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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범 님의 서재입니다.

지옥불 난이도의 이세계 생존기.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지니범
작품등록일 :
2020.07.30 01:13
최근연재일 :
2021.06.30 06:00
연재수 :
8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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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5,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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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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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혈육(2)

DUMMY

"...그리하여. 아직 선왕의 혈육께서 국위를 맡으시기에는 그 보령이 어리신 바. 최소한 12세가 될 때까지는 아델라이데의 보호 아래 있기로 하였소."

"..."


왕성 안에서 폭탄 발언이 나왔음에도 귀족들은 아무런 반론을 하지 않았다. 그들도 스스로 지금의 시트러스로 선왕의 후계자가 돌아왔다가는 후계자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왕국이 왕의 후계자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웃기지만 결코 웃을 수 없는 상황. 이미 귀족들은 이미 저마다 도당을 짜고 입을 맞춘 모양인지. 서로 눈짓만 주고받을 뿐 딱히 입 밖으로 의견을 내지는 않았다.


귀족들이 뭉그적대는 것도 이쯤 되니 오히려 식은 땀을 흘려야 할 것은 섭정인 엘베레스 공작이었다. 분명 격한 반론을 예상하고 꺼낸 것인데, 오라는 논쟁거리는 안 오고 비정상적인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기묘한 침묵을 깬 것은. 섭정에게는 아쉽게도 쉴 새 없이 눈동자를 굴려대던 사르탈 후작이었다.


"삼가 신이 아뢰옵니다. 분명 선왕 폐하의 후계자를 보지 못함은 아쉬운 일이나. 어린 나이에 국위를 맡는 것보다야 남부의 보호를 받는 것이 더 나을 듯 합니다. 다만 그랬다가는 저희 왕국의 풍토와 맞지 않을 수 있으니. 저희 귀족들 중 식견과 학식이 높은 대귀족 중 한 명을 뽑아 후계자의 교사로 삼음이 가하지 않겠습니까?"


예컨대 자기 파벌의 지체 높은 귀족 중 하나를 남부에 보내 후계자의 동향을 감시하겠다는 것이다. 한 번 침묵이 깨어지니 이젠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어졌는지. 어느새 수많은 귀족들이 옳거니하며 사르탈 후작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었다.


"사르탈 후작 각하의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비록 아델라이데의 교육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나. 아델라이데와 시트러스는 지금까지 교류도 거의 없었던, 말하자면 소 닭보듯 하던 사이 아닙니까? 그런 곳에서 교육을 받다보면 식견이 좁아지는 것은 피할 수 없으니. 사르탈 후작 각하의 말씀대로 우리 중에서 적당한 자를 골라 교사로 파견하는 것이 가할 듯 합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추천하시겠소?"

"...."


사르탈 후작의 의견에 동의한 귀족은 사르탈 후작을 바라보았다. 바람잡이 역할은 해 놓았으니 마무리를 하라는 눈빛을 보낸 것이다.


"섭정 각하. 신이 적당한 자를 알고 있사온데, 감히 천거해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사르탈 후작은 그런 눈빛을 알아채지 못할 자가 아니었다. 재빠르게 움직인 그는 누가 추천할 인사를 고르기도 전에 미리 골라놓았던 자를 천거하였다.


"...좋소."

"고금을 막론하고 마법은 수많은 학문 중에서 으뜸이니, 저희 왕국의 대마법사이신 테이렌 님은 어떻겠습니까?"


테이렌. 그 이름을 들은 엘베레스 섭정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확실히 정치에서 떨어져 있는 대마법사라면 사르탈 후작에게 넘어가지 않을만한 용력과 신심을 갖춘 자. 그러나 그렇다면 구태여 사르탈 후작이 그를 추천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미 테이렌이란 이름 석자가 거론된 이상 섭정된 자로서 비답을 내리지 않을수도 없는터라. 섭정은 목소리를 가다듬어 달리 추천할 자가 있느냐는 질문을 내렸다.


"..송구하오나 각하. 사르탈 각하의 고견대로 대마법사 테이렌 님을 보내는 것이 옳습니다. 학식이 깊은 자는 대게 작위가 없고. 그렇다고 성직자들을 파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여러 학문을 전공한 자이자 총명하기 이를 데 없는 대마법사야말로 차기의 국왕 폐하를 양성하는 것에 가장 걸맞지 않겠습니까?"

"에멘탈 백작의 말이 지극히 옳습니다."

"신 또한 가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래알 같던 귀족들의 의견이 마치 누가 양동이로 물을 들이부은 것마냥 거국적으로 일치되니 섭정으로서는 더 이상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당장 왕국의 차기 국왕이라는 거물을 가르치고 이끄는 데 적합한 인물로 대마법사인 테이렌만한 인물도 없다는 것을 섭정 자신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좋소. 그렇다면 본 섭정이 아델라이데의 재상과 잘 협의하여 테이렌 경을 남부로 내려보내리다. 오늘의 회의는 이만 파하도록 하겠소."


*


"이리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테이렌 경. 저는 미욱한 몸으로나마 아델라이데의 재상직을 맡고 있는 세르누엘라 폰 아르누스라 합니다."

"껄껄. 저 또한 반갑습니다. 늙은 몸뚱이로나마 시트러스의 대마법사직을 맡고 있는 솔트게릭 테이렌이라 합니다. 듣자하니 요즘 소문이 자자하신 아델라이데의 사람이시겠군요?"


예에. 하고 세르누엘라는 대답함과 동시에 노인의 안면을 살폈다. 자글자글한 주름은 서글서글하고 적당히 펴져 있었고. 마법사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로브는 100% 비단으로 이루어져 퍽이나 고급스러웠다. 그리고 그가 손으로 연신 쓰다듬고 있는 수염은 회색으로 물든 티도 없이 빛나는 백색이었으니. 그가 어느 정도의 대접을 받고 있는지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래.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것이지만. 귀국이 선왕 폐하의 후계자를 보호하고 양육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겠지요?"

"물론입니다. 경께서 아델라이데로 내려가신다면 알게 되겠지요. 비록 아직 어리시지만 그와 동시에 총명하신 분입니다. 필시 경의 가르침에도 잘 적응하리라 믿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테이렌이 웃음은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과연 사람을 피폐하게 하는 정쟁에서 멀리 떨어져 마법에 탐구했기 때문일까. 그의 육신은 노쇠하였지만 그의 눈빛은 아직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다행이다. 레나시아 공주님께 해가 될 자는 아니야.-


비록 마법사들의 생태를 재상이 알지는 못하나. 저런 맑은 눈을 가진 자를 의심한다면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재상은 언제나 그랬듯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남부의 풍토는 북부와는 달리 험하기 그지없으니 준비를 단단히 하시라고 말하고 싶으나.. 경께서는 이미 고명한 마법사이니 딱히 그럴 필요는 없겠지요. 게다가 호위도 검성인 제라드가 할테니 걱정할 필요도 없겠고요."

"허허. 마법사가 하나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제 한 몸 지키는 것이지요. 이래뵈도 젊었을 적에는 여러 전장을 거친 몸이랍니다."

"하하! 꼭 들어보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군요. 섭정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오?"

"이야기들은 잘들 나누셨소?"


재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맞춰 테이렌도 일어났으나. 섭정은 다시 그를 자리에 앉혔다.


"배려 덕에 편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호의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각하."

"시간을 내어주는 것 정도야 당연히 해야 할 도리지 않겠소....실례지만. 자리를 비켜주시겠소?"

"아,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고맙소."


세르누엘라 재상이 자리를 비우자. 섭정은 얼굴을 쓸어내리고는 이내 풀썩 자리에 앉았다. 그의 얼굴에는 체면도 억누르지 못할 피로감이 스며들어 있었지만. 테이렌은 구태여 그런 무례를 지적하지 않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어째서 후작의 제안을 승낙하셨소?"

"그야 다 이 왕국을 위한 것 아니겠습니까? 선왕께서는 성군이셨습니다. 명군인지 아닌지는 사람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성품만큼은 본받을만한 분이셨지요. 그런 분의 자손이라면 충분히 가르치고 싶은 것이 지식인으로서의 욕망 아니겠습니까?"

"지식인으로서의 욕망이라..."


섭정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선왕이 멀쩡하게 걷고 말했던 시절에는 왕국은 평화로웠으니까. 귀족들끼리의 다툼도 극히 드물었고. 평민들의 삶도 그럭저럭 안정적이었다.


오랜 재위 속에서 눈에 띄는 실패는 없었을지 몰라도. 눈에 띄는 업적 또한 없었으니 성군일지언정 명군의 반열에 들기는 어렵다는 것일까. 나이 좀 먹었다 치는 자들 중에서도 나이가 든 섭정은 쓴웃음을 지었다.


"정녕 그렇다면 그분의 후예도 그분과 같은 길을 걸으리라 생각하시오?"

"그거야 장담할 수 없는 일이지요. 훌륭한 신하들을 두고도 끝내 파멸한 군주들이야 수두룩하게 널려 있고. 정 반대로 내우외환의 상황 속에서도 중흥을 이룬 군주들도 널려 있는 것이 세상살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후계자에게 최선의 선택을 하도록 일어주는 것뿐입니다."


최선의 선택. 그것만 해도 얼마인가. 원래 세상이란 것은 미치도록 불합리한 법이라. 최악과 차악 중에 선택해야 하는 것이 반이요, 위선과 기만 중에 선택해야 하는 것이 반이었으니, 최선의 선택을 한다면 그야말로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할 판이다.


"그렇다..."

"섭정 각하."

".."


뭐라 말을 하려던 찰나 테이렌은 여전히 웃음을 지으면서 그의 말을 잘랐다.


"제가 사르탈 후작을 왕으로 모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섭정의 입이 벙긋거렸으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과연 대마법사라는 직책이 허울이 아니었던지. 언변에서 섭정은 연신 끌려가는 듯 했다.


"아니겠지요, 저 또한 그렇습니다. 제가 남부에 가는 목적은 그곳의 왕인 켈러. 즉 승리자 잭슨이 제가 아는 이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런..."


이쯤되니 엘베레스 섭정은 허탈한 심정마저 들었다. 대체 켈러 왕이란 작자는 인생을 어떻게 살았길래 대마법사와 연을 쌓고 지냈단 말인가?


"물론 그 인연이란 것이 지극히 얇기는 하나. 서로 이름을 듣는다면 환대할 정도이니 결코 옹졸하다 말할 수 없는 것이니. 제가 아델라이데로 가는 것은 한 때 여린 소년이었던 자가 강력한 군주로 벼려진 것을 가까이서 관찰하고 싶은 욕망이 발현입니다.


그러니 섭정 각하께서는 근심을 거두시지요. 저는 제 맡은 바 소임을 다하겠습니다. 후계자를 양육하고 교육시키며 나날을 보낼 터이니. 섭정 각하께서는 감히 왕위를 노리는 승냥이 떼들에게 횃불을 휘두르는 파수꾼의 역할을 다하시면 이 나라는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테이렌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섭정은 그 미소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없었다. 느껴지는 것이라곤 늙은 마법사의 탐욕스러운 지식욕과. 그런 늙은 마법사에게도 압도당한 일신의 무력함뿐.


"...그대의 뜻대로 하리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제자들에게 전할 말도 있고. 두꺼운 옷도 준비해야 하는지라."

"..."


마법사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필시 마법을 쓴 것이리라. 그러나 섭정의 눈은 바닥을 향해 떨구어져 있어 차마 그 광경을 바라보지 못했다. 이 지독한 무력감을 어찌 해결할 수 있을까?


"후우...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내가 쓰러질 때가 아니야.."


해결할 수 있는 방법따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왕위를 노리는 잠재적 반역자들과 음흉하기 그지없는 대마법사. 좀체 믿을 수가 없는 대평원의 왕국까지. 필부였다면 진저리를 치며 궁성을 뛰쳐나갔으리라.


성벽은 무너지고 풀과 나무뿌리에 뒤덮여 그 위엄을 잃고. 큰 바위는 빗물이 떨어져 작디 작은 자갈과 모래로 작아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오직 인간만이. 풀과 나무뿌리를 불태우고 바위 위에 천막을 치는 인간만이 굳건히 남아 버틸 뿐이다. 얼마나 큰 댓가를 치뤄서라도 살아남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이루고 싶은 단 하나의 욕망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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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금의환향(3) 21.05.03 38 0 12쪽
73 금의환향(2) 21.04.20 42 1 12쪽
72 금의환향(1) 21.04.19 95 1 12쪽
71 옛 계약(2) 21.04.13 41 1 12쪽
70 옛 계약(1) 21.04.12 74 1 12쪽
» 혈육(2) 21.04.06 89 1 12쪽
68 혈육(1) 21.04.05 50 1 12쪽
67 남에서 온 손님(1) 21.03.23 52 1 14쪽
66 북에서 온 손님(1) 21.03.22 44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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