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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116 회
조회수 :
14,535
추천수 :
182
글자수 :
530,484

작성
18.04.19 04:44
조회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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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7쪽

61화

DUMMY

“물이나 마셔, 이 녀석아.”


상훈은 그렇게 말하고는 봄이를 보란 듯이 지나쳐갔다. 봄이는 그런 상훈을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바라보다가,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며 받아든 페트병을 뚜껑을 열어 벌컥벌컥 마셨다.


“어르신, 저희는 내일 떠나려고 합니다.”


상훈이 노인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떨림이 없었고, 곧고 뚜렷했다. 벌써 결정해버린 것 같았다.


“결국 떠나는군.”


노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봄이는 마시고 난 물병을 바닥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그녀는 노인이 한탄하듯이 말한 그 한 마디가 마치 끝도 없이 이어진 유대감이 끊어져 버렸다는 뜻으로 들렸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 노인은 봄이의 목적이나 그녀가 가야만 하는 길과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안 그래도 복잡한 봄이의 머릿속이 더 심하게 뒤엉켰다.


노인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계속해서 장승처럼 서 있기만 하던 상훈이 자리에 앉고 나서야 노인이 다시 말을 꺼냈다.


“자네들도 알겠지만 통제소에는 최대 사흘까지 머물러 있을 수 있어. 결코 길다고는 할 수 없는 기간이지. 여기 머무르는 사람들은 반드시 고민하는 문제야. 기간이 지나면 퇴소 수속을 밟고 나가야 하는데, 일단 이렇게 나가고 나면 일정 기간이 지날 때까지 재입소하지 못해. 물론 이 때는 제 발로 나가는 게 좋아. 우리들 편에도 좋고 녀석들에게도 좋지. 예전에 한 번 별난 녀석이 있었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길 떠나고 싶지 않았나 봐. 그 녀석이 재소 기간이 끝났는데도 보이질 않는 거야. 만기가 끝나고도 일주일동안 보이지 않다가 글쎄 옆 건물 직원 화장실에서 발견됐어. 화장실 한 칸만 매번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한 어떤 녀석이 화장실 문을 땄던 거야. 정말로 그곳에서 일주일 동안이나 코빼기도 안 비췄었나 봐. 녀석은 정신이 반쯤 나가있었다고 해. 처음엔 반항하면서 마구 소리를 질렀는데, 나중에는 울고불면서 바지를 잡고 매달리더래. 결국 쫓겨나기는 했는데, 녀석이 일주일동안 그 곳에서 갇혀있다시피 있으면서 뭘 먹고 버텼는지 의문이라네. 바퀴벌레를 먹었다는 소문도 있고, 쥐를 잡아 먹었다는 소문도 있어. 최악의 경우 더 심한 걸 먹었을 수도 있지. 그렇지만 대부분 신빙성은 없어.”


봄이는 가만히 앉아서 노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둘 곳이 없었던 시선은 코와 입에서 스며나오는 습기 찬 입김으로 끌렸다. 분명 천막 내부이기는 했지만 봄이는 한기 어린 스산한 느낌에 몸을 떨었다.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사실 여기 머무르는 대부분의 녀석들은 이 기간에 목숨을 걸었어. 그런 녀석들이 차고 넘치는데 이 아까운 기회를 그냥 스스로 놔 버리겠다는 건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갈 길이 급하다는 건 이해하지만 조금 더 몸을 추스르는 게 좋아. 내일 나가 버리면 이런 곳에 다시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몰라.”


노인이 잔뜩 굳은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무거운 분위기가 흘렀다. 상훈은 노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고, 봄이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바싹 마른 입술을 우물거리기만 했다.


“말씀은 고맙지만, 만약 내일 성과가 있다면 저 녀석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저도 슬슬 가족들에게로 돌아가 봐야 하고요.”


상훈이 그렇게 말하고는 봄이를 턱으로 가리켰다. 난데없이 두 사람에게 주목받게 된 봄이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치웠다. 봄이에게는 그녀의 뒤에서 수근대는 시선이라면 모를까 이런 사람 대 사람으로 마주하는 시선은 결코 익숙하지 않았다.


“분명히 하루라도 더 빨리 가족들의 행방을 찾고 싶을 테니까요. 그리고, 그리운 가족들의 얼굴을 하루라도 더 빨리 보고 싶을 테니까.”


봄이는 끼어들지 않기로 했다.


“잠깐 바람 좀 쐴게요. 먼저들 주무세요.”


봄이는 일어서서 천막 입구를 열어젖히고 나가 버렸다. 봄이가 열고 나온 천막 입구를 닫으려고 하는 순간 안에서 들리는 말 몇 마디를 더 들을 수 있었다.


“딱딱한 아가씨로구먼.”


“그럴 나이잖습니까.”


봄이는 재킷 주머니에 손을 구겨넣은 채로 걸었다. 눈은 완전히 그쳤고, 건조했던 바람도 크게 잦아들어 있었다. 바람은 불지 않았지만 실외 체감 온도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없이 눈길을 녹이고 있던 물웅덩이가 더욱 크고 깊어져 있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앉아 있었다. 하지만 봄이는 그곳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외곽에 몇 대 비치되어 있던 눈 덮힌 벤치로 걸어갔다. 벤치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으나 봄이가 그 쪽으로 다가오자 황급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어디론가 가 버렸다. 봄이는 그런 남자의 행동에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찔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봄이는 허리를 숙여 손바닥으로 벤치에 쌓여 있는 눈을 쓸어냈다.


봄이는 벤치에 가만히 앉아서 눈앞에 비춰지는 광경을 그대로 지켜보았다. 그곳에서는 모든 광경들이 한 눈에 다 보였다. 그녀는 얼음 건물들을 보고 싶었지만 얼음 건물들은 이미 안개처럼 짙게 퍼져버린 어둠이 둘러싸고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건물에서부터 여기저기 비춰대는 탐조등 불빛도 보였고, 경찰관들이 들고 다니는 옅은 손전등 빛줄기들도 사방에서 번쩍였다. 그 날은 빛줄기들이 조금 더 많아진 것 같았지만.


얼어붙은 벤치 때문에 엉덩이가 시리긴 했지만 봄이는 그 얼음 벤치에 앉은 그 순간부터, 최근에 깨어 있을 때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편안함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게 되었다. 편안함은 곧 마음의 평정심을 가져왔다. 바깥이 춥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평생 그렇게 앉아있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봄이는 왜인지는 몰라도 방금 전까지 혐오했던 한기와 찬 공기가 신선하다고 느껴졌다. 곧바로 생각을 고쳐먹기는 했지만, 방금 전까지 차분하게 평정심을 되찾았던 자신이 내심 기특했다.


봄이는 눈을 감은 채로 모든 생각을 비우고 온 몸으로 느껴지는 감촉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하지만 너무 깊은 감각을 집중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서인지, 그녀는 등 뒤에서 접근하는 그림자를 알아채지 못했다.


작가의말

히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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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95화 20.11.28 30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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