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도기(2)
화려한 깃발과 등롱을 보니 느낌이 묘하다. 세상에 어지러워도 술과 여자가 있는 유흥가는 여전히 화려함을 뽐내면서 잘 돌아가고 있었다.
‘세상이 이렇게 어지러워도 유흥을 찾는 사람들은 많은가 보군.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가? 어지러운 세상을 달래주거나 시름을 잊게 해주는 것이 술과 여자니.’
영변제일관은 그 화려한 화원가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건물이었다. 건물 하나에 매달린 등롱만 수십 개가 넘었고, 채색깃발도 수십 개가 꽂힌 건물이다. 외관부터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된 영변제일관은 전통적인 조선의 건축양식과도 달랐다. 다른 건물과 달리 영변제일관은 흰색과 푸른색으로 칠해졌고, 다른 건물과 확연하게 다른 외관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요 공자님! 혹시 찾으시는 기녀가 있습니까?”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재빠르게 내 앞에 와서 고개를 숙이는 종업원.
“기녀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관주를 찾아서 왔네.”
“관주님을요? 관주님은 손님을 받지 않습니다만.”
“의원이라고 전해주게. 음천폐혈증 관련해서 드릴 말이 있다고 전하면 되네.”
“음천폐혈증이요?”
종업원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 하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 말만 전하면 되네.”
“알겠습니다. 일단 위에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종업원이 쪼르르 움직이더니 사십대로 보이는 종업원의 귀에 대고 속닥거린다. 이곳 영변제일관의 점노대로 보이는 인물이다. 점노대는 내 쪽을 흘깃 한 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위로 올라간다. 잠시 후 다시 내려온 점노대는 나를 찾는다.
“의원이라 하셨죠. 관주께서 만나 뵙겠다고 하십니다.”
점노대의 안내를 받아 올라간 곳은 4층의 한 방.
“관주님, 모셔왔습니다.”
“안으로 모시게.”
문이 열리자 손으로 안내하는 점노대.
“들어가시지요. 저는 여기까지 안내하겠습니다.”
“고맙네.”
- 저벅저벅─
안으로 들어서자 보이는 방. 화려하면서도 정갈한 것이 방주인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 같다. 탁자 앞에 앉아있다가 일어나 고개를 숙이는 한 여인.
‘대단한 미모로군.’
삼십대로 보이는 외모. 아마도 십 년 전이라면 모든 사내의 마음을 휘어잡았을 것이다. 한때는 영변제일관 최고의 꽃으로 영변에서 최고의 미모를 자랑했던 여인이다.
“어서 오십시요. 영변제일관 관주인 도여진입니다. 이름보다는 백단화라는 별호로 더 알려져 있기는 합니다만.”
“한강천이라 합니다.”
“한강천이요?”
순간 도여진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나를 안다는 표정이다.
“호칭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한 공자? 한 의원? 아니면 한 문주님?”
역시 도여진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이름만 듣고도 내가 천강문의 문주라는 사실을 안 것이다. 그 이야기는 천강문도 도여진의 정보 안에 들어있다는 이야기고.
“관주하고는 한 문주로 인연을 맺고 싶군요.”
살짝 놀란 표정을 짓다가 다시 온화한 표정으로 손짓을 하는 도여진.
“한 문주라. 그러지요. 앉으시지요.”
잠시 후 시비가 찻상을 가지고 오자 손수 차를 따르는 도여진.
- 호로록─
도여진은 서둘지 않았다. 차를 마시면서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나 역시 입을 열지 않자 결국 참지 못 하고 도여진이 먼저 입을 연다.
“음천폐혈증이라는 말을 꺼내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 병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니까요.”
“저는 그 병이 없는데 왜 저를 만나려 하시는 겁니까?”
“반대로 묻고 싶군요. 그 병이 없는 관주는 왜 저를 만나는 거죠?”
내가 되묻자 눈빛을 반짝이면서 미소를 옅게 짓는 도여진.
“그냥 의원은 아니신 듯하군요. 단순한 의원으로 저를 찾아온 것은 아니군요. 하긴 한 의원이 아닌 한 문주로 호칭해달라고 하셨으니. 저를 찾아온 것은 맞나요? 적지 않은 사내들이 저와 하룻밤을 꿈꾸면서 저를 찾기는 했지요.”
“도 관주를 찾아온 것은 맞지만, 병의 당사자가 아니니 도 관주에게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래요? 제게 목적이 없다면 무슨 목적으로 온 겁니까?”
“귀도기! 귀도기를 만나 거래하려고 온 겁니다.”
순간 도여진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약간 놀란 눈빛이다.
“귀도기요? 이곳에 와서 왜 귀도기를 찾는 겁니까?”
“이곳이 귀도기가 관리하는 기루 아니요. 그러니 도 관주를 통해서 귀도기를 만나야지요.”
“귀도기 어른이 한 문주를 만날 것이라 생각하는 겁니까?”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하면 만나주겠지요.”
“설마 음천폐혈증을 고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물론이요.”
“그동안 관서 관북 지역의 명의들이 손을 든 병입니다만.”
“혹시 압니까. 내가 고칠 수 있을지.”
“흐음, 흥미로운 분이군요.”
- 호로록─
도여진은 나를 바라보면서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는다.
“어쩔 거요?”
“연락을 취하죠. 들었지? 방주에게 전하도록 해라.”
도여진이 누군가에게 말을 하는데, 방 안에는 아무도 없다.
‘은신술인가? 대단하군. 내 기감으로는 어디에 숨어있는지 찾지 못 하겠어.’
잠시 후 천장 쪽에서 진동음이 느껴진다. 정말로 집중하지 않았다면 느낄 수 없을 정도의 미세한 움직임이다.
- 호로록─
“전갈이 갔으니 잠시 후에 회신이 올 겁니다. 그동안 차나 드시죠.”
“그럽시다.”
“놀랍군요. 갑작스럽게 천강문을 창건한 것도 놀라운 일인데, 저와 귀도기 어른을 찾아올 줄이야. 의원이 아닌 문주로 찾아왔다 이거죠. 거래를 위해서 왔다고 하셨으니, 천강문 문주로서 거래를 원한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음철문 관련 일이겠군요.”
역시 도여진은 내가 누군지, 그리고 내가 지금 어떤 상황이며,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도 관주의 예상이 맞을 거요.”
“흥미롭군요. 신생문파 문주가 의원을 자처하면서 귀도기 어른을 찾다니.”
도여진은 눈빛을 반짝이면서 나를 관찰하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관주님, 어르신 오셨습니다.”
“안으로 모시게.”
방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한 사내. 사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내는 화려한 의상을 입고 안으로 묵중한 걸음을 옮겼다.
“오셨습니까?”
“음, 그래.”
- 저벅저벅─
안으로 들어와서 내 앞에 선 사내.
“나를 찾으셨다고?”
“천강문 문주 한강천입니다.”
“염후철이요. 이름보다는 귀도기라는 별호로 더 알려졌소만.”
─ 귀도기 염후철!
관서3기 중 한 명. 신의 손을 가졌다는 인물로 도박에서는 누구에게도 진 적이 없다는 인물이다. 귀신 같은 도박기술을 가진 기인이라고 하여 붙은 별호가 귀도기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도박꾼이 아니다. 영변을 비롯하여 관서 지역의 밤을 지배하는 황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서 지역의 수 많은 객관과 기루, 도박장이 그의 지배 아래에 있다. 그리고 그 조직을 이용해 관서 지역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관리하는 귀도방의 방주이기도 하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를 나눕시다. 끄응!”
풍채 좋은 몸을 가지고 있지만 눈은 매처럼 날카롭고 좁았다. 매부리코에 각진 턱은 강한 인상을 풍긴다. 빈틈이 없어 보이는 인상의 소유자다.
“신생문파인 천강문 문주로 나를 만나 거래를 하고 싶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거래라. 서로 주고받을 것이 있어야 거래가 가능할 거 아니요.”
“그렇지요.”
염후철의 눈빛이 매섭게 빛나기 시작한다.
“음천폐혈증을 고칠 수 있다고 말을 했다는데. 그게 사실이요?”
“아마도요.”
“아마도?”
염후철의 눈썹이 꿈틀하면서 올라간다. 설마 자신을 놀리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는 것이다.
“환자의 병이 음천폐혈증인지 아닌지 모르는 상태니 병을 고칠 수 있다는 확답은 드리지 못 합니다. 하지만 음천폐혈증이 맞다면 고칠 수 있을 겁니다.”
“영변뿐만 아니라 관서 관북 지방의 명의가 와서도 고치지 못 한 병이요. 그런데 의원이 아닌 무인이 그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이요?”
“무인인 동시에 의원이기도 합니다.”
“나름 정보통인 나지만 의원 한강천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소만.”
“약왕 한수창은 아시지 않습니까?”
“약왕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잠깐... 뭐라고 했소? 약왕 한수창? 한강천? ...설마?”
염후철의 눈이 커지면서 뭔가를 떠올리는 표정이 된다.
“약왕의 후예라면 환자를 만날 조건은 되겠지요.”
“약왕의 후예라고? 허허, 이런 일이 있나. 희망이 사라지고 절망의 끝자락에서 약왕의 후예를 만나다니.”
갑자기 염후철은 파안대소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약왕의 후예를 찾았건만, 들리는 소식은 약왕 후예들의 실종 소식뿐이었소. 그렇다면 한 문주가 활생원 출신이란 말이요?”
역시 귀도기답게 염후철은 활생원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활생원 출신입니다.”
“허어, 몇 년 전에 사라진 활생원 출신이 생존해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로군.”
“이제 의원으로서 환자를 만나도 되겠지요.”
“물론이요. 되다마다. 내가 그토록 찾았던 약왕의 후예가 눈 앞에 있는데 어찌 마다하겠소. 내가 먼저 부탁할 일이요.”
- 와락─
염후철은 내 손을 잡으며 뜨거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 눈길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한 문주가 이제 마지막 희망이요. 약왕의 후예도 안 된다면 내 아이는 누구도 고칠 수 없소. 그러니 부탁하오. 내 아이를 꼭 살려주시오. 대가는 무엇이든 지불하겠소. 내 재산의 반이라도 내놓겠소.”
“재물은 필요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거래 조건은 귀도방을 빌리는 겁니다.”
“귀도방을 빌리는 거라. 귀도방의 무엇이 필요한 거요?”
“손발이 되어줄 정보조직이 필요합니다. 삼 년 동안만 제 수족이 되어주면 됩니다. 제가 하려는 일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준다면 아드님을 치료하겠습니다.”
“삼 년 동안 정보 제공이라. 어려운 일은 아니로군. 그렇게 하겠소.”
염후철은 흔쾌히 내 조건을 승낙했다. 아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니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염후철이 내 조건을 거절할 리가 없다.
이렇게 해서 일단 영변 최고 정보조직이자 관서 지방에서도 나름 입지가 있는 귀도방이 내 손발이 되어주기로 했다. 정보는 중요하다. 길거리 걸인에게 은자를 주고 산 영변에 대한 정보를 통해 귀도방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이제 귀도방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를 통해 영변을 손에 쥘 수 있을 것이다.
“환자는 언제부터 진료할 수 있소?”
“지금이라도 가능합니다.”
“지금이라도? 그럼 지금 바로 출발합시다.”
마음이 급한 염후철은 내 손을 이끌고 자신의 집으로 나를 안내했다.
‘귀도기 염후철의 집을 방문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지.’
염후철은 거처가 불확실했다. 귀도방이라는 조직은 분명 존재하지만 귀도방의 건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이 일반 문파와 다른 점이다. 일반 문파처럼 거대한 건물을 갖추고 문도들이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점조직처럼 분산된 조직이기 때문이다. 귀도방은 따로 건물이 없고 산하 집단의 건물을 귀도방의 건물로 사용했다. 그렇기 때문에 염후철의 거취 역시 불확실했다.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염후철은 어느날은 기루에서, 어느날은 도박장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서 염후철의 위치는 파악이 어려웠다. 염후철의 그날 거취는 심복들에게 따로 통신문을 보내서 알려주었기 때문에 염후철의 그날 위치는 심복 몇 명만 알고 있었다.
영변제일관의 도여진을 찾아온 이유도 도여진이 염후철의 거취를 확인할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의 거취를 알리기 싫어하는 염후철이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단 내가 염후철의 신뢰를 얻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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