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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1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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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530,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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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3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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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DUMMY

놈들은 얻어맞아 힘없이 늘어진 봄이의 묶인 양팔을 붙잡고 질질 끌고갔다. 어둠에 가라앉은 밤공기는 쌀쌀했고, 봄이의 의식은 자꾸만 멀어져만 갔다. 봄이는 놈들이 자신을 그 높디높은 지하실 계단에서부터 어떻게 끌고 올라왔는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봄이는 어떻게든 의식을 부여잡으려고 노력했다. 두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끌려가는 모습은 영락없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다름없었다. 퉁퉁 부은 얼굴을 가까스로 들어 올려다보니 아까 전에 보았던 불이 꺼진 창고가 보였다. 창고에 도착하자마자 놈들은 두 팔이 묶인 봄이를 거칠게 안으로 내팽개쳤다.


“금방 다시 올게. 꼬맹아.”


그렇게 말하고는 곧바로 창고 문을 걸어잠근 채 돌아가버렸다.


놈들이 돌아가자 세상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습기처럼 들어찬 어둠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사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깊은 밤에 벌레가 우는 찌르르 소리만 귀에 맴돌았다.


두 팔과 다리를 움직여보려고 했다. 봄이는 두 팔이 잘 움직이지 않는 이유가 놈들에게 두들겨 맞아서인지, 밧줄에 팔이 묶여서인지, 힘이 없어서인지 잘 알지 못했다.


무자비한 폭력 앞에 개처럼 짓밟혀 엉망진창이 된 몸은 자꾸만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목에서는 끅끅 하는 신음소리만 흘러나왔고, 그마저도 이를 악물어 잘 나오지 않았다.


탄환이 떨어진 권총과 칼, 그리고 전기충격기는 모두 놈들에게 빼앗겨버렸다. 봄이는 이제 자신의 몸을 지킬 최소한의 무기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제 봄이에게 남아있는 것은 맞아서 병든 몸과 상처뿐인 마음, 그리고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뿐이었다. 지금 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봄이는 제대로 몸을 지탱해 일어서지도 못한 채 눈물만 흘렸다. 봄이는 지금까지 자신이 걸어온 여정과 목적에만 의지할 수 있게끔 도와준 작은 소망이 이렇게까지 의미없고 헛된 길이었는지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알 수 있었다.


놈들에게 의지가 무참히 짓밟히기 전에는 실현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지금껏 자신이 바라왔던 꿈과 희망이 한순간에 구겨진 종잇조각이 되어버리는 것을 봄이는 자신의 생기 잃은 눈동자로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다.


봄이에게는 이제 더 이상 삶의 이유가 없었다. 이 이상 벌레처럼 연명하는 것이 과연 자신에게 있어 현명한 선택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봄이는 여지껏 자살이라는 개념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생각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어리석고 부질없는 고민도 한순간이었다. 결국 봄이는 이 가망 없는 세계에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고, 이 세계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았던 사람이 끝내 목숨을 잃는 것은 지금은 흔한 일이었다. 어제도 몇 자릿수가 넘는 사람들이 기아와 굶주림, 투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을 것이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봄이 역시도 이 절망뿐인 세상에서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 창조주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었고, 그 대가로 죗값을 치른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투쟁하지만 정작 생전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자신이 오늘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나 자기 자신은 죽음을 피해갈 것이라고 굳게 믿은 채 살아갔고, 봄이도 방금 전까지는 그렇게 믿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어설픈 착각이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간과하고 시덥지 않게 생각했던 것이 봄이에게 있어 치명적인 실수였다. 봄이는 어느새 죽음의 문턱까지 와 있었지만, 앞으로 자신이 어떠한 현실을 마주하게 될지는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놈들이 아까 뭐라고 했었더라? ‘널 식인종에게 팔아넘길 거야.’ 그런데 그 다음엔? 놈들이 자신을 식인종이란 자들에게 팔아넘기기 전에 과연 가만히 내버려 둘까? 만약 그렇다고 해도 그 다음엔? 분명히 그 식인종이란 자들이 봄이를 비참하게 죽인 다음 잡아먹을 것이다. 아니, 산 채로 잡아먹을 수도 있었다.


결국 봄이에게는 내일이 없었다. 봄이의 가족들은 이제 없었고, 더 이상 그녀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 사람도 없었다.


봄이는 하루라도 더 빨리 이 잔혹한 악몽에서 깨어나기만을 원했다. 그리고 악몽에서 깨어나려면 무슨 짓을 해야 할지, 봄이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순간 봄이의 결심에 응하기라도 한 것처럼 봄이의 양팔을 단단히 옥죄고 있던 밧줄이 풀렸다. 처음부터 헐겁게 묶여있었던 것인지, 의도적으로 그 순간에 풀리도록 한 운명의 도움인지는 알 수 없었다.


봄이는 엎드린 채로 필사적으로 어둠 속을 더듬었다. 손을 휘저을 때마다 끈적끈적한 것이 손등에 닿았다. 비쩍 마른 바퀴벌레 시체가 만져지기도 했다.


그렇게 더듬어 나가다 보니 멀지 않은 곳에 자신의 배낭이 놓여있는 것을 눈치챘다. 놈들이 안에 쓸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봄이와 함께 던져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봄이는 가까스로 배낭을 열어 안을 뒤졌다. 그러자 얼마 전, 하수도 내부에서 몰려 살던 아이들과 만났을 때 준혁에게 받았던 약 봉투 하나가 손에 잡혔다. 분명히 그들은 이 약 봉투를 신경안정제라고 했었다.


봄이는 준혁의 말을 떠올렸다. ‘힘들 때,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절망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될 때 한 알 삼켜봐. 그래도 부족한 것 같으면 두 알까진 괜찮아. 그 이상은 안 돼. 절대로.’


봄이는 준혁이 했던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또한 자신에게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끔찍한 악몽에서 벗어날 방법은 이것뿐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죽으면 편해질 거야.


봄이는 주저없이 쥐고 있던 알약들을 모두 입 속으로 털어넣었다.


물이 없어 삼키기가 힘들었지만 눈물로 대신 억지로 삼키면 되는 일이었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기 때문에 삼키기 어렵지는 않았다. 삼키는 순간에는 가슴을 찌르는 고통이 느껴졌지만 곧 잦아들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곧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편안함만 남을 것이라고, 이제 이 끔찍한 악몽에서 깨어날 시간이라고,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그러한 염원은 오래가지 못했고 봄이는 삼켰던 모든 것들을 토해버렸다. 가슴 속에서는 자신에게 영원한 휴식과 더 이상 고통도 절망도 없는 미래를 약속하고 있었지만, 봄이의 몸이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왜일까?


이 알약들만 삼키면 이제 봄이는 더 이상 생존을 위해 싸울 필요도 없어질 텐데. 밑바닥에서 목숨이 위태로워질 걱정도 없고, 구질구질하고 비굴하게 연명할 필요도 없이 편안하게 고통도 절망도 없는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을 텐데........


봄이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죽음만이 이 끔찍한 악몽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때가 되니 죽음이 두려워진 자신의 나약함이 미칠 듯이 한심해서 봄이는 바닥에 머리를 몇 번이나 처박았다.


이제 봄이는 악몽에서부터 벗어날 유일한 탈출구마저 저버렸고, 이제 남은 것은 정말로 죽음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맞이하는 죽음이 아닌, 타인의 손으로 맞이하게 될 죽음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봄이는 좌절감과 슬픔에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분명히 내일이 거래 날짜라고 했었다. 내일까지는 얼마나 남았을까? 동이 트기까지는 앞으로 몇 시간도 채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계속 지나가고 있었다.


정신없이 울부짖던 봄이는 이제 기진맥진해서 힘없이 푹 엎어져버렸다. 이곳에 봄이를 도우러 올 사람은 없었고, 무엇보다 더 이상 봄이에게는 몸부림칠 힘조차 없었다. 물 한 잔만 마실 수 있었으면.........


봄이가 탈진해서 쓰러져있던 그 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창고의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그 어둠 속 그림자는 한 개가 아니었다. 여러 개의 그림자들은 저마다 봄이에게 관심이 있다는 듯이 스멀스멀 몰려들었다.


이윽고 어둠 속 그림자가 말을 걸어왔다.


“저기요, 언니. 괜찮아요?”


생기는 없었지만 맑은 소녀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봄이는 그림자들의 존재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몸 속의 것들을 약과 함께 모두 게워내버린 봄이는 갈증을 견디기 어려웠다.


“물.......... 물 한 모금만..........”


그러자 어둠 속 그림자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것이 물인지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봄이는 그것을 빼앗아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수분을 마시고 정신을 차린 봄이는 그제서야 어둠 속 그림자들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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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3화 21.02.13 32 0 9쪽
115 112화 21.02.05 30 0 15쪽
114 111화 21.01.25 34 0 12쪽
113 110화 21.01.20 54 0 12쪽
112 109화 21.01.15 29 0 11쪽
111 11. 끝나지 않는 밤 21.01.11 49 0 13쪽
110 107화 21.01.08 35 0 12쪽
109 106화 21.01.06 124 1 11쪽
108 105화 21.01.05 32 1 12쪽
107 104화 21.01.03 65 1 13쪽
106 103화 20.12.21 46 0 9쪽
105 102화 20.12.20 27 0 16쪽
104 101화 20.12.16 64 1 12쪽
103 100화 20.12.11 29 0 13쪽
102 99화 20.12.08 38 0 12쪽
101 10. 종착점 20.12.07 38 0 11쪽
100 97화 20.12.02 58 0 13쪽
99 96화 20.11.29 67 0 11쪽
98 95화 20.11.28 30 0 14쪽
97 95화 20.11.23 41 0 13쪽
96 94화 20.11.20 40 1 9쪽
95 94화 20.11.19 62 1 9쪽
94 93화 20.11.17 70 0 13쪽
93 92화 19.11.27 57 0 9쪽
92 91화 19.11.24 57 0 17쪽
91 90화 19.11.23 50 0 26쪽
90 89화 19.11.19 55 0 18쪽
89 88화 19.11.17 52 0 17쪽
88 87화 19.11.16 87 0 19쪽
87 86화 19.11.15 58 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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