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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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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5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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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86화

DUMMY

그녀의 말을 들은 상민의 얼굴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 구겨졌다. 그의 입이 뭐라고 말을 하려는 듯 움직였다가 닫혔다. 당장 불만을 토로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관계인 가족 사이에서 언쟁을 벌여봤자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상민 역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어머니께 아무런 이견도 제기하지 않았다.


중년 여성이 상훈에게 눈길을 보냈다.


“2층으로 올라가서 공구 상자랑 남아 있는 탄약을 가져와. 그리고 너희 둘, 바깥에 나가서 쓰레기를 주워 담아.”


그렇게 말하는 중년 여성의 말투는 무겁고 투박하기만 했다. 마치 거칠고 메마른 전쟁터 한가운데서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지휘관 같았다.


상훈이 가버리자 그녀의 기세에 눌린 상민도 어쩔 수 없이 등을 돌렸다. 그가 현관 밖으로 나가려 하는 순간 중년 여성이 그를 멈춰세웠다.


“잠깐 기다려.”


상민이 돌아보자 중년 여성이 총을 든 채 그를 지나쳐 문밖으로 나갔다. 바깥으로 나간 중년 여성은 주위를 한 바퀴 빙 둘러보고는 상민에게 손짓했다.


“이제 나와도 돼.”


그러자 상민도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봄이도 얼떨결에 그를 따라나섰다. 현관 밖으로 나가자 어지럽게 굴러다니는 빈 깡통들과 반쯤 열린 철제 대문이 눈앞에 보였다. 작은 집에 들어오기 전 보았던 광경이었다. 봄이는 중년 여성이 말한 ‘쓰레기 주워담기’가 이 빈 깡통들을 치우라는 뜻인지 궁금해졌다.


“쓰레기를 주워 담으란 게 무슨 뜻이죠?”


봄이가 묻자 중년 여성이 대답했다.


“상민이가 알려줄 거야.”


그녀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제 마당에는 봄이와 상민 둘밖에 남지 않았다. 상민은 봄이를 힐끗 쳐다보더니 아무 말도 없이 깡통을 줍기 시작했다. 그러자 봄이가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왜 깡통들을 주워담고........”


“왜긴 왜야.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여? 저길 봐.”


상민이 투덜거리며 철제 대문을 가리켰다.


“저게 보여? 대문 손잡이에 밧줄이 매어져 있지? 물론 지금은 풀려 있지만 이걸 전부 주워담고 나면 저 밧줄을 단단히 묶을 거야. 저 밧줄이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봐봐. 대문을 포함한 반경 몇 미터로 이어져 있지.”


상민의 손가락이 철제 대문에서부터 조금 위로 올라갔다.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봄이의 눈동자도 그의 손가락을 따라 올라갔다.


“......이제 이 깡통들을 이 종이 상자에 전부 채워넣고 대문 위에 안 보이도록 매달아 둘 거야. 물론 대문 손잡이와 이어진 밧줄로 묶은 채로 말이야. 그러면 이 대문 손잡이가 누군가에 의해 당겨진다면 어떻게 될까?”


“요란하게 쏟아지겠죠.”


“맞아, 이를테면 구식 경보장치 같은 거야. 조금 원시적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효과가 있어. 가끔가다 밧줄을 단단히 묶어두지 않아서 멋대로 쏟아져서 경보를 울리기도 하지만 괜찮은 방법이야. 이렇게 하면 적어도 넓은 대문으로부터 몰래 침입당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어. 대문 바로 위에서 쏟아지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살상 효과도 있어. 한번은 그 살상력을 극대화하려고 빈 깡통 대신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나 망치나 못 같은 공구를 넣어 본 적도 있었어. 살상력은 뛰어났지만 유리 조각 같은 경우는 다시 회수하기가 어렵고, 망치나 톱 같은 공구들은 너무 무거워서 종이 상자가 금방 찢어져 버렸어. 그렇다고 튼튼한 철제 상자를 매달자니 밧줄이 견디지 못하고 풀리거나 끊어져 버렸어.”


봄이는 그의 말을 듣고 나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봄이가 홀로 지내던 시절에도 비슷한 조치를 취해 놓았던 적이 있었다. 봄이는 공구를 다룰 줄 몰랐고, 대부분의 빈 집에는 외부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만한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봄이는 늘 집을 옮겨 다니며 자신의 흔적을 지웠다. 빈 집은 넘쳐났고 문이 잠기지 않거나 파손되어 있는 집도 얼마든지 많았다. 문 손잡이가 파손되어 있는 집은 사실상 외부의 공격에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기 때문에 봄이는 그런 집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다.


봄이는 대부분의 집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부엌칼이나 날붙이 따위를 눈 속에 파묻어 두는 것으로 침입자들에 대처했다. 하지만 그럴 경우 봄이 자신도 칼을 어디에 묻어 놓았는지 알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조심해야만 했다. 봄이는 주로 늘 가지고 다니던 수첩에 함정의 위치를 적어놓고는 했지만 그 수첩은 예전에 벌어졌던 죽음의 추격전 끝에 잃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이제 더 이상 필요도 없게 되었지만.


봄이는 쭈그려 앉아 묵묵히 깡통을 주워담는 상민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는 봄이에게 물었다.


“알았으면 뭐 해? 도와주지 않고.”


봄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말했다.


“반말해도 되죠?”


“뭐라고?”


상민은 손에 쥔 깡통도 떨어뜨리고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봄이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봄이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나이 차도 얼마 안 나는 것 같은데 편하게 말 까죠.”


봄이의 말을 듣다 못한 상민이 벌떡 일어섰다.


“너 말이야, 내가 좆만하냐? 형이 아니었으면 아직도 길거리에서 이리저리 뒹굴고 있을 년이 어디서 건방지게......”


상민이 그렇게 말하며 봄이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봄이는 그보다 약간 작은 체구였음에도 전혀 눌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말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형은 널 좋게 봐줄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야. 적어도 위 아래는 가려야 할 것 아니야. 한 번만 더 그딴 건방진 소리 했다간.......”


“왜요, 한 대 치게?”


상민이 눈을 부라렸지만 봄이는 눈썹조차 까딱하지 않고 맞섰다.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봄이는 상민의 오른손 주먹이 꽉 쥐어진 채 떨리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뻔히 보이는 공격법이었다. 예전에 봄이가 동급생들과 다툼을 일으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또래의 대부분은 곧 공격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눈앞에 서 있는 그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봄이는 그가 오른손을 날리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의 공격을 막아내고 반격하기 위해 왼팔과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봄이가 반격의 기회를 노리기 위해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그 순간, 봄이를 매섭게 노려보던 상민은 굳게 쥐고 있던 주먹에서 힘을 빼고 그녀에게서 돌아섰다.


“됐어. 바보 같은 멍청한 꼬맹이랑 엮여서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봄이는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조금 당황했지만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봄이를 더러워서 피했든, 차마 때리지 못해서 피했든 봄이는 그에게서 한 가지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어찌되었든 상민이 봄이를 위해 한 걸음 물러서 주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그를 지켜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봄이가 말했다.


“도와줄게.”


그러나 상민은 그런 봄이의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너 정말로 가만 안 둘 거야.”


한동안 그들은 함께 쭈그려 앉아 말없이 깡통을 종이 상자에 주워담기만 했다.


* * *


이윽고 그들은 가득 채워진 상자를 대문 위로 끌어올려 밧줄로 단단히 묶었다. 봄이는 상민이 지시하는 대로 묵묵히 따랐다. 상민은 봄이가 잘 해내고 있음에도 왠지 모르게 자꾸만 봄이에게 신경질을 냈다. 그러나 봄이는 그가 토해내는 불만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봄이가 작업을 끝내고 문득 현관을 돌아보니 상훈과 중년 여성이 보였다. 상훈은 현관문 앞에 앉은 채로 양 손에 공구를 들고 있었고, 중년 여성은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뭐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봄이는 묶다 만 밧줄을 움켜쥔 채 한동안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두 사람에게는 봄이가 세상을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느꼈던 감정 중 하나인 경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또한 봄이 자신도 그들을 경계해야만 하는 마땅한 당위성 같은 건 찾지 못했다.


“뭘 그렇게 멍하니 넋놓고 있어? 거기 밧줄 조심해. 잘못 건드리면 풀릴 지도 몰라. 만약 풀려 버리면 너더러 전부 다시 주워담으라고 할 거야.”


상민이 그녀를 다그치자 그제서야 봄이는 정신을 차렸다. 봄이는 잠깐 동안 자신을 부른 상민의 얼굴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가 곧 그의 등 뒤에 세워진 아스팔트 담벼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까 집에 들어오기 전부터 신경쓰였던 건데, 저건 도대체 뭐야?”


봄이가 그렇게 말하며 담벼락에 마구 칠해진 붉은 자국을 가리켰다. 상민이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거 말이야? 일종의 경고야. 사람이 가장 두려움을 느끼는 색이 붉은색이라고들 하잖아. 처음에는 겁을 줘서 놈들을 쫓아낼 목적으로 칠해 놨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다지 의미는 없었던 것 같아. 오히려 너무 눈에 잘 띄어서 저걸 보고 여길 찾아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 지우려고 노력도 해 봤는데 도통 지워지지도 않아. 나름 쓸모가 있을 줄 알고 스프레이를 잔뜩 챙겨 왔는데 먼지만 쌓이고 있어.”


그 말을 들은 봄이는 그와 처음 마주친 지하실에 쌓여 있던 빈 스프레이 통들을 떠올렸다. 봄이는 아직도 그가 어떻게 코를 찌르는 약품 냄새가 진동하는 지하실 안에서 살고 있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궁금해진 봄이는 상민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까 지하실에서는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상민은 갑작스런 그녀의 질문에 눈썹을 으쓱이고는 대답했다.


“난 그때 형을 찾으러 나온 것이긴 하지만 쓸만한 것들을 구해오기 위해서이기도 했어. 한 번 이렇게 생각해 봐. 먹을 것을 찾는 사람들은 누구나 버려진 식료품 매장이나 노점으로 제일 먼저 가. 물론 가장 구할 확률이 높은 곳이기는 하지만 모두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문제야. 그 때문에 막상 그 곳으로 가보면 늘 허탕만 치고 돌아와. 뒤늦게 가 봤자 벌써 발 빠른 녀석들이 보관하기 쉽고 잘 상하지 않는 음식들만 골라서 모조리 빼돌리고 난 뒤였으니까.”


상민은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완전히 바꿔서 생각해 봤어. 녀석들은 버려진 가게로 몰려가서 빵 부스러기를 주워 먹을 생각밖에 하지 못해. 누가 이런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음침한 지하실로 들어오겠어? 분명히 평범한 사람이라면 지하실에 발을 들이자마자 벌레들이 득실거리는 소리와 쥐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자마자 기겁하면서 도망칠 거야.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것 같던 지하실에 두 명이나 들어와서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그건 어쩌면 운이 나빠서일 거야.”


“그래서 거기서 뭐 건진 건 있어?”


“아니, 없어.”


봄이가 멍청한 눈으로 쳐다보자 상민이 눈을 껌뻑거렸다.


“사실 지하실에는 그저께 처음 왔어.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햇빛이 들어오는 창문들이 전부 다 신문지로 가려져 있었어. 안 그래도 회중전등에 남은 배터리도 거의 다 떨어져 가는데 지하실에서 도통 빛이 나오는 곳을 찾을 수가 없었어. 그렇게 조심스럽게 지하실을 다니다가 뭔갈 밟았어. 뭐랄까 물컹거리고 재수없는 감촉이었어.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건 죽은 쥐 시체였어. 벌써 상당히 부패가 진행되고 난 다음인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져 있었어. 뼈가 완전히 산산조각난 채 다 찢어지고 너덜너덜한 가죽 사이에서 내장이........”


봄이는 더 이상 그의 말을 듣지 못하고 얼굴을 찡그리며 근처에 굴러다니던 스프레이 통 하나를 집어들어 상민의 얼굴에 겨눴다.


“조금만 더 그딴 더러운 이야기 계속하면 평생 더러운 걸 입에 묻히고 살게 될 거야.”


상민이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봄이는 다시 현관을 돌아보았다. 중년 여성과 상훈이 일을 모두 끝마쳤는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중년 여성이 대문 위에 매달린 종이 상자를 힐끗 쳐다보더니 봄이에게 말했다.


“다 끝난 것 같구나. 처음 해 보니 어땠어?”


봄이가 그럭저럭 대답하자 중년 여성이 흡족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래. 앞으로 우리랑 같이 살면 이것저것 많이 해야 할 거야. 며칠 전에는 추위 때문에 창틀이 다 상해버려서 우리가 직접 보수했어. 보수라고 해도 널빤지에 못질하는 정도였지만 말이야. 그래서 뭔가 부족하다 싶어서 커튼을 뜯어내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틈새를 꽁꽁 묶어두기도 했어.”


봄이는 그녀의 말을 듣고 올려다보이는 작은 집을 바라보았다. 2층 높이의 창틀에서 너덜너덜한 커튼 조각이 스산한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역시나 거의 모든 창들은 널빤지로 꽉 막혀있었다. 조잡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불안정해 보이지는 않았다. 위태롭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봄이는 방금 전 그녀가 말했던 ‘보수’ 가 성공적으로 끝났음을 알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막내 아가씨에게까지 거친 일을 시키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 수가 없구나. 우리는 식구가 늘 부족했어. 저번에 그 일이 일어난 이후부터 더더욱 부족해졌어. 네가 우연히 상훈이를 만나 이곳에 오게 된 것도 나는 너무나도 기쁘게 생각한단다. 이렇게 곱고 여린 손바닥을 가진 여자애에게 일을 시키는 건 너무나도 마음이 아프.........”


중년 여성이 그렇게 말하며 봄이의 손바닥을 잡아챘다. 아직 아물지 않은 봄이의 손바닥 한복판은 흉하게 찢어져 있었다. 상처 사이에서 흘러나온 핏자국도 대부분 눌러붙어 있었다. 봄이의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가 푸르스름하게 얼룩져 있었고, 자르지 못한 손톱은 거의 다 부러져 있었다.


“......지만 말이야.”


봄이가 멍하니 서 있자 중년 여성은 곧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상훈이 바닥에 있던 공구 상자를 집어들고는 상민에게 손짓했다.


“잠깐 따라와. 네가 할 일이 있어. 봄이는 잠깐 거기서 기다려.”


상민이 불공평하다는 눈으로 봄이를 힐끗 쳐다보고는 집 안으로 그들을 따라갔다. 이제 집 밖에는 봄이 혼자만 남게 되었다.


봄이는 발밑에 걸리는 돌멩이를 발로 찼다. 모두가 들어가 버린 작은 집 대문은 찬바람이 불어와 냉랭했다. 코끝이 시렸던 봄이가 지저분한 재킷 소매로 코를 닦아냈다. 해가 아직도 떠 있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하늘이 어둡다고 느껴졌다. 봄이는 그 이유가 허공을 가득 꿰찬 안개가 하늘의 빛을 전부 빨아들여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봄이는 서툰 솜씨로 휘파람을 불며 아까 전 상민을 위협했던 스프레이 통을 집어들었다. 통에 붙은 상표 한가운데가 찢겨져 있어서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스프레이를 보자 갑자기 장난을 치고 싶어진 봄이는 담벼락 표면에 스프레이를 조심스럽게 뿌렸다.


빨간 유성 액체가 분무기처럼 담벼락에 뿌려졌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양이 뿌려지는 바람에 약간 놀라긴 했지만 이내 재미가 붙은 봄이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담벼락에 마구 뿌려댔다. 독한 냄새가 풍겼지만 의외로 꽤나 재미있었다.


한참을 뿌려대는 도중 봄이는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상훈이 현관문을 연 채로 봄이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상훈은 봄이를 마치 정신병자를 보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거기서 뭐 하는 거야?”


봄이는 스프레이를 뿌리던 손을 멈췄다. 봄이는 겨우겨우 그의 시선을 피하며 대충 얼버무렸다.


“어, 그냥 있었는데요.”


한동안 상훈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는 상훈과 뚱하니 돌아보는 봄이의 시선이 서로 묘하게 엇갈렸다. 상훈은 한참 동안이나 그녀를 바라보다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이제 밖에서 할 일은 끝났으니까 적당히 하고 들어와. 감기 걸린다.”


그리고는 현관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봄이는 현관문이 닫히고 나서도 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봄이는 남아 있던 스프레이를 전부 비우고 나서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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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105화 21.01.05 32 1 12쪽
107 104화 21.01.03 65 1 13쪽
106 103화 20.12.21 46 0 9쪽
105 102화 20.12.20 27 0 16쪽
104 101화 20.12.16 63 1 12쪽
103 100화 20.12.11 29 0 13쪽
102 99화 20.12.08 38 0 12쪽
101 10. 종착점 20.12.07 38 0 11쪽
100 97화 20.12.02 58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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