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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칼날 님의 서재입니다.

그림과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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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검은칼날
작품등록일 :
2021.12.18 21:47
최근연재일 :
2022.07.05 16:00
연재수 :
11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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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581,056

작성
22.06.03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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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불타지 않은 그림

DUMMY

심상덕의 처는 명희를 보자마자 혀를 끌끌 차며 차를 권했다.

“고맙습니다.” 명희는 사례하고 차를 마셨다.

“아가씨, 하루 동안 아니, 하루하고도 한나절이나 밖에 서 있었다며?” 그녀는 차를 마시는 명희를 살펴보며 말했다.

“예.” 명희는 짧게 대꾸하고 다시 차를 들이켰다.

“아가씨도 참 딱하네. 오늘 아침엔 비까지 왔었는데, 그 비를 다 맞고 있었다면서?”

“예.”

“차만 마시지 말고, 이 구운 떡하고 말린 두부도 들어. 어제부터 지금까지 아무 것도 안 먹었을 것 아냐?”

“예.” 명희는 배가 고팠으나 절제하며 떡을 먹었다.

“안 공의 의녀라고 해서 가냘플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구먼.” 그녀는 강인해 보이는 명희를 보며 하루하고 한나절이 넘도록 서서 기다렸다는 전언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인, 제가 심 공께서 〈계산행려도〉를 불태우셨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왔어요.” 명희가 찾아온 용건을 꺼냈다.

“아가씨, 〈계산행려도〉 얘기라면 꺼내지도 말아. 그것 때문에 그이가 울화병이 났다고. 요즘에는 시도 때도 없이 분통을 터뜨려서 나도 불안해.”

“부인께서도 〈계산행려도〉를 보신 적이 있으시죠?” 명희가 화제를 바꾸었다.

“그야 물론이지. 하지만 난 그 그림을 보면 심장이 떨려서 그 방에는 잘 들어가지 않아.”

“방에다 따로 보관하셨어요?”

“그럼, 그 그림이 워낙 규모가 커서 그렇게 했지.”

“저도 꼭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명희가 긴 아쉬움의 한숨을 내뱉었다.

“내가 보여줄 수도 있어.”

“예? 보여주신다고요? 불태웠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소문은 소문일 뿐. 그이가 그렇게 하겠다는 말을 한 적은 있지만, 내가 극구 만류했지. 그래서 실제로 그러지는 않았어.”

“휴우, 소문이 거짓이라니, 한시름 놓았어요.” 명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 이 일 때문에 문 앞에서 그렇게 서 있었던 거야?”

“아뇨, 혹시라도 다른 그림까지 훼손하실까봐 그러지 마시라고 권유하러 왔어요.”

“다른 그림들 때문에 왔다고?” 그녀는 명희가 그림에 대해 가진 애착에 신뢰감을 느꼈다.

“예. 그런데 〈계산행려도〉도 무사하다니 다행이에요.”

“아가씨가 〈계산행려도〉를 팔았다며? 그러니 그이가 문전박대한 거야. 그런데 아들이 오늘 나갔다와서는 내게 얘기하더군. 안 공의 의녀가 하루를 넘기고도 문 앞에 서 있었다고. 그래서 난 아가씨를 보고 싶었어. 보고나니, 가냘픈 처녀는 아니고, 강인한 인내력을 자연스럽게 발산하는 처녀랄까?” 그녀는 말을 끊었다가 명희에게 권유했다. “아가씨, 일어서. 같이 〈계산행려도〉를 보러 가자.”

“예? 아예, 고맙습니다.” 명희가 사례하며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시종의 앞장섰고 명희는 심상덕의 처의 옆에 서서 걸었다. 심상덕의 처는 명희의 신상과 〈계산행려도〉에 관해 이것저것 물었다. 명희는 〈계산행려도〉의 경매 이야기를 하면서, 옛날부터 고금(古今)의 명화는 임모(臨摸)하는 것도 중하게 여겼다고 설명했다. 심상덕의 처는 고개를 끄떡이며 한숨을 쉬었다.


심상덕의 처와 명희는 시종이 안내한 방에 들어갔다. 〈계산행려도〉를 걸어놓을 수 있을 만큼 천장이 높은 방이었다.

그림은 길이가 칠 척 가량 되었고, 너비는 삼 척 정도가 되었다. 긴 족자로 표구되어 있었는데 그것까지 합치면 십 척이나 되는 대형 그림이었다. 맨 아랫부분이 바닥에서 삼 척 정도 높이에 있어서 그림은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아야 했다. 그림의 규모와 표구 형태도 묵연당에 걸려 있던 〈계산행려도〉와 거의 일치했다.

명희는 한참 동안 말없이 그림을 올려보았다. 그림이 주는 위압감은 같았지만, 모작은 그림이 발산하는 기운이 약한 것 같았다. 어쩌면 이미 범관의 서명으로 원작과 모작을 구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일 수도 있었다. 울화병이 든 심상덕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명희는 멀리서 그림을 보다가 앞으로 다가갔다. 그림 우측하단의 나무 그늘 아래를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하지만 범관의 서명은 없었다.


“아가씨, 〈계산행려도〉에 있는 범관의 서명의 그 부분에 있었던 거야?” 심상덕의 처가 그림을 살피는 명희를 보며 물었다.

“예. 이 그림도 엄청나네요.” 명희가 대꾸했다. 사실이었다. 이 그림을 먼저 보고 또 서명을 발견하지 못 했더라면, 어느 것이 원작이라고 단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보기에는 엄청나지만 이제는 휴지 조각 아니야?”

“아니에요. 아까도 말씀 드렸잖아요. 원작이 그려진지 얼마 안 돼서 당시의 최고 화원들 여러 명이 모사한 것 같아요. 물론 범관이 자신의 그림을 다시 한 번 모사했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어느 쪽이든, 동시대의 똑같은 재료로 그렸기 때문에 이 그림의 가치도 원작에 버금간다고요.”

“그럼, 이 그림을 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그녀가 잠시 말 끊어다가 혼잣말을 했다. “아니지, 모작이 확실한데 살 사람이 어디 있겠어?”

“제가 여러 번 말했잖아요? 이건 남을 속이기 위해 그린 가짜그림이 아니에요.”

“그래? 난 그림을 잘 모르니까, 아가씨 말이 맞겠지?”

“그리고 저 그림은 살 사람도 있고, 값도 충분히 받을 수 있어요.”

“그래? 아가씨가 원작을 일억만 냥에 팔았다고 하던데, 저건 몇 백만 냥은 받을 수가 있을까?”

“그 이상 받을 수 있으면 파시겠어요?”

“이건 모작이잖아? 근데 그 이상을 받을 수 있다고?”

“파실 생각이 있다면 제가 꼭 그 이상의 값을 받아 드릴게요.”

“그이가 이 그림 때문에 분통 터뜨리는 것도 보기 싫고, 나는 팔고 싶어. 근데, 그이 생각이 어떤지는 나도 모르겠어.”

“심 공께 저를 데려다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얘기해볼게요.”

“아휴, 이 아기씨,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이 상황에서 〈계산행려도〉를 판 아가씨를 만나고 싶겠어? 아가씨는 이미 문전박대까지 당했잖아? 그리고 내가 몰랐으면 언제까지 서 있으려고 했어?”

“적어도 사흘은 서 있으려고 했어요.” 명희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래? 사흘이나 버딜 수 있었겠어? 어쨌든 아가씨 그림 얘기하는 걸 들어보면 당당하면서도 품위가 있고 그런데, 그것과는 전혀 다른 뭔가 강인한 기운 같은 게 느껴진다니까. 게다가 피부도 까맣고 손도 투박하고 말이지.”

“제가 홍교에 사는데 성에 오갈 때마다 사공 노릇을 해서 그럴 거예요.”

“그래? 안 공의 의녀가 사공도 안 쓰고 직접 노를 젓고 다닌다고?”

“그럼요. 물론 의부께서는 싫어하시지만, 제가 사공 노릇한지 벌써 십 년이 됐어요.” 명희가 오른팔을 들어 알통을 잡으려다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럼, 열 몇 살 때부터 그랬다는 거야?”

“예. 열두 살 때부터요.”

“이 아가씨, 참 특이하네.” 그녀가 혼잣말을 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 “아가씨, 지금 그이한테 가보자고.”

“예? 데려가주시겠어요? 고맙습니다.” 명희가 태도를 바꾼 그녀에게 사례했다.

“그 대신 난 옆에만 있을 거야. 솔직히 그이가 울화통을 터뜨릴 것 같아서 가기 싫은데, 아가씨 때문에 같이 가는 거야. 그이한테 말하는 건 아가씨가 알아서 해?”

“물론이죠.” 명희는 허리를 깊숙이 숙여 감사함을 표했다.


심상덕은 명희를 만나지 않으려 했으나 처의 부탁 때문에 고집을 꺾었다. 하지만 만나서는 명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어차피 〈계산행려도〉가 그렇게 보기 싫으면 아예 팔아버려요.” 심상덕의 처가 오랜 침묵을 깨고 권유했다.

“그걸 태워버리면 태워버리지 왜 팔아?” 심상덕이 분통을 터뜨리며 소리를 높였다.

“그런 보물은 개인이 소장할 수는 있지만, 자기 기분에 따라 함부로 훼손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명희가 준엄하게 말했다.

“이 아가씨 당돌하구먼. 내가 가진 그림을 내 마음대로 처분하겠다는 데 무슨 상관이야?” 심상덕이 목소리를 높였다.

“몇 백 년 동안 세상에 존재한 그림이에요. 심 공께서 그걸 몇 십 년 소장하셨더라도 겨우 잠시일 뿐이죠.”

“잠시가 됐든 어쨌든 지금은 내 소유이고 처분은 내가 하는 거야!”

“그걸 태워버리시면 불꽃을 보고 계신 동안은 통쾌할지 모르지만, 앞으로 오랜 세월을 후회하실 거예요.”

심상덕은 명희의 말을 곱씹으며 상상해보았다.

“이 아가씨 말이 맞아요. 그걸 태워버리면 잠시의 통쾌함과 바람에 날려갈 재밖에 남지 않을 거예요.” 심상덕의 처가 마음이 흔들리는 남편을 보며 말했다.

“그럼, 당신이 알아서 팔아버리든지 그냥 갖다버리든지 해!” 심상덕은 처에게 화를 내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잘 됐어.” 심상덕의 처가 방을 나가는 남편을 보고 혼잣말을 한 후 명희에게 말했다. “저이가 호승심이 강해서 팔고 싶어도 자기 입으로 말을 못 할 거야. 그래서 나한테 화를 내고 나간 거지.”

“그럼, 부인께서 처리하셔도 되는 건가요?” 명희가 기쁜 마음을 표내지 않고 물었다.

“그야 물론이지.” 그녀가 대답하고 나서 명희를 칭찬했다. “잘했어, 아가씨.”

“예? 뭘 잘했다는 거예요?”

“아가씨가 그이한테 굽실거렸으면 오히려 상황이 더 어려워졌을 거야. 근데 아가씨가 당당하게 말하니 괜히 화만 내고 나가버린 거라고.”

“그럼, 제가 중개해드릴게요.”

“그래, 아가씨가 맡아준다면 난 좋아.”

“조만간에 좋은 값에 팔아드릴게요.” 명희가 장담했다.

“그래, 알았어. 아가씨, 그림 얘기는 이제 그만하고, 나랑 같이 저녁 먹고 가.”

명희가 거절했지만 그녀는 명희를 붙잡았고, 결국 명희는 그녀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명희는 저녁을 먹고 밤에 배를 몰아 홍교로 돌아갔다.

명희는 배 위에서 노를 저으며 떠오르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건 〈계산행려도〉를 태워버렸다는 소문은 심상덕이 일부러 낸 게 아닌가하는 의심이었다. 그는 명희가 찾아올 것을 예상하고, 명희를 통해 그림을 처분하려고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계산행려도〉를 팔아버린 화상을 하루가 넘게 집밖에 세워놓음으로써 자존심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명희는 사과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릎을 꿇지 않고 서서 기다렸다. 그렇게 그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다. 그러나 심상덕의 처가 명희를 부른 것은 계획했던 일 같지는 않았다. 그녀의 호의는 꾸며낸 게 아니었다. 심상덕도 자신이 찾아와서 움직이지도 않고 그렇게 기다리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명희는 그림에 대한 걱정 때문에 심상덕을 찾아감으로써 〈계산행려도〉를 중개할 기회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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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가슴 시린 백발 22.06.07 153 1 11쪽
89 두 번째 검 22.06.04 146 2 12쪽
» 불타지 않은 그림 22.06.03 143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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