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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칼날 님의 서재입니다.

그림과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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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검은칼날
작품등록일 :
2021.12.18 21:47
최근연재일 :
2022.07.05 16:00
연재수 :
11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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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29
추천수 :
565
글자수 :
581,056

작성
22.06.01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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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사라진 검기(劍氣)

DUMMY

팔월 초하루, 아침과 저녁으로 바람이 선선해지기 시작했다.

검(劍)이 초가을바람을 갈랐다. 칼바람 사이로 비도(飛刀)가 날았다. 나뭇잎을 꿰뚫고 묵직하게 나무에 박혔다. 칼바람은 멈추지 않았고, 비도가 간헐적으로 나무에 박혔다. 열여섯 발의 비도가 날고 나서야 칼바람이 멈추었다.

“왼손으로 검 쓰는 건, 힘은 있는데 세밀함이 부족해.” 예상이 담담하게 말했다.

“언니, 비도 날리는 건 괜찮지?” 명희가 물었다.

“비도 날리는 건, 네가 원래 양손으로 다 연습했었잖아? 그러니 오른손으로 검을 쓰면서 왼손으로 비도 던지는 건 자연스러운데, 그 반대일 경우 검 쓰는 걸 더 연습해야 한다고.”

“왼손으로 더 연습하면 나중에 쌍검을 쓸 수도 있겠지?”

“그럴 수도 있지.”

“등 뒤에 검 하나 더 꽂고 있다가 비도 다 쓰고 나면 쌍검을 써야겠어.”

“그러든지. 넌 왼팔 근력도 오른팔 못지않으니 쌍검을 써도 위력은 줄지 않을 거야.”

“이게 내가 십년 동안 뱃사공으로 키운 근육이라고.” 명희는 왼손에 들고 있던 칼을 땅에 꽂고 나서 팔을 들어 알통을 잡아 보여주며 한 마디 덧붙였다. “십년 전에는 노를 저어서 바다도 건너왔다고.”

“야, 또 그 헛소리야, 벌써 몇 번째야?” 예상이 지겹다는 듯 내뱉고 나서 말을 이었다. “어쨌든 넌 무학(武學)의 귀재(鬼才)는 귀재야. 왼손으로 연습한지 얼마 안 됐는데 이 정도면 괜찮아.”

“하하, 세현 오빠도 나한테 귀재라고 했는데, 내가 재능이 있긴 있지.”

“잘난 척은! 걔는 처음에 무예가 아니라 싸움부터 배워서 그런지, 너한테 무예의 기초를 제대로 못 가르쳤다고.”

“그래도 나한테는 유일한 스승이야. 자기가 모르면 책도 구해다주고 어디 가서 물어보고 와서라도 알려줬다고.”

“흥, 걔 십년 전에 나한테 할머니라고 부르면서 짐 들어줄 때 보니까 내공도 별로던데.”

“지금은 내공이 꽤 높아졌어. 언니가 준 책을 내가 해독하고 나서 같이 연구하고 수련도 했다고.”

“걔가 운이 좋은 거야. 너 아니었으면 그 책도 걔한테는 무용지물이었잖아?”

“예상 언니, 그 오빠 나한테는 유일한 스승이니까 뭐라고 하지 마.”

“흥, 그래도 두둔하긴. 넌 처음부터 나한테 제대로 배웠으면 물속이 아니어도 최강이 됐을 거야.”

“하하하, 물속에서는 언니도 안 되겠지?”

“또 잘난 척은! 네가 수중전 최강이면 뭐해? 너 따라 물속으로 안 들어가면 그만이지. 게다가 일 대 일도 아니고 군대랑 싸우다 네가 물속으로 뛰어들면, 걔네들은 물 밖에서 화살을 쏘아댈 걸.”

“그럼, 수중전 최강이 아니라 물에 빠진 고슴도치 꼴이 되어버리는 거네.”

“야, 넌 그런 것도 상상 못 해? 그림 얘기할 때는 고금을 통달해서 박식하더니만, 실전적 상상력은 바보가 따로 없다니까.”

“내가 잘난척챙이란 소리는 들었어도 어디 가서 바보란 소리 안 듣고 살았는데, 아휴.” 명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명희가 사동각으로 돌아왔다.

“아가씨, 오랜만이오.” 양원길이 문을 열고 들어온 명희에게 말했다.

“잘 다녀오셨어요.” 명희가 무덤덤하게 인사했다.

산은 끼어들지 않고 명희에게 눈으로만 인사했다.

“이번 〈계산행려도〉 원작은 아주 만족스러웠소.”

“예상보다 많이 비싸게 사셨을 텐데요.”

“그런 대작이야, 값이 문제겠소. 게다가 범관의 서명까지 발견해서 원작임을 확인했으니. 그만한 가격이라도 하나도 아깝지 않소.”

“만족하셨다니 다행이네요.”

“요즘에 매매한 그림이라도 있소?”

“아뇨, 요즘 여기저기 돌아다녀보긴 하는데, 양공이 만족하실 만한 그림은 없어요.”

“그럼, 심상덕의 〈계산행려도〉는 어떻소?”

“저는 그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그는 호승심이 강해 지금 부글부글 끓고 있을 거예요. 양주에는 의부가 소장했던 〈계산행려도〉에 범관의 서명이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니까요. 물론 그게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요. 어쨌든 심상덕한테는 제가 말 붙이기도 힘들 것 같은데, 자금압박이나 범법행위 체포 같은 방법을 한 번 쓰시죠.” 명희는 안기와 승호의 일을 떠올리며 담담하게 비꼬았다.

“아가씨, 지금 뭐라고 하는 거요?”

“아니, 그런 방법도 있지 않을까요? 근데 용천검은 가져오셨어요? 그게 마음에 들면 〈계산행려도〉 모작은 제가 어떻게든 중개를 해볼게요.” 명희가 용천검 이야기를 꺼내며 화제를 바꾸었다.

“물론이오, 용천검은 가져왔죠. 근데 〈계산행려도〉 모작 중개가 이루어지면, 검의 값은 협상해봅시다.”

“그러시든지. 근데 우선 한 번 보여주세요. 마음에 안 들면 아예 시작도 안 할 거고, 반대면 거래 성사를 위해 어떻게든 하겠죠.”

“그럽시다. 모레 검을 가지고 오겠소. 그럼 그 때 결정하쇼.”

“그러세요.” 명희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명희는 양원길이 돌아가자 작업실의 준을 찾았다.

“준아, 뺨이 이것보다 좀 더 가냘프고, 눈빛은 모든 걸 잃은 허무한 눈빛이라고.” 명희가 소묘를 하는 준에게 말했다.

“뺨이 가냘픈 건 알겠는데, 허무의 눈빛은 뭐야? 내가 허무라는 감정 자체를 잘 모르겠다고.”

“너 말고 도화원의 한 화원님께서 그리신 여자 사진의 그런 눈빛, 아니 그것과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느낌.”

“우리 아버지께서 그리신 사진 말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내가 개성에 있을 땐 삼촌 안 좋아했는데, 나도 나이 들고 삼촌께서 그리신 여자 사진을 보면 볼수록 감탄스럽고 울컥해진다니까. 설명할 수 없지만 그런 뭐가 있다고.”

“어렵네. 난 그냥 본대로 그릴 뿐이고, 네가 말한 그런 감정들은 잘 모르겠어.”

“너나 내가 겪어보지 않은 감정이라 그럴 거야. 내가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과도 다른 그런 건데, 그냥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성이랄까? 그러니까 사랑하는 남자를 잃은 상실감이랄까? 뭔가 애절한 것 같은데, 나도 잘 모르겠어.”

“네가 설명도 못 하는 걸 내가 어떻게 표현하니?”

“내가 삼촌께서 그리신 화첩 보여줄 테니까 그녀들의 눈빛을 다시 관찰해봐.”

“십년 전이네. 그러고 보니, 그 화첩 너한테 주고 나서 다시 본 적이 없잖아?”


다음 날, 명희는 작업실을 준을 찾았다.

“역시 한 화원님이야, 사진 그리는 솜씨는 최고라고.” 명희가 준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내가 말한 대로 그린 거야. 비슷하긴 한 거야?”

“한 번도 보지 않고 내 얘기대로 그린 게 어쩜 이렇게 똑같은 거야?”

“근데, 네가 말한 눈빛은 대충은 알 것 같은데, 아버지 화첩을 봐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더라.”

“눈빛은 어떻게 그릴지 나중에 고민해보자고. 어쨌든 준아, 이 언니 예쁘지 않니?”

“네가 꾸며내서 말한 게 아니라면, 대단한 미인이네.”

“근데, 백발이라니까. 그래서 그 언니 스물두 살 때 세현 오빠가 할머니라고 불렀다고 하더라.”

“세현 형도 이 누나 본 적 있어?”

“십년 전에.” 명희가 짧게 답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 “우리가 양주 도착한지 얼마 안 돼서 세현 오빠가 할머니 짐 들어주고 왔다고 늦게 온 거 기억나?”

“그래, 동희 형이 뭐라고 해서 우리가 사람 함부로 의심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 할머니가 이 언니야.”

“뭐라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너, 백발의 처녀가 그림 선물하고 싸움 잘한다는 얘긴 했지만, 그게 십년 전의 그 할머니란 얘긴 안 했잖아?”

“물론, 안 했었지. 근데 맞아.”

“그래?” 준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지금은 소묘니까 그런데, 채색하고 나서 머리가 백발이면 정말 할머니 같아 보일 거야.”

“알아, 나도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거든. 싸우면서 할머니 참 곱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라 서른둘의 언니였어.”

“이런 미녀의 얼굴에 백발이면, 오히려 마녀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가 그걸 보고 있으면 얼마나 안타까운 줄 알아?”

“말만 들어도 심난하네.”

“혹시 머리칼 검게 만드는 약이라도 있을까?”

“이 넓은 땅덩어리에 뭔들 없겠어?”


그 다음 날, 양원길이 사동각을 찾았다.

“아가씨, 혹시 이전에 보랏빛 검기를 내뿜는 칼을 본 적 있소?” 양원길이 칼자루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런 것 본 적 없어요.”

“그걸 보면 기분이 어떨 것 같소?”

“가지고 싶은 마음에 휩싸이겠죠.”

“아가씨, 칼을 좋아하나 보오?”

“왜요?”

“난 보랏빛 검기를 보고 나서 칼 좋아하는 사람한테 비싼 값에 팔아야겠다는 생각을 했거든. 매력적이긴 했지만 칼을 소유하고 싶지는 않았소.”

“알았으니까, 내가 소유욕을 느낄지 안 느낄지 빨리 보여주세요.”

“뭘 그렇게 서두르쇼? 아가씨는 사람 속 타지게 하는 기술을 잘도 쓰더군. 나도 아가씨한테 좀 배웠소. 내가 주도권을 쥐었을 땐 상대를 압박할 수 있다.”

“근데 잘못 배우셨어, 난 팔 물건도 안 보여주고 그런 적은 없는데. 뭘 보여줘야 마음을 붙들어놓을 것 아뇨? 아무 것도 안 보여주면 그냥 가버릴 수도 있다고요.”

“바로 이거요!” 양원길이 칼을 뽑았다.

“이게 뭔 보랏빛 검기요?” 명희의 기대감은 실망감으로 변했다.

“어어? 잠깐만.” 양원길이 당황해서 자신이 뽑은 칼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아휴, 영풍루의 삼이 쓰는 식칼보다 못 한 게 무슨 보검이라는 거예요? 이런 것 가지고와서 큰소리를 그렇게 쳤다면 부끄러운 줄 아셔야지.”

“아아, 검기가 어디로 간 거야? 이 칼이 아니라고.” 양원길은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잘난 척하고 거들먹거리시더니만 웬 소리를 그렇게 치쇼?”

“이 칼이 아니라고! 그 칼은 칼집에서 나오면서부터 검기로 자리를 압도한다고!” 양원길이 절규했다.

“그 칼이 무슨 칼인지는 모르겠고, 큰 소리로 자리를 압도하시네요.” 명희는 비꼬고 나서 말을 이었다. “이따위 칼로 저한테 거들먹거리신 거 한 번은 참아드릴게요. 제대로 된 칼을 다시 가져오시든지 다른 조건을 제시하시든지 하셔. 칼집이 멋있다고 칼을 사진 않죠.”

“아가씨, 미안하오. 칼이 이게 뭔가 이상하오. 북경에서 가져올 때는 분명히 이러지 않았거든.” 양원길이 당황해서 칼을 이리저리 쳐다보았다.

명희는 그런 그를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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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보랏빛 검기(劍氣) 22.06.02 153 3 12쪽
» 사라진 검기(劍氣) 22.06.01 157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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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백발처녀 22.05.28 146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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