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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1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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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484

작성
20.12.0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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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DUMMY

봄이가 그렇게 말하며 남자로부터 멀리 떨어진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남성은 주름투성이 얼굴로 자신을 이해해 준 봄이에게 힘없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비를 피하기에는 천안맞춤인 공간이었다. 남자는 곧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서툰 솜씨로 튕기는 낡은 기타줄에서 고운 소리가 났다. 남자가 애써 노력하는데도 아기는 울음을 그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봄이가 입을 열었다.


“그 쪽 아이세요?”


남자가 기타줄을 튕기던 손을 멈췄다.


“그럼요. 올 해로 두 살이에요. 이제 며칠만 더 지나면 세 살이 될 거예요. 이름은 아직 못 정했지만요. 아내와 나는 이 아이 이름 문제로 소소하게 언쟁을 벌였어요. 아내는 준이가 좋다고 했고, 난 혁이가 더 좋다고 했었거든요. 그렇게 다투던 우리는 아이가 태어난 다음에 이름을 짓기로 합의했어요.


만약 남자아이라면 준 아니면 혁이로, 여자아이라면 예린이 아니면 초현이로 하기로 약속했죠. 아내와 나는 늘 서로 양보하면서 살았어요. 그렇지만 애 이름만큼은 아내도 나도 절대 뜻을 굽히지 않았었죠. 아, 봄이라는 이름도 고민했었어요.”


그 말은 들은 봄이는 마시던 물을 허공에 내뿜었다.


“결국 아내와 난 말일까지 이름을 두고 싸우는 바람에 끝내 이름을 정하지 못했어요. 아이가 태어나면 함께 이름을 정하자고 했던 아내는 어디론가 떠나 버렸지요. 이젠 우리 둘만 남았어요. 예전에 아내가 임신했을 때 뱃속에 있던 아이에게 가끔 이렇게 노래를 불러주고는 했는데, 지금은 뜻대로 잘 안 되네요.”


봄이가 말이 없자 남자가 말을 이었다.


“아내는 음악가였어요. 한낱 공사장 인부였던 내게 있어서는 과분한 여자였죠. 아내는 피아노를 제일 잘 쳤는데 제일 좋아하는 악기는 기타였어요. 그래서 늘 내가 집에 돌아오면 날 위해 기타를 연주해주고는 했죠. 남는 시간에 아내에게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아내는 그런 내가 기타를 연주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기뻐했어요. 어쩌다가 내가 집에 꽃이라도 사 가는 날에는 날 와락 껴안고 마냥 행복해하기도 했죠.”


남자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는지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봄이는 조용히 듣고 있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 아내분은 지금 어디 있죠?”


흥얼거리던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품에 안긴 아기가 더 크게 울었다.


“어느 날 집에 들이닥친 도둑들에게 강간당하고 자살했어요. 놈들은 난데없이 문을 부수고 들어와 날 흠씬 패고 묶어뒀어요. 원래 그들은 나와 내 아내에게는 손을 대지 않으려고 했어요. 물건들이 목적이었죠. 그러나 아내가 저항하자 놈들은 아내를 번갈아가면서 강간하기 시작했어요. 내 눈앞에서 말이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묶여있던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저 지켜보기만 해야 했죠. 놈들이 돌아가고 난 뒤 아내는 힘없이 기어와서 날 풀어준 다음 화장실에서 목을 매고 자살했어요. 말릴 틈도 없이 떠나 버렸죠.”


남자는 그런 말을 하면서도 분노한다던가 눈물을 흘린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가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어쩌면 그 때 그냥 자살해버렸던 게 현명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만약 그때문에 아기가 또 생긴다면 아내와 난 또다시 둘째 아이 이름을 짓기 위해서 다퉜을 테니까요. 그럴 필요가 없어져서 오히려 다행인 건지도 몰라요.”


갑자기 섬뜩한 기분이 든 봄이는 회중전등을 이리저리 비췄다. 금이 간 실내 벽면에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던 새빨간 핏자국이 칠해져 있었다. 핏자국을 따라가자 피투성이가 된 누군가가 땅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시신은 또렷했고, 핏자국은 거무튀튀하지 않고 윤기가 흘렀다. 자세히 보니 시신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녀석을 죽인 지는 세 시간도 안 됐어요. 녀석이 내게 다가오더니 ‘아이가 아파 보인다’ 고 말했죠. 그래서 죽여버렸어요. 불순한 목적으로 우리 아기에게 접근한 것이니까요. 그 누구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우리 아기에게 접근하지 못해요. 죽어가는 아내와 그렇게 약속했어요. 이 아이는 제 목숨과 맞바꾸는 한이 있다고 해도 반드시 지켜내겠다고 말이에요.


그 누구라고 해도 우리 아기에게 멋대로 접근한다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아내와 약속했어요. 아내는 분명히 아기를 지키려는 나를 자랑스럽게 여길 거예요. 누구도 손대지 못해요. 누구도 우리 아기에게 손대지 못해요.”


봄이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봄이가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자 남자가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아이들은 아무 잘못이 없어요. 잘못한 건 어른들이죠. 그들은 미래를 개척하는 데 실패했어요. 더 나은 미래를 만들겠다던 어른들은 앞으로 자라나야 할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이런 결과만을 남겨놓았을 뿐이죠. 모두 스스로 자초한 결과예요. 아이들에게는 죄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손대지 않아요. 물론 우리 아기에게 손을 대려고 했다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학생도 마찬가지고요.”


그렇게 말하던 남자는 손가락으로 봄이를 가리켰다.


“학생은 혼잔가요?”


당장이라도 그 곳을 벗어나려던 봄이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다리가 얼어붙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말해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네요. 상관은 없어요. 그저 조심하라고 일러주고 싶을 뿐이었어요. 아이들에게는 보호자가 필요해요. 무슨 용건이 있어서 이곳에 왔는지는 묻지 않겠지만 분명히 중요한 일이겠죠. 난 아직 미성숙하고 연약한 아이들이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한 채로 이 절망뿐인 세상에 유린당하는 건 절대로 바라지 않아요. 잘못한 건 우리들인데, 어째서 다음 세대의 아이들까지 이런 미래를 겪어야만 하는 걸까요? 잘못한 건 우리들인데......”


고개를 젖히고 한탄하던 남자의 말은 그의 품에 안긴 아기가 다시 울기 시작하자 겨우 멈췄다.


“걱정 말거라. 아빠는 어디에도 가지 않는단다.”


남자는 나지막이 아기에게 속삭이고는 다시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아기의 울음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봄이는 구슬픈 기타 멜로디와 아기 울음소리를 뒤로한 채 조용히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비는 그쳤고, 먹구름은 걷혀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건물 봉우리에서부터 차츰 빛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가방을 들쳐멨다. 더 아침이 밝기 전에 이동해야만 했다.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봄이는 터미널 밖으로 재차 발걸음을 옮겼다.


* * *


동이 트기 시작하자 어둠이 갉아먹은 초라한 건물의 뼈대 사이로 빛이 스며들었다. 이곳저곳 금이 간 땅바닥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푹푹 빠졌다. 텅 빈 거리에는 산성비에 썩어 문드러진 죽은 고양이 한 마리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 곳곳마다 걸린 낡은 재킷이 펄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곳에도 생명체는 없었다. 생기도 없었다. 온 세계는 이미 죽어 있었다.


봄이는 손에 쥐고 있던 헐렁한 손목시계를 힐끗 바라보았다. 상훈이 마지막으로 건네준 것이었다. 온 숫자가 로마자로 씌인 싸구려 가죽 시계였지만 천안에 도착한 이후로 시간감각을 몽땅 잃어버렸기 때문에 시계는 꽤 도움이 되었다. 그가 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는지 시계는 초침까지 정확했다. 사실 봄이가 진짜 시각을 모르고 있기는 했다.


봄이는 홀로 쓸쓸히 재미없는 길을 걸었다. 더 이상 봄이의 등을 봐 줄 사람은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봄이는 자그마한 소리에도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쥐 떼가 지나가는 소리, 하수도에 넘쳐흐른 물길이 흐르는 소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 같은 누군가의 기침 소리..... 봄이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다가 안도하는 걸 수도 없이 반복했다.


30분쯤 걷자 얼어붙은 사거리 주변에 파묻힌 자동차 한 대가 보였다. 그 자동차는 봄이가 여기까지 타고 온 승용차와는 조금 달랐다. 차체가 양 옆으로 굉장히 기다랗고 크기도 제법 컸다. 버스였다. 차체 옆면에는 몇 년 전 개봉했던 영화 포스터가 그려진 광고판이 붙어 있었다. 거의 다 망가져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봄이가 본 적이 있었던 영화였다.


자세히 보니 버스 차체 여기저기에 총탄 자국이 가득했다. 앞 타이어는 이미 바람이 다 빠져 찌그러져 있었다. 문짝은 이미 걸레짝이 되어 있었고, 배터리나 기름은 벌써 누군가가 모두 빼돌린 뒤였다.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두 다리가 멀쩡할 때 어서 이곳을 떠나라.’


눈 없는 노숙자의 말이 떠올랐다. 눈앞에 섬뜩하리만치 선명하게 새겨진 총탄 자국을 보자 봄이의 의지가 한순간 흔들렸다. 처음 여정을 시작했을 때부터 방금 전까지 이어지던 굳은 결심이 마치 벌레 먹은 기둥처럼 삐걱이는 것이 느껴졌다.


작은 집에서의 악몽같았던 새벽이 다시금 봄이의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와 뇌를 헤집어 놓으려고 했다. 고막을 찢는 굉음과 함께 머리 위로 쏟아지던 유리 조각들.....절대로 잊지 못할 광경이었다. 정말로 여기 오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을까?


봄이는 아무런 목적지도 없는 길을 걸었다. 그저 새벽녘 태양이 가리키는 앙상한 건물의 그림자만을 따라갔다. 만약 이 지구가 사람의 몸이고 봄이가 밟고 선 이 세계가 허파였다면 지구는 전혀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세계의 숨통을 틀어막았나? 도대체 누가 이 세계에 남은 마지막 숨결을 칼로 찌르고 심장을 검게 썩도록 내버려두었던 걸까? 머리가 아플 정도로 고민했지만 결국 답은 나오지 않았다.


40분을 더 걸으니 다리가 저려왔다. 봄이는 근처 폐가로 들어가 잠깐 한숨 돌리기로 했다. 물을 한 모금 마시자 기운이 났다. 작은 집에서 허락을 받고 조금이나마 챙겨온 식량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가방 부피는 갈수록 줄어만 갔다. 더 이상 정처없는 발걸음만을 옮겨서는 안 되었다. 계획이 필요했다.


“바보 같기는.”


봄이는 자신도 모르게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가슴 속 어딘가가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예전에는 녹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거대한 응어리만이 잠식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반대였다. 얼어붙은 도로에 비춰지는 그림자는 한 개뿐이었다. 죽은 세계를 홀로 걷는 소녀의 그림자는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지금껏 늘 봄이와 함께 나란히 걸었던 그림자는 이제 없었다.


봄이는 아무렇게나 혼잣말을 했다. 자신이 말하면서도 방금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저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누군가가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주길 바랬다. 하지만 봄이의 목소리는 세상의 끝자락에 닿기도 전에 바스라지고 희미해졌다. 분명히 봄이에게는 익숙했을 텐데 어째서인지 마음이 석연치 않았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봄이는 난간을 붙잡고 도로 아래로 단숨에 뛰어내렸다. 텅 빈 도심가와는 다르게 도로 아래는 온갖 고물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소각장이었다. 타이어가 빠지고 다 찌그러진 차량 잔해를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바닥에는 타다 만 땔감들이 굴러다녔고 불을 피운 흔적이 있었다. 더욱 깊숙이 들어갈수록 타는 냄새와 함께 지독한 악취가 풍겼다. 소각장 한가운데에는 온 세상을 전부 빨아들이고도 남을 정도로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무슨 구멍일까?


바로 그 때 봄이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빛을 비췄다. 놀란 봄이는 어설프게 권총을 꺼내려다 하마터면 이 끝이 보이지 않는 구멍 밑바닥으로 총을 떨어뜨릴 뻔했다. 고철덩어리 잔해 뒤에서 누군가가 봄이에게 소리쳤다.


“멈춰.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쏘겠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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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101화 20.12.16 64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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