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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구. 님의 서재입니다.

정점의 DNA로 뉴 스타트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완결

서지구.
작품등록일 :
2022.05.11 21:31
최근연재일 :
2023.01.01 00:00
연재수 :
203 회
조회수 :
207,601
추천수 :
3,569
글자수 :
1,721,531

작성
22.07.21 21:46
조회
862
추천
10
글자
21쪽

집으로

DUMMY

정점의 DNA로 New Start


74화



“꾸이익!”


멧돼지가 뒷걸음질을 쳤다.


최상위포식자의 진정한 면모를 목격했으니, 지레 겁을 집어 먹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하지만 저런 4족 보행 짐승들은 보통 후진이 느린 법이었다.


“미개한 동물 같으니라고.”


우리 동네 아줌마들만 해도 산길을 뒤로 뛰어다니면서 박수까지도 치신다.


그런데 겨우 저런 것도 못하다니.


원래 이족보행 같은 걸로 차별할 생각 없었는데, 오늘만은 기꺼이 차별주의자가 되기로 했다.


그만큼 많이 쫄렸고, 두려웠으며, 위험했다.


그 반대급부로 아드레날린이 폭포 흐르듯 솟구쳤다.


“뭐하냐? 대가리 원위치!”


달려가 녀석의 대가리에 다시 한 번 짱돌을 찍었다.


“꾸에엑!”


멧돼지도 반격을 시도했지만 발을 멈춘 순간, 놈이 가지는 이점이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녀석의 장점은 육중한 체구와 말이 안 되는 속력이다.


그렇게 돌진해 덤프트럭마냥 상대를 치어 무력화시킨다.


그런데 그게 안 되는 이상 깨무는 것만 조심하면 된다.


멧돼지도 이를 아는지 계속 입을 벌리고 들러붙었다.


‘버틸 수 있을까?’


어쩌면 수호의 DNA가 놈의 이빨마저 막아낼지도 몰랐지만, 굳이 시험해보지는 않으련다.


뼈까지 으스러트리는 턱 힘이다. 괜히 나섰다가 후크선장 꼴 나는 건 사양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기에 멧돼지의 입에 짱돌을 집어넣고, 양 손을 겹쳐 내리쳤다.


“꼭꼭 씹어 먹어라!”

“꾸엑!”


돌도 씹어 먹는 나이였으면 짱돌도 먹었을 텐데, 멧돼지는 그러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연약한 입천장이 까졌다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그 틈을 타, 녀석의 눈에다가 흙을 한 줌 뿌렸다.


“인마. 사람은 손가락이 다섯 개야!”


안타깝게도 발가락이 두 개밖에 없는 멧돼지는 눈에 들어간 흙을 씻어내지 못했다.


그 이후로는 난타전이었다.


근처가 산이었기에 나는 또 다른 짱돌을 주워들 수 있었고, 쉬지 않고 멧돼지의 미간에 내리찍었다.


상대도 밀치고, 발로 찼지만 수호의 DNA를 각성한 나에게는 별다른 충격을 입히지 못했다.


“에이 씨 더럽게 단단하네.”


내구력이 좋은 건 멧돼지도 마찬가지지만 녀석에겐 조금이나마 데미지가 들어가고 있다.


자힐이 없는 이상, 탱커끼리의 땀내나는 전투는 내가 우위에 있으리라.


“승윤아. 휘말리지 않게 조심해!”

“응!”


보통 이런 상황에선 주변 인물이 휘말려 주인공의 발목을 붙잡지만, 현실엔 그런 고구마 같은 일은 없다.


승윤이는 알아서 폴짝폴짝 뛰며 멧돼지와의 거리를 벌렸다.


이내 응원 버프를 넣어주기까지.


“상혁아 멋져! 해낼 줄 알았어!”


상혁코인 대 떡상을 목격한 대주주님이 기쁨을 표하고 있다.


나는 그에 보답하기 위해 더 열심히 상대의 대가리를 두드렸다.


해머로도 안 깨졌다지?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지켜보기로 했다.


멧돼지의 대가리가 깨지는 순간, 나는 해머보다 강한 파괴력을 지닌 사람이 되는 것이다.


때리고, 때리고, 또 때렸다.


타격만 서른 번이 넘게 들어갔고, 드디어 멧돼지의 머리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녀석은 겁에 질린 비명을 지르며 몸을 돌렸다.


“꾸에에엑!”


그래봤자 돼지새끼에 불과하다. 목숨을 불태워 상대를 쓰러트리겠다는 투쟁심이 녀석에게는 없었다.


이러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구차하게 도망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녀석을 곱게 보낼 생각이 없었다.


녀석의 목덜미에 매달려 멈추지 않고 팔을 휘둘렀다.


이런 건 기회가 있을 때 확실히 짓밟아야 한다.


예를 들어 적당히 치다가 멧돼지가 도망갔다고 가정해보자.


상대는 도망가다가 그런 생각이 들 것이다.


‘아 씨. 조금만 더 하면 내가 이길 수 있었을 거 같은데. 쟤 진짜 별거 아닌데.’


덜 쳐맞으면 저런다. 저러고는 다시 풀 악셀을 밟아 덤프트럭마냥 나에게 갖다 박겠지.


그러니까 때릴 수 있을 때 딜을 우겨 넣어야 했다.


“네가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거다. 숟가락 살인마라고 들어 봤지?”


시골 촌놈이라 못 들어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의지는 전해졌는지 녀석의 속도가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바람이 볼따구를 세게 때릴 즈음, 멧돼지를 붙잡았던 손을 놓았다.


순도 100% 도망갈 생각이 아니고서야 저런 속도가 안 난다.


이미 녀석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내가 새겨둔 공포가 깊게 자리했을 것이다. 이 정도면 보내줘도 다시 돌아올 걱정은 안 해도 괜찮으리라.


“아코!”


관성 때문에 몇 바퀴를 굴러 머리를 박았다.


DNA 덕에 아프지는 않았지만 괜히 아픈 느낌이다.


가만히 누워 있자니 승윤이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상혁아! 멀쩡해?”

“그래 승윤아.”

“휴우 다행이다.”


8살 꼬마가 멧돼지를 때려 쫓아냈는데 승윤은 별로 놀라지 않은 것 같다.


“겨우 살았다. 그치?”

“응!”

“이거 진짜 어려운 일이었어. 조금 더 놀라도 괜찮은데.”

“상혁이는 언제나 놀라웠어!”


아무래도 그녀에게 내가 멧돼지를 이긴 사건은 있을 수 있는, 그 정도뿐인 일인 것 같다.


무슨 사람을 슈퍼 히어로나 마법소년 같은 걸로 아는 게 아닐까?


어리니까 그럴 수 있다.


과연 승윤이는 언제쯤 철이 들어서 어른이 될까?


헤실거리고 잘 우는 모습만 봐서는 감이 잘 안 잡혔다.


언제가 되었든, 나중에 그녀가 좀 컸을 때 지금의 일을 자랑하듯 들려줘야겠다.


“... 아! X발.”


정말 중요한 걸 까먹고 있었다. 좋았던 기분이 바로 나락으로 처박혔다. 그걸 못해서야 이겨도 이긴 게 아니다.


내가 양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자, 승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보았다.


“왜. 무슨 일 있어?”


있다. 그것도 엄청 큰 일이.


그녀가 궁금해 하길래 들려주었다. 내 인생 최대의 실수를.


“사진 안 찍었잖아.”


지금 승윤에게는 엄마가 맡긴 카메라가 있다.


만약 멧돼지를 때려잡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다면 어땠을까?


훗날 어떤 인연을 만나더라도 술자리에서 기가 막힌 안주가 되었으리라.


그 자랑질을 못한다는 생각에 속이 쓰렸다. 이건 반쪽짜리 승리에 불과하다.


그런데 승윤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찍었는데?”

“찍었어?”

“응! 많이 찍었어!”


보통 카메라 플래시 때문에 모를 수가 없었을 텐데, 온 신경이 멧돼지에 집중이 되어 있어서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다.


그게 대수가 아니다. 평생 술안주가 돌아왔다는 기쁨에 승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역시 승윤이랑 친구하길 잘 한 거 같아.”

“진짜? 진짜 진짜?”

“응.”


그녀가 폴짝폴짝 뛰다가 다친 무릎이 아팠는지 다시 주저앉았다.


그럼에도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어떻게 사진을 찍을 생각을 다 했대?”

“멋져서. 너네 어머니가 그러셨잖아. 멋지면 사진을 찍으라고.”


승윤이는 정말 한결같은 친구였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쭉 올곧게 날 추앙해주고 있다.


예전에는 그 과한 마음이 부담스러웠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나를 생각해주는 마음 덕에, 이렇게 내가 살아 있을 수 있었으니까.


DNA 각성도 그렇고, 사진도 그렇고 그녀에게 받은 것이 많았다.


그녀랑 친구를 하길 잘 한 것 같다.


처음 관계를 설정할 때 조건으로 내밀었던 ‘능력 개방’도 달성했으니, 앞으로 그녀를 밀어낼 명분도 없다.


그러니 이제는 진짜 친구로써, 승윤이를 맞이하리라.


지금보다 더 아끼고, 챙겨주고, 잘 되도록 보살펴 줄 생각이다.


그녀가 멋진 사람이 되어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 있게끔.


“승윤아 이제 내려가기만 하면 돼.”

“맞아!”

“그 전에 조금만 쉬자.”

“응!”


우리는 흙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솟구쳤던 아드레날린이 효력을 다한 것 같다.


정점의 DNA가 비활성화됨과 동시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탈력감이 찾아왔다.


피곤하고, 지쳐 어지러울 정도였다.


그러니 본격적으로 하산하기에 앞서 잠시만 쉬기로 했다.


그 전에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나는 주먹을 쥐어 하늘 위로 들어 올렸다.


“멧돼지. 이겼다고...”


또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갔다. 멧돼지를 때려잡았다는 낭만 역시 챙길 수 있었다.


의식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벅찬 감정이 몸을 짜르르 떨게 만들었다.


기쁘고, 보람차다. 거기에 앞으로는 이런 일들이 계속 늘어날 것이다.


그 미래를 기대하며, 나는 천천히 주먹을 내렸다.


주먹이 떨어짐과 동시에, 의식이 암전했다.


* * *


툭, 투둑.


차가운 액체가 내 머리를 두드렸다.


‘누구지. 멧돼지가 돌아왔나.’


그건 아닌 것 같다. 멧돼지의 침이었으면 보다 더 따뜻했을 터.


‘그럼 승윤이?’


그럴 수 있을 거 같기도 하고. 왜 애가 나한테 침을 뚝뚝 떨어트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으음 승윤아. 하지마. 좀만 더 잘래.”


그러나 대답은 멀리서 들려왔다.


“나 아닌데.”

“그럼 이건 뭐야...”

“비야.”


다비드 비야. 발렌시아와 바르셀로나에서 뛰었던 전설적인 축구선수가 나한테 침을 뚝뚝 흘리...는 건 지랄이고.


비? rain? 눈이 떠졌다.


그녀의 말처럼 비가 한 두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하늘이 새까만 것이 아무래도 비가 한바탕 쏟아질 것 같다.


아닌가, 밤이라서 까만 건가.


잠이 덜 깨서 머리가 잘 안 돌아갔다.


잘은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지친 상황에서 비마저 맞았다간 몸살을 앓기 십상이니까.


이제는 시계와 다름이 없어진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11시네.”


반딧불이 행사가 9시에 시작했고, 멧돼지에게 거의 30분을 쫓겼다.


그러니 거의 1시간 반 정도를 쓰러져 잠만 잤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다행이 여름이라 그런지, 바닥에서 잤는데도 입이 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흙이 푹신하고 차가워 자기 편했달까.


숙박 어플이 있었다면 4점 정도는 줬을 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이 깨자 승윤이에게 생각이 미쳤다.


“승윤아?”

“응!”


부르자마자 그녀가 쫑쫑 다가왔다. 근처에 있었던 것 같다.


“안 잤어? 뭐하고 있었어?”

“응. 또 못된 놈들이 오면 안 되니까 주변을 살피고 있었어!”


자신도 힘들 텐데 굳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는 소리다.


정말 누구 친구인지 참 기특하다. 회귀 이전의 나보다 훨씬 성숙한 것 같다.


“고마워.”

“친구인데 뭐.”


승윤의 고생을 치하하며, 이동 계획을 세웠다.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으니 삼길초 사람들도 우리가 사라진 걸 눈치챘을 터.


그러니 구조대를 불렀다는 가정하에 움직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보통 조난을 당한 경우, 제자리에 있는 것이 최선이라고 한다.


구조대랑 엇갈릴 수 있기 때문이며,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비가 오는 상황은 다르다.


오히려 가만히 있다가 저체온증으로 위험해질 수 있다.


그러니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찾는 것이 타당한 선택이리라.


그러는 편이 구조대원들이 찾기도 더 편할 거고.


“좋아. 일단 비를 피할 곳을 찾아보자. 업혀.”

“고마워. 무거울 텐데.”


그녀는 부담이 되기 싫은 것 같았지만, 이 정도는 괜찮았다.


보초를 서 준 승윤에게 보답하는 셈 치면 되니까.


그녀를 둘러메고 자리를 떠났다.


다행히 길을 대충은 외우고 있어서 방향을 잡기는 쉬웠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 된다. 참 쉽죠?


평범한 사람들은 그게 안 되어서 길을 잃지만, 천재적 두뇌의 소유자인 이 몸에게는 별것 아니다.


“여기서 꺾었고, 저기서 오른쪽. 그렇게 나와서 쭉 직진하면 이정표가 되는 상수리나무가... 얼레?”


없었다. 이 길이 아닌가?


사실 수호의 DNA를 각성한 뒤로, 두뇌가 조용해졌다. 말을 걸어도 답이 없다.


평소였으면 알아서 길 안내를 해주었을 텐데, 급똥 신호라도 온 것 같다.


그래서 스스로 나섰는데 이렇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허... 길을 잃었다. 이래서야 정말 조난이나 다름이 없다.


하다못해 로드 뷰 기능만 있었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뭐 어쩌겠나. 조금 더 걷는 수밖에.


머리가 똑똑하면 몸이 편하다 그랬는데, 어떻게 된 게 나는 항상 몸이 고생하는 것 같다.


“어디 보자 비를 피할만한 곳이... 있네? 저기서 피하면 되겠다.”


마침 근처에 동굴이 있었다. 우리 둘이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로 넓은 굴이다.


설마 길을 잃었는데 비를 피할 곳을 찾을 줄이야. 운이 좋았다.


“... 음.”


이상했다. 내가 운이 좋을 리가 없는데?


가만히 걷기만 해도 멧돼지가 꼬이는 날이다.


그런데 이렇게 매끄럽게 일이 풀리니까 되려 의심이 들었다.


‘설마 안에 곰이라도 들어 있다던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멧돼지도 있는 산골에 곰이 없으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설마 했던 일을 모두 겪고 있는 입장으로써, 동굴에 들어갔을 때의 미래가 눈에 훤히 보이는 듯 했다.


오들오들 떨고 있던 승윤이와 나. 구조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뒤에서 나타난 수상한 그림자.


그리고 쮸쀼쮸쀼 하는 울음소리와 함께 곰이 우리를 찢는 것이다.


수호의 DNA? 곰은 사람을 찢는다.


그냥 앞발만 휘둘러도 멧돼지의 몸통박치기 위력과 다름이 없다.


현재 상태로는 100% 사망하리라.


“으으음.”


업혀있는 승윤이가 몸을 떨었다. 비를 맞아 상태가 좋지 못한 것 같다.


‘어떡하지’


확실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멀리 돌아가는 것도 아쉽다.


결국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기로 했다.


주변에서 짱돌을 주웠다. 오늘따라 짱돌을 쓸 일이 참 많은 것 같다.


팔을 뒤로 쭉 당긴 다음, 동굴 안쪽을 향해 힘껏 던졌다.


돌이 호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그러나 떨어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돌을 아래로 떨어트린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다는 뜻은 무언가에 부딪혔다는 소리.


푹신푹신하면서도 덩치가 큰 곰이라거나, 곰이라거나, 곰이라거나.


“크허어어엉!”


명백히 사람의 소리가 아닌 울음소리다.


“X발 그럴 줄 알았다.”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곰도 빠르기 때문에 어그로가 끌리기 전에 모습을 감춰야 했다.


동굴에서 뭔가 뛰쳐나온 것 같지만, 더 이상 나랑은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길이 어딘지도 모르고 허겁지겁 뛰었지만 상관없다.


이미 길을 잃었으니까. 조금 미아가 되나, 많이 미아가 되나 별 차이는 없다.


“비만. 비만 피하자.”


어느새 빗줄기가 꽤나 굵어졌다. 슬슬 어디가 되었든 비를 피해 박혀 있어야 할 것 같다.


저녁도 든든히 먹었겠다. 물통도 가방 안에 있겠다. 자원이 모자라 죽을 일은 없다.


그러니 비를 피할 곳만 찾으면 된다. 아직 위험한 수준은 아니다.


* * *


그렇게 20분을 더 걸었다. 소나기는 어느새 호우와 같이 되었고, 여전히 비를 피할 곳은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운명 같으니.”


정말 상황이 공교롭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상대하는 느낌이랄까?


비를 내리게 만들고 동굴 안에 곰을 숨겨놓더니.


함정을 파훼하니까 이제는 아예 쉴만한 곳을 없애 말려 죽이는 느낌이다.


‘진짜 뒤질 것 같다. X발.’


진짜 요즘 신들은 상도덕이 없는 느낌이다.


보스전 끝나면 바로 마을 귀환을 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서로 전력을 부딪혀 싸웠으면 ‘아 제가 미숙했습니다. 다음에 더 준비해오겠습니다.’ 하고 물러설 줄도 알아야지.


패배를 인정 못하고 끝까지 잡몹으로 괴롭히는 꼬락서니가 치졸했다.


‘좀생이. 쓰레기. 허접 신.’


생각나는 모든 욕설을 신 영감에게 박았지만 분이 풀리지 않았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앉아있을 수도 없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가만히 앉아있다간 진짜 죽는다.


조금이라도 움직여서 열을 내는 것이 좋다.


“상혁아... 괜찮아?”

“어. 괜찮아.”

“안 괜찮은 거 같은덷... 미안해.”


그녀는 아까부터 횡설수설하고 있다. 등에서 느껴지는 열이 심상치 않다.


상처가 있기 때문에 상태가 빠르게 나빠진 듯하다.


“뭐가 미안해. 괜찮다니까.”


그녀의 등을 팡팡 때려주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빗물이 산길을 타고 흐르고 있다. 물은 아래로 흐르는 법이니까 따라 걷다보면 길이 나올 것이다.


다행히 남쪽 지역이라 북한에 도착해 ‘수령님의 DNA로 인민 공화국 만만세’를 찍을 일은 없을 것 같다.

“걷자. 걸어야지.”


생각해보면 걷는 일이랑도 연관이 깊다.


회귀 이후 눈을 뜬 곳이 걷기 대회장이었으니까. 기어 다니기 대회였나?


어쨌든 이번도 마찬가지다. 그냥 걷기만 하면 된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정신이 아득하고, 몸이 떨리고, 다리가 비틀거리더라도 괜찮다.


세상에서 나보다 걷는 걸 잘하는 꼬마는 없을 테니까.


얼마나 걸었을까. 시간도, 위치도 알 수 없었다.


이미 이성의 영역은 지나친 지 오래다. 그나마 반자동으로 움직이던 본능도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깜빡거리고 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저승에 도착하자마자 신의 명치를 존나 세게 때리는 수밖에 없다고 마음을 먹은 찰나, 저 멀리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삐용삐용 울리는 사이렌 소리였다.


“... 왔다. 드디어.”


비소리에 묻혀서 희미하긴 했지만 저 소리는 분명 사이렌이었다.


구급대원들이 근처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목적지가 보인 순간 정신이 돌아왔다.


아까와 상황은 똑같이 힘들지만, 아득바득 힘을 긁어모을 수 있었다.


“크흐흐. 병. 신새끼야. 우리가 이겼다.”


고라니에, 멧돼지에, 비에, 조난까지. 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갖다 박았음에도 나는 살아남았다.


최후의 승리자는 신이 아닌 나와 승윤이다.


얼마나 억울할까. 얼마나 답답할까.


신이 저 위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고 생각하니 미소가 지어졌다.


“야. 다 했냐? 뭐 더 없어? 븅~신 같으니라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티배깅을 하기로 했다.


농락은 승자의 정당한 권한이었으니.


“상혀가. 누구랑 이야기하는 거야아.”


승윤이 잠에서 깬 듯하다. 그녀에게도 이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다.


“거의 다 왔어. 이제 곧 도착할 거 같아.”

“진짜? 헤헤. 역시 상혁이...”


그 사이 새롭게 뭔가 나타나지 않을까 경계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드디어 산의 끝자락이 보였다. 차도에 경찰차가 주차되어 있고, 그 너머에 지훈이와 다른 선생님들이 보였다.


“하아...”


한숨이 나왔다. 드디어 끝이다.


한 때는 진짜 뒤질 생각까지 했는데, 어떻게든 살 수 있었다.


지훈이가 경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걸로 봐선, 녀석이 신고를 한 게 틀림없다.


내가 길을 잃었을 때를 대비하여 사이렌을 크게 울리고 있는 것도 지훈이가 건의한 걸지도 모른다.


똘똘한 녀석. 오늘은 여러모로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그동안 허투루 산 건 아닌 것 같아 가슴이 찡하게 울렸다.


신 새키야. 보고 있냐? 너는 친구도 없지?


하늘에 주먹 감자를 한 번 날리고, 경찰을 향해 걸었다.


승윤이가 제 발로 걷고 싶다고 해서 손을 잡고 같이 갔다.


시간은 벌써 11시 59분 15초. 지긋지긋했던 하루도 이걸로 끝이다.


차도에 도착하자 경찰들이 우리를 알아보았다. 건너편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가자.”


횡단보도는 없었다. 때문에 손을 들고 그냥 건너기로 했다.


좌우를 살펴보았으나 자동차 라이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절반쯤 왔을까?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에서 경적 소리가 들렸다.


빠앙!


억지도 정도껏 부려야지.


이런 시골에서, 이렇게 어두운데 라이트도 안 키고 달리는 트럭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애들아!!!”


경찰들이 다급히 막으려 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우리에겐 차를 피할 여력이 없었고.


“하... X발 진짜 가지가지 한다.”


정각까지 이제 고작 10초가량 남았다. 운명을 너무 꽉 채워 휘두르는 게 아닐까?


수호의 DNA를 활성화시키고 승윤을 감싸 안았다.


다행히도 최근에 물리 내성을 업그레이드 한지라, 아마 죽지는 않을 거다.


그 사실은 나도 알고, 신도 안다.


그런데도 이렇게 차를 보낸다는 이유는 분명하다.


‘곱게 보내기는 싫으니까 엿이나 먹으라는 소리지’


하늘을 노려보며 침을 뱉었다.


더 강해질 것이다. 더 큰 사람이 될 것이다.


그렇게 정점에 이르러 언젠가는 신에게 한 방을 먹이고 말리라.


잠시 후 트럭이 무서운 속도로 나를 쳐버렸고, 나는 이번에도 잠시 하늘을 거닐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생각보다는 버틸만한 아픔이었다. 부디 승윤이가 많이 다치지 않기를.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다급한 목소리뿐이었지만 흐릿하게 들려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오늘만 몇 번 겪는 건지 모를 감각이다. 의식이 암전했다.


작가의말

오늘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댓글도 추천도 선호작도 언제나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재밌고 힘이 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파이팅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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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오히려 좋아 22.08.03 769 10 17쪽
86 스타 이즈 본 +1 22.08.02 783 13 20쪽
85 배우가 되다 22.08.01 791 12 23쪽
84 드라마 속 짱 센 엑스트라가 되다 22.07.31 775 10 16쪽
83 경국지색 +1 22.07.30 825 10 19쪽
82 주연배우가 되기 위해 +2 22.07.29 801 10 18쪽
81 어깨에 힘을 풀고 22.07.28 794 10 25쪽
80 첫 촬영 22.07.27 815 12 23쪽
79 오리지널 vs 가짜 +1 22.07.26 822 13 21쪽
78 어린이의 손목을 비트는 것처럼 22.07.25 815 10 16쪽
77 드라마 너로 정했다 22.07.24 853 10 18쪽
76 박상혁 강화 프로젝트 +1 22.07.23 910 15 25쪽
75 sorry i’m strong 22.07.22 865 10 21쪽
» 집으로 22.07.21 863 10 21쪽
73 야밤의 전투 3 22.07.20 853 10 14쪽
72 야밤의 전투 2 22.07.19 854 10 16쪽
71 야밤의 전투 22.07.18 924 10 17쪽
70 현장학습을 가다 3 22.07.17 903 12 15쪽
69 현장학습을 가다 2 +1 22.07.16 940 13 16쪽
68 현장학습을 가다 22.07.15 979 15 13쪽
67 호가호위호위 22.07.14 968 13 19쪽
66 호가호위 22.07.13 989 15 16쪽
65 첫 친구 22.07.12 1,018 17 25쪽
64 1차 심사 22.07.11 1,084 16 15쪽
63 천하제일 친구대회 22.07.10 1,103 18 13쪽
62 친구를 만드는 법 22.07.09 1,182 19 15쪽
61 향상심 2 +1 22.07.08 1,256 22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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