부터 그들과 함께 떠돌며 물을 술로 만드는 듯한 재미를 맛보며 살다 보니 필이가 혼인 따위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물론 광대패 안에도 짝이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간혹, 자기 삶을 버리고 광대패를 따라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광대패의 꼭두쇠는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는 우두머리였다.

그중에는 지명수배자도 있어서 포졸들에게 봉변을 당할 뻔하기도 했다.

하지만 꼭두쇠는 특유의 능글맞은 성격으로 사람들을 구워삶아 위기를 넘겼다.

그때 필이는 돈 주고도 못 보는 탈놀음을 보는 것 같았다.


하얀이도 자기 마을에서 도망 나온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나쁜 주인마님에게 핍박받는 몸종이라고 했다.


광대패의 돈 관리를 하는 강진 아지매를 비롯해서 모두가 하얀이를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필이는 의아했다. 하얀이가 노비 일리 없었기 때문이다.


* *


하얀이는 자기 마을에서부터 광대패를 쫓아 나왔다고 했다.

모두들 엊그제의 고갯마루를 떠올렸지만 필이에겐 절대 그렇지 않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는 머릿속 그녀를 찾아 손가락을 튕겨보았다.


필이가 기억해낸 하얀이는 역시나 광대패가 놀음판을 벌린 전, 전, 전 마을의 사람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 마을의 하얀이, 분명 다른 이름을 갖고 있을 그녀의 모습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날 광대패의 줄꾼인 혁대 영감은 언제나처럼 과감한 줄타기를 보여주었다.

하얀이는 영감의 재주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하얀이에게서 눈을 못 떼던 게 필이었다.


‘눈망울이 진짜 옥구슬 같구나.’


그녀의 눈을 보느라 광대패 최고의 장구실력을 가진 필이가 박자를 놓치기도 했다.

쓰개치마를 뒤집어쓴 그녀는 어딘가의 마님이라긴 너무나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다 신명 나는 소리와는 너무 동떨어진 슬픈 표정을 하고 있었고 심지어 눈물까지 흘렸다.


그랬던 그녀가 자기가 하얀이라며 근 두 달만에 나타난 것이다.

그 두 달이 어땠는지 설명해주는 듯 꼴이 말이 아닌 그녀는 진짜 노비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미혼 인척 쪽진 머리를 풀고 지저분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하더라도, 정돈된 그 얼굴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필이가 자신의 기억을 의심할 여지는 티끌만큼도 없었다.


광대패 사람들은 하얀이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필이 말고는 그녀의 원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평상시에 말이 없는 편인 필이는 그 이야기를 하긴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잠자코 말았다.


하얀이는 광대패 사람들 눈동자 속에 들어가기라도 한 모양으로 모두들과 잘 어울렸던 것이다.

계절이 바뀌기도 전에 하얀이는 오래전부터 있었던 사람처럼 광대패에 제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양반이 노비로 전락하는 일도 종종 있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그냥 뭐 그런 거 아냐?’


사실 하얀이가 광대패에 온 것이 처음부터 좋았던 필이였다.


* *


방심하면 하얀이를 쳐다보게 되는 게 어색했던 필은 되도록 그녀와 말을 섞지 않았다.

그래도 결국 자기 전에는 꼭 그녀에 관한 일화를 곱씹고 있었다.


그녀는 줄꾼이 되고 싶어 했다.

평상시에는 최고로 줄을 잘 타는 혁대 영감한테 깍듯한 듯 보이더니 기회가 있으면 놀려먹기도 했다.


‘혁대 영감이 멀리서 볼 때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얼굴이 산신령 같다고?’


그날 보고 들었던 하얀이의 모습 때문에 피식피식 웃는 필이었다.


그러다 만갑이 하얀이에게 한 짓이 떠올랐다.

대접 돌리는 걸 가르친답시고 앵두 막대기를 건네면서 손을 잡은 것이다.

그런데도 하얀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속이 살짝 불편해지는 필이었다.

그는 하얀이가 만갑에게 거북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는 건 모르고 있었다.


* *


필이는 보름달보다 초승달이 좋았다.

어떠한 어둠도 도려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런 기분이 드는 밤이면 필이는 나발을 한번 구슬피 불어 주곤 했다.

너무 늦은 시간만 아니면 광대패들도 아무 말 안 했다. 솜씨가 좋았기 때문이다.

그때 하얀이가 다가왔다.

웬만한 것에는 놀라지 않는 필이가 깜짝 놀랐다.

하얀이는 나무기둥에 줄을 묶고 있었다.


“뭐하냐?”

“···어? 여기 나무 기둥이 건실하니, 줄 타는 연습 좀 하려고.

불던 거 계속 불어. 듣기 나쁘지 않네.”


필이는 구슬픈 가락을 이어가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미 달 따위는 신경도 안 쓰였다.

그래도 나발을 불어야만 할 것 같았다.

힐끔힐끔 눈이 하얀이에게 가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느새 외줄 위에서 서 있을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어둡기도 했고 그녀의 눈길이 필이에게 향하고 있는 것은 미처 알지 못했다.


* *


하얀이, 정 씨 부인은 줄 위에서 뛰놀아 보고 싶었다.

자기 인생은 꽁꽁 묶인 채 그들에게 끌려다니는 삶이었다.

시아버님 시할아버님, 남편 그리고 남편의 여자들.

줄 위에서 솟구칠 수 있다면 그들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도망쳐 나왔다.


광대패에서의 몇 달이 지났다.

배가 고프고 잠자리는 불편했다.

그러나 이 나날들은 줄 위에 올라가거나 풍악이 울리지 않아도 늘 놀음판이었다.


물론 줄타기는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었고 가장 즐거웠다.

그래도 대접도 돌리고 장고도 치며 탈춤도 추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려고 안달인데 필이는 달랐다.


그냥 하면 돼, 그냥 그런 거지, 뭐 그냥···.


무심한듯한 그의 입버릇이 좋았다.


광대패 사람들 자체가 ‘될 대로 되라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듯했다.

그래도 크고 작은 다툼은 끊이지 않았는데 필이는 먹고 자는 것에도 집착하지 않았다.

그의 말버릇은 삶의 태도였다.


그렇지만 놀음판에서의 필이는 조금 달랐다.

모든 놀이를 놀 줄 알았던 필이는 주역이 되려고 하진 않더라도, 광대패 모두를 배려하는 것이 느껴졌다.

광대패 사람들이 잘 되든 말든 그냥 놔두지는 않았던 것이다.

무리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 *


시력이 좋은 하얀이는 필이가 나발을 불고 있는 근처에 적당한 나무가 있는 걸 보고 줄을 들고 나왔다.

앞이 안 보이는데 연습 따위 될 리가 없었다.


필이가 부는 나발의 곡조가 살짝 바뀌었다.

하얀이가 가까이 있으면 꼭 저런 식이었다.

같은 동작 같은 말씨 같은 눈빛이 살짝 달라졌다.


그럼에도 언제나처럼 관심이 없다는 행세를 하고 있었다.


‘이 야밤에 보이지도 않는데 내가 줄타기 연습을 하는 게 걱정이 되지도 않는 건가.’


혁대 영감이 제일 먼저 가르쳐준 것은 외줄에서 발이 미끄러졌을 때 되도록 다치지 않게 떨어지는 법이었다.

일부러 발을 미끄러지게 한 후 기본에 충실하게 떨어졌다.

그리고 조금 아픈데 많이 아픈 흉내를 냈다.


“아야!”


필이는 하얀이의 생각보다 빨리 달려왔다.


“괜찮냐? 어디 봐.”


등으로 떨어진 하얀이는 왼발목을 내밀어 보였다.


“조금··· 삔 거 같아.”


필이는 하얀이의 발목과 발을 양손으로 잡고 천천히 돌려 보았다.

이런 애 같은 발로 어른이 어떻게 걸어 다니나 싶었다.

발목은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하얀이의 마음이 살짝 저렸다.


“움직여져?”

“으···어··· 괜찮은 거 같아···.”


여기서 재치를 발휘하고 싶었던 하얀이는 그야말로 아무 상관없던 오른팔을 내밀었다.


“근데 손목이···.”

“너 왼쪽으로 떨어졌잖아.”

“아 맞다.”


필이는 능청스레 내미는 하얀이의 손목을 깨물어주고 싶어서 깜짝 놀랐다.

천천히 하얀이의 손목을 잡고 손을 잡았다. 조심히 돌려보았다.

생각보다 작은 손은 정말 아기처럼 부드러웠다.


필이의 손길은 따스했다.

시집에서 빗자루처럼 다루어지는 것은 노비들만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하얀이었다.

그녀의 돌덩이 같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이렇게 고운 손을 한 사람이 우리들과 같이 다녀도 되는 것인가.

나 같은 놈과 함께 해도 되는 것인가’


성격은 누구보다도 솔직한 필이었다.


“너 노비 아니지?”


깜짝 놀란 하얀이는 급히 손을 빼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난 노비다. 상관없냐?”


하얀이는 풍문을 들은 적이 있다.

어떤 학문인데, 백성이 임금을 선출하는 세상이 있고 그곳에서는 남자, 여자, 양반, 노비 할거 없이 모두가 같이 밥을 먹으며 같이 배운다는 것이다.


“난 그냥 상관없다. 너가 노비든 어디 공주님이든.”


잠시의 틈이 있었다.

그 사이를 기다려본 필이는 “잘 자라.” 말을 툭 던지고는 가버렸다.

그리고 그 틈 사이에, 하얀이는 더 이상 양반 일가에 속하지 않게 되는 마지막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녀는 달빛 아래 야생화가 이렇게 아름다운지 처음 알았다.


* *


언제나처럼 신명 나는 풍물소리는 모인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장구를 치는 피이와 소고를 두드리던 하얀이가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둘은 등을 맞붙인 채 바람개비처럼 뱅글뱅글 돌았다.

하얀이는 소고를 내던지고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하얀이의 옷깃과 필이의 옷깃이 스쳤다.

하얀이는 장구에 방해가 안되게 살갗을 스치게 했다.

필이는 장구도 자기 몸에 일부가 되게 해 하얀이를 스치게 했다.


광대패의 풍물이 그 두 사람의 호흡에 맞춰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얀이와 필이는 둘만의 세계에 있었다.


흔한 고갯마루였지만 두 사람만의 특별한 장소가 되었다.


* *


이때 작은 빛의 구슬이 춤을 추고 있는 필이와 하얀이 사이에 떠올랐다.

그러더니 구슬에서 흘러나온 빛의 베일이 두 사람을 감싸기 시작했다.


광대패를 즐기는 사람들 뒤편에 웃지 않는 자가 있었다.

놀이가 아닌 베일에 눈이 가있는 그자는 아름다운 용모를 하고 있었고 얼굴이 매우 창백했다.


구슬이 자아낸 베일도 그자의 얼굴처럼 창백한 빛깔을 띄었다.


두 사람은 베일에 감싸 졌지만 그런 게 있다는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 채 계속 춤을 추었다.

이질적인 베일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자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자가 거기 있다가 사라졌다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 *


필이와 하얀이를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까지 하나가 되어 즐기는 가운데, 마음이 불편한 사람은 광대패에서 대접을 돌리던 만갑 한 사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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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에필로그 (최종회) 운명의 사람이 소원을 이룰 때가 오기 전에 21.07.22 21 0 15쪽
54 제3장 (마지막) 무수히 피어있는 빛의 잎사귀 21.07.21 20 0 21쪽
53 제3장 (5) 그 옛날 나무탈이 된 필이 21.07.20 25 0 16쪽
52 제3장 (4) 하얀이의 소원, 필이의 소원 21.07.19 21 0 15쪽
51 제3장 (3) 창백한 얼굴의 청년과 한 가지 소원 21.07.18 24 0 13쪽
50 제3장 (2) 그 옛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21.07.15 25 0 14쪽
» 제3장 (1) 그 옛날 필이와 하얀이 21.07.14 33 0 12쪽
48 제2장 (마지막) 다시 만난 하건과 아리 21.07.13 26 0 18쪽
47 제2장 (23) 모든 것을 건 나무탈의 연기 21.07.12 21 0 16쪽
46 제2장 (22) 현섭이 되어 만난 하건 21.07.11 22 0 15쪽
45 제2장 (21) 인정할 수 없는 장례식 21.07.08 29 0 15쪽
44 제2장 (20) 하건안에서 변하지 않은 아리 21.07.07 25 0 16쪽
43 제2장 (19) 두 사람의 피 분장 기념사진 21.07.06 23 0 12쪽
42 제2장 (18) 감독 오케이 속에 하건과 아리 21.07.05 27 0 14쪽
41 제2장 (17) 하건에게 찾아온 마지막 기회 21.07.04 24 0 13쪽
40 제2장 (16) 주연 겸 메이킹 박하건 21.07.01 30 0 16쪽
39 제2장 (15) 하건의 봄 다시 봄 21.06.30 30 0 14쪽
38 제2장 (14) 나무탈의 분노와 행복을 빈 여자 21.06.29 31 0 15쪽
37 제2장 (13) 나무탈의 적극적인 행동 21.06.28 24 0 15쪽
36 제2장 (12) 회의적인 나무탈과 김상철 21.06.27 30 0 13쪽
35 제2장 (11) 현섭의 소원을 위한 조정 21.06.24 25 0 12쪽
34 제2장 (10) 오디션, 아리와 하건 페어 21.06.23 27 0 17쪽
33 제2장 (9) 하건이 아껴둔 카드 21.06.22 26 0 13쪽
32 제2장 (8) 나송화와 아리스 21.06.21 27 0 14쪽
31 제2장 (7) 아리와 스치는 하건 21.06.20 26 0 15쪽
30 제2장 (6) 아역 탤런트 최아리의 끝 21.06.17 28 0 14쪽
29 제2장 (5) 나쁜 날들과 상관없는 하건 21.06.17 40 0 14쪽
28 제2장 (4) 즐겁지 않은 나무탈 21.06.16 38 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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