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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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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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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9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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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DUMMY

운전대를 붙잡고 있던 상훈은 제 시간 안에 출발하지 못하고 늦어지게 된 원인을 장난스레 모두 봄이에게로 돌렸다. 상민은 물자가 든 가방들을 차량 트렁크로 집어넣고 있었다.


그가 집어넣던 가방들 중에는 봄이의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봄이와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차량 뒷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봄이도 남은 물건을 모두 챙긴 것을 확인하고 나서 차량에 올랐다.


끼긱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퀴가 굴러갔다. 조수석에 앉은 중년 여성은 습기가 찬 나머지 김이 서린 차량 네비게이션 액정을 문지르며 말했다.


“생각보다는 잘 굴러가는데. 이 차를 기꺼이 우리에게 넘겨준 그 녀석에게 감사를 표해야겠어. 누구 차라고 했지? 어떤 노인이었다고...... 말 나온 김에 그 때 얘기나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그 영감이 왜 너희들을 도와줬던 거야?”


그들이 대화하는 사이 봄이는 조용히 뒷좌석에 기댄 채 턱을 괴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잠시나마 봄이를 얼어죽지 않게 지켜주었던 작은 집이 점차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처음 작은 집을 보았을 때가 생각났다. 솔직히 말해서 작은 집은 봄이에게 그다지 깊은 첫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근 사흘 동안 벌어진 갖가지 일들이 처음 작은 집에 새겨진 그저 그랬던 인상을 순식간에 절대로 잊지 못할 악몽같은 추억으로 바꿔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코 유쾌했던 순간들은 아니었다.


지금껏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던 아픈 과거를 뒤로한 채 봄이는 드디어 현재행 열차를 올라탄 것이 되었다. 깊은 땅 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 운명의 선로가 봄이를 인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봄이를 인도하는 운명의 선로의 종착점이 과연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소망’일지, 지금껏 자신이 알지 못한 돌이킬 수 없는 ‘절망’일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모든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선 한 걸음 나아가야만 했다. 그게 싫다면 그저 주저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것만이 지금 봄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런데 꼭 나아가야만 할까?


이 모든 것을 선택할 권리는 봄이에게 있었다. 일찍이 체념하고 더 이상의 여행을 중단한 채 상훈의 가족들과 함께 안전하게 정착하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스로 권총과 회중전등을 짊어지고 어둠 속으로 나아가는 것을 택했다. 희망 없는 삶 속에서 몇 십년을 살아간다고 해도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만약 희망 없는 삶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분명 죽음보다도 못한 일일 것이다.’


“방금 뭐라고 했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던 봄이는 갑작스런 상훈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아무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렸다.


30분 정도 달리자 엄청나게 넓게 트인 하늘이 나타났다. 지금껏 빛 한가닥 들지 않는 어두침침한 터널만 바라보고 있던 봄이는 자기도 모르게 눈길을 그쪽으로 돌렸다. 그 순간 봄이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한강의 수평선을 따라 끝에서 반대쪽 끝으로까지 이어진 드넓은 강변이 나타났다. 수면 위에는 그림자를 드리운 거대한 대교 한 채가 뒤편에 걸린 태양과 함께 웅장한 규모를 뽐내고 있었다. 흔히 볼 수 있는 버려진 차량들을 제외하고는 대교 주변에는 누구의 흔적도 없었다. 한강 수면은 황금 진주처럼 빛났지만 강물이 흐르지는 않고 있었다. 강물이 모두 말라버린 것일까?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대교를 따라 한강을 가로질렀다. 봄이는 구름하나 없이 맑은 하늘 아래 무지개처럼 걸린 은빛 성수대교를 넋이 나간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마치 무엇인가에 홀린 듯한 느낌이었다.


봄이는 지금 당장이라도 차문을 열어젖히고 알 수 없는 목소리로 자신을 끌어들이는 경계의 저편으로 달려나가고 싶어졌다. 장엄하고도 고요한 한강의 풍경은 봄이가 지금까지 스스로 ‘아름답다’ 고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광경이었다. 봄이는 가끔 이런 경치에 매료당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들이 탄 차량이 대교를 지나치기 전에 봄이는 재빨리 부탁했다.


“아저씨, 여기서 조금만 쉬었다 가면 안 될까요?”


그 말에 상훈이 의아하다는 듯 차를 세우고 봄이를 돌아보았다. 중년 여성은 손목시계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간은 충분한 것 같다며 봄이의 부탁을 허락해주었다.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봄이는 기쁜 얼굴로 차문을 열고 곧바로 강변으로 달려갔다.


봄이는 넓은 고속도로를 가로질러 거침없이 밑으로 뛰어내려갔다. 고속도로에는 차가 한 대도 없었다. 예전 세계였다면 말도 안 되는 광경이었다. 예전 세계에 살았던 사람들이, 과연 오후가 막 지난 한강 고속도로에 차량이 한 대도 없이 삭막하기만 한 도심가를 상상조차 할 수 있었을까?


신이 나서 정신없이 달리던 봄이는 그 자리에 멈춰서서 양 팔을 펼친 채로 공기를 한숨에 힘껏 들이마셨다. 눈앞의 이 대교는 봄이가 한순간 넋을 잃고 쳐다봤을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세계는 봄이가 자각하기도 전에 일찍이 정지해버렸고, 정지한 세계에 남아있는 사람은 오직 봄이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걸까?


봄이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이 앉은 자리에서는 대교 아래 가득 차오른 한강 수면이 모두 한 눈에 보였다. 자세히 보니 강물은 말라있던 게 아니라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언 강물 표면에는 금이 쩍쩍 갈라져 있었다.


봄이는 완전히 얼어붙은 한강을 보자 문득 동화책에서 보았던 얼음을 모조리 부숴가며 앞으로 전진하던 주인공의 쇄빙선이 떠올랐다. 동화 속 주인공은 언제나 새로운 곳으로 모험하곤 했다. 그리고 동화 속 주인공은 언제나 자신의 모험에 어떤 역경이 닥쳐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봄이의 뒤에서 누군가가 봄이의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뭘 그렇게 신이 나서 달려가는 거야, 이 녀석아.”


봄이는 상훈을 보자 지금까지 느낀 모든 점을 늘어놓았다.


“이런 곳은 처음 봐요. 저 대교를 마주본 채로 가만히 앉아있으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뛰어요. 마음도 안정되고 더 차분해지는 것 같아요. 아저씨도 그렇게 느껴지나요? 여기 잠깐 앉아 보세요.”


잔뜩 들떠 있는 봄이가 상훈을 끌어당겼다. 마지못해 봄이와 나란히 강변가에 앉은 상훈이 입을 열었다.


“글쎄, 나한테는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걸.”


봄이가 이것저것 물어보았지만 상훈의 대답은 미적지근하기만 했다. 봄이는 그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대답해주지 않자 더럭 심술이 났다.


그러던 그가 봄이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이젠, 너랑 이렇게 마주 앉아서 대화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난데없이 음울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그의 표정에 봄이는 지금껏 들떠 있던 감정이 점차 가라앉았다.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의 종착에 희망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믿던 봄이의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도 곧 잦아들었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봄이가 물었다.


“아저씨는 저랑 만난 게 후회돼요?”


“그러는 너는?”


“아, 무슨 소리예요. 제가 먼저 물어봤잖아요.”


그들은 한참 동안이나 의미없이 서로 되묻기만 했다. 결국 확실한 대답을 내놓는 사람은 없었다. 봄이는 지금 자신이 상훈에게 품고 있는 감정이 그에게도 존재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지금껏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라고 인식되어 본 적이 없었던 봄이였기에 더욱 그러기를 바라고 있었다.


과연 상훈은 봄이를 자신에게 있어서 소중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어떤 존재로 여기고 있을까? 동료? 친구? 아니면.......


봄이는 못 이기는 척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에게서 등을 돌린 사이 그가 등 뒤에서 무슨 말이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그다지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그저 ‘싫지는 않았어’ 정도면 되었다.


“글쎄, 뭐라고 해야 하나.......싫지는 않았어.”


상훈은 그렇게 말하고도 영 멋쩍었는지 모자를 벗고 머리를 긁적거렸다. 봄이는 그 대답을 듣고 난 후에야 안도할 수 있었다. 솔직히 기뻤다. 더 이상 봄이가 그에게 궁금한 것은 없었다.


“그러는 넌, 나랑 지금까지 함께 지내면서 즐거웠어?”


그의 다음 질문은 꽤나 직설적이었다. 봄이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지금까지 그와 함께 텅 빈 유령 도시를 걷고, 저주받은 지하철 역을 지나 통제소를 거쳐 여기까지 오기까지 즐거웠던 적이 있었나?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눈앞의 이 남자는 마치 지금까지 지나왔던 그들의 험난했던 여정을 모두 즐거움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면 그 모든 역경을 제외하고 그와 함께 지나왔던 인연의 성과만을 묻는 것일까? 만약 맞다면 그건........


“안 알려줄 거예요.”


어처구니 없다는 듯 표정을 구기는 상훈을 보자, 그 모습이 너무나도 우스꽝스러웠던 나머지 봄이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상훈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들의 첫만남은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처음 그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을 때, 얼어붙은 세계에 혼자 남았던 봄이는 그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어찌보면 그것은 변해버린 세상에서 지극히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자신 옆에 앉은 상훈을 보고 있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남자와 예전 세계에서 만났다면...... 그 때도 봄이는 상훈에게 총구를 겨누어야 했을까?


“아저씨, 만약에 말이에요. 정말 만약에 우리가 정말 기적적으로 다시 만날 수 있다면요, 그 때는 지금 이 한강도 전부 녹아 있겠죠?”


상훈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뭐랄까, 천안으로 가서 가족들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오려면...... 아니, 돌아올 수는 있을까 모르겠네. 아무튼 그렇게 되려면 적어도 몇 달은 지나야 할 것 아녜요? 그러면 한 달, 두 달......겨울은 확실히 지나겠네요. 그렇게 되면 날씨도 많이 풀릴 테고, 이 얼어붙은 세상도 조금은 녹아서 따뜻해지지 않을까 해서.”


봄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그 때 대답해 드릴게요.”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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