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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칼날 님의 서재입니다.

그림과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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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검은칼날
작품등록일 :
2021.12.18 21:47
최근연재일 :
2022.07.05 16:00
연재수 :
110 회
조회수 :
25,691
추천수 :
565
글자수 :
581,056

작성
22.06.24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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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의인(義人)

DUMMY

“저놈 뭐야? 남의 집 앞에서.” 얼굴에 화상을 입은 중년 사내가 가래 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야 모르죠, 나리. 가보면 알겠죠.” 말잡이가 말 위의 주인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집 앞에는 장사꾼차림의 댕기머리 청년이 말고삐를 잡고 서 있었다. 마치 집주인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거리에 들어서자 주인이 유심히 청년을 관찰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말에서 뛰어내려 청년을 향해 달려갔다. 말잡이는 놀라서 말고삐를 틀어쥐고는 주인의 뒤를 따랐다.

“이 집 주인이시오? 혹시 한 화원을 아시오?” 청년이 달려오는 주인에게 물었다.

주인은 대답 없이 다시 한 번 댕기머리 청년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 화상 때문에 팽팽해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눈물을 글썽였다.

“여기 혹시 예전에 한 화원 댁이 아니었소?” 청년이 괴기스러운 표정을 짓는 주인을 응시하며 물었다.

“넌 말 놓고 안에 들어가서 큰 손님 맞을 준비하라고 해라.” 주인이 말잡이에게 명령했다.

“예?” 말잡이가 의아한 눈으로 주인을 쳐다보았다.

“같은 말을 두 번 하랴? 빨리 들어가서 큰 손님 맞을 준비를 하라고 전해.” 주인이 꾸짖으며 다시 한 번 명령했다.

말잡이는 주인의 행동이 이상했지만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주인은 주위를 한 번 살피고는 땅바닥에 꿇어앉아 청년에게 절을 올렸다. 청년은 깜짝 놀라 주인을 붙잡았다.

“도련님!” 주인은 말을 잇지 못하고 목 놓아 울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어린아이처럼 두 발을 휘저었다. 흙먼지가 일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요? 빨리 일어나쇼.” 청년이 주인을 붙잡아 일으켰다.

주인은 명령을 받들 듯 벌떡 일어섰다.

“예전에 여기가 한 화원님 댁 아니었소?” 청년은 일어선 주인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동희 도련님, 저 손돌이에요.” 주인은 청년의 바지를 붙잡고 꿇어앉아 다시 울기 시작했다.

“일어나게. 이게 뭔가? 자네가 말 놓고 가라고 했으니까 타게. 어디든 가면서 얘기하세.” 손돌은 그 말에 벌떡 일어나서 말에 올랐다.

“도련님, 살아계실 거라고 믿었지만··· 도련님께서 다시 찾아오실 거라고도 믿었지만······” 손돌이 말을 잇지 못 하고 흐느꼈다.

“오빠는 양주에 있어.” 청년이 말에 오르며 대꾸했다.

“예? 그러면 명희 아가씨?” 손돌이 놀라며 명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못 알아보겠지? 계집애 같지는 않잖아?”

“예? 아예. 아가씨 어떻게 오셨어요? 그 동안 고생을 얼마나 하셨어요?” 손돌이 안타까운 눈길을 보내며 울먹였다.

“이제는 좀 그만 울게.” 명희가 핀잔을 주며 명령하고 물었다. “근데 자네 얼굴은 그게 뭐고, 목소리도 왜 그렇게 변한 거야?”

“그건 말이죠, 휴우.” 손돌이 한숨을 쉬며 팽팽하게 당겨진 얼굴피부를 만졌다.


십일 년 전 살타는 냄새가 다시 나는 것 같았다. 악몽을 꿀 때마다 살타는 냄새가 강렬했다. 과연 꿈에서도 냄새를 감지할 수 있을까? 치가 떨렸다. 그 때 눈을 질끈 감고 숯으로 얼굴을 지졌다. 그러고는 숯덩이를 삼켰다. 그러다 기절했기에 냄새만이 유일한 기억이었다. 살타는 냄새, 눈썹 타는 냄새,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냄새, 기억은 혼미했고 온갖 냄새뿐이었다.


“못 알아보시겠죠?” 손돌이 살타는 냄새를 떨쳐내려고 고개를 흔들며 물었다.

“목소리도 못 알아들겠네.” 명희가 대꾸했다.

“그럼요. 목구멍도 타들어 가는 줄 알았어요.”

“삼촌은?” “도련님은요?” 둘이 동시에 물었다.

“오빠 양주에서 잘 살아. 여기는 나 혼자 왔어.”

“그랬군요. 한 화원님은 재작년에 돌아가셨어요.” 손돌이 대답했다.

“그랬군. 승호도 양주에서 잘 지냈는데, 얼마 후 여기 나타날지 몰라.”

“예? 승호도 올 거라고요.”

“그럴지도 모른다고. 그 얘기는 나중에 하세.” 명희가 말을 자르고 화제를 바꾸어 물었다. “자네 혹시, 우리들이 돌아와서 쉽게 찾으라고, 삼촌 사시던 초가 자리에 집을 지은 거야?”

“아, 예. 언젠가는 돌아오실 줄 알았어요.”

“그래, 고마워.”

“명희 아가씨, 저 혹시··· 그러니까 말이죠. 아버지 소식은 아세요?” 손돌이 주저하며 말을 끌다 물었다.

“의부한테 들었어.” 명희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예? 혹시 안기 나리를 만나셨어요?”

“그래.” 명희가 짧게 대답하고 담담하게 물었다. “근데, 이제는 아버지 유골도 못 찾겠지?”

“유골 전부를 어떻게 찾겠어요? 그래도 시신의 일부는 제가 묻어드렸어요.”

“응? 묻어드렸다고?”


십일 년 전, 조선의 중심인 도성의 서소문에는 괘서가 나붙었다. 정부가 비공개수사를 결정하자 도성의 중심인 종로에 또다시 괘서가 나붙었다.

나는 주인인 변양호에게 이 괘서들을 붙이겠다고 자원했다. 그러다 잡히면 혀를 깨물고 죽을 각오를 했다. 정치는 몰라도 비밀은 지킬 자신이 있었다. 자신이 평생 모셨던 주인에게 이것은 당연히 해드려야 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승호가 그것을 맡게 되자 난 자신이 노비임을 잊고 난생처음 주인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금방 고개를 숙였지만 승호가 위험에 몰리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주인이 누굴 이용하자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모든 걸 다 버렸음을 깨달았다. 일이 잘못되면 이 집안은 끝장이 날 것이었다. 하지만 주인이 끝장난다고 노비가 끝장날 일은 없었다. 단지 다른 집 노비가 될 뿐이었다. 주인은 나에게 이 길을 터주고자 한 것이었다.

주인이 체포되자 나는 개성에 소식을 알리기 위해 도성을 나왔다. 이 때 처를 피신시키지 않은 것은 나중에 천추의 한이 되었다. 어쨌든 당시 서울은 이미 계엄령을 내리고 모든 성문을 걸어 잠근 상태였다. 그러나 포교 최진규의 도움으로 쉽사리 성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성을 나와 개성으로 향하던 중에 임진강 나루에서 승호를 만났다. 승호에게 청나라로 넘어가라는 말을 전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은 밤인데도 밝혀놓은 횃불로 훤했다. 그런 도성 안에서는 역적들을 색출하고 있을 것이었다. 반군이 성을 점령하지 못하면 이미 체포된 주인은 처형될 것이 뻔했다. 내가 들어가도 달리 구할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 소식도 구하지 못 한 채 기다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성 안으로 가야했다.

나는 불빛이 없는 성벽을 골라 기어올랐다. 미끄러지면서도 돌 틈을 잡았다. 손끝이 갈라지고 손톱이 빠져서 피가 났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몇 번이고 미끄러지면서 성벽에 기어올랐다. 결국은 성벽을 넘지 못 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를 삼키며 울었다. 방성통곡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며칠이 지나고 반군이 안성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이제는 서울까지 진격할 가능성은 없었다. 주인도 풀려날 가망이 없었다. 나는 좌절했다. 그래서 도성 안의 소식이 더 궁금해졌다.

그 때 양재의 말죽거리에 역적들을 효수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는 그곳을 찾았다. 삼각으로 세워놓은 장대에 머리칼을 묶어 매달아놓은 머리가 있었다. 그 머리는 몸통이 없는 주인의 머리였다. 눈물이 났다. 얼른 달려가 머리를 내리고 싶었지만 지나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행인들은 지나다가 역적 놈이라며 욕을 하기도 했고, 심심풀이로 돌을 던지기도 했다. 나는 주먹을 움켜쥐며 눈물을 삼켰다.

밤이 되어 인적이 끊겼다. 나는 주인의 머리를 내려 그걸 품에 안고 뛰었다. 효수한 모가지 없어졌으니 조정은 발칵 뒤집힐 것이었다. 그건 효수가 정당하지 않다는 반항이니까. 나는 이렇게라도 주인의 복수를 하고 싶었다.

나는 뛰고 또 뛰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그래도 뛰었다. 새벽이 되어서 주인의 처가 묻힌 자웅산의 무덤에 도착했다. 주인의 머리도 가리지도 않고 품에 안은 채 밤새 달렸다. 사람들이 봤다면 관아에 신고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돌리고 아직도 부릅뜬 주인의 눈을 감겨주었다. 그러고는 그 목을 끌어안고 통곡하다 하다 자리에 올려놓고 절을 했다. 그가 처를 묻으면서 자신의 묏자리를 마련한 곳이었다. 땅을 팔 도구가 없었다. 나뭇가지로 땅을 후비다 맨손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새 손톱이 돋지도 않은 손이었다. 그런데 흙은 굳어 있지 않았다. 얼마쯤 흙을 파내자 피범벅이 된 손끝에서 나무상자가 느껴졌다. 그제야 손끝이 아리다는 느낌을 자각했다. 나뭇가지로 상자 옆을 파내서 상자를 들어냈다. 뚜껑을 열자 상자 가득 은괴가 들어 있었고, 그 위에는 편지 한 통이 놓여 있었다.


손돌은 이 이야기를 하며 임진강을 건너 자웅산으로 명희를 데려갔다.

명희는 부모의 묘에 절하며 울었다. 목 놓아 울지 않고 울분을 삼키며 흐느꼈다.

“아가씨, 여기 아버지 편지요.” 손돌이 흐느낌을 그친 명희에게 십일 년 동안 항상 품고 다니던 편지를 건넸다.


이 편지를 읽어줘서 고맙네. 돌이 자네이겠구먼. 자네가 아니라면 누가 내 묏자리를 파보겠나? 자네가 여길 판다면 난 이미 죽었을 테지. 어차피 난 죽을 각오로 한 일이니 많이 슬퍼하지는 말게. 상자 안에 있는 은은 역적의 장례를 치러준 사람에게 주는 걸세. 사양하지 말고 받게. 은을 다 빼내면 상자는 내 목에 딱 맞는 관일 걸세. 역적의 모가지라도 묻어주어서 고맙네.


“고맙네. 자네는 의인이고 아버지와 나에겐 은인일세.” 명희가 손돌이 건넨 편지를 읽고 나서 말했다.

“아닙니다, 아가씨. 나리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은 거죠.

“아닙니다, 삼촌. 제가 이 은혜를 어떻게 갚겠습니까?” 명희가 갑자기 손돌에게 절을 올리며 울먹였다.

“아가씨 얼른 일어나세요.” 손돌은 당황해서 명희의 팔을 붙잡고 일으키려다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팔을 놓았다.

명희가 일어나지 않자 손돌은 맞절을 했다. 명희는 몸을 일으켜 또 절을 했다. 손돌도 어쩔 줄 몰라 또 맞절을 했다. 그 사이 명희는 일어섰다가 세 번째 절을 했다. 손돌은 또 다시 맞절을 했다.

“앞으로는 삼촌으로 모시겠어요. 아가씨니 뭐니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명희가 삼배를 올리고 일어서며 말했다.

“아가씨, 갑자기 왜 이러세요?” 손돌은 어쩔 줄 몰라 당황했다.

“앞으로는 아가씨라고 부르지 말고 조카처럼 대하세요. 안 그러면 전 여기서 일어나지 않고 무릎 꿇고 있을 거예요.” 명희가 단호하게 말하며 무릎을 꿇었다.

“아, 아가씨, 제발 일어나세요.” 손돌이 정색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삼촌께서 명희라고 부르시면 일어날게요.”

“예? 아니에요, 아가씨. 감히 어떻게······”

명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대로 꿇어앉아 있었다.

“며, 명희야, 일어나.” 손돌이 한참을 망설이다 꿇어앉아 일어날 기미조차 없는 명희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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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또 다른 명희 22.06.28 138 2 10쪽
104 손돌 22.06.25 135 2 13쪽
» 의인(義人) 22.06.24 144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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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애합문(愛哈門)객잔 22.06.22 142 2 11쪽
100 인삼주 22.06.21 141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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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엄마 22.06.17 140 2 11쪽
97 가출 22.06.16 139 2 12쪽
96 22.06.15 155 2 12쪽
95 거래 종료 22.06.14 143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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