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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범 님의 서재입니다.

지옥불 난이도의 이세계 생존기.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지니범
작품등록일 :
2020.07.30 01:13
최근연재일 :
2021.06.30 06:00
연재수 :
8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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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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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7
글자수 :
465,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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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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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하나의 깃발 아래에서(3)

DUMMY

"에...엘베로스 공작...."

"예, 폐하! 신이 여기 있사옵니다! 하명하소서!"

"쿨럭! 쿨럭!"

"폐하!"

"허억...허억...! 서기...서기를..!"

"뭣들 하느냐! 어서 서기관과 어의를 데려오거라!"

"예!"


왕성 안에서 그 무엇보다 밝게 타오르는 왕의 침실. 그러나 일국을 이끌던 군주는 숨 쉴 기력마저 잃어가며 마지막 말을 남기려 가래 끓는 목소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지...짐이 죽거늘.... 그대가 섭정을..."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폐하. 어서 쾌차하고 일어나소서. 시트러스의 2천만 백성들이 폐하의 쾌유를 기원하고 있사옵니다!"

"커헉! 커허어억!"

"폐하!"


왕의 목소리가 말려들어가자. 어의가 달려와 목에 맺힌 가래를 서둘러 빼냈다. 가래를 뱉는 하찮은 일조차 할 수 없는 노쇠한 육신. 이제 그의 죽음은 얼마 남지 않았다.


"허어억...하아아...공작..... 켈러.... 대공은... 맹세를 지킬 걸세."

"그는 맹세를 이행할 것입니다. 폐하의 시대가 끝나고 제가 왕좌를 지키는 동안. 그 누구도 신성한 왕좌에 앉지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신께 맹세합니다."

"레나시아...그 아이가 여자가 되어 이 왕성으로 온다면.."

"왕좌는 그녀의 것이 될 겁니다. 폐하의 아이이자 제 아이입니다.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짐이.. 지켜보겠노라..."

"폐하...! 폐하! 폐하!"


왕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공작의 손을 잡고 있던 손이 내려가고. 쇳소리를 내던 호흡음도 가라앉기 시작했다.


"레나시아..."


툭.


내려가던 손이 침대에 닿았다. 몸은 식어가고. 눈은 감긴 채 다시는 떠지지 않았다. 시트러스 왕국의 32대 국왕이자 레나시아의 아버지가 더 이상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다.


"....사망 시각.. 3월 7일 오후 3시 24분.."


비통한 표정의 어의가 연필을 사각거리는 소리가 멎어들자. 침실 안에는 침묵과 울음소리가 가득 차기 시작했다. 왕국을 지탱하던 큰 어르신이자. 왕국의 지존이었던 자. 그러면서도 자신의 모든 가족을 잃은 슬픔을 감당하여야 했던 왕의 비극이 드디어 끝났다.


그리고 이제부터 왕이 겪은 비극은. 시트러스의 2000만 백성들이 감당해야 할 것이다.


*


"좋습니다 공주님. 착실하게 공부를 한 티가 나는군요. 평소에도 그렇게 잘 하시면 좋을텐데.."


교사를 맡은 폴 공작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고귀한 핏줄의 태생은 천한 농민들과는 질적으로는 다른지 늙은 기사인 그가 보기에도 레나시아 공주의 학업 성취도는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럼 다음 문제도 맞힌다면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절대적인 식량의 양이 부족한 상황에서 지도자는 식량의 부족을 어떻게 해결하여야 할까요? 단. 이 상황에서 국내 생산은 한계에 이르렀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음... 외국에서 수입해와야 해요."

"좋은 답변이지만. 아직 부족하군요. 절대적인 식량의 양이 부족하다면 필시 마름병같은 농업에 차질을 주는 대규모 역질이 돌았을 것이고. 외국 또한 그런 역질에서 무사하지 못합니다."

"으윽.."

"자. 그렇다면 어떤 대가를 주어야 외국의 체면을 살리면서도 국민들을 먹여살릴 수 있을만한 대규모의 식량 수입을 할 수 있을까요?"


레나시아의 두뇌가 팽팽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사실 이 문제는 왕족인 그녀에게도 가혹하리만치 어려운 문제였지만. 본래 9시가 되어야 끝날 강의를 12시에 끝낼 수 있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서로에게 어떠한 자원이 얼마나 편중되어 있는지. 평소 외국과의 관계가 어떠하였는지. 왕국의 식량 비축분은 얼마인지조차 알려주지 않은. 사실상 해답이라기보다는 소설을 써야 하는 문제였지만. 레나시아의 명석한 두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답을 찾았다.


"전쟁을 하면 돼요!"

"..전쟁 말입니까?"

"네! 가뭄이나 역질이 돈 것은 우리나라의 번영과 안정을 시기하고 질투한 외국의 탓이니 우리 모두 힘을 합쳐서 외국을 쳐서 가뭄과 역질을 퍼트린 죗값을 물게 하고 그 나라의 수확물로 우리 가족의 주린 배를 채우게 하자고 선동하면 되지 않을까요?"


공주가 이렇게 나오니 외려 당황한 것은 폴 공작이었다. 윤리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생각할 가치도 없이 오답이었지만. 국가의 지도자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매력적인 선택지임은 분명하다.


전쟁은 본디 식량이 부족할 때 일으키면 안 되는 것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식량이 부족해서 전쟁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고 있을 때. 문 바깥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쾌한 답이구나!"

"이 목소리는.. 폐하?!"

"헛!"


라이투스 폰 켈러. 통칭 국왕이라 불리는 존재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 공부방은 순식간에 그의 존재감에 압도되었다. 그러나 그는 레나시아가 굳어있는 것을 개의치 않는지, 아니면 그냥 그녀를 배려할 생각이 없는지 가까이 다가가서는 말했다.


"역시나 레나시아 넌 타고난 지배자다. 응당 왕이라면 백성들을 인도할 의무가 있는 법이지. 설령 그것이 다른 이들의 파멸을 전제로 하는 것일지라도 말이야."

"폐하. 하지만 그것은..!"

"윤리에 어긋난다고? 그렇게 말할 셈인가 폴 공작?"

"그..!"


폴 공작은 차마 '그렇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의 주군이자 아델라이데의 주인인 국왕을 재단하는 것이 되니까.


*


"세유라벤 산맥을 넘어가란 말입니까?"

"부탁하네 제라드 경. 그대 말고는 이 임무를 맡길 적임자가 없어."

"후우우우..."


본래 파문받고 왕실 친위기사직에서 해임된 그가 엘베레스 공작과 독대하는 이 상황은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왕국의 미래라는 막중한 책임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끌었다. 세유라벤 산맥 너머. 레나시아를 보호하고 있을 켈러와 접촉하는 것이 제라드가 맡을 임무였다.


왕실 친위기사는 왕이 승하하고 왕가가 전멸한 이상 지휘권이 붕 떠버려 사실상 백수 집단으로 전락하였고. 전원이 성자로 이루어진 탓에 섣불리 지휘권을 이양하려다가는 정치적 공세에 당할 수 있으니 논외였고. 정규군을 사적으로 유용할 수는 없었으니 또한 논외였다.


그러나 딱 하나. 이 시트러스의 토지에 남아있는 강자들 중에 엘베레스 공작이 은밀하면서도 자기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자는 제라드가 유일했던 것이다.


"가서... 자네의 제자와 접촉한 다음 레나시아의 피와 머리카락을 받아오게. 친자 확인을 할 때 필요하니 말일세."

"그거면 되는 겁니까? 레나시아는 계속 남부에 놔두고요?"

"아직은 때가 아닐세.. 아직은...불안요소들이 너무나 많아."

"..."


정치에는 문외한인 제라드였지만 엘베레스 공작이 말한 불안요소는 불 보듯 뻔했다. 왕권의 부재를 틈타 알음알음 자신들의 권리 증진을 노리는 귀족원의 능구렁이들과 계속해서 성장해왔지만 왕권에 억눌려 온 채 빛을 발하지 못한 상인들과 시민들의 압박. 어느 하나 쉬이 해결할 수 없는 난제였다.


"그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내가 최선을 다해보겠네. 그러니 그대는 남쪽으로. 남쪽으로 향하게. 레나시아를.. 내 손녀를 찾아주게."


일국의 공작이자 섭정인 엘베레스가 이렇게까지 비굴하게 나오자 제라드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다. 그의 정치적인 권력과 권위는 막강했고. 왕국을 떠나지 않는 이상 그의 부탁아닌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켈러... 과연 네가 소망한대로 대평원의 지배자가 된 것이냐?-


제라드는 머리를 쓸어내린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튼을 들추자 어느새 어둠은 사라지고 서서히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남부로 가도록 하죠. 이 왕국의 유일한 후계자를 만나러.."


*


"현재 저희 아델라이데의 군대는 약 20만명의 정원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예비군까지 포함한다면 약 60만 정도의 병력입니만. 실제로 이 숫자가 전장에 투입될 일은 없겠지요."

"맞는 말이다. 그나저나. 짐이 명령한 대포의 개발은 어찌 되어가고 있는가?"

"그렇잖아도 오늘 새벽에 조합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어느 정도 기술적으로 진전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는군요."

"...그렇게까지 만드는 게 어려운가?"

"강선을 새기는 것. 대포의 무게를 적절하게 조절하는 것. 작약의 양. 포탄의 형상과 재질 모두 고려해야 하니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겠지요. 그리 신경쓰지 마십시오. 어차피 공학자들이야 쥐어짜면 결과를 내뱉는 자들 아닙니까."


지금도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공학자들이 듣는다면 피를 토할듯한 구절이 술술 흘러나온다. 근대적인 기술이 얼마나 성취하기 어려운 것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세르누엘라 백작이기에 내뱉을 수 있는 말이겠지만.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국왕 또한 이해심이 없기로는 마찬가지였다.


세르누엘라 백작이 다음으로 보고할 것을 정리하는 사이. 국왕은 테라스의 난간에 팔을 올려놓고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제법 일국의 수도다운 모습을 갖추어가고 있구나."

"예?.. 아, 그렇습니다 폐하. 지금도 아델라이데 전역에서 온갖 귀한 물자들이 하늘산으로 오고 있으니. 이대로만 간다면 폐하께서 계획하셨던 300만명이 사는 도시가 만들어지는 것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겠지요."

"음."


말이야 그렇겠지만 사실 국왕은 300만이라는 숫자에 그리 연연하지 않았다. 말이야 몇백만이지. 지금 아델라이데의 전 인구가 700만 남짓이고 전쟁으로 인해 성비까지 막장이 된 것을 고려하면 아델라이데의 인구는 북부에 비해 느린 속도로 성장할 것이고. 켈러 왕이 늙어 죽을 때에도 50만명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국왕은 인구같은 자신이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일치감치 집착을 놓았다. 괜히 차우셰스쿠나 히틀러같이 인구를 늘리겠답시고 민중을 도탄에 빠트리는 것보다야 수백년에 걸쳐 인구를 증가시키는 것이 더 바람직하니 말이다.


"폐하?"

"왜 그러지?"

"보고를 이어가도 되겠습니까?"

"아, 그러게나."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세르누엘라 백작은 다시 보고를 시작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여러가지 대규모 토목공사와 개간사업.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성인 남성들의 급격한 감소로 인해 실업률은 더 없이 낮지만. 그에 반해 백성들이 받는 실질적인 소득은 전쟁 전보다 훨씬 줄어들었습니다."

"어쩔 수 없지 않나. 자금도 무한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야. 대평원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만드는 데 쓰이는 자재 값만 해도 어마무시하단 말일세."

"그렇다면 꼭 필요한 공사 외에 다른 공사를 일시적으로 중단시키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것도 안 돼. 갑자기 공사를 중지시키면 노동자들만 일자리를 잃는 것이 아니라 공사장에 자재를 납품하던 사업자들도 일자리를 잃게 된단 말일세."


언제 어디서든 그놈의 돈이 문제였다. 전쟁으로 인해 서민 경제는 고사하기 일보 직전인데 거기다가 대규모 공사까지 미친듯이 벌이고 있으니 나라에 돈이 들어오는 것이 이상할 지경.


덕분에 사람 수가 적은데도 본래 받던 임금의 반절을 겨우 받는 처지가 되었으니. 가뜩이나 대학살로 인해 이미지가 좋지 않은 켈러 왕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되기 전에 노동자들의 임금 문제를 해결할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나왔다.




추천과 댓글은 작가가 연중할 수 없게 만드는 방법 중 가장 흔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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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금의환향(1) 21.04.19 95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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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옛 계약(1) 21.04.12 74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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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혈육(1) 21.04.05 50 1 12쪽
67 남에서 온 손님(1) 21.03.23 51 1 14쪽
66 북에서 온 손님(1) 21.03.22 44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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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하나의 깃발 아래에서(2) 21.03.09 63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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