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의미 (5)
115.
‘이쪽 세계’에서는 최초로 조우한 신인류와 깡통로봇. 둘은 서로를 한참 동안이나 조용히 탐색했고, 정적을 깬 건 [올 포 원] 쪽이었다.
“근데 넌 뭐냐? 로봇? 평범한 로봇은 아닌 것 같은데?”
- ... 그 질문은 제가 먼저 했습니다. 당신은 아버지 종족처럼 생겼지만 아예 다른 종족이군요. 당신은 대체 어떤 존재입니까?
“... 아버지 종족은 또 뭐야. 설정 개 거지같이도 짜놨네. 에휴.”
[올 포 원]은 짜증난다는 듯 한숨을 한 번 푹 내쉬더니.
“그래. 니 정체 따위 알 게 뭐냐. 그냥 죽이면 되지.”
양 팔을 다시 한 번 거대한 낫으로 변형시키고는, 검은 반원을 그리며 휘둘렀다. 행성 루드비코 때에서 전혀 발전히지 않은, 정교하지 않은 투박한 공격.
- ... 같잖군요.
[뱀파이어]는 그 공격을 가볍게 피해냈지만, 녀석이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바로 자기 뒤의 ‘마나석 원석’은 공격을 피하는 방법 따위는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푸슉-! 촤아아악-
‘
- 아... 안 돼!
살덩어리에서 핏물이 폭포처럼 뿜어져 나오자, [뱀파이어]가 당황한 듯 소리쳤다. 허나 자기가 무슨 일을 한 지도 모르는 [올 포 원]은.
“아니. 씨발 이걸 피한다고?”
라 말하며 계속해서 양 팔을 막무가내로 휘두를 뿐이었다.
캉-! 캉-! 푹! 촤아아아악-
[뱀파이어]는 [올 포 원]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최대한 막아보려 했으나, 마나석 원석은 너무나도 컸다. 어디 한 곳 베이면 마치 금간 댐처럼 피가 터져나왔고, 마나석 원석에서는 인간의 의성어로 표현할 수 없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지... 지금이라도 공격을 멈춘다면 살려는 드리겠습니다!
“... 이 새끼 뭐래는 거야? 그냥 뒤져!”
---
쿵-!
“... 졸라 많이 때린 것 같은데, 기별도 안 가네.”
[올 포 원]이 공격을 멈췄다. 한참 동안이나 낫처럼 생긴 앞발을 휘둘렀건만, [뱀파이어]의 바디에는 여기저기 생채기만 조금 생겼을 뿐 처음 그대로 멀쩡했다. 허나 마나석 원석의 상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인지, 마나석 원석은 더 이상 심장처럼 고동치지 않았다. 그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고,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이제는 더 이상 ‘원석’이 아니라 그저 ‘다진 고기’라고밖에 할 수 없는 존재가 돼버린 셈이다.
찰박-
피바다 속에서 살덩어리를 만지는 [뱀파이어]. 녀석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이젠 완전히 못 쓰게 돼버렸군요. 우리 종족에게 있어 꼭 필요한 ‘물건’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된다면 Type-00가 나를 문책할지도 모르겠어요.
“이 새끼는 아까부터 지 혼자 자꾸 뭐라뭐라 꿍시렁대는거야?”
뚜두두둑-
[올 포 원]은 팔의 모양을 바꾸었다. 날카롭고 예리한 낫에서, 둔탁하고 묵직한 망치로.
- 하지만 혹시 모르죠. 당신이라는 특이한 존재를 생포해 간다면, Type-00가 나를 용서할지도.
촤자자작-!
이번에는 [뱀파이어]도, 방어가 아니라 공격을 준비했다.
쿵-!
둘은 치열하고 격렬하게 싸웠다. 싸우기 전에 나불대던 것과는 달리 말할 여유도 없이 공방을 주고받았고, 한 합씩 맞부딪힐 때마다 연구실 전체가 휘청거렸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유아라가 난간에서 한 발짝 물러나며 중얼거렸다.
“이거 왠지 불길한데... 괜히 여기 있다가 우리도 저것들 싸움에 휘말리는 거 아니에요?”
“... 적어도 유아라 넌 안 죽게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마... 말이라도 고맙네요.”
그 이후로도 유아라는 계속 작게 뭐라뭐라 궁시렁댔지만, 별로 귀에 들어오진 않았다. 내 정신은 온통, 아래층에서 싸우고 있는 두 녀석 쪽에 쏠려 있었으니까.
쿵-!
[올 포 원]이 벽에 한 번 부딪히면 연구실 벽이 페트병마냥 찌그러지고, [뱀파이어]가 공격을 받아내면 바닥이 유성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푹 파인다. 뭐. [뱀파이어]나 [올 포 원]이나, 마나량 20000을 훌쩍 넘기는, 이 우주에서 손에 꼽히는 강자들이니까.
[ 마나량 : 19438 (-6262) ]
뭐. 나는 저 둘에게 수치상으로는 확연히 밀리지만, 일 대 일은 질 자신이 없다. 애초에 여태 나보다 약한 놈들과 싸워본 경험이 더 적고, 게다가 나는 놈들을 알지만 놈들은 나를 모르니까.
허나.
“... 만에 하나 저거 둘 한 번에 상대할 일 생기면, 그냥 쪽도 없이 죽겠네.”
“... 그게 그렇게 여유 부리면서 뱉을 말인가요? 지금 이 상황에서?”
‘저쪽 세계’에 비해 ‘이쪽 세계’는, 너무 빨리 흔들리고 있다. 김석봉이 자주 보는 만화 주인공처럼 ‘헤에- 나 좀 강할지도-’ 하고 있다가는 모두를 지키기는커녕, 시대에 휩쓸려 가장 먼저 죽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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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둘의 싸움은 결국 [올 포 원]의 패배로 끝이 났다. 이전에 행성 루드비코에서 만났을 때보단 자기 몸 다루는 것에 많이 익숙해진 모양이었지만, 여전히 미숙한 부분은 존재했고 그것이 승부를 갈랐다.
꾸득- 꾸득-
“하아- 하아- 쿨럭... 또 졌네. 씨발...”
[뱀파이어]의 기계 촉수가 꽂힌 채 쓰러진 [올 포 원]. 녀석이 피를 토하며 입을 중얼거렸다.
물론 [뱀파이어]라 해서 멀쩡한 건 아니었다. 주무기인 기계 촉수들은 대부분 맛탱이가 갔고, 왼쪽 어깨부터 팔까지는 완전히 날아가버린 상태였으니까. 녀석은 힘들게 몸을 가누며, [올 포 원]을 향해 말했다.
- 이... 이제는 확신이 드는군요. 확실히 아까 ‘그것’보다는 당신에 대한 정보가, 훨씬 가치있습니다.
“... 이 새끼는 자꾸 뭐라 씨부리는거야. 알아듣게 얘기해야지.”
- ... 그 건방진 주둥이를 놀리는 것도 그게 마지막입니다. 당신은 이제 죽지도 살지도 않은 존재가 될 테니까요.
꾸득-
꿈틀거리는 [뱀파이어]의 촉수. ‘권속’이라 불리는 기계 기생충이 [올 포 원]의 몸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는 가운데, 녀석은 허탈하게 웃으며 뜬금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그래도 넌 ‘그 새끼’랑은 달리 싸울 만 했어. 다시 한 번 싸우면 그 땐 내가 이길걸. 쿨럭-”
- ... 도발입니까?
“그 새끼는 진짜... 하는 짓은 졸렬하기 짝이 없는데. 다시 싸워도 이길 거라는 이미지가 안 그려져. 분명 강하긴 너가 더 강한 것 같은데, 그거랑은 다른 무언가가 있단 말이지.”
- ... 아무 의미 없는 도발이군요. 당신 말은 전적으로 무시하겠습니다.
“아니. 의미가 있지. 너랑은 언젠가 다시 싸워 보고 싶으니까.”
툭-
짧은 말을 남기고, 눈을 감는 [올 포 원]. 움직임이라 부르기도 뭐한 그 단순한 행동에, [뱀파이어]는 상당히 당황한 듯 소리쳤다.
- 어... 어떻게? 대체 어떻게 ‘권속’이 심어진 생물이 자기 의지로 죽을 수 있는 거지?
물론 저건 [올 포 원]이 그저 아바타와 연결을 끊어버린 것에 불과하다. 허나 [뱀파이어]는 그걸 모른다.
- 이... 빌어먹을!
쿵-!
그저 찾고 먹고 진화하는 데 미쳐 있는 ‘저쪽 세계’의 깡통로봇들과 달리, ‘이쪽 세계’ [F.E.E.]는 상당히 감정적이다. 뭐. 나한테는 고마울 따름이다. 부상도 입었는데 감정적인 상태라면, 내 일만 편해지니까. 나는 주머니 속의 마나 사브르를 꾹 쥐며 말했다.
“야. 나 이제 슬슬 내려갔다 올게.”
“빠... 빨리 와야 해요. 무조건요.”
경호니 뭐니 하면서 무섭다고 징징댈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쿨하게 보내주는 유아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단번에 뛰어내렸다.
- 누... 누구입니까?
하. 그럼 그렇지. 역시나 반응한다. 뭐. 애초에 5층 이상의 높이에서 조용히 내려갈 방법은 없었지만.
쾅-!
썩어도 준치라고, 몸이 거의 반파된 상태로도 내 일격을 받아내는 [뱀파이어]. 허나 받아내고 죽지 않았다 뿐이지 대미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올 포 원]과의 싸움으로 기계 촉수가 몇 개 작동하지도 않는데, 그나마도 이제 거의 다 고철이 돼버렸다.
- 이... 빌어먹을 유기물 종족이!
촤라라락-
여유가 사라졌는지 경어 따윈 갖다버린 [뱀파이어]. 녀석은 재빨리 자신의 바디를 변형시켰다. 톱니바퀴로 이루어진 구체에 촉수가 달린 형태. 깡통로봇들이 최후의 상황에서 펼치는 자기 방어 모드다.
물론.
콰직!
최후의 상황에서 펼친다는 말은 곧 가장 약한 형태라는 의미. 나는 힘없이 날아드는 촉수들을 모두 피해 구체에 접근했고, [뱀파이어]의 약점인 ‘심장’부분에다가 팔을 꽂아 넣었다.
촤라라락-
자기 방어 모드를 펼친지 몇 초나 됐다고, 다시 인간 폼으로 돌아오는 [뱀파이어].
- 이... 종족 자체가 비겁한... 빌어먹을 유기물 덩어리들...
“... 잘 아네.”
나는 녀석의 심장에다가, 마나 사브르를 꽂아 넣었다.
---
찰박- 찰박-
“으... 비린내...”
내가 피바다 속에서 ID카드를 겨우 찾았을 즈음, 유아라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도... 돌아오기로 했으면서 왜 나보고 내려오라는 거예요?”
“... 어차피 메인 컴퓨터는 아래에 있으니 내려와야 하잖아.”
“다... 당신이 올라왔다가 다시 같이 내려가면... 뭐... 뭐에요. 왜 그런 눈으로 봐요?”
“아니. 너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태연자약하게 해서.”
“... 진짜 말을 해도 꼭... 아무튼 그거 줘 봐요. 접속해 볼 테니까.”
타악-!
내가 ID카드를 내밀기가 무섭게, 낚아채듯 가져가는 유아라. 녀석은 피 튀는 걸 의식해서인지 안짱다리로 메인 컴퓨터로 향했다.
“... 그거 온통 피투성이인데 돌아가려나.”
“그걸 말이라고 해요? 요즘 기술이 얼마나 좋은데요... 됐다.”
[ 권한$! 없습니다. ]
[ ‘베드로’ ^$# 이상의 권한을 가진 ID카드를 @#$@해 주십시오. ]
이걸 불행인지 다행인지, 화면이 개박살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깨지지는 않은 상태라 대강의 의미 파악은 가능했다.
타다다닥-
ID카드를 태그하고도 몇 번의 보안 절차가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그 모든 것들을 일사천리로 뚫어내는 유아라. 믿기 힘든 일이 눈앞에서 펼쳐지니까,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 유아라 너 의외로 이런 거 잘 하네.”
“다... 당연하죠! 나... 나는 뭐 아무 재주도 없는 줄 알아요? 이런 건 우리 회사에도 비슷한 보안장치가 있다구요.”
“...”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닌데 지 혼자 발끈하는 유아라. 녀석은 저 혼자 씩씩대면서도 계속해서 보안을 해제했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메인 컴퓨터 화면에는 기다리던 창이 떠올랐다.
[ @$#@되었습니다. ]
[ 열람하고자 하는 프로젝트명을 !@#!@% 해 주십시오. ]
“이제 대충 된 것 같네요. 뭐부터-”
“[이데아 프로젝트].”
- 작가의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ㅠ
새 공지가 등록됐으니 부디 확인해 주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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