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의미 (4)
114.
- 치이이이익!
콰직!
스멀스멀 피어나던 기계 기생충이 기습적으로 날아들었지만, 유아라가 가볍게 쳐내자 그대로 벽에 처박혀 산산조각났다. 녀석이 척수액이 잔뜩 묻은 손을 벽에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으... 왜 하필이면 습격해 온 것도 안드로이드인지... 우리가 만든 것도 아닌데, 왠지 슈마허가 정말 계획적으로 H.N.H.를 공격한 것 같잖아요...”
... [NULL]은 유아라네 회사에서 만든 게 맞다. 단지 현 경영진마저도 모르는 비밀 연구실에서, AI에 의해 개발됐을 뿐.
물론 그런 걸 일일이 말해 줄 이유는 1도 없으니, 나는 적당히 시체에서 ID카드를 뜯으며 화제를 돌렸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길안내나 해.”
“말을 해도 꼭... 안 그래도 하려고 했다구요.”
---
연구소 내부는 개미굴처럼 복잡했다. 몇 층을 오르내렸는지 어떤 길로 왔는지조차 가물가물했다. 게다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유아라와 마나석이 있는 곳으로 향할수록 [뱀파이어]의 기계 기생충에 감염된 연구원들은 점점 더 많이 등장했다.
- 으어어어어...
콰직-!
이젠 몇이나 처리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때 쯤, 유아라가 레이더를 주머니에 넣더니, 정면의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 다 온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저 문 너머에 마나석이 있는 모양이네요.”
[ 출입 제한 구역입니다. ]
[ ID 카드를 태그하십시오. ]
문 앞에 서자마자 떠오르는 홀로그램. 뭐. 이미 나나 유아라나 주머니가 피 묻은 ID 카드로 가득했기에, 별 말 없이 번갈아서 각자의 주머니에서 하나씩 꺼내 태그했다.
[ 권한이 없습니다. ]
[ 권한이 없습니다. ]
[ 승인되었습니다. ]
위잉-
“제가 주운 카드로 열렸네요.”
“... 그래서 어쩌라고.”
“뭐. 그냥 그렇다고... 요.”
의기양양하게 중얼거리던 유아라. 허나 녀석은 문 너머에서 나타난 광경을 보자마자 입을 다물지 못하게 되었다.
쿠쿵-! 쿠쿵-!
그곳에는 마치 아파트 테라스 한가운데처럼, 위아래로 몇 층이나 있는 건지도 모를 정도로 거대한 공간 속에서 고래 몇 마리를 이어 놓은 듯한 연갈색 살덩어리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고동하고 있었으니까.
꾸득- 꾸드득-!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살덩어리’에선 군데군데 사람 팔이나 얼굴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들어갔다 했으며.
우우웅-!
- 우리는... 하나다...
- 세르부스의 마나석 광산은... 세르부스의 것이다...
- 세르부스는... 자유다...
주기적으로 마나의 흐름이 있을 때마다, 마치 비명과 신음의 중간 상태처럼 목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이... 이건... 세르부스... 설마... 욱-”
한편 이니시움 수석은 날로 먹은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유아라는 눈앞의 살덩어리가 자기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마나석 광산’이란 걸 단번에 알아챈 듯한 모양이었다. 녀석이 헛구역질을 하며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 괜찮냐?”
“괘... 괜찮아요. 좀 역하긴 하지만... 그보다 이거 좀 들어 줄래요?”
그리 말한 유아라는 주머니 속 ID카드들을 몽땅 꺼내 내게 건네더니, 마나블렛을 두 손으로 들었다.
“... 뭐 하려고.”
“뭐... 뭐 하긴요? 지금 눈앞의 저거 마나블렛으로 찍어 놔야죠. 우연히, 정말 우.연.히. H.N.H.의 기밀을 입수했는데, 써먹지 않으면 손해잖아요?”
“...”
“카메라 어플이 어디 있더라... 아. 이거였-”
끄아아아악-!
유아라가 카메라 어플을 키기가 무섭게,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 사진 찍으려던 유아라가 순간 마나블렛을 자기 가슴팍에 딱 붙이고, 게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바... 방금 들었어요?”
“... 놀란 건 알겠는데 들러붙진 마라.”
“노... 놀라긴 누가 놀랐다고 그래요? 그... 그리고 당신이 지금 내 경호인데! 위험한 것 같으면 당연히 바로 달라붙어야죠! 내... 내 말이 틀려요?”
“...”
쓸데없는 실랑이는 사절이었기에, 나는 작은 목소리로 역정을 내는 유아라를 무시하고 난간 아래를 살폈다. 다섯 층 정도 아래에 ‘마나석 원석’을 띄우고 있는 반중력 발생장치가 있었고, 그 주위엔 흰 가운을 입은 열댓 명.
그리고.
“어... 어떻게 이 시설의 존재를 안 것이지?”
- 나의 아버지 종족이시어. 의미 없는 질문은 접어두고 이제 그만 쉬십시오. 영원히 잠드실 시간입니다.
또 그 연구원들을 마주하고 있는 [뱀파이어]까지.
대충 예상한 그대로의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띠링-!
[ 뱀파이어 ( 분류 : F.E.E. ) ]
[ 슈마허 인더스트리의 안드로이드. 생물체를 전부 포식할 필요 없이, 혈액 속 마나만을 뽑아 먹는 것만으로도 진화할 수 있다. 이 때, ‘뱀파이어’에게 마나가 빨린 생물체의 몸속엔 혈액 속 철분을 재구성해 스스로 자라는 기계 기생충이 심어진다. ]
[빅 데이터]가 이미 다 아는 사실을 창으로 띄워 정리해주는 동안, [뱀파이어]는 연구원들을 향해 말했다.
- 아버지 종족이시어. 제가 당신들이 살 수 있는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마...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말고 그냥 죽-”
츄욱-!
한 연구원이 반발해 소리쳤지만, 그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었다. 그 연구원은 말을 채 끝마치지도 못하고 [뱀파이어]의 손에서 뻗어 나온 금속 촉수에 목을 관통 당했으니까.
- 이성적인 생명체라면, 제 말을 끝까지 들어 보고 판단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이렇게 되기 싫으시다면 말이죠.
꾸득... 꾸드드득...
[뱀파이어]의 말과 동시에 연구원의 목에 박힌 촉수가 연동운동을 하듯 꿈틀대었고, 몇 초 지나지 않아.
- 으어어어어...
연구원은 복도에 나돌아다니는 녀석들처럼 비틀거리며 괴성을 내기 시작했다.
연구원들은 다들 겁에 질려 덜덜 떨며 아무 말도 못 하는 가운데, 나이 지긋이 먹은 여자 연구원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 제안이란 거, 이... 일단 들어 볼게요. 말해 보세요.”
- 하하. 이거 아버지 종족이 아니라 어머니 종족이라고 불러야겠군요.
“...”
- 여튼 제가 당신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 두 가지뿐입니다. 하나는 지금 당장, 당신들 뒤에 있는 ‘마나석’을 사용 가능한 상태로 정제해 두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저 인간들을 뭉쳐놓은 살덩어리에 불과하니까요.
“... 좋아요. 정제해 두도록 하죠. 그보다... 또 다른 하나는 뭐죠?”
-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여러분들이 진행하고 있는 [이데아 프로젝트]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제게 넘기는 것입니다.
“그건 안 돼요. 차라리 그냥 저희를 모두 죽이세요.”
- ... 이성적이지 못한 판단을 내리는군요.
“아니요. 저는 충분히 이성적이에요. [이데아 프로젝트]는 인류의 평생 숙원이자, 존재 이유나 다름없는 프로젝트입니다. 비록 여기서 우리가 죽더라도, 정체도 모를 당신 같은 존재에게 넘길 순 없어요. 여기 있는 모두가 같은 마음일 겁니다.
비장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여자 연구원. 뒤에 있는 연구원들 또한 절대다수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한 젊은 남성만이 ‘이게 뭔 소리야’ 하는 표정으로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그 순간, 언제부턴가 내 옆에 나란히 서서 아래쪽 상황을 보고 있던 유아라가 작게 입맛을 다셨다.
“저 여자... 우리 슈마허로 스카웃 해가고 싶네요. 챱챱. 그나저나 [이데아 프로젝트]가 뭐죠?”
“... 낸들 알겠냐.”
“지... 진짜 몰라요? 혹시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건 아니죠?”
“...”
유아라가 눈을 흘겼지만, 모르는 건 모르는 것이었다.
[ ‘이데아 프로젝트’ 검색 결과... ]
[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
심지어 이 [이데아 프로젝트]란 단어는. [빅 데이터]에조차 등록돼 있지 않은 상태. 어렴풋이 세 번째 공통사건 [이데아 발견]과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 추측해 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었다.
철커덕-!
한편 아래쪽에서는 고개를 몇 번 끄덕인 [뱀파이어]가 몸에서 기계 촉수를 하나둘 꺼냈다.
- 당신들의 결정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부디 편안한 안식이 되시길.
녀석은 마치 인형뽑기 기계처럼 연구원들 머리 위에서 촉수를 설렁설렁 움직이다가, 한 번에 한 명씩 머리에 꽂았다. 촉수가 꽂힌 사람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꿈틀대다가, 바깥에 널려 있는 좀비처럼 변하고 말았다.
푹-! 푹-!
그리고 열댓 명의 연구원 중 오직 세 명 만이 남았을 무렵.
“자자자자자잠깐만요!”
차라리 죽겠다던 분위기에서 자기 혼자 두리번거리던 젊은 남자가, [뱀파이어]쪽으로 후다다닥 달려가 무릎 꿇었다.
- 무슨 일입니까? 아버지 종족이시여.
“워... 원하시는 것 다 해 드릴게요! 뒤에 있는 저 마나석도 정제해 드리고, [이데아 프로젝트]에 대해서 아는 것도 전부 말씀드릴게요!”
“저... 저 새끼가 돌았나?”
“야 임마! 혼자 살겠다고-”
- 조용히들 하시죠.
푹-! 쿠욱-!
[뱀파이어]의 손짓 한 번에, 무릎 꿇은 남자를 제외한 모든 연구원들의 목이 날아갔다. 벌벌 떠는 남자에게 [뱀파이어]가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 죄송하지만, 저는 당신의 ‘말’은 믿지 않습니다. 데이터라던가, 문서라던가. 제대로 된 정보가 있습니까?
“아... 아마 있을 거예요! 그... 저... 맞아! 소장님의 ID 카드를 사용한다면 [이데아 프로젝트]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든 기밀문서를 열람할 수 있을 겁니다!”
처음에 다 같이 죽자고 했던 여자를 가리키며 소리치는 연구원. 그 광경에, 유아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한심하긴... 저런 애사심 없는 사람을 이런 기밀 연구소에 두는 H.N.H.도 수준 알 만 하네요.”
“...”
“그나저나 저 ID카드... 탐나네요. H.N.H.의 기밀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는 게 사실이라면 단순계산으로도 몇조 코인은 할 텐데...”
“꿈 깨. 저건 내가 가질 거니까.”
“다... 당신이야말로 꿈 깨야 하는 거 아니에요? 당신이 약하다는 건 아니지만, 저기 있는 저 안드로이드는 당신이랑 나랑 같이 싸워도 못 이길걸요.”
[ 뱀파이어 ]
[ 마나량 : 25000 ]
뭐. 실제로 내가 [뱀파이어]와 단순하게 정면승부를 한다면 정말 백 번 싸운다면 백 번 다 지겠지. 허나 [뱀파이어]와 싸우는 사람은 내가 아니다. 나는 그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될 뿐.
- 좋습니다. 우선 [이데아 프로젝트]의 정보에 앞서, 마나석부터 정제해 주시죠.
“예? 예! 바로 정제하겠습니다!”
이제 슬슬 녀석이 등장할 때가 됐다고 생각하던 찰나.
“사... 사실 이거 정제하는 게 바로 제 전공인지라-”
푸슉-! 툭.
홀로 살아남았던 남자 연구원의 모가지가 낫 같이 생긴 무언가에 의해 잘려 바닥에 떨어졌다.
- ... 넌 뭐지?
잠시 상황을 파악하던 [뱀파이어]가 연구소 한 쪽을 응시하며 중얼거리자, 이내 그곳에서 한 명의 인물의 등장했다. 외형만큼은 나보다도 더 어려 보이는 소년이지만, 실상은 그저 생체병기에 불과한 존재.
“씨발... 이번엔 또 사막 지하 연구소야? 게임 한 번 진짜 좆같게도 만들어 놨네.”
바로 [올 포 원]이었다.
- 작가의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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