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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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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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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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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97화

DUMMY

봄이는 ‘난 지금 말해줬는데 너무한 것 아니냐’ 며 불평하는 상훈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곧바로 차량으로 달려갔다. 봄이가 돌아가서 말없이 뒷좌석에 올라타자 중년 여성이 단둘이서 뭘 하고 왔느냐고 낄낄거렸다.


그가 돌아오고 차량이 다시 출발했다. 한강을 지나치자 왠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한강을 지나친 이후로는 재미없는 황무지만 눈에 들어왔다. 실망한 봄이는 눈을 감아버렸다.


잠시 후 누군가가 봄이를 깨웠다. 어물쩡 뜨인 귓전에서 사람 목소리들이 들렸다. 최소 너덧 명은 넘는 것 같았다. 차에 탄 사람이 이렇게 많았었나?


그들이 탄 차량을 경찰 두 명이 막아섰다. 비몽사몽하던 봄이는 그 광경을 보자 잠이 번쩍 깼다. 어느새 운전석에는 중년 여성이, 조수석에는 상민이 앉아 있었다.


야광조끼를 입고 번쩍이는 교통 지휘봉을 든 경찰관 하나가 차를 멈춰세웠다. 상훈은 봄이의 머리를 꾹 누르며 자세를 낮췄다.


경찰관이 운전석 창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통행증 있으십니까?”


중년 여성이 품에서 서류를 꺼내 경찰관에게 보여주었다. 경찰관은 서류를 대충 훑어보더니 돌려주고는 ‘두 명’ 이라고 외치며 통행 안전바를 올려주었다.


“우린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이었던 거네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차량이 조심스럽게 내부로 진입했다. 봄이가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자 아까 들었던 사람 목소리들이 바깥에서 들렸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터미널 입구에 북적이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 몸 크기만한 짐들을 짊어지고 있었다.


무장 경찰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데도 바닥에 주저앉아 구걸하는 거지들은 버젓이 존재했다. 오후 시간대라 빛은 필요 없었음에도 상당히 음울한 광경이었다. 주차된 차량들이 빼곡이 밀집해 있는 좁은 입구로 천천히 들어서던 차량은 골목에서 예고없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사람들을 몇 번이고 들이받을 뻔했다.


경찰관의 도움을 받아 적당한 곳에 주차신청을 할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그들은 주차장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공터에 차를 세웠다. 오래 머무를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한 경찰관이 다가와 ‘차량을 도난당해도 상관 없느냐’ 고 주의를 주었지만 중년 여성이 태연하게 그렇다고 대답하자 경찰관은 한동안 벙찐 채 서있기만 했다.


봄이는 차량에서 내리자마자 후드를 뒤집어썼다. 건물 벽면에는 검은 타일이 구석구석 발라져 있었고, 누군가가 스프레이로 휘갈긴 낙서들로 온통 도배되어 있었다. 바닥에는 시위대가 버리고 간 듯한 종이 팻말이 자꾸만 발에 밟혔다. 봄이는 호기심에 팻말을 주워 읽어보았지만 심하게 밟혀 훼손되어 있어서 ‘낙원’ 이라는 글씨밖에 알아보지 못했다.


저 멀리 보이는 검문소에서 한 무리의 군중들이 경찰에게 욕설을 쏟아붓고 있었다. 몸수색 도중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군중들 중 누군가가 경찰관을 밀치려 하자 다른 군중들이 그를 저지했다. 그러자 경찰관들이 데리고 있던 개 한 마리가 계속해서 군중들을 향해 짖어댔다.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던 봄이에게 상훈이 가방을 내밀었다.


그들은 가져온 가방들을 차량 트렁크에서 모두 꺼내놓았다. 각자 메고 있는 가방 외에도 큼지막한 여행용 케이스 가방이 한 개 더 있었다.


“마침내 여기까지 와버렸어. 준비는 되어 있겠지?”


그것은 그 누구도 아닌 봄이에게 하는 말이었다. 봄이는 그 순간까지도 어떻게 하면 자신이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터미널을 지나 천안으로 갈 수 있을지 모르고 있었다. 입구 검문소에서 틀림없이 붙잡힐 것이었다.


만약 기적적으로 통과했다고 해도 그 다음엔? 얼마나 많은 탑승 절차가 봄이를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도 몰랐다. 그 과정에서 봄이의 신원이 밝혀지기라도 하면 소망이고 남은 여정이고 뭐고 그대로 끝이었다.


“어떻게 절 천안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게 해주신다는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저길 봐요. 표를 구한다고 해도 그 전에 검문이 있어요. 설마 저길 정면으로 돌파하겠다는 건 아니죠?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우회라도 해서 차에 몰래 숨어탈 수는 있겠지만 그러면 표가 없어서 도중에 내쫓길 거예요. 어떻게 절 천안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건가요? 버스 트렁크에라도 몰래 숨을 수 있다면 모를까........”


“바로 그거야.”


봄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바로 그걸 위해서 이 커다란 가방이 필요한 거야.”


중년 여성이 트렁크에 실린 거대한 여행용 케이스 가방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저기, 지금 무슨 말씀 하시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봄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묻자 상훈이 끼어들었다.


“봄아, 이제와서 말해서 미안한데...... 우린 네가 잘 동안에 널 어떻게 무사히 목적지까지 데려다줄 수 있을지 의논했어. 별의별 의견이 다 나왔지. 하수도 맨홀을 열고 들어가서 검문을 통과하자는 말도 나왔고, 아예 직원을 총으로 위협해서 강제로 얻어타고 가자는 말까지 나왔어. 물론 전부 다 말도 안 되는 소리고, 최종적으로 널 커다란 가방 안에 숨겨서 어머니가 승객인 척 가방만 싣고 되돌아오자는 걸로 결정됐어.”


“뭐라구요? 왜 저한테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멋대로 결정했던 거예요?”


봄이는 그의 말을 듣고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네 말대로 우리 둘은 함부로 돌아다니기 위험해. 사실은 나라도 말해주려고 했는데 그러면 네가 반발할 것 같아서 말 안 해줬어. 우리도 최대한 도와주려고 어렵게 내린 결정이니까 네가 이해해줬으면 해......”


상훈의 멱살을 붙잡으려고 다가가던 봄이는 다시 생각해보니 꽤 괜찮은 방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반대한다고 해도 뾰족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예상외로 일이 잘 풀릴 것만 같았다.


“.....성공할까요?”


“물론이지. 나만 믿어.”


중년 여성이 자신만만하게 자신을 가리켰다.


“아까 전에 안내창구에서 물어봤는데, 천안행 종착버스는 일주일마다 하루씩 두 대가 출발한다고 했어.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몰라도 오늘이 바로 그 날이라는 모양이야. 가방 속에서 쥐죽은 채로 숨어있다가 종착점에 도착하게 되면 승객들을 모두 내리게 할 거야. 그 때 승객들이 찾아가지 않은 짐들은 모두 근처 수하물 창고나 분실물 취급소로 옮겨질 거야. 그러면 밤이 깊을 때까지 거기 숨어있다가, 아무도 없을 때 몰래 나와서...... 그 다음부터는 네게 달렸어. 아무튼 첫 번째 버스는 8시간 전에 한 대가 출발했다고 했어. 이제 곧 막차가 출발한다는 모양이야. 내가 알기론 다음 버스가.......”


그녀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검문을 마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갔다.


“......바로 지금인 모양이구나. 작별 인사할 시간도 없겠어. 서둘러. 지금 가야만 해.”


그들은 경찰관들의 눈을 피해 담을 기어올랐다. 철조망이 쳐져 있기는 했지만 높이가 낮고 헤져 있어서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였다. 상민은 빈 차량을 지키기 위해 남았다. 그는 봄이와 눈이 마주치자 팔짱을 껸 채로 성의없이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시간이 없어. 얼른 들어가. 가장 큰 가방을 가져오기는 했는데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


봄이가 가방 속으로 다리를 집어넣으려고 하는데 중년 여성이 붙잡았다.


“내 정신 좀 봐.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네.”


그렇게 말하고는 가방을 뒤져 물건들을 꺼냈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우리들끼리 상의해서 소소한 이별 선물을 준비했어.”


중년 여성이 무언가 조잡하고 검은 장치를 내밀었다.


“남는 부품을 모아서 만든 전기충격기인데 네 마음에 들지 모르겠어. 더 이상 권총에 남은 총알이 없다고 들었어. 여자애를 아무런 무기도 없이 사지로 보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배터리도 확실하게 새걸로 넣어두었어. 하루 전에 만들어서 시험해 봤는데 효과도 아주 끝내줘. 사실 이걸 만드는 데는 상민이의 도움이 제일 컸어. 아, 혹시 몰라서 말해두는데 사용하다가 폭발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그렇게 말하며 조잡한 전기충격기를 봄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상훈도 봄이에게로 다가왔다.


“이것 받아. 돌려줄게.”


그가 작은 칼 하나를 내밀었다. 봄이가 처음 그에게 선물했을 때와는 다르게 가죽으로 만든 칼집에 조그마한 끈이 묶여 있었다.


“내가 손재주가 없어서 이런 것밖에는 해줄 수가 없었어.”


그리고 자신이 두르고 있던 목도리와 차고 있던 시계도 봄이에게 쥐어주었다.


“받아. 사양하지 말고. 마지막까지 함께 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순식간에 선물을 세 개나 받아든 봄이의 표정이 점점 창백해졌다. 머릿속에 들끓던 두근거림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윽고 새하얀 백지만 남게 되었다. 봄이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넋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있기만 했다.


지금껏 기억 속 가장 가장자리에 치워둔 채로 잊고 있었던 그와의 이별이 결국 현실로 다가오자 봄이의 감정선은 점점 무너져내렸다. 봄이는 그들이 마지막 선물을 쥐어주며 어깨를 토닥이며 응원해주는 그 순간에도 자신은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가 바래다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중년 여성이 그렇게 말하며 웃어주었다.


“성질 더러운 꼬맹이, 잘 지내라. 살아있어야 돼.”


상훈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도 들렸다.


세계의 질서가 무너져버린 이후 이 황폐화된 세계에 남은 모든 생명체들은 생존을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힘이 없는 자들은 이용당했고, 세상 밖으로 무참히 내버려졌다.


정상적인 세계였다면 가장 먼저 보호받아야 할 노인, 여자, 어린이들은 인류의 암흑기가 도래했을 때 제일 빠르게 죽어나갔다. 그렇기에 봄이는 강해져야만 했다. 몇 번씩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생긴 불신이 봄이의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잡았다. 한때는 여렸을 몸과 마음도 이미 오래 전에 닳아 없어져버렸다.


이 황량하고 잔인한 세상에서 봄이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은 채로 불신주의자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녹이지 못할 것만 같았던 봄이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인 단 한 사람이 있었다.


봄이는 자신의 마음을 녹여 준 이 사람이 고마웠지만 고마움을 표현하지는 못했다. 자신이 지금까지 입은 은혜를 표현하지도 못한 채 고마웠던 사람, 지금까지 함께했던 하나뿐인 사람과 이제 헤어져야 했다. 봄이는 또다시 혼자가 되어야만 했다.


봄이는 혼자가 되기 전에 상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말없이 상훈을 조용히 껴안았다.


순간적으로 그 자리에 있던 두 사람이 모두 당황해했음에도 봄이는 그를 놓지 않았다. 다시는 울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던 봄이의 노력은 결국 무색해져 버렸다.


상훈은 조용히 품에 안긴 채로 훌쩍이는 봄이의 더러운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사실 봄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상훈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함께 해 주셔서 고마워요, 아저씨.”


봄이가 눈물을 그치고 제대로 선 채로 말했다.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이 하나 있어요.”


“그게 뭔데?”


따뜻하게 미소짓는 중년 여성의 모습을 보자 꿈 속에서 나타났던 얼굴이 지워진 여성이 떠올랐다. 만약 엄마를 눈앞에서 만나게 된다면.......이런 모습일까?


“한 번만......안아 주시면 안 될까요?”


중년 여성이 봄이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작은 몸을 꼭 껴안아주었다. 봄이는 어머니에게서 느껴지는 따뜻한 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 때 고속버스에서 울려퍼지는 경적음이 들렸다.


이제 떠나야만 했다.


“이런,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저 버스를 놓치면 이제 더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몰라.”


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가방 속으로 다리를 집어넣었다. 온 힘을 다해 꾸역꾸역 웅크리자 몸이 들어갈 만한 정도는 되었다.


상훈이 봄이가 든 가방을 중년 여성에게 건네주자 가방 안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딱히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상훈은 기꺼이 대답해주었다.


“뭐, 인연이 있다면.”


< 다시 만날 수 있다면 > 마침.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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