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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1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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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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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6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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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87화

DUMMY

봄이는 조용히 현관을 지나 거실로 향했다. 그러나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짙은 그림자에 가려진 드럼통에서 불씨만이 탁탁 타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봄이는 이들 가족들이 자기만을 놔두고 땅 밑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꺼져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귀를 기울이자 봄이의 머리 위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서야 봄이는 그들이 모두 2층에 올라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계단을 올랐다. 2층으로 이어지는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잠겨 있지는 않았다. 봄이는 가뜩이나 예민해져 있는 그들이 자신을 침입자로 오인하지 않도록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렸다.


봄이는 탁자에 놓인 양초에 불을 붙이고 있던 상민과 눈이 마주쳤다. 중년 여성은 벌레 먹은 나무 의자에 앉아 남은 총알을 세고 있었다. 상훈은 한가운데가 뻥 뚫린 총구멍에 눈을 대고 바깥을 살피고 있었다. 한참을 주시하던 상훈이 커튼을 쳐서 총구멍을 가리며 말했다.


“이상 징후는 없어. 쉬어도 되겠어.”


그가 말하고 나서야 모두들 긴장을 풀어놓을 수 있었다. 중년 여성이 담배를 빼들고 상민을 쳐다보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던 성냥을 후 불어서 꺼버리는 바람에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상민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 말 없이 어깨를 으쓱하기만 했다.


작은 집 2층은 평범한 방과는 달리 침대가 없었다. 침대 뿐만 아니라 가구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어떤 특수한 목적에 의해 개조된 곳 같았다. 예전에 봄이가 즐겨보던 싸구려 전쟁영화의 작전 회의실 같기도 했고, 크기가 들쑥날쑥하고 조잡한 판자로 막아놓은 창문은 견고한 요새가 떠올랐다. 언뜻 보기에는 완전히 밀폐된 공간처럼 보였지만 방 안에 일산화탄소가 차지 않는 걸 보니 환기는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중년 여성이 탁자 위에 놓인 촛불로 담뱃불을 붙였다. 이윽고 방 안에 연기가 가득 차자 중년 여성이 코를 찔끔거리며 한마디 던졌다.


“조금만 있으면 해가 질 거야.”


봄이는 그녀가 총구멍을 내다보지도 않고 어떻게 바깥 세상을 알 수 있는지 궁금했다. 오랫동안 시간 관리를 엄수해온 탓에 방에 떠다니는 담배 연기만 봐도 시간을 알 수 있는 경지에 이르기라도 한 것 같았다. 봄이가 말했다.


“원래 담배를 그렇게 많이 피우나요?”


중년 여성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연기를 뻐끔거렸다.


“세상이 완전히 뒤바뀌고 나서, 평소에 삶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던 화폐의 수요는 크게 줄어들었어. 아니, 거의 사라져 버렸어. 이런 상황에서도 절대로 수요가 줄어들지 않는 게 있어. 그게 뭔지 알아?”


봄이가 고개를 가로젓자 중년 여성이 흔쾌히 대답했다.


“술과 마약, 그리고 여자.”


중년 여성은 그렇게 말하며 봄이를 가리켰다. 봄이는 그녀가 취한 행동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봄이가 중년 여성을 빤히 쳐다보자 그녀가 허탈하게 웃었다.


“아까 내가 쫓아낸 늙다리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 줄 알아? 식량과 깨끗한 물, 다른 필요한 것을 넘쳐날 정도로 줄 테니 바로 이 자리에서 한판 하자는 거야. 자길 따라온다면 많은 군중들을 통솔할 수 있는 권력까지 준다고 하더군. 그 녀석은 내가 쉽게 수긍할 거라고 생각했나 봐. 녀석이 떨어뜨리고 간 가방에는 콘돔이 가득했어. 말솜씨를 보니까 한두 번 거래해 본 솜씨가 아니었어. 녀석의 표정이 그때까지 의기양양한 걸 보니까 소름까지 돋을 지경이었어. 그 자리에서 녀석의 불알 두 쪽을 총으로 쏴서 으깨버리고 싶었지만 쫓아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어. 하여간 짐승 같은 새끼들이야.”


중년 여성이 말하며 손가락으로 발 밑을 툭툭 가리켰다. 그리고는 담배를 한 개비 더 뽑아 상훈에게 제안했지만 그는 손을 내저었다. 봄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옆에 놓인 촛불이 일렁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중년 여성이 씁쓸한 미소를 거두고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남아 있는 사람들은 서서히 예전 세상을 잊어가고 있어. 남은 사람들은 이제 의지할 만한 게 없으면 그다지 오래 못 가. 물론 의지할 만한 것이라는 건 사람마다 천차만별이야. 끝없는 쾌락만을 가져다 주는 술이나 마약인 사람도 있고, 자기 자신조차 제어하기 힘든 생존 본능인 사람도 있고, 친구나 남아 있는 소중한 가족인 사람도 있지. 변해 버린 세상을 직시하지 못하고 쾌락에 취해 버린 녀석들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 녀석들은 끝없이 스스로 손가락을 뇌에 꽂아 정신 착란을 일으키려고만 해. 자기 자신이 끝도 없는 어둠 속으로 굴러 떨어진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로 그저 눈 앞에 다가온 쾌락만을 즐겨. 왜 그러는 것 같아? 그야 눈 앞의 잔혹하고 처참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가 있거든. 그렇다고 해서 그 일시적인 안정감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아? 개같지도 않은 소리지. 그런 건 현실 도피밖에 안 돼.”


중년 여성은 기분이 나빠졌는지 물고 있던 담배를 짓이겨 내팽개쳤다. 봄이는 방 안에 가득 찬 담배 연기 때문에 질식할 것 같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상훈이 커튼을 걷어내고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양초 불빛만이 비추던 방에 바깥 세상의 빛이 스며들었다. 그러자 중년 여성의 뒤쪽에 가득 쟁여져 있는 철제 상자들이 보였다. 봄이가 손가락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상자들 안에는 뭐가 들었죠?”


중년 여성이 봄이가 가리킨 방향을 뒤돌아보았다.


“아, 이걸 말하는 거야? 기다려. 우리들의 비장의 무기를 보여줄게.”


중년 여성이 의자를 빼고 세 상자 중에서 한 상자를 봄이의 앞에 내려놓았다. 유리병이 부딪히는 명쾌한 소리와 액체가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짙은 납빛으로 빛나는 철제 상자에 정체모를 액체가 담긴 병들이 채워져 있었다. 병나발 끝에는 기름때로 물든 거즈가 묶여 있었다. 봄이도 이 물건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봄이가 눈을 크게 뜬 채 병들을 내려다보고 있자 중년 여성이 자랑스레 말했다.


“*몰로토프(화염병)야. 우리가 직접 만들었어. 아마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도 만들기 쉬운 무기일 거야. 총 열다섯 병 있어. 모두들 불타올라서 화끈하게 가 버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어. 그렇지만 아직 써본 적은 없어.”


봄이는 신기하다는 듯이 화염병 한 개를 꺼내 이리저리 살폈다. 중년 여성이 방금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장 위험한 무기...... 사람을 죽이는 무기...... 이제 봄이에게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수단이 한 가지 더 늘어난 셈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자신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봄이는 얼른 화염병을 철제 상자 속으로 집어넣었다.


“이걸 써야만 할 때가 올까요?”


“내 생각에는 조만간 올 것 같아.”


중년 여성이 엽총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내려갔다 올게. 잠깐이나마 편히 쉬고들 있어. 몰로토프는 너무 갖고놀지 마. 그러고 보니 드럼통 불씨는 어쨌어?”


중년 여성이 계단을 내려가자 상민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문이 닫히자 담배 연기 가득한 방안에는 봄이와 상훈 둘만 남게 되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촛불이 흔들리는 탁자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담배 연기가 대부분 빠져나가자 상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다시 닫았다. 그 모습을 본 봄이는 자신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지금 나 배려해 준 거예요?”


상훈은 눈썹을 까딱이며 아니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집에 오니까 어때?”


봄이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우리 집도 아닌데.”


“네 마음이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서두르지 말고 조금만 쉬었다 가.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잖아. 눈 앞의 목표에 집중하는 건 좋지만 너무 과하면 쫓지 않느니만 못해. 사실 그 녀석 말대로 가족들이 널 받아주지 않을까 봐 걱정했는데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서 여러모로 다행이야. 느긋하게 쉬고 나서 내일 생각하자.”


상훈이 그렇게 말하고 나서 어디선가 이불을 꺼내 폈다.


“우리 가족은 늘 매일 번갈아가면서 깨어 있어야 돼. 교대로 집 주변을 감시해야 하거든. 널 통제소에서부터 여기까지 뜬눈으로 데리고 오느라 피곤해 죽겠는데도 곧 일어나야만 해. 네가 온 뒤로 할 일이 많아졌어. 조금 이따가 보자.”


상훈이 맨바닥에 이불을 깔고 돌아누웠다. 봄이는 그러는 그가 책임감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아까 전 자동차에서 상훈에게 건넸던 말이 떠올랐다. 그에게 푹 쉬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봄이는 몸을 돌려 그대로 방을 빠져나오려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다리는......이제 좀 어때요?”


그러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봄이는 몇 분 동안이나 대답을 기다렸지만 대답이 없자 포기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 * *


의외로 아래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잠시 집을 비운 모양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현관문을 열고 바깥을 살펴봤지만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봄이는 그 잠깐 새에 중년 여성과 상민이 어디로 가버린 건지 궁금해졌다. 또 한편으로는 집을 이렇게 요새처럼 단단히 방비해 두었으면서 정작 집주인들이 집을 비워도 되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봄이는 천천히 거실로 향했다.


봄이는 불씨가 튀는 드럼통 옆에 조용히 앉았다. 드럼통에 얼마 남지 않은 불씨가 곧 꺼지려는 듯 환하게 타올랐다. 그 순간 봄이는 아까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조금 더 발견할 수 있었다.


천장에는 붉은 빛을 띠는 둥근 시계가 걸려 있었다. 그 시계가 가리키는 시곗바늘이 제대로 된 시각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지는 몰랐지만 시계 자체는 잘 작동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런 세상에서 돌아버린 시곗바늘을 다시 끼워맞추고 있을 만큼 심적으로 여유로운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시계 옆에는 가족사진이 끼인 액자가 보였다. 사진에는 미성숙한 두 남자아이와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부부가 보였다. 봄이는 상훈의 인생사를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가족사진에 찍힌 인물들이 누구인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무엇보다 봄이는 그런 것에 관심을 두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웅크린 채로 불꽃을 바라보고 있자니 졸음이 몰려왔다. 하지만 잠들어서는 안 되었다. 봄이는 지금 자신마저 잠들어 버린다면 이 누추한 작은 집을 지킬 사람이 아무도 없어지게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억지로 눈을 뜨려고 해도 눈꺼풀이 자꾸만 무거워졌다. 여기서 자 버린다면 집을 지킬 사람이 없는데.......


봄이는 결국 졸음을 이기지 못했다.


* * *


꾸벅꾸벅 졸던 봄이가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봄이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처음 눈을 감았을 때와 바뀐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방금 전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고요한 실내에는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미약하게나마 타오르던 불꽃은 전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봄이는 시간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주춤거리며 일어섰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는 몰랐지만 꽤나 시간이 흐른 모양이었다.


정신이 반쯤 돌아오지 않은 봄이가 발을 질질 끌며 계단으로 향했다. 집 안은 특별한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아직도 중년 여성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나름대로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초조하게 계단을 오르는 봄이의 정신이 차츰 돌아오기 시작했다. 봄이는 2층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엽총을 들고 자리에 앉아있던 중년 여성이 봄이를 홱 돌아보았다.


“안녕. 무슨 일 있어?”


봄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중년 여성을 보자 뛰던 가슴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어디 있었어요?”


봄이가 흠칫하니 묻자 중년 여성이 눈을 껌뻑거리며 대답했다.


“어디 있었느냐고......아, 아까 말이야? 잠깐 불씨를 가지러 지하에 내려갔다 왔었어. 상민이도 불씨 옮기는 걸 도와줬어. 일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네가 불이 꺼져버린 드럼통 옆에 기대고 쿨쿨 자고 있는 걸 봤어. 깨워서 따뜻한 방으로 옮겨 주려다가 네가 너무 곤히 잠든 것 같아서 놔뒀어. 1층은 추울 텐데 왜 그런 곳에서 졸고 있었어?”


“현관 앞에서 집을 지킬 누군가가 필요할 것 같았어요.”


봄이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이 깜빡 졸았다는 사실만큼은 끝까지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문득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아직까지도 곤히 곯아떨어져 있는 상훈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중년 여성이 히죽이며 말했다.


“그 녀석은 잠시나마 내버려 둬. 이제 곧 교대 시간이니까. 춥지 않니? 차라도 한 잔 마실래?”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봄이의 뱃속에서 허기가 느껴졌다.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시기보다는 배부르게 식욕을 채우고 싶었다. 봄이는 통제소에서 도망쳐 나온 이후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차 안에서 상훈이 건넨 에너지 바 하나를 먹은 것이 전부였다. 봄이는 중년 여성에게 먹을 게 있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미소를 지으며 ‘차’를 따라 주는 중년 여성을 보니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봄이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물었다.


“지금이 몇 시쯤 되었죠?”


그 말을 들은 중년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걷어냈다.


“해가 완전히 떨어진 걸 보니 꽤나 밤이 깊은 모양이야. 바깥이 내다 보이기라도 하면 대강 짐작이라도 할 수 있는데 며칠 전부터 검은 하늘에 안개가 잔뜩 끼는 바람에 요즘은 시각을 예측하기가 어려워졌어.”


그렇게 말하고 나서 중년 여성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봄이는 눈을 감기 전까지만 해도 안개 속 지평선에 어렴풋이 떠 있는 해를 보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해는커녕 빛 한 줄기도 보이지 않았다. 서리 낀 창 너머로 보이는 건 오직 검은 안개와 어둠뿐이었다. 창 밖을 내다보고 나서 봄이는 실내에 수없이 놓인 불 붙은 양초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 양초들이 없었다면 아마 이 작은 집조차도 떡 벌린 괴물의 아가리 같은 어둠 속으로 통째로 삼켜져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봄이는 자신이 상당히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창 너머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만을 보고 있자니 눈동자가 암흑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봄이는 고개를 돌려 탁자에 수없이 놓인 양초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봄이가 한참 동안이나 일렁이는 촛불을 바라보자 중년 여성이 한마디 던졌다.


“불꽃을 너무 쳐다보지는 마. 불꽃의 끝은 죽음의 세계로 이어져 있다는 소문이 있으니까.”


봄이가 홱 돌아보자 중년 여성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봄이는 그녀가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촛불가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봄이는 아까 전 거실에서 본 가족사진이 그들의 사진이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중년 여성은 흔쾌히 맞다고 대답했다. 그 사진은 15년 전에 자신이 그들 형제와 함께 찍은 사진이라고 말했다. 봄이는 그 사진에 보였었던 부부 중 한 명에 대해서도 물었지만 중년 여성은 그것에 관해서는 일체 입을 열지 않았다.


봄이가 이번에는 상훈에 관해서 물었다. 중년 여성은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 것 같았다.


“......15년 전까지만 해도 말 잘 듣고 귀여운 녀석이었어. 지금은 언제 저렇게 커 버렸는지 내 가슴께에 닿던 키도 어느새 훌쩍 넘어가 버렸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그냥 다 큰 어른인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직도 그저 철없는 어린애 같아. 상민이는 아직 한창 사춘기를 지날 나이인데도 찬찬히 돌아보면 녀석이랑 함께 있었던 시간도 많이 부족했던 것 같아. 예전부터 저 녀석들을 데리고 멀리 떠나서 낚시라도 해 보고 싶었는데.”


봄이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녀에게는 낯선 감정들이 머릿속에서 한데 뒤섞여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봄이를 바라보며 중년 여성이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너, 가까이에서 보니까 정말 예쁘구나. 멀리서 볼 때는 그저 그런 줄 알고 은근히 깔보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까 어렸을 적 나보다 지금 네가 더 예쁜 것 같은데. 너 주변에서 예쁘다는 소리 많이 듣지?”


봄이는 그 말을 듣고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녀의 말뜻을 완전히 이해하고 나서도 당황한 봄이는 중년 여성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흘겼다.


“예? 아, 아뇨. 한 번도......”


봄이가 부담스러워했지만 중년 여성은 뭐가 그리 좋은지 마냥 누런 이를 보이며 웃어대기만 했다.


“왜, 농담 같아? 진심이야.”


중년 여성은 봄이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봄이는 약간 흠칫하기는 했지만 잠자코 있기로 했다. 추위에 빨갛게 튼 봄이의 얼굴에 거칠고 까끌까끌한 중년 여성의 손바닥이 닿았다. 그녀는 자꾸만 흘러내려 눈을 가리는 봄이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넘겨주며 ‘아이구, 어쩌면 이렇게 예쁠 수가’ 따위의 말을 해댔다.


봄이는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도 잘 몰랐지만, 눈 앞의 중년 여성에게 봄이는 어떠한 감정이 느껴졌다. 포근하고, 신뢰할 수 있는 엄마의 품 같은..... 그런 감정이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봄이에게는 낯선 감정이었다.


중년 여성이 만족한 듯이 손을 치우고 두 팔을 이리저리 흔들며 손짓했다.


“아, 그리고 말이지. 방금 전에 생각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들어볼래? 어느 하루는 우리가 말이야.......”


그러나 중년 여성의 이야기는 끝을 맺지 못했다. 고요하기만 하던 검은 하늘 속에서 천둥 같은 굉음이 울려퍼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소리는 봄이에게 상당히 익숙한 굉음이었다.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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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103화 20.12.21 47 0 9쪽
105 102화 20.12.20 28 0 16쪽
104 101화 20.12.16 64 1 12쪽
103 100화 20.12.11 30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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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96화 20.11.29 68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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