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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구. 님의 서재입니다.

정점의 DNA로 뉴 스타트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완결

서지구.
작품등록일 :
2022.05.11 21:31
최근연재일 :
2023.01.01 00:00
연재수 :
203 회
조회수 :
207,605
추천수 :
3,569
글자수 :
1,721,531

작성
22.07.28 21:10
조회
794
추천
10
글자
25쪽

어깨에 힘을 풀고

DUMMY

정점의 DNA로 New Start


81화



‘나비효과’ 제작진의 막내 스태프 김일신의 하루는 고되기 짝이 없다.


촬영, 연출, 제작 가릴 것 없이 잡다한 일을 도와야 하며.


그 와중에도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취향이나 방식을 숙지해야 하고.


마지막까지 남아 정리를 한 뒤, 누구보다 빠르게 나와 세팅을 해야 한다.


일에 대한 열정과, 감독이 되겠다는 의지가 아니었으면 벌써 수백 번은 때려치고도 남았을 터.


그런 그에게도 오늘의 촬영은 특히 빡센 편이었다.


“처음부터 왜 이러냐 정말.”


아역 여주인공의 연기가 미흡한 것이 문제였다.


안 중요한 장면이면 몰라, 1화의 하이라이트 부분이었기에 감독은 보다 나은 연기를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꼬마의 연기는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새벽에 추가촬영이 잡히고 말았다.


때문에 일신은 네 시간도 못 자고 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X발.’


다른 감독들은 1화 2화 섞어서 잘만 촬영하더만, 우리 감독은 왜 굳이 새벽 촬영을 고집하는 건지.


흐름을 깨트리고 싶지 않아서라고는 하는데, 솔직히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꼬르륵.


배가 고팠다. 급하다고 아침을 제대로 안 챙겨먹었더니 배에서 난리를 치고 있다.


빈속에서 욕이 술술 넘어왔다.


‘X같네 진짜.’


새벽 촬영을 고집하는 감독도, 연기를 못하는 꼬마도, 막내에 불과한 자신도 짜증났다.


그래도 어쩌겠나, 더 나은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이 악 물고 버틸 수밖에.


어째 날이 갈수록 실력이 아닌 독기만 강해지는 것 같다.


‘다시 그때로’를 쳐부술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렇게 날카로워지지 않고서야 버틸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이를 악 문다고 힘든 게 사라지는 게 아니니, 새벽 촬영은 깔끔하게 끝나길 바란다.


‘하느님, 부처님, 연기의 신님! 제발 오늘은 빨리 들어가게 해 주십쇼!’


그러나, 그의 믿음은 무참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컷! 한별아! 어제보다 못해지면 어쩌자는 거야!”

“... 죄송합니다.”


한별이라는 아이는 어제보다 부족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아마 감독이 아닌 누가 보더라도 마찬가지일 터.


주눅 들고, 확신이 없다.


과거로 돌아온 여주인공에게서 희망과 기대를 엿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건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다.


제작진이 봐도 그런데 과연 어느 시청자가 저 여주인공을 좋아할 수 있을까.


결국 감독은 재차 한별과 면담을 하게 되었다.


의도치 않게 생긴 쉬는 시간이다. 일신은 자리에 허탈하게 주저앉아 멍하니 하늘을 보았다.


“제발.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엑.”


사실 지적받은 내용을 몇 시간 만에 전면적으로 고쳐오는 것은 힘든 일이긴 하다.


그래도 유한별은 해내야 한다. 그녀가 누구인가.


대한민국 여배우를 뽑으라 하면 3손가락 안에 뽑히는 나윤희의 외동딸이다.


그런 내로라하는 여배우의 핏줄인데 이 정도는 해줘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그러라고 여주인공으로 뽑은 건데.


일신을 비롯한 제작진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과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정당했으니까. 명분은 그들에게 있으니까.


이렇게 시간이 질질 끌리고 있는 와중에도 라이벌 ‘다시 그때로’는 팍팍 나아가고 있을 게 뻔했다.


져서는 안 된다. 반드시 이기고 말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저 꼬마 아이를...!


촬영장에 내려앉은 음침한 분위기가 일신을 집어삼키려는 찰나.


그의 앞으로 흰 네모네모한 물체가 들이밀어졌다.


“... 응?”


뭉툭하면서도 포근해 보이는 흰 정육면체가 김을 내뿜고 있었다.


“백설기?”


그래 백설기. 그것도 딱 봐도 맛있어 보이는 백설기였다. 그런데 이게 왜 갑자기 나타난 걸까?


일신은 백설기를 들고 있는 아기자기한 팔을 따라 시선을 내렸다. 그곳엔 배시시 미소를 짓고 있는 꼬마가 있었다.


“떡 좀 드시면서 하세요.”

“누구...?”


촬영장은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다. 그러니 잡상인은 아닐 테고.


‘주연 배우 중 하나가 돌리는 건가?’


보통 먹을 걸 돌리는 건 큰 배역을 맡은 사람들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단역들이 이런 걸 돌릴 일은 없었으니까.


지속적으로 방송 문턱을 두드리려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떡을 돌릴 필요가 없지 않겠나.


엑스트라가 방송에 나오면 얼마나 나온다고.


뭐, 만만한 배역을 다 집어삼켜서 비중을 늘리겠다는 계획을 세운 게 아니고서야 엑스트라가 떡을 돌릴 일은 없다.


물론 그런 말도 안 되는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는 주연 중 하나가 떡을 주문했으리라고 확신했다.


일신은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꼬마의 근처에는 떡판을 들고 있는 할머니 뿐이었다.


“어라?”


없다. 나비효과의 모든 주연 배우들의 얼굴을 외우고 있는 일신이었지만 주변에는 매칭되는 얼굴이 없었다.


그의 추측이 대차게 빗나가는 순간이었다.


그가 잠시 인지부조화에 빠져 멍을 때리자, 꼬마가 그의 생각을 알겠다는 것처럼 빙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단역 민수 역할의 박상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 어어. 그래. 고맙다.”


일신은 당황하면서도 백설기를 받아들었다. 상혁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민수라는 배역은 알고 있으니까.


민수는 주인공들의 어린 시절에 주로 등장하는 대사가 조금 많은 엑스트라였다.


다만 정말 엑스트라가 음식을 돌릴 줄은 몰라서 당황했을 뿐이다.


떡을 건넨 꼬마는 바람과 같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일신은 갑자기 생겨난 떡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꿀꺽.


절로 침이 고였다. 아침을 제대로 먹지 못해서 그런지 정말 너무 맛있어보였다.


게다가 시기도 적절했다. 이제 막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새벽은 따뜻한 백설기를 먹기 좋은 날씨였다.


그래도 막내가 이런 걸 먼저 먹으면 안 된다. 설령 그게 쉬는 시간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


일신은 입에 가득 찬 침을 꿀꺽 삼키며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도 상혁이라는 꼬마는 주위 모든 사람들한테 떡을 정확하게 배분을 하고 있었다.


“신기하네.”


촬영장 같이 사람이 많고 유동적인 경우, 무언가를 분배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누구는 못 받고, 누구는 2개를 받고. 그런 일이 일상다반사다.


그러나 저 꼬마는 마치 최적의 경로를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정확하게 1인당 1개씩을 분배하고 있었다.


누군가 슬쩍 두 번 받으려 하면


“죄송해요. 인당 1개씩이 정량이라서요. 대신에 남으면 가장 먼저 챙겨드릴게요.”


라며 싹싹하게 말하고는 다시 분배를 시작했다.


여기 나타났다, 저기 나타났다 참으로 신통방통한 꼬맹이다.


“왜 저 정도의 애를 몰랐을까.”


비범한 꼬마다. 평소였다면 일신의 눈에 띄지 않았을리 없다.


“분명 어제 촬영에도 나왔을 텐데. 일에 너무 집중한 건가.”


가끔 몰입하면 주변이 안 보이는 경우가 있다. 이번도 그러한 경우이리라.


여하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떡을 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지.


일신은 눈치를 살피다가 조연출이 떡을 한 입 뜯는 것을 목격하고 헐레벌떡 포장을 벗겼다.


잠정적인 허락이 내려졌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크게 한입을 베어 물었다.


“와 씨. 흐허.”


방금 찐 건지 떡이 말랑하고 뜨거웠다.


한입 베어 물자마자 쌀과 설탕의 조화로운 단 맛이 일신의 입 안 가득 퍼졌다.


그리고 머지않아 백설기가 녹아 사라졌다.


백설기는 액체가 아니다. 당연히 녹아내리는 일은 없다.


하지만 떡 겉면에 촉촉하게 서린 김이, 부드러운 떡의 입자를 넘겨주었기에 굳이 씹을 필요가 없었다.


일신은 그 맛을 잊을세라 빠르게 다음 입을 베어 물었다.


“흐으. 이거지.”


맛에서 오는 기쁨이라기보다는 이를 초월한 행복이라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래 행복.


새벽 촬영의 피로도, 일이 안 풀려서 받는 스트레스도, 정신을 장악하고 있던 독기도.


모두 잊고 충만하게 누릴 수 있는 아득한 행복이었다.


‘그래. 죽기살기로 살아봤자 몸만 동나지.’


어쩌면 그는 그동안 미련하게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열심히 사는 거랑 미련하게 사는 거는 엄연히 다르다.


떡 맛을 잊고 살 정도로 과하게 몰입하는 건 미련하게 사는 축에 속했고.


일신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렀다. 그만큼 상혁이 건네준 떡은 맛있었고, 깊은 감동을 주었다.


비단 자신만 그런 게 아닌지 주변의 공기가 달라졌다.


단체로 감동적인 영화를 보고 난 뒤의 분위기와 비슷하다.


촬영장에 내리 앉았던 집단적인 광기는 이미 희미해진지 오래였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지금 촬영을 한다면 정말 괜찮은 영상을 뽑아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 때, 어디선가 호통이 들렸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한별과의 면담을 마치고 돌아온 감독이다.


그러고 보니 아직 독기가 가득 찬 사람이 한 명 남아 있었다.


“내가 언제 쉬는 시간이라고 했어. 지금 뭘 먹고 있는 거야! 다들 정신 안 차릴래?”


기껏 좋아졌던 분위기가 다시 우중충해졌다.


“저. 감독님. 잠시 시간이 나는 것 같아서 제가 먹으라고 했습니다. 아침을 못 먹은 애들이 많은 것 같아서요.”


현장 분위기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조연출이 나서보았지만, 감독의 화는 가라앉을 생각을 안 했다.


“그럴 시간 없다는 거 알잖아! ‘다시 그때로’ 이긴다며. 저쪽이 우리보다 유리한 건 다들 잘 알 거 아냐! 그러니 죽을 둥 살 둥 노력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


조연출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다고, 조금 과하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지금 말해봤자 제대로 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조연출은 반 쯤 먹은 백설기를 들여다보았다.


이 떡을 먹이면 감독도 생각을 바꿀 수 있을 텐데.


“떡 좀 드셔보실래요?”

“떡? 야. 지금 떡이 넘어가?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용기를 낸 발언도 무시를 당하고 말았다.


상황이 안 좋았다. 아무리 감독의 머리에 스팀이 가득 찬 상태라고 하더라도 감독을 빼고선 촬영할 수는 없다.


누군가 직설적으로 말해주면 좋겠지만 이곳에는 그럴만한 사람이...


“에이. 그러지 말고 한 입 드셔보시는 건 어때요?”


있었다.


떡을 나눠주던 상혁이 어느새 감독의 앞에 서 있었다.


“... 민수 네가 한 짓이냐?”

“네! 저희 할머니가 떡집을 하시는데 되게 유명한 가게에요! 다 같이 먹고 힘내면 좋을 것 같아서 부탁 좀 드렸어요.”


그동안 티는 내지 않았지만 감독에게 상혁의 존재는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뭐니뭐니 해도 패배감에 쩔어 있던 자신에게 의욕을 불어넣어준 사람이니까.


그런데 지금 그 꼬마가 자신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네가 나비효과가 이길 거라고 하지 않았니.”

“그렇죠. 이렇게까지 독하게 하지 않아도 이길 수 있을 거에요.”


감독은 꼬마가 하고 싶은 말을 알았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노력해도 이길까 말까 한 상대다. 그런데 지금 쉬엄쉬엄 하자고 건의를 하는 거니?”

“네!”


상혁의 논리는 빈약했다. 하지만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마치 미래라도 보고 온 것마냥.


그러나 감독의 마음을 울리지는 못했다. 그는 자신의 선택을 고수하기로 했다.


“싫다. 나중에 후회하긴 싫거든.”

“그러셔요. 그래도 촬영 할 때 하더라도 떡 한 입 정도는 괜찮잖아?”

“싫다니ㄲ... 어?”


순식간에 상혁이 자리를 박차고 뛰어 올랐다.


평범하지 않은 도약력에 감독이 입이 떡 벌어졌을 때, 상혁이 그곳에 떡을 꽂아 넣었다.


“큽! 크흐흡!”


감독은 빨리 떡을 뱉으려 했지만 뱉는 과정에서 떡을 어느 정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말이 안 될 정도로 떡이 부드러웠기 때문이다.


“...”


감독의 행동이 잠시 굳었다. 갑자기 들어온 떡의 맛에 놀란 듯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내 정신을 되찾은 감독은 떡을 뱉어냈다. 그리고는 꼬마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다가갔다.


“퉤! 퉤! 야. 박상혁. 나가! 나가서 찾을 때까지 돌아오지 마!”


주변에서 독하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얼마나 독하길래 저런 떡을 먹고도 꼬마한테 저렇게 화를 낼 수 있을까.


아니, 떡이 맛있었기 때문에 자르는 게 아닌 근신으로 그친 걸지도 모른다.


상혁은 쩝 입맛을 다시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짐을 싸들고 배우 대기실로 향했다.


“뭐 구경났어? 촬영 준비 안 하고 뭐해!”


스태프들이 그런 상혁을 안쓰럽게 바라보자 감독이 쿠사리를 넣었다.


이미 촬영할 분위기가 아니게 되었음에도 억지로, 이전처럼 촬영을 하려는 모습이다.


“레디~ 슛! 슛! 슛이라니까 다들 뭐해!”


스태프들이 그의 촬영을 쫓아가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꼬마가 가져다 준 백설기는 이미 중독된 것처럼 스태프들 사이에 퍼졌으니.


감독의 호통에 독하게 마음을 먹으려다가도 마음이 풀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보다 못한 감독이 대본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야! 너희 지금 뭐하자는 거야. 먹는 것도 좋지만 일부터 해야 할...”


갑자기 감독의 동작이 뚝 멈췄다. 누군가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먹는 것도 좋지만 일부터 하란 말...”


이번에는 되감기였다. 그는 잠시 똑같은 말을 입 안에서 중얼거렸다.


그 말을 뱉을 때마다, 정반대되는 말을 했던 누군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고의 흐름이 되감겨 과거의 기억을 불러왔다.


그가 아직 조연출에 불과하던 시절, 그 때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커피를 물 대신 마시고, 밥은 시간이 날 때가 아니면 안 먹었다.


어떻게든 경력을 쌓아 가족을 부양해야 했기 때문에.


그런 그를 볼 때마다 노년의 어머니는 서글픈 목소리로 말하곤 하셨다.


“상문아. 일하는 것도 좋지만 뭐라도 먹으면서 하려무나.”


그 때 자신은 뭐라고 대답했던가.


“이따가 먹을 게요.”

“내가 알아서 해요.”

“바빠요.”


그 때의 자신과 마주한다면 대가리를 후려 쳐서라도 밥을 먹게 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평안하게 만들었을 터이다.


하지만 그 당시의 그는 그러지 못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일하다가 먹으라면서 쌀가루로 떡 비스무리 한 것을 만들어주시곤 하셨지.


그렇게 떡을 가져와야 겨우 먹는 시늉을 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났다. 지금은 일도 그렇게 바쁘지 않고, 밥을 먹을 시간이 많다.


하지만 더 이상 어머니가 차려주시던 밥도, 떡도 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게 그녀에 대한 기억을 마음에 묻고 살다가 오늘 이렇게 마주하고 말았다.


다름 아닌 자신의 발언 때문에.


‘먹는 것도 좋지만 일부터 해야 할 것 아니야!’


그녀가 그의 말을 들었다면 뭐라고 말하셨을까?


반대로 이야기 했을 것이 뻔하다. 일도 좋지만 먹을 것부터 먹고 하라고. 사람은 뭐라도 먹어야 일을 더 잘 할 수 있다면서 말이다.


오늘이 기일도 아닌데 오늘따라 그녀의 향수가 더 짙게 나는 것 같다.


이 모든 시작은 분명 상혁이 나누어준 백설기에서부터였다.


맛도 형태도 다르고, 수준도 비교할 수 없이 차이나지만. 떡에 담긴 따뜻한 마음만은 동일했으니까.


과거에 맺혔던 사고가 빠르게 흘러 현재로 돌아왔다. 그동안 의식하지 않았던 감정의 격류와 함께.


“끄으윽!”


감독은 눈물이 넘치려는 걸 안간힘을 다해 참았다.


화를 내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감독을 다들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위신을 바닥에 쳐 박고 그 위에서 땅따먹기를 할 게 아니라면 어떻게든 참아야만 했다.


“너네 진짜 먹고 나면 잘 찍을 수 있겠냐?”


그의 방향성은 어느새 ‘열심히’가 아닌 ‘잘’으로 변해 있었다.


죽을 정도로 노력하지 않아도, 때로는 어깨 힘을 빼고 하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네엡!!!”


그 변화를 눈치 챈 스태프들이 합창을 하는 것처럼 한 마음으로 크게 대답했다.


“그래. 그럼 먹고 있어라. 나는 어디 좀 갔다 와야겠다.”


감독은 터덜터덜 세트장을 떠났다.


촬영진들도 경력이 없는 게 아니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의 연기를 봐오고 분석한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눈치챌 수 있었다.


감독의 목소리는 눈물 연기를 하는 배우처럼 젖어 있었다는 사실을.


또한 그가 가고 있는 방향은 상혁이 있을 배우 대기실이라는 사실을.


아마 자신의 행동을 사과하고, 이번에야말로 백설기를 소중하게 만끽하지 않을까.


일신이 직접 본 내용은 아니지만, 왠지 그럴 것만 같았다.


* * *


감독이 눈물을 찔찔 흘리며 찾아와 떡을 버린 것에 대해 사과했다.


원래라면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지만 다 큰 어른이 찔찔 짜는 게 안쓰러워 용서해주기로 했다.


할머니에게 추가로 받은 백설기를 소중히 들고 사라지는 모습이 얼마나 짠하던지.


그래도 일이 계획했던 대로 잘 풀려서 다행이다.


‘역시 당분이 모자라서 저러는 거라니까.’


예민한 사람들한텐 당분이 특효약이다. 괜히 예민 보스들이 초콜릿을 찾는 게 아니다.


물론 그렇게 간단하게 자평하고 넘어갈 만한 일은 아니긴 했다.


노력을 넘어 집착의 영역에 발을 들인 집단의 광기를 적절한 이벤트로 환기를 시킨 거였으니까.


현 상황에 대한 냉철한 판단, 미래에 대한 통찰력, 음식을 조달할 수 있는 재력 등.


뭐 하나라도 빠지면 해결 할 수 없었겠지만, 하이퍼 치트 소유자 천재인 내게 걸리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물론 수훈갑 할머니의 공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혀 짧은 소리를 내며 할머니께 매달렸다.


“함모니! 역시 할머니가 최고에욧!”

“오호호호. 이 할미 떡이 좀 맛있기는 하지!”


할머니의 콧대가 높아졌다. 방송국 사람들을 맛으로 압살할 실력을 가졌으니 자부심을 가지는 게 당연하다.


이제 해피 엔딩까지는 딱 한 발자국 남았다.


나는 슬슬 일을 마무리할 생각으로 할머니께 다가갔다.


“할머니 혹시 떡 안 남았어요?”

“몇 개 남았지. 왜? 먹으려고?”

“아뇨. 아직 못 받은 사람이 있는 거 같아서요.”


할머니께 떡을 받아들고 배우 대기실을 나섰다.


갑작스레 바뀐 촬영장 분위기에 당황하며 어정쩡하게 있을 그녀를 향해.


걷기의 DNA를 활성화하고 촬영장을 뒤진 결과, 근처 인적이 드문 곳에 콕 박혀 있는 한별을 찾을 수 있었다.


“여기 있었네. 떡 먹을래?”

“... 너!”


그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두 번씩이나 자신을 찾을 줄은 몰랐던 것 같다.


그러고는 내가 내민 백설기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손을 내밀지는 않고 지긋이 보고만 있다.


“그러다 떡에 구멍 뚫리겠다. 안 먹을 거야?”

“... 반말 하지마. 내가 나이가 더 많은 걸.”


으휴. 뭐 그래 한창 나이에 민감할 시기이긴 하다.


누적 나이가 38살이 넘었다고는 해도 비공식이었기에, 신체 나이를 따라주기로 했다.


“한별 누나. 떡 먹을래?”

“안 먹어. 체중 관리해야 해.”


염병. 어차피 안 먹을 거면 누나라고는 왜 부르게 시킨 걸까?


오기가 생겼다. 어떻게든 떡을 먹게 만들 것이다.


나는 그녀의 눈앞에서 떡을 흔들었다.


“와 맛있겠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이 주는 시각적 이미지의 위력은 거의 폭탄과도 같았다.


그 때문인지 한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궤도를 바꿔 백설기를 그녀의 코 앞으로 옮겼다.


그리고 열심히 향기를 퍼트렸다.


“흐읏!”


눈을 감으면 다른 감각이 예민해지는 법이다. 백설기의 향기가 그녀의 상상력을 자극했으리라.


한별은 질 수 없다는 듯 손으로 코를 막았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나는 그럴 거라고 예상을 하고 있었다.


빠르게 그녀의 귓가로 이동해 떡에 대한 찬가를 읊기 시작했다.


“떡이 정말 부드럽고 촉촉해서 한 입만 삼켜도 사르르 녹아 없어지는데, 쌀과 설탕의 부드러운 조화와 단맛이 아주 그냥...!”

“그만! 그만해!”


결국 한별은 항복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이쪽을 째려보았다.


“지금 뭐하자는 건데?”

“뭐하긴요. 떡 먹으라고요. 어차피 지금 체중 문제 때문에 드라마 못 찍는 거 아니잖아요?”


정곡을 찌르자 그녀가 흠칫 떨었다.


“니가 뭘 안다고 그래?”

“연기를 보면 잘 알죠. 누나 연기를 보면 뭐랄까 여러 명을 강제로 한 명으로 압축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원래라면 바로 쏘아붙였을 그녀가 의외로 잠잠하다.


어쩌면 감독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걸지도 모른다.


덕분에 내 분석이 맞았다는 확신이 생겼다.


“솔직히 말해 봐요. 누나 연기 코칭 받죠.”

“... 응”

“몇 명한테요?”


그녀가 손가락을 꼽기 시작했다.


“연기 선생님, 엄마, 그리고 감독님이 좋아할 것 같은 연기 지침까지... 3개?”


거 봐라.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하는 사람이 3팀이나 있는데 정상적인 연기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러니까 촬영장에서 감도 배도 아닌 파인애플을 꺼내고 있지 않나.


애가 천재라면 저렇게 때려 박아도 잘 종합해서 멋진 결과물을 낼 것이다.


그런데 내가 옆에서 지켜본 결과 한별은 천재과가 아닌 노력파이다.


그러니 방향부터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누나. 그런 거 다 때려 치우고. 누나가 생각하는 다연이는 어떤 애에요?”

“... 내가 생각하는 다연이?”


다연이는 여주인공의 이름이다.


“생각 안 해봤어요?”

“아니! 하긴 했는데, 내 분석보다는 전문가의 의견을 따르는 게...”

“에이. 그렇게 했다가 이 모양 이 꼴이 난 거잖아요. 차라리 다 때려치우고 누나가 분석한 대로 연기를 하는 게 더 깔끔하고 자연스러울 걸요?”


역시, 저런 성실파가 캐릭터 분석을 안 해왔을 리가 없다.


성공을 향한 수단을 다 갖추고 있으면서도 사용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별은 아직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내가 분석한 건 정답이 아니랬는데.”

“어허. 솔직히 누나 정도면 분석이 조금 이상해도 다 커버칠 수 있어요! 연습을 그렇게 하더만.”


한별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풀렸다. 촬영장에서 처음으로 들은 칭찬에 기분이 조금 좋아진 듯하다.


이대로 밀어붙이기로 하자.


“그리고 누나. 감독님 걱정은 안 해도 돼요. 감독님이랑 이야기가 다 된 상태니까요.”

“정말?”


물론 아니다. 그래도 눈물 콧물을 찔찔 흘렸으니까 조금은 유도리 있게 촬영을 하지 않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때문에 나는 입에 침을 한 번 묻히고 대화를 이어갔다.


“네. 한별 누나가 그렇게만 하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대요.”

“정말? 정말 그러셨어?”

“아이. 그렇다니까요. 자. 그러니까 지금은 떡이나 먹어요.”


드디어 한별이 떡을 받들었다. 하지만 먹지는 않았다.


아직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것 같다. 정말 손 많이 가는 누나였다.


“아 또 왜요?”

“아니... 내가 정말 잘 할 수 있을까 싶어서.”


지금의 상황은 그녀의 연기 인생 중 최저점인 것 같다.


자존감을 난도질 당해 의기소침해진 걸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저런 쉬운 문제를 가지고 질문할 줄이야. 나는 당연하다는 어투로 대답했다.


“물론이죠. 누나는 잘 할 거에요. 이번 촬영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이번에는 진심이다. 그녀가 훗날 잠적은퇴를 하는 건 알고 있지만, 정보로만 접한 그런 사실보다는 눈앞의 인물을 보고 평가를 내리고 싶다.


한별의 연기에 대한 열정과 실력은 진짜였으니까.


이번을 기회로 육성 방향만 잘 잡으면 다른 미래를 쟁취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네 생각이 틀리면?”

“아. 진짜 걱정도 많아. 걱정하지 마요. 만약 또 이렇게 쭈그리게 되더라도, 내가 이번처럼 바로잡아 줄 테니까.”

“피. 말은 잘해.”


한별은 새침하게 눈을 흘겼다. 그래도 또래한테 무조건적으로 받는 응원이 적지 않게 힘이 된 모양.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백설기를 앙 베어 물었다.


“으음! 이거 너무 맛있다!”

“맛있다니까 그러네.”


그녀의 눈이 똥그랗게 변했다. 아마 연기를 해도 저것보다 맛있게 먹는 건 불가능하리라.


체중관리를 한다는 사람이 이미 백설기를 반 이상 먹어치웠다.


그 때 우리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곧 촬영 시작하신답니다! 배우분들 모여주세요!”

“헉! 어쩌지? 아직 다 못 먹었는데.”


한별이 다급하게 입에다가 떡을 쑤셔 넣었다. 그 모습이 자뭇 웃겨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프핫!”

“뭐야! 너 왜 웃어? 왜 웃는데!”


그러는 그녀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제야 어깨에 힘 좀 빼고, 나이에 걸맞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배우 분들! 오셔야 한다니까요!”

“넵! 유한별 여기 있습니다!”


그녀는 열심히 오물거리면서도 빠르게 촬영장으로 향했다.


그녀의 연기를 구경할까도 했으나, 굳이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제 곧 정체되었던 촬영이 재개될 것 같은데 나 찍을 부분을 준비하기도 바쁠 것 같아서.


이 날 한별의 연기는 처음으로 OK 싸인을 들을 수 있었다.


작가의말

오늘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댓글과 추천, 선호작은 언제나 큰 힘이 됩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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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깨에 힘을 풀고 22.07.28 795 10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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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집으로 22.07.21 863 10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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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야밤의 전투 2 22.07.19 854 10 16쪽
71 야밤의 전투 22.07.18 924 10 17쪽
70 현장학습을 가다 3 22.07.17 903 12 15쪽
69 현장학습을 가다 2 +1 22.07.16 940 13 16쪽
68 현장학습을 가다 22.07.15 979 15 13쪽
67 호가호위호위 22.07.14 968 13 19쪽
66 호가호위 22.07.13 989 15 16쪽
65 첫 친구 22.07.12 1,018 17 25쪽
64 1차 심사 22.07.11 1,084 16 15쪽
63 천하제일 친구대회 22.07.10 1,103 18 13쪽
62 친구를 만드는 법 22.07.09 1,182 1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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