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5. 메리 크리스마스 (2)
100.5
물론 라인하르트의 ‘선물’이라는 말에 기대라고는 1도 안 했다. 하지만.
“허허. 사실 선물 같은 건 없고, 연말이라고 좋은 홍차가 들어와서 자네랑 차나 한잔 할까 하고 불러 봤네.”
“...”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엿을 먹여 올 줄이야. 사람을 교장실까지 찾아오게 해 놓고, 하는 말이 고작 차나 한 잔 할까 해서라니-
“사실 이렇게 크리스마스에 여유로운 차 한 잔을 할 수 있다는 것도, 다 하늘이 주신 일종의 선물 같은 게 아니겠나? 허허.”
말이나 못 하면 밉지라도 않지. 다시 한 번, 이 노인네는 반드시 내 손으로 죽여야 한다고 다짐하는 한편, 라인하르트가 찻잔을 세팅하며 중얼거렸다.
“헌터 시험은 잘 봤는가?”
“... 그냥저냥 봤습니다.”
“자네 기준에서 그냥저냥 봤다면 합격했겠구먼. 허허.”
“...”
“축하의 의미로 한 잔 받게.”
쪼르르-
내 찻잔에 차를 가득 채운 라인하르트는, 이번엔 자기 잔에 차를 채우면서 은근슬쩍 물어왔다.
“그래. 이젠 어떻게 할 생각인가?”
“... 뭘 말입니까.”
“이제는 슬슬 거취를 정해야 할 때가 아닌가? 물론 헌터 자격증을 가진 채로 1년 더 이니시움에 머무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건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네만. 허허.”
“... 박준 선배도 1년 더 다녔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박준 그 아이는 정예원 때문에 남은 거 아니던가? 허허. 자네도 설마-”
“... 졸업할 겁니다.”
“허허. 역시 그런가? 난 또 미련이 많이 남아 더 다니려는 줄 알았네.”
“...”
능글맞게 웃는 라인하르트. 뭐. 녀석이 맘에 들고 말고를 떠나서 라인하르트의 말이 맞긴 맞았다. 이제는 슬슬 방향성을 정해야 할 시점이었다.
깡통로봇들이 여기저기서 이것저것 주워 먹으며 강해지기 시작한 지금, 녀석들을 미리 족쳐 놓지 않는다면 링링과 유아라가 위험해지니까.
“근데 졸업할 거라면, 안보부 추천은 왜 거절했나? 마윤재가 꽤나 자네를 눈독 들이고 있을 뿐더러, 우주에서 그만한 직함도 없는데 말이지.”
“... 안보부 가면 일 많이 할 것 같아서 거절했습니다.”
“허허. 그렇구먼. 그런 거야.”
“...”
저 혼자 신나서 중얼거리는 라인하르트를 보며, 예순 살을 헛먹었다고 생각하던 찰나. 라인하르트가 한 모금 마시며 다시 한 번 물어왔다.
“그렇다면 자네, 아직 졸업하고 무엇을 할지에 대해선 확정된 건 없는 게지?”
“... 그렇긴 한데, 왜 자꾸 물으십니까?”
“허허. 향후 계획이 없다면, 내가 자네한테 자리를 하나 추천해 주고 싶어서 그렇다네.”
... 그럼 그렇지. 애초에 이 노인네가 고작 차나 마시자고 날 불렀을 리가 없었다. 나는 마시려던 찻잔을 도로 내려놓은 채, 무슨 꿍꿍이인지 들어나 보자는 마음으로 물었다.
“... 어떤 자리입니까?”
“허허. 별로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걸세. 아주 별 볼일 없는 자리니 말이야.”
스윽-
순간 품 안에서 품 안에서 종이봉투 하나를 꺼내는 라인하르트. 녀석은 그걸 조심스레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핸슨 최 교수의 사임서네.”
“... 예?”
“허허. 자네도 얼추 짐작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의 반응이로구먼. 아무튼 사실 몇 달 전부터, 어느 정도 예견돼 있던 일이라 생각하네.”
“...”
“그 친구가 워낙 괴로워했어야 말이지. 허허.”
묘한 기분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던 찰나, 라인하르트가 웃으며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핸슨 최가 맡던 핵심 강좌들이 꽤 많았는데 말이야... 수업을 또 몇 개씩 폐강할 순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 그렇죠.”
“그러니까, 자네 혹시 졸업하고도 계속 이니시움에 남아, 시간강사라도 해 볼 생각은 없나?”
“... 시간강사 말입니까?”
“허허. 별 볼 일 없는 자리라 하지 않았던가. 이니시움 내 연구실은 당연히 없고, 교직원 숙소도 제공되지 않고, 봉급도 거의 없다시피 한데다가 시간강사라는 이름답게 별 명예도 없지만...”
말꼬리를 늘이는 라인하르트. 녀석은 일부러 한 번 뜸을 들이고서 말을 이었다.
“언제 어느 때, 어느 행성의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연구’라는 핑계로 연합과 안보부의 눈을 피할 수 있다는, 별 거 아닌 장점이 있지. 허허.”
“... 정말 별 거 아닌 장점이네요.”
“허허. 그러게 말일세. 사람이 당당하면 연합과 안보부의 시선을 피할 이유가 없는데 말이지.”
“...”
“여튼,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인하르트의 질문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 강의의 퀄리티는 기대하지 마십시오.”
“허허. 필기만 12등이던 여자아이가, 몇 달 만에 학년 종합 3등이 됐는데 기대하지 말라니.”
“...”
나는 녀석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말없이 차를 입에 댔다. 홍차 특유의 쓴맛이 올라오는 가운데, 라인하르트가 창밖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간밤 사이, 밖에 눈이 많이 내렸구먼.”
“... 겨울이니까요.”
“나아가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발자국이 남겠어. 허허.”
- 작가의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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