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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칼날 님의 서재입니다.

그림과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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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검은칼날
작품등록일 :
2021.12.18 21:47
최근연재일 :
2022.07.05 16:00
연재수 :
11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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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24
추천수 :
565
글자수 :
581,056

작성
22.06.25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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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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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3쪽

손돌

DUMMY

손돌과 명희는 무덤을 뒤로하고 산을 내려가려고 했다.

“삼촌, 얼굴이랑 목소리는 어떻게 된 거예요?” 명희가 물었다.

“아가씨, 이건 말이죠. 그러니까···” 손돌은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 했다.

명희가 또 땅바닥에 꿇어앉아버렸다.

“아가씨 고집은 여전하네요. 하루아침에 갑자기 어떻게 바꾸겠어? 이해 좀 해줘.” 손돌이 말을 놓았다.

“그럼 삼촌, 호칭은 마음대로 하고, 말은 서로 놓기로 하자.” 명희가 일어서며 제안했다.

“그래 아가씨, 그럼 그렇게 하지.”


손돌과 명희는 산 아래로 내려와 말을 타고 개성으로 향했다. 손돌은 되돌아가는 길에 명희에게 그 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주인의 머리를 상자에 담아 묻었다. 은도 당장 쓸 만큼만 꺼내고 다시 묻어놓았다. 그러고는 무덤에 절을 올리고 서울로 되돌아갔다. 가는 길에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다. 중들이야 많이 봐왔지만 자신이 중노릇을 하려니 쉽지는 않았다.

나는 어색한 중노릇을 하며 처의 소식을 수소문했다. 처도 역적의 노비로 체포되어 함경도 갑산의 공노비로 끌려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도성을 나오면서 처를 피신시키지 않은 것을 땅을 치며 후회했다.

나는 갑산으로 처를 찾아갔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 처는 이미 죽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겁탈하려는 아전에게 반항하다 얻어맞아 넘어졌다. 그런데 처는 문지방에 머리를 부딪쳐 즉사했고, 이미 화장을 당해 재로 뿌려졌다고 했다.

나는 승복을 찢으며 울부짖었다. 그날 밤, 야음을 틈타 비수로 그 아전을 찔러죽이고 산속으로 도망쳤다.

나는 그렇게 갑산의 산길을 헤매다 산사람을 만났다. 그는 바로 주인 변양호의 친구이자 승호의 아버지인 장희수였다. 나는 그를 만나 친구 변양호가 사행에서 돌아올 때 의주에서 승호를 맡겼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나중에 그에게 들은 얘기에 의하면, 그는 젖먹이 승호를 친구에게 맡기고 나서 죽은 처를 업고 여기저길 떠돌았다. 주인 없는 땅을 찾아 이 산속까지 올라와서 처의 시신을 묻었다. 그러고는 자살하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 하자 처의 무덤을 돌보며 산속에서 살았다.

그는 나를 알아봤다. 그런데 그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동물이 울부짖는 것 같았다. 나는 마음이 아팠다. 사람조차 만나지 않고 살아온 게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숙종이 임금이던 시절, 역관 생도 중에 장희수의 한어 실력은 조선 최고였다. 내가 변양호의 생도 시절 몸종으로 따라다니면서 들었던 얘기였다. 그런 사람이 말조차 제대로 못 했다. 그 때 승호가 열여섯 살이니 십육 년을 그렇게 살아온 것 같았다.

나는 장희수와 함께 두 달을 움막에서 살았다. 그는 나와 함께 지내면서 말문이 트였다. 하지만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에게 변양호의 이야기도 했고 승호의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아들처럼 키워온 승호의 생사조차 알 수가 없어서 가슴이 먹먹했다. 그런데 그는 나의 얘기만 들을 뿐 아무 것도 되묻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희로애락을 초월한 사람 같았다. 그는 젖먹이 아들을 친구에게 맡기고 죽은 처를 묻은 후 자살하려고 했었다. 죽는 것도 쉽지 않아 세상을 등지고 아무 감정 없이 살아온 것이다.

장희수는 노련한 사냥꾼이자 약초 캐는 산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두 달 동안 고기와 야생초만을 먹고 살았다. 처음에는 맛있게 먹었던 사슴육포도 질려버렸다. 그는 짐승 가죽이나 약초를 팔러 마을에 내려가지 않았다. 그야말로 세상과 연을 끊고 살았다. 나는 그를 따라 사냥을 다니면서 나 자신이 산속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관원을 죽이고 도망친 살인자가 세상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그렇게 두 달이 다 되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그와 함께 노루를 쫓다가 움막에서 칠팔십 리나 떨어진 곳에서 노숙을 했다. 다음날, 나는 돌아가자고 했지만 그는 노루를 뒤쫓았다. 나는 혼자 되돌아 갈 수도 없어서 그를 따라 가야했다.

장희수는 어디선가 불이 난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아름드리나무들 때문에 앞도 보이지 않는 숲에서 뭔 소리를 하냐고 물었다. 그는 냄새를 맡아보라고 했다. 나는 냄새를 맡아보았지만 느낄 수가 없었다. 그는 능선으로 올라갔다. 나도 숨을 헉헉대며 능선으로 따라 올라갔다.

저 멀리 이미 잿더미가 된 집에서 아직도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 앞의 언덕에는 화전이 일구어져 있었다. 화전민의 집이 타버린 것이다. 그는 사람의 움직임이 있다고 하며 가보자고 했다. 나는 너무 멀어 볼 수가 없었지만 그의 동물 같은 감각을 믿었다. 그는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앞서가다 뒤를 돌아보며 나를 기다렸다. 나는 먼저 가라며 손짓을 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뒤를 따랐다.


그곳에는 아이를 업은 여인이 잿더미가 된 집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계집아이는 포대기 속에서 버둥거리며 울고 있었다. 장희수는 먼저 달려왔지만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모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헉헉, 나리, 헉, 육포나 좀 꺼내주쇼.” 내가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여기 있네.” 장희수가 육포를 꺼내 건넸다.

나는 그것을 받아 씹으며, 포대기 속의 아이를 꺼내 안았다. 여인은 뒤를 한 번 돌아보고는 다시 잿더미를 응시했다. 돌이 지난 듯 보이는 계집아이는 앞니가 두 개밖에 나지 않았다. 나는 아이를 달래며 씹던 육포를 꺼내 아이의 입에 넣어주었다. 버둥거리던 아이는 육포를 받아 씹으며 울음을 그쳤다. 나는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며 웃었다. 아이도 나를 보며 웃었다. 나는 여인을 바라보았으나 그녀가 슬픔 같은 건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반쯤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또 주랴?” 나는 아이에게 남은 육포를 먹였다. 그러면서 허리에 찬 가죽물통을 들고 물을 마셨다.

“물, 물.” 아이는 때가 꼬질꼬질한 소매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나리, 물통도 좀 주쇼.” 나는 이미 다 마신 내 물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장희수는 자신의 물통을 건넸다.

“나리, 승호가 젖먹이 때, 제가 의주에서 서울까지 젖동냥하며 데려갔다니까요. 아니, 승호 도련님이죠.” 나는 아이에게 물을 먹이며 지난이야기가 떠올라 말을 꺼냈다.

“고맙네.” 장희수는 짧게 대꾸하며 고개를 끄떡였다.

“여보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내가 여인에게 물었다.

여인이 말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잿더미가 된 집을 바라보았다.

“애 아빠는 어디 갔소?”

“안 나왔어요.” 여인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럼 이미 타죽었겠구먼.” 나는 전소되어 무너질 것 같은 집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장희수가 집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리, 얘 좀 맡아주쇼.” 나는 아이를 맡기고 잿더미를 향해 걸어갔다.

나는 그 때 결심했다. 세상에 나가기로. 나는 맨손으로 아직도 연기가 나는 재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세수를 하듯 얼굴에다 문질렀다. 중노릇하느라고 빡빡 깎았다가 덥수룩해진 머리에도 문질렀다. 살과 털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비명을 지르면서도 작은 숯덩이를 삼켰다. 목구멍이 타들어가면서 비명조차 탁하게 갈라졌다. 그러다가 결국은 기절했다.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은 나중에 여인에게 들었다. 장희수는 하도 갑작스러운 일이라 말리지도 못하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내가 쓰러지자 그제야 나에게 달려갔다. 아이는 놀라서 울기 시작했고, 아이 엄마는 쓰러진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장희수는 물로 내 상처를 씻어냈다. 그러고는 산속을 뒤져 꿀을 따다가 상처에 발라주었다. 꿀을 물에 타서 내 목에 넘겨주었다. 나는 잠시 깨어났다가 다시 정신을 잃었다. 그는 남은 꿀을 모녀에게 먹으라고 주었다. 아이 엄마는 딸에게 꿀을 먹이면서 한참 동안 놓았던 넋을 되찾았다.

밤이 되어서야 나는 정신을 찾았다. 아이는 장희수가 피워놓은 모닥불 옆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나는 여인에게 집은 왜 그렇게 된 거냐고 물었다. 그러다 나는 내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평생 한 번도 들어보지 못 한 쇳소리가 섞인 탁한 목소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말을 꺼내자 또 다시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나는 또 다시 정신을 잃었다.

다음날 아침, 잿더미에서 더 이상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았다. 나는 몸을 일으켰고 여인에게 지난 이야기를 들었다.

남편은 술만 마시면 자신과 아이를 때렸다. 그날 밤도 만취한 남편은 폭력을 휘둘렀다. 여인은 남편을 피해 아이를 업고 집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산속으로 가서 아이를 재우고 돌아갔다. 집은 이미 불타오르고 있었다. 만취한 남편은 불난 것도 모르고 자고 있었던 것 같았다. 불은 그렇게 집과 남편을 집어삼켰다.

“나랑 같이 이 지긋지긋한 산에서 내려가오. 여기서 더 이상 어떻게 살겠소? 아이도 키워야하지 않소. 내가 돌봐주겠소.” 나는 여인에게 말을 꺼냈다.

여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나리, 전 산에서 못 살겠소. 내려갈 거요. 저를 아무도 못 알아보겠죠? 조만간 다시 찾아뵙겠소.”

장희수도 말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산에서 내려온 나는 아이의 아빠 노릇을 했다. 마을 사람들은 화상으로 일그러진 나의 얼굴을 보며 혀를 차며 동정을 보냈다. 나는 여인의 남편이 되었고,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그 후 나는 남쪽으로 내려와서 주인의 무덤을 찾았다. 그러고는 그가 내게 준 은을 파냈다. 그것을 가지고 개성으로 가서 장사를 시작했다.

나는 개성에서 한현을 찾았다. 그는 폐인이 되어 있었다. 안 그래도 폐인이었는데 준이 떠난 후로는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신분을 밝힐 수가 없어서 그림을 부탁하고 사례를 두둑이 했다. 그림은 엉망이었다. 사례는 하룻밤에 도박으로 다 날렸다. 그러고는 개평으로 받은 돈으로 술을 마셨다. 그렇게 살다가 재작년 전에 죽었고, 나는 성대하게 장례를 치러주었다. 그리고 그가 살던 집을 헐고 거기에 지금의 저택을 지었다. 남매가 돌아오면 반드시 여기로 찾으러 올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청나라 물건은 들여오기만 하면 열 배 이상의 값을 받고 팔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없어서 팔 수 없었다. 나는 밀무역을 시작했다. 갑산의 산속으로 올라가서 장희수를 찾았다. 그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그는 단번에 거절했다. 나는 얼마 전 청나라에서 표류한 어부를 만났는데, 승호가 항주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언젠가는 승호가 조선에 들어올 텐데 그 때는 육로로 올 것이라고 했다. 장희수는 산을 내려왔다.

나는 그에게 밀무역의 통역을 맡겼다. 장희수는 칼 같았다. 통역뿐만이 아니라 회계까지 그랬다. 나는 장희수가 생도 시절 주위에서 왜 그가 최고의 역관이 될 거라고 했는지 절감했다. 역관들은 사행을 따라나서면 통역뿐만 아니라 경비지출까지 챙겨야 했다. 변양호가 그걸 얼마나 깔끔히 처리했는지는 자신도 사행을 따라가며 옆에서 확인했다. 그렇다고 장희수에게 장사를 맡길 수는 없었다. 국경지대 관리들에게 뇌물도 찔러줘야 하는데 그런 걸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송도에서 몰락한 상인의 자식을 찾아 교육을 시키고 나중에 사업을 총괄하게 했다. 그는 믿을 만 했고 수완이 좋아서 사업은 궤도에 오르고 번성했다.

밀무역은 장사가 안 될 리가 없었다. 이금이 왕이 된 후, 잇따른 무역금지 조치를 취해왔다. 그 강도는 갈수록 높아졌고 사상(私商)의 모든 무역을 금지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효시한다는 엄명을 내렸다. 결국 정부가 역관들의 공식적인 무역만을 인정했다. 관세 수입이 줄어든 청나라 관리들이 불만을 전달했지만 조선정부는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제대로 기회를 잡았다. 효시 따위는 겁나지 않았다. 나는 이미 효시된 역적의 모가지를 빼돌렸고, 관원도 죽여 버렸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이미 두 번 죽은 목숨이었으니 죽는 건 두렵지 않았다. 생사를 초월하면 행동은 과감해진다.

나는 중개인을 내세워 밀무역으로 마련한 청나라 물건들을 서울의 고위관료들에게 팔았다. 역설적으로 후시무역의 금지를 결정한 그들이 밀수품의 최대 고객이었다. 그들은 국법을 어겨서 효시당해야 할 범죄자를 고발하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무역금지를 소리 높여 주장하던 그들은 밀수품을 사기 위해 소리를 낮춰 흥정했다. 나는 그들을 비웃으며 터무니없는 폭리를 취했다. 그들은 범죄자에게 물건을 사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물건이 없어서 못 살까봐 걱정했다. 그래서 나는 서울 양반들의 돈을 아낌없이 긁어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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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대리 대국 22.06.30 149 3 11쪽
106 무덤에서 22.06.29 148 2 12쪽
105 또 다른 명희 22.06.28 147 2 10쪽
» 손돌 22.06.25 144 2 13쪽
103 의인(義人) 22.06.24 151 3 11쪽
102 상봉 22.06.23 150 3 13쪽
101 애합문(愛哈門)객잔 22.06.22 151 2 11쪽
100 인삼주 22.06.21 150 2 12쪽
99 국경 22.06.18 145 2 12쪽
98 엄마 22.06.17 145 2 11쪽
97 가출 22.06.16 146 2 12쪽
96 22.06.15 160 2 12쪽
95 거래 종료 22.06.14 152 3 11쪽
94 사부 22.06.11 148 3 11쪽
93 핑계 22.06.10 162 3 11쪽
92 가보(家寶) 22.06.09 174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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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가슴 시린 백발 22.06.07 165 2 11쪽
89 두 번째 검 22.06.04 164 3 12쪽
88 불타지 않은 그림 22.06.03 155 3 11쪽
87 보랏빛 검기(劍氣) 22.06.02 160 3 12쪽
86 사라진 검기(劍氣) 22.06.01 165 3 11쪽
85 위조 미수 22.05.31 157 2 12쪽
84 백발처녀 22.05.28 156 2 12쪽
83 할머니 22.05.27 164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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