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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시아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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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r
작품등록일 :
2011.11.13 22:52
최근연재일 :
2014.12.15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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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7.04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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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로라시아 연대기 - 32.폰터프랙트 요새(2)

DUMMY

파수꾼은 그 어느 때라도 경계를 늦추어선 안 된다. 모두고 먹고 마시는 오늘 같은 날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대위의 명령에 따라 파수대를 지키며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있었다.

요새 안쪽에서는 축제를 즐기느라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밤새 한 자리에 서서 추위에 덜덜 떨고 있는 파수꾼을 놀리기라도 하는 것 같은 그 소음에 두 명의 파수꾼은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불침번을 서게 된 자신의 불운을 저주하였다. 폰터프랙트 지역은 아키텐에서 가장 평화로운 지역이라는 걸 생각해볼 때 오늘의 불침번은 단순한 고문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지금까지 폰터프랙트가 습격당하지 않은 것은 이곳이 난공불락의 요새이기 때문이 아니라 딱히 약탈할 것이 없어서 오크와 도적들 모두 거들떠보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키텐 지역의 도적들 중 9할 이상은 엘브 강가를 다니며 양모를 실어 나르는 배들을 습격하였다. 즉 폰터프랙트가 습격당할 가능성은 한없이 0에 수렴했다.

그 때문에 불침번을 서고 있는 파수꾼들은 아까부터 화톳불 옆에서 툴툴거리고 있었다.

“망할 놈들... 잘도 퍼마셔대는군.”

파이크를 겨드랑이에 끼고 연신 손을 비비며 유겐이 말했다.

“누군 여기서 보초나 서고 있는데 말이지.”

유겐이 투덜거리자 그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새어나왔다. 한 마디씩 말할 때마다 더욱 추워졌지만 불평을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시끄러워.”

유겐의 옆에서 연신 호호하며 두 손에 입김을 불던 에리크가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 괜히 속만 쓰리니까.”

“쳇.”

유겐이 파수대 아래를 향해 침을 탁 뱉었다. 침덩어리는 곧바로 얼어붙은 어둠 속을 향해 사라졌다. 두 사람의 발 밑에 있는 어둠은 아르 강가까지 쭉 이어져 있었다. 별빛조차 보이지 않는 캄캄한 아르 강은 몇 주 전부터 꽁꽁 얼어붙어 있었기에 물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런 추위에서는 들짐승조차 걸어 다니는 것을 꺼릴 정도였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파수를 서는 건 무의미했다.

“제기랄. 오늘 같은 날은 여자랑 뜨끈한 곳에서 한탕 벌여야 되는데 말이야.”

에리크에게 핀잔을 당한 지 채 몇 분도 되지 않아 유겐이 다시 투덜거렸다. 에리크가 말했다.

“미친 놈. 이 시골 바닥에 무슨 여자가 어딨다고?”

“그 계집애 있잖아.”

유겐이 음흉한 어조로 말했다.

“그 귀족 여자애.”

“그 샌님처럼 생긴 녀석의 여동생 말이야?”

“그래. 어린 것이 정말 맛있게 생겼더라고. 그 야들야들한 허리에다가, 새침하게 생긴 게 아주 죽여주더라고.”

유겐의 말에 에리크가 대답했다.

“돌았군. 기사가 둘씩이나 따라다니는 것 안 봤어? 너 같은 녀석이 귀족 여자를 손대려 했다간 거기를 싹둑 해버릴 걸.”

“어딜 말야?”

“네 그 못난 거북이 말이지. 뭘 말하겠어?”

상스러운 농담을 하며 에리크가 빈정거렸다.

“고자가 되면 네 마누라가 퍽도 기뻐하겠다.”

“흥. 그 호박 같은 여편네. 제 년이 화를 내던 말던. 아들도 못 낳는 년이.”

“아들 못 낳는 건 네 못난 소시지가 축 늘어진 탓이지. 멀쩡한 마누라 욕을 왜 하냐? 아들을 낳고 싶으면 사창가나 그만 들락거려라, 새끼. 그런 데서 힘을 쓰니 아들이 나올 씨도 없는 거 아냐?”

“너 이 새끼. 강물에 쳐 박아 버린다.”

에리크의 비아냥거림에 유겐이 진심으로 화를 냈다. 유겐은 자신의 정력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작 그에게는 아들이 없이 딸만 셋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누군가가 이 점을 지적하며 조롱하는 것을 대단히 싫어했다.

“보초는 안 서고 뭣들 하나?”

갑자기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이 요새의 책임자인 대위가 서 있었다.

“이, 인기척 좀 하시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했던 유겐이 비굴하게 말했다. 그 모습에 에리크가 한심하다는 듯 유겐을 바라보았다.

“언제 오신 겁니까?”

“네 놈이 그 소시지 가지고 농담 짓거리를 할 때부터다.”

대위가 유겐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 백작이라는 애송이에게 들켰으면 네 놈의 소시지는 진작 뿌리까지 잘려서 개들한테 던져 졌을 거다, 이 새끼. 그 물건 잘 간수하고 싶으면 입조심해.”

대위의 꾸중에 유겐이 입을 다물었다. 사실 유겐은 대위를 매우 두려워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유령처럼 뒤에서 스윽 나타나 그에게 손찌검을 하기 일쑤였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에버딘을 두고 상스런 농담을 하자마자 대위가 등장한 것을 보면 유겐과 대위 사위에는 무언가 끔찍한 악연이라도 붙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괜히 이야기가 길어지다가 자신에게 불똥이 뛸까 걱정한 에리크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는 적어도 유겐보다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오늘 같은 날 대위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 백작 나리와 술자리에 계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네 놈들이 보초를 잘 서고 있나 확인하러 왔다.”

대위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한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유겐에게 던졌다. 말로트 지방에서 가져온 위스키였다. 대위가 그 비싼 술을 건네자 유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같은 놈을 위해 이런 것까지 챙겨다줬으니 한 잔씩 하고 제대로 보초 서.”

대위의 말에 그제야 유겐은 3인치는 튀어나왔던 입을 오므렸다.

“가, 감사합니다!”

유겐이 투구를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대위에게 경례를 했다. 대위는 코웃음을 치며 경례도 받지 않으며 허름한 나무 의자에 털썩 앉았다. 유겐과 에리크도 파이크를 난간에 세워둔 뒤 대위를 따라 나무 의자에 앉았다.

유겐은 마개를 따고 벌컥벌컥 위스키를 들이켰다. 그는 사양하지 않고 술병을 들이마실 듯이 술을 목구멍에 들이 부었다. 만족할 만큼 마신 뒤에 그는 에리크에게 술병을 넘겼다. 에리크는 여느 남자처럼 적당히 목만 축이고 대위에게도 술을 권했다. 하지만 대위는 굳이 사양하며 두 사람 대신 보초를 서주었다. 그러자 유겐은 에리크에게서 술병을 빼앗아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 술기운이 오르자 꽁꽁 얼어붙어있던 두 사람의 몸이 순식간에 따뜻하게 녹았다.

“적당히 좀 마셔.”

에리크가 유겐에게 핀잔을 주었다.

“술을 먹고 몸이 따뜻해지는 건 진짜 따뜻해진 게 아니라 몸이 착각하는 것뿐이니까.”

“헛소리 마라.”

술병에 정신이 팔려 있는 유겐 대신 보초를 서주고 있던 대위가 말했다.

“네까짓 놈이 뭘 안 다고.”

“제가 한 말이 아니라 의사가 한 말입니다.”

“쳇. 그 돌팔이 놈들. 그 놈들은 완전 사기꾼이야.”

대위가 단언했다.

“그 놈들 때문에 푸아티에 전투 때 멀쩡한 다리를 자를 뻔했지. 망할 놈들.”

“푸아티에 전투요? 그 전투에 참전했습니까?”

에리크가 물었다.

“푸아티에 전투를 아나?”

“물론입니다.”

에리크도 명색이 군인인데 푸아티에 전투를 모를 리 없었다. 아니, 굳이 군인이 아니더라도 웬만한 아키텐 지역 사람들은 모두들 푸아티에 전투를 알고 있었다.

20년 전, 선왕인 길드스턴은 5개 군단, 총 2만 8천에 이르는 대병력을 이끌고 레인가드의 숙적인 난쟁이족을 정벌하기 위해 출진했다. 레스터 공작이 군대의 출정을 미루며 시간을 끌었기 때문에 이 원정은 당초의 계획대로 양면 공격이 아닌 길드스턴의 단독 원정이 되었다. 그러자 난쟁이족은 레어티스 아르한이 이끄는 반란군과 연합을 맺고 2만 5천의 병력을 집중시켜 푸아티에 지역에서 길드스턴과 회전을 벌였다. 결과는 레인가드의 대참패였다.

“전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에리크가 말했다.

“레인가드 군대가 연합군보다 많았다고 들었는데요. 도대체 어쩌다 그렇게 대패하고 만 겁니까?”

에리크의 물음에 대위가 말했다.

“흥. 전쟁이란 게 숫자로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몸소 보여준 거지.”

대위가 빈정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해가 안 됩니다. 어떻게 그렇게 철저하게 질 수가 있죠?”

“네까짓 놈이 그런 건 알아서 뭐하게?”

대위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에리크가 어깨를 으쓱했다.

“술안주 삼아 이야깃거리를 찾는 것뿐입니다.”

에리크의 말에 대위는 내키지 않는 듯 팔짱을 끼웠다.

“뭐, 싫으시면 굳이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에리크가 별 관심 없다는 듯 말하자 대위가 코웃음을 쳤다.

“망할 자식.”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바닥에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그는 단검을 꺼내들어 바닥에 금을 그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푸아티에 전장이 그려졌다. 대위는 그 전장에 이런저런 기호를 그리며 당시의 전황을 설명해주었다.

“......그 전투에는 친위대와 1군단, 3군단, 4군단, 5군단이 참전했지. 국왕은 신병들로 구성된 4군단과 5군단을 정중앙에, 1군단과 3군단을 각각 좌익과 우익에 배치했지. 그리고 친위대가 4군단과 5군단의 바로 뒤에 배치하여 독전대의 역할을 하면서 최종방어를 담당했어.”

대위가 단검을 꺼내들어 바닥에 금을 그어가며 말했다.

“난 3군단의 4열에 배치되었는데 바로 지금의 국왕인 샤를이 지휘하는 군단이었지. 우리는 부대의 좌익을 맡고 있었어. 당시 나는 풋내기 사관에 불과했지만 전령이었기 때문에 아군의 포진이나 작전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었지. 길드스턴 국왕은 우익에 기사들을 배치하지 않고 600명에 달하는 기사들과 경기병들을 모조리 좌익에 배치했지. 왜냐하면 아군의 우익의 바로 옆에 큰 강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기병이 움직이기 불리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적들의 기병대 역시 접근하지 못할 거라고 판단했어.”

대위가 흥하고 콧김을 내뿜었다.

“멍청한 생각이었지.”

대위는 계속해서 바닥에 화살표와 점을 표시하며 양군의 포진을 설명했다.

“좌익에 기사들을 집중한 것만 빼면 정석적인 포진이야. 중앙의 신병들과 최정예 부대가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동안 좌익의 기사들이 적들의 하찮은 기병대를 짓밟고 적들의 후위와 측면을 공격하여 포위섬멸하는 작전이지.”

대위의 그림을 관찰하던 에리크가 말했다.

“친위대의 전열을 너무 얇아 보이는데요. 혼자서 두 개 군단의 뒤를 받쳐주려면 병사가 부족해보입니다만.”

에리크의 지적에 대위가 그를 바라보았다.

“네 녀석, 제법이로군. 졸병 주제에 그런 것까지 알아보고 말이지. 맞아. 친위대가 중앙의 후위를 모두 받치느라 전열이 절반으로 얇아졌지. 그게 길드스턴의 두 번째 실책이었어.”

대위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반면 난쟁이족은 아군과 정반대로 포진했어. 그들은 중앙에 중무장한 최정예 보병들을 배치했지. 양날개는 아군에 비해 얇게 포진해 있었어. 그리고 레어티스 아르한이 이끄는 기병대는 양 날개에 배치했지. 그 수는 각각 1천과 1천, 모두 2천이었지만 대부분 경기병이었기 때문에 아군의 적수가 될 순 없었어.”

대위가 말했다.

“이윽고 오전 11시쯤 전투가 시작되었지. 난쟁이족의 보병들이 전진하여 아군과 접전을 시작했어. 한편 레어티스 아르한의 기병대도 아군의 좌익에 배치된 기사들과 전투를 개시했지.”

대위가 갖가지 화살표들을 서로 맞대며 전투를 설명했다.

“처음에는 아군의 작전대로 되는 것 같았어. 레어티스 아르한과 난쟁이족은 1천 명의 경기병만으로도 아군의 좌익에 집결된 기사들을 막을 수 있으리라 오판했지. 아군의 기사들은 놈들의 경기병들을 풍비박산내버렸고 놈들의 우익은 모조리 전장에서 도주했어. 아군은 그 기세를 틈타 놈들의 측면으로 파고들었지.”

날카로운 화살표가 난쟁이족의 측면으로 들어갔다.

“문제는 중앙이었어. 난쟁이족은 엄청난 밀집대형으로 아군의 중앙을 강타했지. 신병들은 그 가공할 돌파력에 채 1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전열에 큼지막한 구멍을 내버렸어. 난쟁이들이 키가 작다고 해서 우습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방패에 잔뜩 웅크린 채 한 발짝씩 전진해가며 아군을 쓸어버리는 모습은 공포 그 자체니까. 어쨌든 이 가공할 보병대가 아군의 풋내기 신병들을 박살내버렸지만 사실 우리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어. 왜냐하면 아군의 최정예 친위대가 중앙에 버티고 있었으니까. 이 최정예 부대가 버텨주기만 한다면 아군의 기사들이 난쟁이족의 측면을 부수고 적들을 포위망에 가둘 수 있었어.”

대위는 여기까지 말하고 킥킥거리며 웃었다. 이 난데 없는 행동에 에리크는 깜짝 놀라 대위를 바라보았다.

“우리 모두 승리를 확신하는 그 순간, 난데없이 레어티스 아르한의 1천 명의 기병대가 아군의 배후에서 툭 튀어나왔어. 알고 보니 강물은 그다지 믿을 만한 방벽이 아니었던 거야. 그 멍청한 전령 놈들의 보고와 달리 아군의 우익에 자리 잡은 강은 그 상류에 도하할 만한 지점이 있었고 아르한의 기병은 맨몸으로 강을 건넜지. 그들은 재빨리 아군의 우익을 전속력으로 지나쳐 중앙에 위치한 친위대의 배후를 공격했어. 친위대의 전열을 너무 얇게 펼쳐놓은 것이 여기에서 화근이 되었지. 난쟁이족에게 정면을, 기병대에게 후위를 공격당한 친위대는 말 그대로 전열이 두 동강 나고 말았지. 아군의 전열 전체가 통째로 끊어져 버린 거야. 더 웃긴 건 뭔 줄 알아? 길드스턴 국왕이 적들의 기병대와 보병대 양쪽에 낀 아수라장 속에서 어이없게 죽고 만 거야.”

대위가 다시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 장면을 목격한 녀석의 말에 따르면 말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는데 적들의 말들이 그대로 그를 짓밟아버렸다더군. 왕치고는 꽤나 한심한 개죽음이지. 허무하게 국왕이 전사해버리자 난쟁이족의 측면을 공격하던 기사들이 사기를 잃고 패주했어. 그걸로 게임 끝이었지. 아군의 우익은 오른쪽의 강과, 정면의 난쟁이족과 중앙을 두 동강낸 기병대에게 4면이 포위되어 말 그대로 학살을 당했어. 내가 좌익에 배치되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내 모가지도 거기서 날아갔겠지. 전투에서 살아남은 건 오직 아군의 좌익에 배치된 3군단과 그나마 전투에서 가장 먼저 달아난 5군단뿐이었어. 2만 8천의 병사들 중에 2만이 녹아 없어졌고, 2천 명이 포로로 잡혔어. 그나마 남은 병사들도 모조리 패주해버리고 왕세자 샤를은 가까스로 나머지 4천의 패잔병을 수습하여 퇴각했지. 그 중에 나도 끼어 있었다는 게 행운이야. 난 어떤 얼간이가 오발로 내 다리에 총을 쏴버려서 총알이 박힌 것만 빼고는 멀쩡히 살아 돌아왔으니까.”

대위는 여기까지 말한 뒤 다시 미친 듯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왕세자는 그대로 도망간 겁니까?”

어느새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유겐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자기 아버지가 원수들한테 죽었는데 복수를 했어야죠.”

“샤를은 네 놈 새끼보다는 생각이란 게 있는 남자였거든.”

대위가 톡 쏘아붙였다.

“4천도 안 되는 패잔병으로 2만에 가까운 적을 공격한다고?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도망치는 게 상책이라는 걸 깨닫겠지.”

“아까는 전투가 숫자로 하는 게 아니라면서요.”

“그래. 바로 대가리로 하는 거지. 그리고 넌 그 대가리가 없고.”

대위가 딱 잘라 말했다.

“2만 명의 적에게서 무사히 도망친 것만 해도 기적이야. 적들이 우리의 퇴로를 끊으려 계속 시도했지만 거의 반나절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알리아까지 퇴각에 성공했으니까. 샤를은 적어도 2만 명의 군대를 전멸시킨 아버지보다는 나은 지휘관이었지.”

대위의 말에도 여전히 유겐이 반항하듯 말했다.

“더 나은 지휘관인지는 몰라도 겁쟁이인 것 같은데요. 제가 듣기론 전투 한 번 제대로 안 해보고 계속 도망만 쳤다고......”

“안전한 곳에 앉아 있는 놈들은 언제나 전쟁에 대해 잘도 떠들어대지. 용기가 어떻고 복수가 어떻고 하면서 말이야. 하지만 실제 전쟁터를 보면 그런 말이 싹 사라질걸.”

대위가 단언했다. 그리고 그는 유겐에게서 위스키를 빼앗았다. 유겐이 놀랄 새도 없이 그는 그 마개를 따고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마치 무언가를 잊으려 하는 것만 같았다.

“그 때의 싸움이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20년이나 되었군. 그땐 어떻게든 공을 세우려 안달이 난 풋내기였는데 말이지.”

대위는 자조하듯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는 유겐과 에리크에게 말했다.

“네 놈들도 조심해. 어떻게든 전쟁터는 피하고 안전한 곳으로 도망 다녀라. 괜히 전투에 휘말렸다간 개처럼 죽어나가기 십상이니까. 푸아티에 전투에서도 용감하게 싸우며 자리를 지켰던 놈들은 모조리 까마귀밥이 되었지.”

대위가 으스스하게 말했다. 유겐과 에리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위는 술병에 남아 있는 술을 자신의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유겐은 그 모습을 보며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이야기를 마친 대위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탁탁 털었다. 그리고 그는 옆에 내려놓은 칼을 집어 들려 했다.

그러나 대위는 그러지 못했다. 갑자기 에리크가 대위의 손을 꽉 붙잡았기 때문이다.

“무슨......”

대위가 이 불쾌한 행동에 대해 따지려 하자 에리크가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셋 중에서 가장 술을 적게 마신 그였기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유겐과 대위는 에리크의 이 행동에 깜짝 놀라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들은 요새 바깥을 향해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푸드드득.


어둠에 잠긴 강가 쪽에서 갑자기 말울음소리가 들렸다. 들릴 듯 말 듯한 소리였지만 그들은 그 소리를 똑똑히 감별해 낼 수 있었다. 절대 들짐승의 소리는 아니었다.

대위는 화톳불에서 횃불을 꺼냈다. 에리크는 활시위에 화살을 메기고 대위를 바라보았다. 대위는 그에게 눈짓을 한 뒤 어둠에 묻힌 강변을 향해 횃불을 집어던졌다. 횃불은 우아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다 지면으로 고꾸라졌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횃불은 잠깐 동안 타오르다 곧 불어 닥친 칼바람에 꺼졌다.

대위는 다시 횃불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는 아까 횃불을 던진 곳보다 약 20m 정도 떨어진 곳을 향해 횃불을 힘껏 던졌다. 횃불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에리크는 그 횃불을 따라 활을 겨누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얼어붙은 아르 강을 건너 이쪽으로 은밀하게 진군하고 있는 수십 명의 무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아, 아니!”

유겐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순간 에리크의 활에서 화살이 ‘휙’하며 시위를 떠났다. 그 화살은 횃불이 있는 곳으로 정확히 날아가 한 남자의 목에 꽂혔다. 두터운 웃옷에 도끼를 쥐고 있던 그 남자는 비명 한 번 질러보지 못하고 아래로 고꾸라졌다.

그 모습에 유겐은 부랴부랴 품 속에서 나팔을 꺼냈다. 그리고 그는 나팔을 불어댔다.


뿌우우우. 뿌우우우. 뿌우우우.


유겐은 있는 나팔로 있는 힘껏 야습을 알리고 파수대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그는 병사들과 인부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기습! 적 기습이다!”

유겐이 목청껏 소리치며 병사들에게 알렸다. 방금 전까지 진탕 취해 있던 병사들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의 무기를 꼬나 쥐고 자기의 자리로 달려갔다.

요새를 노리던 적들은 요새가 소란스러워지자 기습이 실패했다는 것을 눈치 챘다. 그들은 함성을 지르며 요새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제 보니 적들은 수십 명이 아니었다. 적어도 수백, 수천은 되어 보이는 대군이었다. 수많은 적들이 요새를 에워싸고 있었다. 에리크는 다시 활을 쏴 얼음 위를 건너오는 한 궁수의 팔을 맞추었다.

“무슨 일입니까?”

얼굴이 파랗게 질린 알베로가 허겁지겁 파수대로 달려와 대위에게 물었다. 그 뒤를 따라온 에버딘은 알베로의 소매를 꽉 붙잡고 있었다.

“기습이라니? 도대체 뭡니까?”

대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요새 가까이로 다가온 적들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깃발이 화톳불에 의해 드러났다. 대위의 눈에 익숙한 군기가 눈에 들어왔다. 지난 20년간 악몽 속에서밖에 보지 못했던 군기였다.

“으음......”

대위가 신음했다.

“왜가리 군기......”

“왜가리 군기?”

알베로가 되물었다. 그러자 대위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레어티스 아르한의 깃발입니다.”

“......!”

알베로와 에버딘은 경악했다.

레어티스 아르한은 레인가드에서 가장 큰 규모의 반란군 집단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키텐과 수백 km 떨어진 곳에 있어야 했다. 한창 로딤체프 공작과 싸우고 있어야 할 그들이 왜 아키텐에 있단 말인가?

“레어티스 아르한이면 레인가드의 남부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도대체 왜 여기 있는 겁니까?”

“저야 모릅니다만 어쨌든 지금은 여기에 있군요.”

대위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피스톨을 꺼내 장전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병사들이 각자 무장을 갖추고 요새의 방벽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수십 배에 달하는 적들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당장 알리아로 전령을 보내십시오.”

몰려오는 적들을 보며 대위가 알베로에게 말했다.

“한시라도 빨리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나 당신 모두 모가지가 떨어져나가는 건 물론이고, 댁의 그 잘난 여동생도 저 놈들 100명에게 윤간을 당할 테니.”

대위의 말에 에버딘은 실신할 것처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알베로는 황급히 전령을 부르려 가다가 갑자기 우뚝 그 자리에 섰다. 한 가지 생각이 그의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째서 레어티스 아르한이 본거지인 남부에서 벗어나 이런 중부의 시골 마을을 습격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만약 그 이유가 사실이라면 프레이르의 구원군이 제 시간에 이곳에 도착할 가능성은 한없이 낮아진다는 점이었다.

알베로가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자 대위가 성을 냈다.

“뭐 하는 겁니까! 더 늦었다간 전령이 저 포위를 뚫을 수조차 없을 겁니다. 어서 보내십시오!”

대위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든 알베로는 에버딘과 함께 황급히 전령을 찾아 나섰다. 그 와중에도 반란군은 요새로 접근해오고 있었다. 얼어붙은 강변 위로는 끝없이 적들이 충원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이 수수깡 같은 요새를 모두 에워쌀 것 같은 숫자였다. 그에 반해 요새를 지키는 병사들은 고작 30명, 인부와 농부를 모두 방어에 돌린다 해도 100명이 조금 넘는 숫자였다. 일찍이 푸아티에 전투를 경험했던 대위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왕자의 군대가 제때 오지 않으면 저놈들이 우리의 뼈까지 씹어 먹겠지. 제발 늦지 않도록 기도나 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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