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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범 님의 서재입니다.

지옥불 난이도의 이세계 생존기.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지니범
작품등록일 :
2020.07.30 01:13
최근연재일 :
2021.06.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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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5,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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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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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계약(2)

DUMMY

재상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백작이 건넨 '순결의 증서'를 살펴보았다. 과연 그의 말대로 이 증서에 적힌 것대로라면 로렐라이란 여식과 결혼하려면 아델라이데의 국왕인 켈러의 허락을 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허... 이것 참 곤란하군... 아는지는 모르겠다만 우리 아델라이데에서는 이런 증서라던가.. 순결을 증명하는 제도 같은 게 없어서... 어떻게 귀족원의 증빙을 받을 방법이 없나?"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나쁜 선례를 남기면 안 된다면서 세 번이나 거절당했습니다. 각하. 저 좀 도와주십시오. 저 정말 그녀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백작쯤이나 되는 인사가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바닥에 찧어가면서 애원하자 재상의 얼굴도 곤혹스럽게 변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대리인을 보내는 것이겠지만. 이 증서는 대리인의 사용이나 고용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어 백작이 직접 아델라이데로 가는 것 말고는 별 다른 방법이 없었다.


"우선.. 우선 알겠으니 돌아가 있게. 내 어떻게든 방도를 찾아보겠으니."

"감사합니다! 각하만 믿고 있겠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허허... 어여 일어나게나, 다 큰 어른이 칠칠치 못하게.."


감격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는 백작을 반쯤 끌어서 나가게 만든 뒤. 세르누엘라 재상은 양피지에 잉크를 묻혀 국왕에게 올릴 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간결하고도 빠지는 내용이 없게끔. 지금 이 상황이 외교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상황임을 알리는 호소문과 현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섭정에게 설명하는 문서들을 3시간에 걸쳐 쓴 세르누엘라 재상은 밀랍을 녹여 문서를 봉납한 뒤 자신을 호위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일렀다.


"게 있느냐?"

"무슨 일이십니까 각하?"

"본국에 있는 폐하께 급히 전해야 할 전갈이 있다. 제라드가 돌아오거든 이 문서를 가지고 하늘산으로 가달라고 부탁하게."

"아... 알겠습니다 각하. 이 문서들만 말입니까?"

"그래. 외교 문서니 열어볼 생각일랑 말고!"

"예!"


봉납이 손상되지 않게 조심스럽게 문서 뭉치를 받아든 호위병은 마침 코너를 돌아온 장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두 문서를 인도했고. 장교는 호텔에 내려가 병영으로 돌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한 다음 문서 두개를 영관급 고위 장교에게 인도했다.


고위 장교는 마법 수정구를 통해 외교부에 연락을 넣은 다음 상황 설명을 하였고. 이윽고 외교부에서는 문서 수령을 위해 시종을 보냈다. 시종이 오자 고위 장교는 철통같이 시종을 호위하라 명령했고. 시종은 졸지에 귀족이나 받을법한 경호를 받으며 외교부 청사로 돌아와 상급자에게 두 문서를 인계했다.


상급자에게 인도된 두개의 문서는 곧이어 외교부의 수장인 외교대신에게 전달되었고. 그는 섭정직을 맡고 있는 엘베레스 공작에게 문서들을 가져갔다.


길고도 긴 관료제의 통로를 지나온 문서들 중 국왕에게 진상할 문서는 엄중히 보관되었고. 섭정이 읽어야 할 문서는 말라버린 봉납이 뜯긴 채 그에게 읽혀지고 있었다.


"...후우..."


장문의 글을 읽은 섭정은 귀찮은 것이 생겼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 다음 그의 시종을 불렀다.


"가서 귀족들을 불러와라. 긴급히 논해야 할 상황이 있다."

"예, 각하!"


*


"대체 무슨 일입니까? 비상 소집이라뇨? 설마 또 이단들이 쳐들어 온 겁니까?"

"그..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섭정 각하께서 설명을 해주실테니 자리에 앉으시죠."


난데없는 비상 소집령에 귀족들은 불안에 떨었다. 남부에서 그 난리가 난지 이제 겨우 7년이 지났을 뿐이다.


모든 귀족들이 제 자리에 앉자. 섭정은 시종들에게 일러 섭정이 보았던 문서를 복사한 것을 귀족들에게 나누어주라 일렀다.


그리고 몇 분간의 정적이 흐르고. 어느새 종이를 펄럭거리는 소리가 멎었을 때였다.


"섭정 각하... 아무래도 아델라이데로 향하는 길을 뚫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문장 하나만을 말했지만 파장은 가볍지 않았다. 남부로 향하는 길. 길 자체야 어렵잖게 찾을 수 있었다. 당장 수천명에 이르는 사람들도 하늘산을 세울 때 산을 넘어갔으니 말이다.


다만 쉴 새 없이 눈보라가 치고 기온도 영하 이상으로 올라가 본 적이 없는 좁고 험한 통로를 국가와 국가 간의 유일한 창구로 삼는다? 그건 전혀 이야기가 달랐다. 개인의 교류와 국가의 교류의 스케일이 같을 수는 없었으니까.


"나도 그 문제에 대해 경들과 의논하고 싶어 이렇게 비상 소집을 하게 되었고. 솔직히 말해 결혼을 포기하라고 말하고 싶지만.. 대역죄인도 아닌데 귀족간의 결혼을 강제로 파토내는 것은 전례도 없는 일이거니와. 자칫하면 귀족의 개인사에 중앙 정부가 간섭할 수 있다는 나쁜 선례를 남길 수도 있는 노릇 아니겠소?"

"맞는 말씀입니다. 마침 아델라이데의 재상이 아직 왕국에 남아있으니 국교를 트는 것은 간단한 의례를 치르면 되겠지만. 실질적으로 대규모의 인적, 물적 교류가 안정적으로 행해질 수 있는 지점은 단적으로 말해 우리 왕국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국교를 틀고 서로 교류하겠다 말하는 것은 쉬웠다. 사람 몇 명 보내는 것은 별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앞서 말했듯 국가 간의 안정적인 교류가 가능할만한 곳이 없었기에 대평원이 그동안 고립되어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그 점에 대해서라면 걱정하지 마시오. 재상에게 물어보니 이미 아델라이데 측에서 세유라벤 산맥을 관통하는 거대한 터널을 파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소. 재상이 건너오기 몇 개월 전부터 시작된 공사아니. 이제 적어도 중간 정도는 파내지 않았겠소?"


어떻게든 북부와 남부를 잇기 위해 말 그대로 사람을 갈아넣어가며 터널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시트러스의 귀족이 알게 된다면 기함을 하겠지만. 현재로서는 통로가 만들어진다는 것만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귀족간의 결혼이 한 나라의 왕족과 연결되어 있는 이상 시트러스가 혼자서 해결한다면 타국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더.


"...그렇다면 기다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연락할 방법이 한정되어 있는 이상. 우리 쪽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호위를 붙여서 라우란스 백작과 그의 약혼녀를 세유라벤 산맥 이남으로 보내는 것뿐입니다."

"...정말로 그게 최선이겠군."


귀족들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나라의 사정이 정말로 좋지가 않았다. 중앙 정부의 재정은 남부 전란으로 인해 반쯤 말라붙어 있었고. 그나마 여력이 있는 대귀족들도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 무료 복지나 수익성이 떨어지는 대민 사업에 투자하다보니 사정이 궁한 것은 매한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사소해보이지만 국가적 역량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일이 터지다니. 시트러스 왕국으로서는 울고 있는데 뺨까지 맞은 격이었다.


*


"흐음.. 과연 이 일이 어떻게 되려나.."


세르누엘라 재상은 지팡이를 쓰다듬으면서 중얼거렸다. 지금도 라우란스 백작으로부터 일이 너무 커지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 섞인 편지를 받은 그였지만 재상인 그로서도 다른 나라의 조정에서 처결하겠다 나서니 이쯤되면 백작이나 재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똑똑!


"들어오게."


끼익.


제라드가 그의 방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오랜 여행을 한 탓인지, 아니면 그냥 여러번 왔다리갔다리한 탓인지,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제라드는 자신의 품에서 고급스럽게 포장된 편지를 꺼내 재상에게 건넸다.


"사람을 참 여러번 부려먹으시는군요 재상 각하. 국왕 폐하로부터 답변을 받아왔습니다."

"제라드..! 그대가 직접 올 줄은 몰랐는데.. 아무튼 고맙네. 내 아랫것들에게 말해 요깃거리를 대접할테니 내려가 있게나."

"...알겠습니다."


그에게는 안타깝게도. 화려한 미사여구로 장식된 국왕의 답신은 없었다. 그 대신 양피지에 적혀있는 것은 왕족들만 쓸 수 있는 보라색 잉크로 간결하게 적힌 한 문구.


-터널이 뚫렸으니 짐이 직접 가겠다.-


*


다음날, 왕성.


"...우리의 국왕 폐하께서 친히 오시겠답니다."

"국왕 폐하라 함은 켈러 국왕을 일컫는 것이겠지?"

"물론입니다 각하."


간결한 문구였지만 그 파장은 컸다. 아델라이데의 국왕이 직접 시트러스에 오겠다는 폭탄선언에 섭정의 얼굴, 나아가 왕성에 모인 모든 귀족들의 눈이 댕그랗게 떠졌다.


"그렇다면 우리도 준비할 수밖에 없겠군. 아, 걱정말게, 의전은 타국의 군주를 대하는 예로 행해질 터이니."

"그렇다면 저희로서야 안심이 됩니다. 국왕 폐하께서도 시트러스의 사정을 알고 계시니 너무 화려한 의전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걱정 말게, 우리로서도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으니, 그렇지 않은가?"


귀족들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화려한 의전은 보기에는 좋지만 돈을 먹는 괴물이나 다름없다. 남부 때문에 재정이 말라붙어가는 지금 지출이 더 생기는 것도 가슴이 아픈 일인데 괜히 자존심을 세우겠다고 화려한 의전을 하자는 머저리같은 귀족은 없었다.


"뭐, 그렇다는근. 그래서? 국왕 폐하께서는 언제쯤 오시겠는가?"

"터널이 뚫렸으니 직선거리로 오실텐데... 제라드 경? 그대가 보기에는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직접 자기 발로 산맥을 뛰어넘은 유일한 인물인(테이렌은 순간이동을 썼다.) 제라드야말로 거리를 가장 잘 아는 인물이라 생각해, 재상은 제라드의 의견을 물었다.


"... 왕쯤 되는 이가 혼자 오지는 않을테고, 필시 호위대와 같이 올 터인데 세유라벤 산맥을 직선으로 통과한다면 이 수도를 기준으로 빨리 온다면 한 2주.. 늦장을 부린다고 친다면 최대 3주 정도..."

"아무튼 1달은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군. 준비를 서둘러야겠어."


섭정이 짐짓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지금도 과로로 고생하고 있는데 거기다 환영식 준비까지 곁들인다고 생각하니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절로 일하기가 싫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섭정 각하. 그렇다면 환영식에 쓰일 재화는 어디서 충당하실 겁니까? 미리 말해두겠지만 이미 중앙의 재정은 한계입니다."

"걱정 말게. 내탕금(국왕의 개인 자금을 이르는 말)이 있으니까."


내탕금을 쓰겠다는 말에 귀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내탕금은 왕의 자금. 제아무리 섭정이라 해도 섣불리 내탕금을 쓰겠다는 말은 아무래도 꺼려졌던 것이다.


그러나 엘베레스 공작에게는 선왕의 유훈이라는 강력한 명분과 늙어오면서 얻은 말발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고작 귀족들 몇몇의 웅성거림에 굴할 그가 아니다.


"허나.. 내탕금을 쓰는 것은..."


귀족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엘베레스 공작은 자신이 말함으로서 그의 발언을 끊었다.


"어허. 지금 나는 선왕 폐하께서 전권을 이양하셨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 아니면, 내탕금을 건드리지 않고 환영식을 치르지 않을 방법이라도 있는 겐가. 자칫 환영식이 초라해지기라도 하면 국격이 훼손됨은 말할 필요도 없을 터인데.."


화려하지는 않지만 초라하지는 않게. 어려운 주문이기에 엘베레스 정도의 능력이 없다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난 귀족에게 있어 더 두려운 것은 국격이 훼손될 수도 있다는 섭정의 압박이었다.


"아..아닙니다 각하! 제가 그만 실언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알면 되었네. 시간도 늦었고 하니 이만 회의는 파하도록 하겠네, 이견 있는가?"

"""없습니다 각하!"""

"그럼 오늘은 이만 회의를 파하도록 하겠네. 이만 돌아가도록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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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혈육(1) 21.04.05 50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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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북에서 온 손님(1) 21.03.22 44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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