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히어로 (2)
102.
교도소장은 일처리를 꽤 잘했다. 행성 루드비코에 도착한 것이 아침때인데, 점심을 먹기 전에 '멍청'이라는 가상의 신분으로 루드비코 소년교도소에 들어올 수 있었으니까.
디테일하게 파고들어가자면, 나의 죄목은 묻지마 살인이고 분노 제어용 칩이 심어진 ‘곰인형’을 들고 다니지 않으면 돌아버린다는 설정. 물론 곰인형 안에 있는 건 분노 제어용 칩 따위가 아니라,
- 확실히 이곳은 내부에서의 공격에 대한 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군. 미리 들어와 있는 선택이 옳았다.
[미스트]의 코어다. 이 녀석을 혼자 밖에 놔둘 순 없는 노릇이니까.
아무튼 포승줄에 묶인 채로 교도관을 기다리는 가운데, 나는 곰인형 속 [미스트]에다 대고 물었다.
“... 그래서, [NULL]이 습격해오는 날짜는 1월 13일이고 장소는 이곳인데, 뭐 더 추가적으로 아는 건 없어?”
- [NULL]의 계획엔 장소와 날짜, 파견 개체까지만 정해져 있을 뿐 공격 방식은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내가 알기로 이곳에 파견되기로 했던 건, Type-07. 주변 전자기기들을 [골렘]화 시키는 개체로, 다대다 전투 능력은 [NULL]내 최강이다.
주변 전자기기들을 [골렘]화 시키는 개체라면... [피그말리온]인가. 확실히 녀석만큼 약한 놈들을 뭉탱이로 죽이는 데 특화된 개체도 없지. 대신 일대일 능력은 상당히 떨어지지만.
- 참고로 Type-07은 상당히 음흉한 개체다.
“... 로봇이 음흉한 건 또 뭔데.”
- 녀석은 의도적으로 ‘최선의 판단’을 하지 않는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 내게는 없는 기능이다.
“...”
벌써 그런 잡다한 기능까지 갖추고 있다니. 역시 ‘저쪽 세계’에 비해 진화 속도가 너무 빠르다. 이런 상황에서 [진화의 리미터]마저 해제된다면-
“100226번.”
어느새 도착한 교도관. 녀석은 얼굴을 이죽대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루드비코의 소년교도소에 온 것을 환영한다. 듣자하니 분노조절장애가 있다며?”
“...”
“그 곰인형은 금방 쓸모없어질 거다. 살인, 방화, 강도, 강간... 여기 수감돼 있는 놈들은 다 우주에서 가장 악질 꼴통들만 모아 놓은 곳이거든. 네 분노조절장애라는 것도 며칠 얻어맞다 보면 자연스레 고쳐지겠지. 클클.”
“아. 예...”
“자. 바로 저기가 네 방이다. 안에서 잘 지내길 바란다.”
덜커덩-!
[ D - 301호 ]
내 방이라고 소개받은 곳엔 이미 다섯 명의 죄수들이 들어차 있었다. 종이 살 돈이 없었던 건지 하나같이 온몸에 문신이 그득그득한 녀석들로만 말이다.
“신참이냐?”
개중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녀석이 내게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내 뺨을 치려 했다. 죄수들 사이에서 흔히 있는, 기선제압 같은 의미의 행동이었다.
물론 맞아줄 이유는 하등 없었기에.
"어. 신참이다."
나는 다가오는 오른손을 가볍게 피하고, 역으로 녀석의 볼을 톡 쳤다.
짜악-! 쿵!
나름 살살 쳤는데, 단 한 방에 문 앞에서 방구석까지 날아가는 덩치. 아무래도 몸만 컸지 교도소 내에서의 먹이사슬에선, 최하층이나 다름없을-
"라... 라이언 형님!"
"형님!"
... 거라 생각했는데. 아닌가보네.
뭐.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 일단은 이 교도소를 접수하는 것이 나의 첫 번째 계획이었으니까.
- Type-07은 은밀하게 움직이는 유형의 개체다. 체계적인 시스템이 잡혀 있지 않다면 녀석을 막기 쉽지 않을 것이다.
건물만 8개가 있고 수감인원도 몇 천 명이 넘는 루드비코 소년교도소에서, 언제 어디서 [피그말리온]이 튀어나오더라도 그 소식이 내게 들어오게 하려면 이 방법이 가장 쉽고 빨랐다.
"괘... 괜찮으십니까?"
"숨을 안 쉬셔!"
... 잠깐. 그보다 소장이 분명 다 괜찮으니까 죄수들 죽이지만 말라고 했었는데...
“형님! 숨 쉬십쇼! 형님!”
"교도관! 교도관 불러!"
저 새끼... 설마 죽는 건 아니겠지...?
---
이니시움 아카데미의 수행관.
텅텅 빈 열람실 한구석에서 혼자 마나블렛을 만지작대던 한겨울은, 자기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 하아. 권민성 얜 이번엔 또 어디로 사라진 거야.”
[ 권민성 -> 한겨울 : 출장 다녀올게 ]
[ 권민성 -> 한겨울 : 당분간 연락안될거임 ]
그래도 세르부스나 알렉산드리아에 갔을 때는 연락이라도 됐는데, 이번에는 아예 연락조차도 안 될 거라니. 그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룹채팅방에서도 안 읽은 사람 1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가 않는다.
“적어도 어디 갔는지 정도는 말하고 가야 하는 거 아냐?”
뾰루퉁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리던 한겨울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마나블렛 화면을 두들겼다.
토도독-
[ 한겨울 -> 권민성 : 모해 ]
그리고는 마나블렛을 무음으로 세팅해 놓고 덮어 놓는다.
그리고는 해가 쨍쨍한 창 밖을 한 번 내다보다가.
스윽-
은근슬쩍 다시 화면을 켜 보지만, 당연하게도 답장은 없다.
하아.
한겨울은 한숨 한 번 쉬고 다시금 마나블렛을 덮어 놨다가.
스윽-
“흐히히...”
이번에는 품 안에서 전에 찍었던 스티커 사진 꺼내 보고, 배시시 웃다가 다시 한 번 화면을 킨다.
[ 읽지 않은 메시지 2건 ]
이번에는 뭔가 왔다. 한겨울은 자기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손으로 가리고는, 아무도 없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 메시지를 확인한다.
[ 마리아 선배님 -> 한겨울 : 다음달 초에 검사 받으러 오거라. ]
[ 마리아 선배님 -> 한겨울 : 그놈도 데리고 오고. ]
"..."
이걸 좋아해야 할지, 아쉬워해야 할지 모르겠는 한겨울이었다.
---
루드비코 소년교도소에 들어오고 어느덧 일주일.
- 지금은 외부 운동 시간입니다. 수감자 여러분들은 운동장으로 나가 주십시오.
쿵-!
“형님! 나오셨습니까!”
이미 나는 이곳에서 '큰형님' 대접을 받고 있었다.
“... 어. 일들 봐.”
“예! 형님!”
내 손짓에 모였다가, 다 흩어지는 죄수들. 사실 이렇게 되는 건 당연한 결과였겠지만, 운도 조금 따랐다.
기존의 내 방에서 방장이었던 놈. 그러니까 한 대 맞고 나가떨어진 녀석이 바로 내가 오기 전에 이곳을 휘어잡고 있던 ‘형님’ 포지션의 존재였-
“형님! 녀석들 한 번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 넌 또 왜.”
“아니! 인사하는 각도가 싸가지가 없지 않습니까! 저라면 허리 제대로 안 굽히는 새끼들은 싹 다 척추를 못 피게 만들어 버릴 겁니다!”
"... 됐어."
... 뭐. 이런 새끼였다. 물론 녀석이 이곳 루드비코 소년교도소에서 ‘형님’대접 받는다고 해 봐야, 봐야 범죄자들 사이에서나 인정받는 수준이지.
[ 라이언 융 ( 18세 ) ]
[ 마나량 : 704 ]
[ 이명 : 없음 ]
[ 마나의 속성 : 질서 ]
[ 비고 ]
- 특수강도 8건.
18살 먹었는데도, 이니시움 2학년 1학기를 뚫기조차 어려운 수준인데다가 내 10분의 1도 되지 않는 마나량. 확실히 이니시움 아카데미가 명문이긴 명문이다.
아무튼 교도소 생활은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식사나 잠자리야 물론 이니시움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래도 뮤턴트 군락지보다는 백 배 천 배 나았고.
“형님! 일단 시키신 것들은 다 전달했습니다!”
"어. 수고했어. 쉬어라."
"예! 형님!"
힘의 차이를 한 번 보여준 것만으로도 애들이 나이랑 상관없이 굽실굽실 대며 말을 잘 듣는다는 점도 꽤나 마음에 들었다. 골목대장 놀이는 일곱 살 때 졸업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보다.
“... 그나저나 내일이 [NULL]의 습격 예정일인데, 아직까지 아무런 낌새가 없네."
- 나 역시 몸을 퍼뜨려 교도소 내부를 샅샅이 뒤졌지만, 다른 타입의 개체는 전혀 감지할 수 없었다.
전날까지 아무 기미도 없다니. 미리 들어와 있던 것이 무색하게도, 내부에서부터의 습격은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피그말리온]이 어떤 방식으로 공격해올지는 모르는 일이었기에.
[ 887/01/12 현재 시각 - 23 : 59 : 58 ]
[ 887/01/12 현재 시각 - 23 : 59 : 59 ]
[ 887/01/13 현재 시각 - 00 : 00 : 00 ]
나는 자정부터 한껏 긴장한 채 녀석의 습격을 기다렸다.
“구체적인 시간은 정해진 게 없지?”
- 그렇다. 임무를 맡은 개체가 재량껏 판단해 계획을 실행한다.
... 오늘 잠은 다 잤네.
뭐. 그래도 [피그말리온]에 대한 대비는 충분히 해 놨다. 녀석의 ‘대처법’도 이미 알고 있고, 이곳 죄수들한테도 긴급사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형님’으로서 말을 해 놓은 상황.
“... 이제 녀석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자고.”
스윽-
나는 곰인형 뒤의 지퍼를 열고, 마나 사브르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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