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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범 님의 서재입니다.

지옥불 난이도의 이세계 생존기.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지니범
작품등록일 :
2020.07.30 01:13
최근연재일 :
2021.06.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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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465,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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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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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하나의 깃발 아래에서(4)

DUMMY

"그거 그냥 배급제를 시행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마침 경제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이유로 국무회의에 참가한 조합장이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한 마디가 현재 당면한 경제 위기의 타계책이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임금을 줄 돈이 없으면 임금을 주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겠는가?


평소 생산에 쓰이는 원자재들을 장인들에게 배급하는 것이 생업이던 조합장이 아니었다면 결코 떠올리지 못했을 발상이었다.


"배급제라?....과연. 확실히 생필품을 구하지도 못할 정도로 임금이 하락했다면 아예 직접 임금 대신 배급권을 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요."


아직 재상직을 받지는 않았으나. 사실상 재상직을 수행하고 있는 세르누엘라 백작이 읊조리자 회의에 참석한 대성주와 공작들은 어느새 스스로 배급제에 대한 토론을 시작했다. 대성주들이야 원래부터 경제에 조예가 깊었으니 말할 필요도 없었고. 공작들도 그동안 대규모의 군대를 지휘하면서 민생이나 민심을 다독이고 통제하는 방법에 대해서 얼추 알고 있었으니. 생각외로 토론은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졌다.


"배급을 한다고 친다면. 어떻게 광할한 대평원의 마을마다 배급을 실행할 수 있단 말입니까? 중앙 정부의 능력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건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백작과 남작이란 지위가 그냥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백작들과 남작들에게 배급제의 시행을 통보하고. 각 행정구역에 있는 마부들과 마차들을 징발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농부들에게는 어떻게 보상을 해줄 겁니까? 배급을 시행한다면 필시 농부들의 수확물을 강제로 압류해야 하는데. 시장에 내다파는 것보다 더 수익이 나지 않을 것은 당연하니 징발관이 오기도 전에 작물을 숨기거나 파기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겁니다."

"현재 시장에서 팔리는 식료품의 가격을 조사한 뒤 평균값을 낸 뒤 그 평균값에 상응하는 금전을 농부들에게 쥐어주면 해결될 겁니다. 그럼에도 반항하는 자들에게는 반역죄를 씌우면 되겠지요."


점점 배급제에 관한 토론이 진행되면서, 배급제의 시행에 관한 의견들에 살이 덧붙여지기 시작했다. 거시적으로는 배급의 방법에서부터. 미시적으로는 농작물을 강제로 바쳐야 하는 농부들에 대한 보상안까지.


한 번 실행할 방법이 정해지자 그 방법에 따른 문제점과 대응책이 나왔고. 대응책이 나오자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나 다름없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상석에 앉아있는 국왕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았으나. 국왕은 그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면서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는 28명의 신하들을 바라보았다.


스스로 국정에 대해 논하면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이야말로 바람직한 나라의 올바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


수도로 향하는 직통 도로를 만들고 있는 공사현장. 오늘도 어김없이 일당을 받으러 온 노동자들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작업 반장에게 달려가 일당 대신 받은 종이표를 들이밀었다.


"아니, 달라는 돈은 안 주고 이딴 종이표를 주는거요? 뭐하자는 짓거리요? 우리보고 다 굶어죽으라는 소리인가?"

"아니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나? 이건 나라에서 일당 대신 나눠주라고 뿌린 배급권이라네. 이것만 있으면 배급을 타먹을 수 있으니 간수 잘하는 게 좋을게야."

"뭐? 배급?"


배급권을 받아든 노동자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임금도 줄어들어서 새벽별을 보고 출근하고 새벽별을 보며 퇴근해야 겨우 처자식을 먹여살릴 수 있는 수준이었는데. 이제는 돈 대신 잘 구부려지지도 않는 딴딴한 종이조각을 주다니?


"앞으로 당분간 임금은 배급권으로 줄 걸세. 잃어버리면 큰일나니 잘 간수들 하고."

"아니.... 후우... 그러니까 이 종이쪼가리로 뭘 할 수 있다는 거요?"

"이제부터 생필품들을 가득 실은 커다란 마차들이 올 건데. 그게 있으면 그 마차에서 생필품을 배급받을 수 있다네. 매주 월요일마다 온다니까 참고들 하고."

"...뭔 미친..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임금을 올리는 게 백배 천배 낫겠는데?"

"내 말이."


노동자들은 불만을 터트렸지만 윗사람들이 결정한 이상 그들은 그들의 의지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기나긴 전쟁으로 인해 대평원의 경제가 피폐해진 것을 가장 먼저 체감한 것은 서민들이었지만. 결국 그 피폐함을 다시 번영으로 바꾸는 것에는 정치인들의 힘이 필요했으니까.


게다가 조금만 더 생각해본다면. 서민들의 입장에서도 빵 하나 사기도 어려운 쥐꼬리만한 임금을 받는 것보다는 아예 먹을 것을 포함한 생필품들을 받을 수 있는 배급권이 더 서민 친화적인 정책인 것은 명백하였다.


괜히 시장에 가서 푼돈으로 상인들과 씨름하면서 본전도 못 건지고 빵 몇조각이나 사오는 것보다야 생필품이 든든하게 들어간 꾸러미 하나를 받는 것이 더 이득이라는 것은 비단 경제학자가 아니더라도 머리가 존재한다면야 늦든 빠르든 알 수 있는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


쾅! 쾅! 쾅!


"당장 이 문 열어! 나오지 않으면 반역으로 판단하겠다!"

"지랄!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그딴 푼돈을 받고 작물들을 넘기라고?! 시장에 내다 팔면 10배는 더 받을 수 있는데 바치는 놈이 병신이지! 그 돈을 받고는 절대 못 넘겨! 차라리 태워버리면 모를까!"

"이기적인 놈 같으니! 같은 동포들이 굶어죽어가는데 일신의 영화만을 추구할 셈이냐!"

"동포는 지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서로 죽이지 못해 으르렁거리던 놈을 위해 왜 내가 희생해야 하는데!"

"망할 놈! 후회하게 될 거다!"


조정의 예상대로 농부들에게서 농작물을 강제로 수매하는 과정은 험난하기 그지없었다. 칠대호 사업 전. 그러니까 물이 부족했을 시기부터 꿋꿋하게 농사를 지어온 농부들의 심성과 전투력은 어지간한 병사들조차도 애를 먹을 정도였고. 그 결과 졸지에 농부들의 집 앞에는 흙더미에서 뒹구며 신음하는 공무원들과 병사들이 작물 대신 자라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배급제 시행을 위한 중앙 정부의 수매 사업에 영향을 주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막말로 140만명을 죽인 정부가 그깟 농부들을 갈아엎는 것을 어려워하겠는가?


대답은 당연히 '아니다'였다.


제아무리 농부들이 강하다 한들 각자 이해관계가 갈리는 이상 각개격파가 가능했고. 지난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면 이골이 날 정도로 연습한 아델라이데의 중앙군은 농부들을 마치 포도를 밟아 으깨 포도즙을 만드는 것처럼 농부들의 집을 부수고 농부들의 가족을 총살한 다음, 마지막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절규하는 농부의 앞에서 농작물들을 수확하고 그를 대체할 새로운 농부를 보여준 다음 십자가에 묶어 불태웠다.


자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또 다시 승전했다는 소식을 들은 다른 국민들은 분개했으나, 언제나 그렇듯 자신의 앞으로 피가 묻은 생필품이 배달되자 비극을 겪은 농가들의 소식은 서서히 잊혀지기 시작했다.


마차들이 더 많이 오갈수록. 배급제가 문제없이 유지될수록 백성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농부들이 죽을 만한 짓을 했다고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얼마 더 지나자 우리 농가는 정부에 충성하는 충절 농가라는 선전문구가 나돌기 시작했다.


더 시간이 지나자, 백성들은 더 많은 물품을 얻고 싶어서 평소 아델라이데 왕국의 폭압적인 체제에 은연중에 반발하던 자신들의 이웃을 신고하기 시작했고. 아델라이데 중앙 정부는 그런 밀고자들에게 '충성스러운 백성임을 증명하는 훈장'과 함께 더 많은 생필품을 배급받을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주었다.


아델라이데의 백성들이 몸소 보여주고 있듯. 국가의 통합이란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반항하는 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린다면. 어찌되었건 문제는 해결되지 않겠는가.


*


딸랑! 딸랑!


"어서오세요!"


여관 안은 북적거렸지만 시끄럽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각자 술잔을 들고 있었으나 비어 있지는 않았고. 급사는 예쁘장했지만 딱히 선정적인 복장을 입지 않고 있었다.


"좋은 여관이군."

"감사합니다. 저쪽에 앉아주세요!"


여행자는 오랜만에 본 좋은 여관에 만족하면서 급사가 안내해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메뉴판을 들고 주문을 하려는 찰나, 그가 대평원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본 주정뱅이들이 그의 곁에 다가와 앉았다.


"어이 형씨. 보아하니 이곳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북에서 내려왔수?"

"....그렇게 티가 나나?"

"여기 남쪽에서는 그렇게 얇게 입고 다니지 않거든. 게다가 억양도 다르고 말이야."

"흐음."


여행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주정뱅이들을 훑었다. 다들 술에 취해 얼굴을 붉히고는 있지만 딱히 적의가 보이지 않는 모습. 그는 가늘게 떴던 눈을 거두고서 주문을 했다.


"여기 쇠고기 스튜와...라거? 아무튼 그걸 한 잔."

"예! 쇠고기 스튜와 라거 한 잔이요!"


주문이 들어가자. 주정뱅이들은 뭐가 그리 우스운지 킬킬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당신 라거를 모르나?"

"술... 아닌가? 솔직히 잘 모르겠군. 무슨 술이지? 포도주인가?"

"아하하하! 포도주..! 아이고!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만?"

"맥주일세 이 친구야! 여기 남쪽에서는 맥주라 하면 라거. 라거라 하면 맥주야!"

"오호라."


북쪽. 그러니까 시트러스. 매그놀리아, 단델라이언 왕국에서 맥주란 곧 에일을 뜻했다. 기본적으로 남쪽보다 기온이 높기도 하거니와. 원래부터 에일만 만들다보니 에일이란 말이 곧 맥주를 뜻하게 된 것이다.


그에 반해 평균적인 기온이 낮은 남쪽에서는 라거가 맥주를 뜻하는 말이었는데. 맥주에 향을 첨가하니 복잡한 맛을 내니 할 여유가 없었던 남부인들에게 라거의 청량감과 옅은 향은 대평원에서 라거가 맥주라는 뜻으로 퍼지게 된 주요한 이유라 해도 무방했다.


"쇠고기 스튜와 라거 한 잔 나왔습니다."

"고맙군."


여행자가 스튜 한 술을 뜨고 달아오른 입을 라거로 축이자. 그의 입에서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워우. 확실히 에일하고는 맛이 다르군. 향은 옅지만 청량감이 뛰어나. 게다가 굉장히 차가운데?"

"거 이 친구 맥주 맛 좀 아는가 보구만!"

"나쁘지 않아... 솔직히 북쪽에서 남쪽이라 하면 지지리도 못사는 깡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인데. 술 맛을 보니 틀린 말이었군."

"아하하하!"


여행자는 옅게 웃으면서 식사를 계속했다. 중간 중간 주정쟁이들이 얘기를 건네기는 했지만. 여행자는 그때마다 적절한 답을 건네주면서 그들의 지식욕을 만족시켰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는 순간. 여행자는 그들이 자신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급사에게 은화 하나를 던져주며 그들에게 라거 한 잔씩을 돌리는 걸 잊지 않았다.


"이건 내 호의니까 받도록 하게. 남쪽으로 내려와선 사람과 대화한 적이 드물어서 말이야."

"휘유~! 쏜다니까 고맙게 마시겠네 친구! 그런데... 자네. 이름이 뭔가?"

"내 이름 말인가?"


마지막 질문을 들은 여행자는 지금껏 눌러썼던 후드를 벗어 얼굴을 드러냈다. 짧고 단정하게 관리된 수염과 잔흉터로 뒤덮은 전사의 얼굴을 본 주정뱅이들은 깜짝 놀라며 라거를 비우기 시작했다.


"레이스터 제라드. 편하게 '제라드'라고 불러주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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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나약함에서 강대함으로(1) 21.05.10 36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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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금의환향(3) 21.05.03 38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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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금의환향(1) 21.04.19 96 1 12쪽
71 옛 계약(2) 21.04.13 41 1 12쪽
70 옛 계약(1) 21.04.12 74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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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남에서 온 손님(1) 21.03.23 52 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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