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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범 님의 서재입니다.

지옥불 난이도의 이세계 생존기.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지니범
작품등록일 :
2020.07.30 01:13
최근연재일 :
2021.06.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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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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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약함에서 강대함으로(6)

DUMMY

"다들, 준비는 되었겠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야흐로 오늘은 다시 한 번 아델라이데의 상행이 출발하는 날, 지난 날 치욕스러웠던 패배 이후 그들은 시트러스에서 온 상술 서적들과 엄격한 훈련을 통해 단련해왔다.


비장한 기색이 그들 사이에 흘렀다. 만약 이번에도 국왕 폐하의 마음에 들지 못하는 성과를 낸다면 그들 모두 최소한 자리를 내놓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좋아... 그럼 출발한다!"

"""예!"""


마치 전장에 나가는 기사들의 그것과 같이, 상인들은 매서운 기세를 풍기며 북쪽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


"이번에 가는 자들은 저번보다는 더 큰 이익을 거두어야 할 것이야, 적어도 본전은 쳐야 우리도 계속 무역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 아닌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상행에 나간 상인들도 지난 번의 실패를 타산지석 삼아 열심히 훈련을 거듭하였으니, 이번에는 결과를 기대해보아도 되겠지요."


재상과 국왕은 상인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사실 마음은 다른 데에 가 있었다. 바로 저번의 위령제 사건, 아직도 그 사건의 진범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저나, 아직도 범인을 특정하지 못했는가?"

"...송구하옵니다. 본래 금속 활자라는 것이 활발하게 거래되는 물품이라 추적이 어려워서.."

"그대를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마음이 답답하구나. 짐에게 그런 요청을 보낸 간 큰 자라면 분명 범인(평범한 사람을 이르는 말)은 아닐 것이야."


신문이 뭔지 모르던 시대도 아니고, 금속 활자를 이용한 인쇄 기술은 이미 아델라이데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금속 활자 또한 어차피 소모품이었던 탓에 수많은 기업들이 활자들을 만들고 도시에 주재한 인쇄소들이 그런 활자들을 대규모로 사들여 신문이나 기타 잡다한 정보들을 찍어내니, 활자를 사용했단 것만으로는 도저히 이 편지를 보낸 자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던 것이다.


"아무튼 조급하게 일을 처리하려 한다면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 있음이니, 그대는 신중히 이 일을 처리하도록 하라. 뭔가 필요한 것이 있다면 기탄없이 말하고."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폐하. 반드시 그런 오만불손한 청을 올린 자를 잡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대를 믿고 있겠다."


재상이 물러가자, 왕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면서 고민에 잠겼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140만명을 죽인 것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차피 인구야 늘리면 되는 것, 자신을 반대하는 자들을 국민으로서 이끄는 것은 마조히스트나 좋아할 일이다.


그러나 그런 그의 뜻이 병사들에게도 전해졌을지는 의문이다. 마음이 약해져 몰래 도망치게 한 병사들도 있을 것이고, 곧 학살이 있을 것이란 것을 눈치채고 일찍 도망쳐 오지로 도망간 자도 있을 것이다.


지난 국무회의 때 소란이 일기는 했지만. 사실상 도시 위원장들이나, 대성주들이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감히 왕의 결단이 틀렸다고 비꼬아 말하고 있는 저 역도를 잡아들이기는 해야겠다만.


애초에 아델라이데의 700만 국민들 중에서 140만명을 국왕이 전부 죽여버렸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는데도 왕국이 평화로운 것이 그 증거다. 그들도 학살의 정당성을 이해하고 있기에, 나아가 더 이상의 분쟁을 원하지 않기에 왕의 만행을 용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


"확실히 병사가 늘었군. 역시 국왕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 맞는 모양이야."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부탁인데 제발 '다시 군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킨다'라는 허무맹랑한 소리는 하지 마."

"설마, 그게 가능했다면 이런 편지를 보낼 필요도 없었겠지."


두 사람이 텐트에 모여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눈다. 복식은 낡아있고, 그들이 차고 있는 검은 모두 이가 나가있다. 가난한 모험가라 보기에는 행동에 절도가 깃들어 있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야, 국왕이 저지른 패악을 패악이라 알리는 것이지."

"패악이라는 것을 누가 모르나. 다만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지."

"만약 국왕의 철권이 자신의 앞에 당도한다 해도, 이 나라의 백성들은 입을 다물고 있을까?"


그들은 지난 천일전쟁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패잔병들과 대학살의 생존자들이 뭉친 집단이었다. 수는 고작해야 약 7000명, 집단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숫자였지만, 무언가를 도모하기에는 턱없이 적은 숫자였다.


더구나 이미 몸을 붙일 고향은 불타고, 친지들은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된지 오래, 그러나 그들은 살아있었다. 도망치고, 패배한 끝에 말이다.


"이제 돈도 얼마 남지 않았어, 정말 동굴 속에서 숨만 쉬고 있다고 한다면 앞으로 1년 정도는 버틸 수 있겠지만. 이런 저런 활동을 계속한다면 3개월도 버티기 어려울거야."


이 집단의 생존은 위태롭기 그지없다. 다행히도 패잔병들 중 몇몇이 구 협상국이 건설해놓은 군수 물자 창고의 위치를 기억하고 있어 식량과 식수를 비축할 수 있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약간, 7000명에 다다르는 집단을 먹이기에는 터무니없는 적은 숫자였다.


농기구를 살 수 없으니 둔전도 할 수 없고, 가진 돈도 없으니 외부에서 보급을 할 수도 없다. 물론 애초에 둔전이나 보급이 된다 쳐도 눈에 불을 켜고 그들을 찾고 있는 국왕의 군대에 의해 금방 걸려버리겠지만 말이다.


보통 이 정도로 몰린 집단은 내부 분열 끝에 자멸하던가, 아니면 서서히 쪼그라들다 소멸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들은 단 한 가지의 목적을 중심으로 뭉친 일종의 사상범들이었다.


"이 대평원에 우리가 존재했다는 증거를 알리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자, 할 수 있는 일이야"


어찌보면 처절하다고도 할 수 있는 목적, 교과서나 역사서에 '전쟁을 했다, 이겼다. 끝'이 아닌 협상국이라는 나라와 아델라이데라는 나라가 전쟁을 했다는 것을, 그 전쟁이 천일동안 이어졌다는 것을, 그리고 140만명이라는 생명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공포 속에 사그라졌다는 것을 이 나라에 각인시키고자 하는 처절하고도 고귀한 목적이 그들을 결집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이상주의는 현실주의에 침식되기 마련이었다.


"하아... 제발 그런 허황된 소리는 그만 둬! 대체 언제가 되야 인정할 셈이야!? 우린 끝났어! 국가는 멸망했고, 국민들은 전부 죽어버렸다고! 우리가 이제와서 뭘 할 수 있는데? 저들은 수백만이고 우리는 수천이야! 그리고, 만약 네 목적이 이루어지면 뭐가 바뀌는데? 우리가 다시 원래의 지위를 되찾을 수 있어? 아델라이데의 700만 국민들이 우리를 따스한 눈길로 받아줄 것 같으냐고!"

"그건...!"

"나는 네 고결한 이상 따위 이해 못해! 오직 투쟁뿐이야. 국왕이 어떻게 이 대평원을 통일했지? 무력을 통해서야! 그 같잖은 토론이나 화합의 장을 마련해서 통일을 한 게 아니라고!"

"무력을 쓰면 우리는 토벌당할 뿐이야! 진정 너는 두번째 패전을 겪고 싶은 거야?!"


그랬다. 목적이 숭고하다 한들, '할 일은 다 했으니 이제 어찌되든 좋다'라는 것이 목적인 이상 사람들의 마음은 흔들리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우리 마음가는 대로 하자!'라는 극단주의가 판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작은 텐트 속, 한 때 공동의 적을 맞아 싸웠던 두 사람의 패잔병은 서로의 마음에 상처만을 입힌 채 갈라지고 말았다.


*


어느새 시간은 흘러, 시트러스로 떠난 상인들이 다시 아델라이데로 돌아와 그동안의 성과를 보고했다.


결과는 본전보다 약간 흑자를 본 정도, 운송비까지 고려한다면 사실상 적자를 본 셈이지만 일단 물건값은 본전을 치는 데에 성공했으니 반절의 성공은 거둔 셈이었다.


"두번만에 본전을 치다니 생각보다 발전이 빠르구나, 그들에게 포상금을 주고 다른 상인들에게 상술을 가르치도록 하라."

"분부대로 하겠나이다. 참. 시트러스의 상인들이 돈 대신 준 공예품들이 있는데, 그것은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마침 하늘산의 박물관에 전시할 것이 없었는데 잘 되었다, 박물관에 시트러스의 공예품을 기증한다면 무지한 백성들까지 북부의 문화에 대해 쉬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박물관에 기증토록 하겠나이다."


북부에서의 무역이 진척될수록, 비단 금이나 은뿐만이 아닌 물물교환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금은으로 가치를 매길 수 없거나 어려운 것들도 으레 있기 마련이라, 북부에서는 적당한 가치를 지닌 물건들끼리 맞교환하는 물물교환도 생각 외로 활성화되어 있던 것이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이 대평원에서도 이웃집과 식기나 가재도구를 교환하는 것은 그리 이상하거나 특별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흐음... 재상은 들으라."

"예, 폐하. 분부하소서."

"짐이 생각건대 지금 우리가 비록 지식을 수입하는 처지에 있다지만, 그렇다고 우리 아델라이데의 문학이 열등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사옵니다."

"북부의 백성들도 우리 대평원의 백성들이 어떠한 책을 읽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있을 터, 상인들에게 일러 다음에 있을 상행에는 아델라이데에서도 명저(명성이 있는 책, 주로 유명한 책들을 이름)를 가져가 팔도록 하라."

"분부대로 하겠나이다 폐하."


이제는 희미해진 기억이지만, 켈러 왕이 기억하기로는 원작에서 시트러스의 문학은 대게 만연체(문장을 길게 늘려쓰는 문체)로 이루어져 있어 세밀한 감정 표현이 돋보이고, 단델라이언의 문학은 간결체와 함축적인 의미가, 매그놀리아의 문학은 영탄법과 점층법이 주된 기법으로 쓰인다고 적혀 있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별로 책을 읽지 않은 켈러 왕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적어도 아델라이데에서도 사람들이 즐겨 있는 책들은 있을 터, 그동안 물질적인 교류에 치중하느라 정작 타국과 교류할 때 가장 중점이 되는 '문화'에 대해서는 그동안 켈러 왕이 생각치 못했던 것이다.


"폐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그렇다면 다음 번 상행은 전부 문학 작품으로 채우는 것이옵니까?"

"그게 좋을 듯 하다. 여러번의 상행을 거쳐서 우리가 생산할 수 있는 물자를 저쪽도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했을 것 아니더냐? 거기에서 우리가 문학 작품을 들이민다면 의외의 돌파 전략이 될 수 있도다."

"과연... 폐하께서 이리도 총명하시니 참으로 아국의 홍복이옵나이다."

"머리가 달려있다면 누구라도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런 것 가지고 짐을 찬양하려 하지 말거라."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국왕의 명령이 상당히 그럴듯한 것일까, 재상은 열정적으로 국왕의 명령을 수행하려 전국에 출판된 책들을 마구잡이로 사들였고, 이내 현실의 벽에 부딫쳤다.


"대체... 어느 것이 잘 쓴 책인거지...?"


그렇다. 정부의 관원들이란 작자들은 전부 감성이 메마른 월급쟁이들이라, 대체 무엇이 잘 쓴 책이고 어느 것이 못 쓴 것인지 도저히 분간을 할 수가 없던 것이다.


고육지책으로 잘 팔리는 책들을 훑어보고 캐러밴의 구비 목록에 적어두기는 했지만, 겨우 베스트셀러 몇 권 가지고서는 국왕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동안 대평원은 도저히 문학에 대한 비평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환경이었던지라, 이제와서 민간 비평가를 구해오기도 어려운 상황. 결국 재상을 포함한 정부의 공무원 절반이 1달 동안이나 끙끙댄 후에야 캐러밴에 실을 명저들을 고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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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혈육(1) 21.04.05 50 1 12쪽
67 남에서 온 손님(1) 21.03.23 51 1 14쪽
66 북에서 온 손님(1) 21.03.22 44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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