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의미 (1)
111.
테라미시에서의 첫 날 밤.
“내일은 여기랑 여기를 확인할 거예요오.”
“네. 언니...”
처음에 같은 방 쓴다 했을 때 놀랐던 것이 무색하게도, 유아라와 링링은 금방 나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자기들 해야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뭐. 사실 두 사람은 이런 상황에 어느 정도 익숙하다. 이전에 헌터 시험 때도 같은 방에서 지내며 경호했었으니까. 그것도 2주나.
“그러니까 여기 볼 때 링링이 [페르소나]로 여기를 확인해 주고...”
두 사람이 홀로그램 창 하나를 띄워 놓고 내일 할 일을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방구석에 앉아 눈을 감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계속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여기를 확인하고, 점심 먹고 나서는 여기로 넘어가서...”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모자랐다. [미스트]의 예측으로는 녀석들의 큰 동선만 유추 가능할 뿐, 누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오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말은 곧, 생각해야 하는 경우의 수가 못해도 몇 천 개가 넘는다는 뜻.
내가 박준 사부, 아니. 형처럼 매번 상황에 맞춰 제깍제깍 최선의 판단을 하는 천재라면 좋았겠지만, 나 같은 범재는 항상 미리 생각을 해 놔야 했다.
“... 저기요.”
‘최악의 상황’부터 시작해서 ‘그나마 희망적인 상황’을 생각하고 있는데, 유아
“... 뭐.”
“뭐... 뭐긴 뭐에요. 이제 저랑 링링 잘 거니까... 밤중에 이상한 짓 할 생각 말아요.”
“... 경호하러 왔는데 내가 니들한테 이상한 짓을 왜 해.”
“그... 그런 줄 알라고요!”
난데없이 소리지르고 침대에 드러눕는 유아라. 목숨 구해주러 왔는데도 지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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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액-
링링은 진즉 잠들었건만, 정작 잔다고 선언했던 유아라는 새벽 세 시가 다 됐을 무렵에나 잠들었다. 그러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나도 얼추 시뮬레이션을 마쳤다. 물론 시뮬레이션을 마쳤다고 잘 순 없는 노릇이니, 나는 시간이나 때울 겸 [미스트]에게 물었다.
“[NULL]에, 이제 8개의 타입이 남았다고 했었나?”
- 그렇다. 시작할 때는 열둘이었지만 셋이 죽었고, 내가 나왔으니까.
“... 같은 타입의 개체가 둘 이상 존재하는 경우는?”
- 없다. [진화의 리미터]가 해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아류를 생산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위협한다.
그렇다면 죽었다는 셋은 아마 내가 처리한 [서큐버스], [임포스터], [이카루스]겠군. 셋 다 깡통로봇들의 먹이사슬 내에서는 최하위지만, 그래도 먹는 것만으로도 강해지는 놈들. 숫자를 줄여 놨다는 게 어디-
콰악- 위잉...
순간 바깥쪽에서 들려온 아주 작은 소리에, 고개를 창문 쪽으로 돌렸다.
- ... 무슨 일이지?
“... 바깥에 뭔가 있어.”
들려온 기척은 분명 평범하지 않았다. 마치 피켈로 빙벽을 찍고, 로프를 당기는 듯한 소리.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소리는 확실히 아니었다. 그리고 내 짐작이 맞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듯, 유리창 너머에서 무언가가 와이어에 매달린 채 모습을 드러냈다.
- 뭔가가 뭔가 했더니, Type-07의 하수인이었군.
나도 안다. [갈라테아]. 까다로운 녀석이다.
띠링-!
[ 갈라테아 ( 분류 : 로봇 ) ]
[ F.E.E.로 분류되는 피그말리온에 의해 창조된, 대인전투 특화 기계 생명체. 여성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몸 전체에 날붙이를 숨기고 있다. 대상을 먹거나 진화하는 기능이 없어 F.E.E.로 분류되지 않는다. ]
[갈라테아]는 [피그말리온]이 직접 만들어 낸 로봇이다. 주변 전자기기를 골렘으로 변환시켜 싸우는, [피그말리온]의 쓰레기 같은 대인전투 능력을 메꾸어 주는 존재지.
끼이이이... 텅-
[갈라테아]가 유리창에다 대고 금속 손톱으로 원을 그리자, 마치 레이저 커팅을 한 것처럼 깔끔하게 떨어져 나가는 유리. 녀석이 그 틈 속으로 팔을 넣어 창문을 열었다. [갈라테아]가 방 안으로 발을 내딛는 그 때.
부웅- 치이이익!
나는 재빨리 일어나 마나 사브르를 휘둘렀다. [갈라테아]의 발목이 잘려나가며 스파크가 튀었다. 생물이라면 그 종을 불문하고 당황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녀석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지이잉-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등에 장착된 와이어를 급속도로 수축시켜, 순식간에 창밖으로 사라지는 [갈라테아]. 나는 곧바로 창밖을 확인했다.
[ 갈라테아 ]
[ 마나량 : 8011 ]
로봇 주제에 웬만한 헌터 보다도 강한 [갈라테아]. 녀석은 발목이 잘린 상태로도 건물 곳곳에 갈고리를 박아 도망치고 있었다.
- 쫓지 않는 건가?
“... 쫓아야지.”
허나 그냥 쫓을 순 없었다. 지금 뒤쫓는다면 [갈라테아]는 잡겠지만, 자리를 비운 사이 [피그말리온]이 나타나 링링과 유아라를 채가면 본말전도. 아까 ‘뇌내 시뮬레이션’에서도 그런 경우의 수가 분명 있었다. 나는 자고 있던 링링부터 깨웠다.
스윽-
“링링. 일어나 봐.”
“... 으으응... 선배... 무슨 일 있어요...?”
“습격 받았어. 그러니까-”
“네? 습- 읍!”
링링이 큰소리를 내기 전에, 나는 녀석의 손바닥으로 틀어막으며 작은 목소리로 전했다.
“조용히 좀 해 봐. 링링. 니 언니 깨겠다.”
끄덕-
“나는 습격한 녀석을 쫓을 테니까, [페르소나] 하나만 소환해 봐.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워프 키트]로 돌아올 테니까.”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끄덕이는 링링. 녀석이 마나를 끌어올려, 오른손에서 자기와 똑 닮은 존재를 하나 소환해냈다. 녀석이 각 잡힌 자세로 경례하며 소리쳤다.
- 하일 링링!
충성스런 [페르소나]의 모습에 순간 얼굴이 찌푸려졌다. 당장 내 주머니 속에도 비슷한 놈이 있는데, 이 녀석은 과자값만 축내고 헛소리만 지껄일 줄 알지 쓸모라곤 하나도 없으니-
“... 선배. 뭔가 문제라도... 있으세요...?”
... 잡생각 할 때가 아니지. 빨리 [갈라테아]를 쫓아야 한다.
“다녀올게.”
고개를 끄덕이는 링링을 뒤로한 채, 나는 그대로 창 밖으로 몸을 던졌다.
최대한 빨리 쫓기 위해 4층 정도 높이에서 그대로 뛰어내렸음에도, 이미 [갈라테아]는 꽤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촤악-! 위이잉-
갈고리와 와이어를 이용해, 건물 사이사이를 헤집으며 성 외벽 쪽으로 달아나는 [갈라테아]. 아무리 지금이 새벽녘이라지만, 만일 녀석이 일반적인 행성에서 갈고리와 와이어로 저렇게 입체기동을 펼치고 다녔다면 분명 난리가 났겠지.
이제야 [NULL]이 왜 하필 행성 테라미시로 유아라를 유인한 건지 알겠다. 이곳엔 SNS도, [Li4U] 영상 제작자도, 메시지를 보내거나 인터넷에 게시글을 올리는 사람도 없다. 자기들이 어떤 깽판을 치더라도 행성 내부적인 문제로 치부되기 때문. 자기들의 동선이 행성 미라이로 향했다고 보여야 하는 [NULL]입장에선 이만한 행성도 없다.
허나 녀석들이 간과한 게 하나 있다.
“... 남들 눈에 띄고 싶지 않은 건 니들뿐만이 아니라고.”
나 또한 숨길 것 없이, 전력을 다해서 [갈라테아]를 쫓았다. 아무리 녀석이 건물을 타고 다닌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스펙 자체가 달랐다. 처음에 몇백 미터가 넘게 벌어졌던 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좁혀졌다.
위이이잉-
갈고리를 타고 성벽을 올라타는 [갈라테아]. 나 또한 녀석을 뒤쫓아 성벽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곳엔 내가 예상하지 못한 존재가 있었다.
“이제야 당신을 만나는군요. 와하하하!”
[갈라테아]와 비슷하게 생긴 여성형 로봇들 3구 사이에서, 성벽을 의자 삼아 앉은 채 경망스러운 웃음소리를 내는 ‘로봇’.
게다가 행성 테라미시와 어울리지 않는 하와이안 티셔츠에 반바지, 그리고 밀짚모자에 썬글라스 패션을 한 그것은, 저쪽 세계에서와는 다른 형태였지만 분명 [피그말리온]이었다.
그 증거로 여태 쫓던 [갈라테아]는, 녀석의 앞에 무릎 꿇고 있었다.
- 분부대로 그를 이 자리로 인도하였습니다. 나의 주인이시어.
“잘 했습니다. 잘 했어요. 나의 아름다운 [갈라테아]. 수고가 많았어요.”
- 아닙니다. 그러니 부디 ‘은총’을-
“그런데... 다리는 어쩌다 그리 된 건가요?”
순간 [피그말리온]이 목소리를 착 내려깔자, [갈라테아]가 내는 기계음에 노이즈가 섞이기 시작했다.
- 이...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키신 바를 이행하려다가...
“[갈라테아]. 내가 늘 뭐라 했나요?”
- 주인님. 안 됩니다. 저는-
파지지직-! 투욱.
순식간에 [갈라테아]의 머리가 달아나, 땅바닥을 굴렀다. [피그말리온]이 기름 묻은 손을 뒤로 내밀자, 녀석의 뒤에 있던 로봇 중 한 구가 손수건으로 그 손을 닦았다.
“늘 말하지만 아름답지 않은 존재는, 내게 필요하지 않아요.”
- 알겠습니다. 주인님.
세 구의 로봇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피그말리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석은 굴러다니는 [갈라테아]의 머리통을 발로 걷어차 성 아래로 떨어뜨린 뒤, 내 쪽을 보며 중얼거렸다.
“다시 봐도 아름답군요.”
“...”
“그대를 보고 싶었어요. 아름다운 존재여. 나는 [NULL]의 일원이자, 예술과 아름다움을 숭상하는 존재. 원칙적으로 코드명은 Type-07이지만... 부디 그대는 나를 [피그말리온]이라 불러 줬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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