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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칼날 님의 서재입니다.

그림과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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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검은칼날
작품등록일 :
2021.12.18 21:47
최근연재일 :
2022.07.05 16:00
연재수 :
11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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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565
글자수 :
581,056

작성
22.05.27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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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할머니

DUMMY

명희는 사나흘마다 평산의 말 농장에 가서 말을 교체해 왔다.

준은 사나흘마다 모양과 색이 다른 말들을 관찰하며 그렸다. 한 달 남짓 열 마리 정도의 말을 관찰하고 그리면서 묘사력은 일취월장했다.


명희는 사동각 이층 작업실에서 준이 그리는 말을 보고 있었다. 저녁노을 때문에 방안은 피처럼 붉은 색조로 물들어 있었다. 책상 위의 화구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종이 한 장만이 연적에 눌려 있었다. 준이 그린 백마는 창을 뚫고 들어오는 노을 때문에 땀을 흘린 한혈마(汗血馬)처럼 붉게 보였다.

“사진보다 훨씬 좋은데.” 명희가 감탄했다.

“그래, 부자들이나 관리들 사진 그리는 건 나도 지겨워. 백성들 피나 빨아먹고 살아온 놈들이 사진 그린다고 인자하게 웃는 건 부자연스럽고 지긋지긋하다고.”

“그랬어? 신랄하긴 한데 맞는 말이야. 어쨌든 이젠 사진 주문은 거의 안 들어오잖아?”

“말 사진을 그리는 건 재미있는데, 말들한테는 팔 수가 없잖아?”

“아니, 말 그림도 잘 팔릴 것 같아. 걔네들 힘찬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니까.”

“그래, 얘들 근육 관찰하다보니까 왜 빨리 달릴 수 있는지 알 것 같아.”

“말들 근육도 멋있긴 하지, 내 근육보다 못 하지만 말이야.”

“야, 또 잘난 척이야! 이젠 말하고도 경쟁을 하니?”

“그건 그렇고, 우리 승호랑 보보 데리고 말 농장에 같이 갈까? 넌 거기서 초원에 뛰노는 말들을 그리고, 승호랑 나는 넓은 데서 말도 좀 달려보고, 여긴 말을 데리고 와도 마음껏 달릴 만한 데가 없다니까. 그리고 보보도 조랑말을 타봐야지.”

“넌 왜 보보한테 말을 못 태워서 안달이야?”

“야, 여자라면 말도 탈 줄 알아야지. 고모가 가르쳐주려고 하는데, 넌 뭘 계속 뭐하고 해?”

“위험할 것 같아서 그래. 어쨌든 같이 가보자. 재미있을 것 같아.”


다음 날, 명희는 승호와 준과 보보를 데리고 평산의 말 농장을 다녀왔다.

“누나, 오셨어요? 다들 재미있게 놀다오셨어요?” 산이 평산에서 돌아온 명희 일행을 보고 인사했다.

“그래, 별일 없었어?” 명희가 잠이 든 보보를 다시 위로 안아 올리며 물었다.

“아뇨, 어떤 할머니가 오셔서 족자를 팔고 가셨어요.”

“그래?” 명희가 산에게 대꾸하고 준에게 보보를 안겨주며 말했다. “준아, 보보 데리고 들어가서 재워.”

“그래, 나도 피곤하다. 들어가서 쉴게.” 준이 보보를 안고 뒷문으로 향했다.

“아가씨, 저도 들어갈게요.” 승호도 준을 뒤따랐다.

“누나, 족자 여기 있어요. 한 번 보세요.”

“그래, 한 번 보자.” 명희가 대꾸하고 족자를 펼쳤다.

폭포와 기암절벽을 배경으로 험상궂은 인상과 기괴한 모습을 한 이철괴(李鐵拐)가 앞을 응시하며 바위에 앉아 있다. 온몸에는 거지 차림의 누더기를 걸치고, 오른손에는 쇠지팡이(철괴)를 짚고 오른다리를 지팡이에 걸치고 있으며, 왼손에는 호리병을 들고 있었다.

이철괴는 도교 팔선(八仙) 중의 하나이다. 그는 스승 노자를 따라 선계(仙界)에 가면서 육신은 지상에 남겨놓았는데, 지상에서는 그가 죽은 줄 알고 육신을 화장했다고 한다. 그가 지상으로 되돌아왔으나 돌아갈 육신이 없어서 결국 거지의 몸을 빌려 살아났다는 전설이 있다. 그는 약이 든 호리병을 가지고 다니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또한 항상 쇠지팡이를 짚고 다녔는데, 그것을 공중으로 던져 용으로 변하게 한 후 그 용을 타고 다녔다는 전설도 있다.

“산아, 이거 누굴 그린 거야?” 명희가 그림을 살펴보고 나서 물었다.

“이철괴 아니에요. 지팡이를 짚고 호리병을 들고 있잖아요? 이철괴 전설은 들어봤죠.”

“제대로 알고 있구먼. 너 이런 신선도(神仙圖) 본 적 있어?”

“아뇨, 사동각이나 누나한테는 이런 그림 없잖아요?”

“그렇긴 하지. 다른 데서도 본 적이 없다는 거지?”

“예.” 산이 짧게 대답하고 말을 이었다. “근데, 그림 속 이철괴의 눈빛이 너무 날카로워 소름끼친다니까요.”

“그게 이 그림의 매력이잖아? 괴기스러운 배경에다 기괴하게 지팡이에 다리를 걸친 자세, 그리고 네 말처럼 그림을 보는 사람을 응시하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

“이 그림을 걸어놓으면 귀신도 무서워서 못 올 거예요.”

“야, 귀신을 쫓으려면 종규(鐘馗) 그림을 걸어놓아야지.” 명희가 대꾸한 후 물었다. “아까 할머니라고 했지? 그림 값은 얼마나 쳐드렸어?”

“할머니라고 하기는 좀 그런데··· 그러니까 얼굴은 할머니 같지가 않은데, 머리는 백발이었어요. 게다가 허리도 꼿꼿했다니까요.” 산이 첫 질문에 대답하고 다음 대답을 이었다. “그림 값은 열 냥만 달라고 하셔서 그렇게 드렸어요.”

“야, 겨우 그것밖에 안 쳐드렸어!” 명희가 소리쳤다.

“할머니가 열 냥만 달라고 하셨다고요.” 산이 항변했다.

“무조건 싸게만 산다고 좋은 게 아니야. 제 값을 쳐줘야 우리를 신뢰할 거 아니야? 그리고 다음에 그림을 사고팔 일이 있으면 다시 우릴 찾아올 거고.”

“그건 알겠는데, 제가 그림을 처음 사본 거잖아요?”

“그건 나도 알겠어. 근데, 이 그림 뭐에다 그린 거야?”

“깁바탕에 그린 거죠.”

“맞아, 지본(紙本)이 아니라 견본(絹本)인물화야. 물론 이건 내 도록에 없지만, 견본수묵화는 있잖아? 이만한 크기의 견본수묵화는 얼마에 거래했어?”

“누나 도록에는 최소 이백 냥 이상은 주고 샀다고 적혀 있어요.”

“그래 맞아. 도록에 적혀 있는 건 잘 기억하고 있네. 그렇다면 이 그림도 견본이니까 최소한 그 정도는 지불해야 하는 거 아니야? 여기에 그 정도 현금은 충분히 있잖아?”

“듣고 보니 그러네요.” 산이 수긍했다.

“아니다, 다 실전을 안 가르쳐준 내 잘못이야. 미안해. 이제부턴 제대로 가르쳐줄게. 그리고 앞으로는 네가 거래한 건 네가 책임질 수 있어야 해.”

“알았어요.”

“야, 뭘 그렇게 풀이 죽었어? 그럴 수도 있지. 그런 그렇고, 그 할머니 어디 사는지 물어봤어?”

“예? 그건 왜요?”

“찾아가서 돈을 더 드려야 할 것 아니야.”

“정말 그럴 거예요?” 산이 묻고 나서 말을 이었다. “아, 맞다. 할머니께 어디서 오셨냐고 물으니 관음산(觀音山)에서 왔다고 하셨어요. 더 자세한 것 몰라요.”

“관음산이라면 촉강인데··· 으음, 내일 한 번 가봐야겠다.” 명희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누나, 근데 이 그림을 누나라면 얼마에 샀을 거예요?”

“낙관이나 제발이 없으니까 단정할 수는 없지만, 깁바탕의 낡은 정도를 보면 원대(元代) 그림 같아. 그러면 넌 얼마나 지불하겠니?”

“원대라고요?” 산이 깜짝 놀라 반문하고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원대 그림이라면 최소한 천 냥 이상은 줘야겠네요.”

“그래, 원대가 맞으면 그렇지. 근데 넌 이걸 열 냥만 주고 샀다는 거잖아?”

“그 할머니한테 엄청 미안하네요.”

“근데, 그 할머니는 왜 이런 그림을 가져와서 헐값에 팔고 간 거야?”

“그러게요. 근데 그 할머니 어떻게 찾을 거예요?”

“어떻게 되든지, 내일 관음산에 한 번 가볼 거야.”


다음 날, 명희는 아침부터 촉강 동쪽의 관음산으로 향했다.

관음산은 산이라고 하지만 높이가 삼십삼 길 정도의 낮은 언덕에 불과했다. 그 위에는 관음사가 세워져 있었다.

명희는 관음가(觀音街)의 과가정(過街亭)에 앉아 지나가는 행인들을 살펴보았다. 분향을 하기 위해 관음사에 오르려는 사람들이 과가정을 지나가기도 가기도 하고 쉬어가기도 했다. 명희는 산에 오르기 전에 정자 뒤에 운집한 술집들도 한 번 둘러보았다. 애초에 아무런 단서도 없이 사람을 찾아 나선 게 무모한 일이었다.

명희는 과가정 뒤의 술집들을 둘러보고 나서 관음사에 올랐다. 산문(山門)까지 구불구불 돌길이 있었는데, 명희는 그 길을 따라 오르며 양주의 풍경을 조망했다. 그러면서 홍교의 사동각의 위치도 가늠해보았다.

명희는 산문에 들어서서 대웅전(大雄殿), 지장전(地藏殿), 십왕전(十王殿) 등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절의 뒤쪽으로 난 산문으로 절을 나와 흙길을 따라 산을 내려왔다. 그렇게 산을 내려와 흙길 끝의 송풍수월교(送風水月橋)에 이르렀다.

그 때, 명희는 다리 건너편에서 느릿느릿 걷고 있는 백발의 할머니를 발견했다.

“할머니 잠깐만요. 기다려보세요.” 명희가 그녀를 따라가며 외쳤다.

할머니는 아무 말도 못 들은 것처럼 가던 길을 걸었다.

“할머니 잠깐만 기다리셔!” 명희는 그녀가 못 들은 줄 알고 큰소리로 외쳤다.

할머니는 여전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느릿느릿 걸었다.

“저 할머니 귀가 멀었나?” 명희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할머니를 쫓아갔다.

할머니는 느릿느릿 걸었지만 명희는 할머니를 따라잡지 못 했다. 명희는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하지만 그녀와의 거리는 좁힐 수가 없었다.

“저 할머니 설마 경공(輕功)을 쓰는 거야?” 명희가 혼자 중얼거리다 자신도 경공으로 속도를 높였다.

그래도 명희는 할머니를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할머니를 따라 시골길을 이십 리 이상 쫓았다. 앞에 숲이 나오자 할머니는 뒤를 한 번 돌아보고는 숲으로 느릿느릿 걸어 들어갔다.

“할머니 제발 기다리셔!” 명희가 숲으로 들어가는 할머니의 등에 대고 외쳤다.

할머니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명희가 숲으로 들어가 할머니를 쫓았다. 할머니는 숲 가운데 있는 연못 앞에 서서 명희를 기다렸다.

“할머니, 뭔 걸음이 그렇게 빠르셔?” 명희가 걸음을 멈추고 투덜댔다.

할머니는 명희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휴우, 할머니 뭣 좀 여쭤볼게요.” 명희는 숨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야, 운기를 하려면 날숨을 더 짧게 뱉어야지.” 할머니가 한 마디 했다.

“예? 뭐라고 하셨어요?” 명희가 깜짝 놀라 물었다.

“들숨은 하나 둘 셋, 날숨은 하나! 근데 넌 들숨은 셋에다 날숨은 둘을 뱉잖아?”

“예? 그걸 어떻게 아세요?”

“이자승주, 범범기경(二子乘舟, 汎汎其景). 원언사자, 중심양양(願言思子, 中心養養).” 할머니는 명희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시경(詩經)》 패풍(邶風)의 〈이자승주(二子乘舟)〉라는 시를 외웠다.

“이자승주, 범범기서(二子乘舟 汎汎其逝). 원언사자, 불하유해(願言思子, 不瑕有害).” 명희는 자신도 모르게 할머니가 외운 시의 뒷부분을 외웠다.

“그래, 외우고 있구먼.”


시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두 아들이 배를 타고, 두둥실 떠가는 광경.

기원하며 자식들 생각하니, 속마음은 출렁출렁.

두 아들이 배를 타고, 두둥실 멀리 가네.

기원하며 자식들 생각하니, 허물되어 해나 입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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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보랏빛 검기(劍氣) 22.06.02 153 3 12쪽
86 사라진 검기(劍氣) 22.06.01 157 3 11쪽
85 위조 미수 22.05.31 150 2 12쪽
84 백발처녀 22.05.28 146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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