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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1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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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글자수 :
530,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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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27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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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DUMMY

“무례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저 녀석을 며칠 전에 만났는데, 복부에 상처를 입고 거의 죽어가던 걸 도와줬더니 평생 갚아도 갚지 못할 빚을 졌다느니 하면서 막무가내로 경호원으로 받아달라지 뭡니까. 그래서 데리고 왔는데 잠깐 지켜보니 안심해도 될 것 같습니다. 녀석의 주제넘은 행동은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마른 남성이 겸손하게 사과했다.


그들은 마른 남성을 따라 조용히 지하실로 내려갔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 사이사이마다 불 붙은 양초가 한 개씩 걸려 있었다. 마치 고대 왕의 무덤이나 의식을 치르는 제단 같았다. 내려가는 동안 이따금씩 박쥐 울음소리가 들렸고,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따뜻한 온기와 함께 물이 펄펄 끓는 소리가 들렸다.


거미와 벌레들이 득실거릴 것만 같은 어둠이 불을 지피는 소리와 함께 모두 걷혔다. 족히 네 명은 둘러앉을 수 있을 것 같은 탁자에 다른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자세히 보니 지하실에는 두 사람이 더 있었다. 한 사람은 침대에 미동조차 않은 채로 누워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어린 소년 같아 보였는데 병자를 간호하는 것 같았다.


“앉으시지요.”


침대 옆에 앉은 채로 물수건을 짜던 소년이 봄이와 상훈을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 온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러는 소년을 마른 남성이 진정시켰다.


“괜찮아, 승현아. 나쁜 사람들이 아니야.”


먼저 탁자에 앉아 있던 사람이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주었다. 봄이와 상훈이 의자를 빼고 탁자에 걸터앉자 마른 남성이 이야기를 꺼냈다.


“저희들이 저번에 만나게 된 지 얼마나 지났을까요? 다시 볼 수 있어 영광입니다. 지난 밤 벌어졌던 총격전 이후 우리는 집 안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이렇게 직접 찾아와주셔서 정말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보다시피 우리들은 나가서 전투를 치르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하고 약합니다. 인원이라고는 다 죽어가는 노인 한 명과 어린아이, 싸우기에는 너무나도 쇠약해져 버린 저뿐입니다.”


봄이는 마른 남성의 말로 미루어보아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이 ‘다 죽어가는 노인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이 숫자는 바깥에서 문지기 노릇을 하는 덩치를 제외한 숫자였다.


“지난 밤 메아리쳐 울려퍼지던 총성은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멈췄습니다.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꽤나 가까운 곳에서 벌어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신들도 분명히 들었을 겁니다. 혹시 총격전이 어디서 벌어졌는지 알고 계십니까?”


상훈이 말을 잘랐다.


“잡담은 이쯤하고 거래를 시작합시다. 어젯밤 모두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총격전을 일으킨 주범들이 어딘가에서 이 지하실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봄이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별다른 위험이나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마른 남성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좋습니다. 제 말뜻은 그저...... 당신들이 그 총격전에 휘말리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린 지금, 이렇게 마음놓고 이야기를 터놓을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은 더할 나위없이 소중한 것일 테니까요......승현아, 네 발밑에 있는 가방 좀 주워 줄래?”


얼굴이 창백한 소년이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 그에게로 가져다주었다. 그가 가방을 뒤적이며 말했다.


“제가 지난 날에 요구했던 물건들은 전부 가져오신 겁니까?”


상훈이 말없이 메고 있던 가방을 벗어 탁자 위로 올려놓았다.


“항생제와 주사기, 해열제, 그 외 기타 약품들......”


남자가 흡족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홱 들어올렸다.


“그러고 보니 따님이나 여자 형제는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마른 남성의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봄이에게로 향했다. 난데없이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에 봄이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다면 가족은 아닌 것 같은데..... 아, 그럼 혹시 저 아이도 상품인 겁니까? 만약 맞다면 정말 잘 됐군요. 안 그래도 저런 여자아이가 요즘 필요하던 참이었어요.”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시선이 봄이에게로 쏠렸다. 마른 남성과 소년은 물론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누워있던 노인까지 어느새 붉은 눈을 번뜩이며 봄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상황을 눈치챈 봄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봄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데 상훈이 가로막았다.


“이 아이는 상품이 아닙니다. 그보다 우리가 요청한 식량은 제대로 준비되었겠지요?”


봄이는 한시라도 빨리 이 역겨운 지하실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마른 남성은 느릿느릿 대답하며 시간을 끌었다.


“그거 아쉽군요. 저희라면 비싸게 쳐 드릴 수 있는데.......”


마른 남성이 가방을 상훈에게 넘겨주었다. 거래가 성사되자마자 봄이는 상훈의 팔을 잡아끌었다. 상훈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방으로 들어오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마른 남성이 웃으며 말했다.


“참, 마침 점심시간이기도 하고, 시장하실까 봐 간단한 식사라도 대접해드릴 참이었는데 혹시 생각 없으십니까?”


아까 전 탁자에 조용히 앉아 있던 누군가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접시 네 그릇을 가지고 왔다.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건더기가 떠다니는 누런 국그릇에서 구수한 냄새가 났다.


“아직 식사 전이시면 사양하지 말고 드십시오.”


얼굴이 창백한 소년도 탁자로 와서 앉더니 국을 훌훌 들이키기 시작했다.


“죄송하지만 이미 식사를 하고 오는 길이라.”


“그러셨군요. 오늘 일은 감사했습니다. 이거면 널브러진 시체를 뜯어먹다 염증에 걸린 저 노인네도 정신을 차리겠지요. 그리고 그 애를 팔 생각이 있거든 후하게 쳐드릴 테니 언제든 연락 주시오. 어린 여자애들은 육질이 부드럽거든. 또 봅시다.”


봄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 사람은 못 드신다고 하셨나?”


봄이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지하실을 뛰쳐나갔다. 수백 개나 되는 계단들의 높이가 그 순간만큼은 마치 끝도 없는 중세시대의 지하감옥 미궁처럼 느껴졌다. 대문을 벗어날 때 아까 보았던 덩치 문지기가 봄이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던 것만 제외하면 누구도 쫓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봄이는 예전에 어디선가 쥐고기를 구워 판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물론 실수로 쥐고기를 먹고 난 후 그것이 쥐였다는 것을 알게 되자 미친 듯이 토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 봄이의 눈 앞에 예상치도 못한 새로운 난관이 들이닥쳤다. 직접 입에 대지는 않아서인지 그때보다 충격은 덜했지만 배를 쥐어짜는 듯한 구역질은 여전히 올라왔다. 사람이 사람을 먹는다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사실을 스스로 납득할 수 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눈 앞에 놓여있던 국그릇이 떠올랐다. 누런 국물 속에 둥둥 떠다니는 건더기들......


금방이라도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려는 것들을 봄이는 다른 생각을 하며 애써 억눌렀다.


뒤늦게 그녀를 따라나온 상훈이 보이자마자 봄이는 그에게 윽박질렀다. 그마저도 숨이 차서 잘 나오지 않았다.


“말해두겠는데, 앞으로 한 번만 더 아저씨가 여기 다시 온다고 하면 내가 절대로 가만 안 둘 거예요.”


상훈이 ‘파란지붕’을 뒤돌아보더니 체념한 듯 중얼거렸다.


“진정해. 적어도 양손에 칼과 도끼를 들고 우릴 당장이라도 잡아 죽이려고는 안 했잖아.”


“도대체 왜 그렇게 태연한 거예요?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어요?”


상훈의 무감각한 태도에 질린 봄이가 쏘아붙였다.


“전에 그렇게 당할 뻔한 적이 있었거든.”


상훈이 그들에게서 받은 가방을 들쳐메고 봄이를 지나쳐갔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이 세상은 이미 전과는 달라져도 한참 달라졌다는 걸 기억해둬. 예전 세계에서는 절대로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일들이 지금 일어난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어. 오히려 예전 세계에 미련을 남긴 나머지 지금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놈들에게 질 수밖에 없어. 놈들과의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패배한다면 남은 건 곧 죽음뿐이야. 더 이상 이 세계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잖아? 우리는 늘 그렇게 살아왔어. 사실 예전 세계에서도 그랬지만.”


상훈은 봄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멀어졌다. 문득 생각에 잠겼던 봄이가 입을 열었다.


“식인종들이 아저씨를 죽이려고 들었던 적이 있었다구요?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상훈이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해줄게.”


작가의말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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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101화 20.12.16 64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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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95화 20.11.28 30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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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94화 20.11.19 62 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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