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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1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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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73
추천수 :
182
글자수 :
530,484

작성
20.11.2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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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94화

DUMMY

누군가가 봄이를 흔들어 깨웠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봄이는 눈을 비비고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봄이가 눈을 뜬 공간에는 자신과 침대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온통 텅 비어있는 무(無)의 공간뿐이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창백한 공간의 허공에서부터 조각들이 날아왔다. 그 무수한 조각들은 마치 퍼즐처럼 봄이의 눈앞에서 점차 맞춰지더니 이내 한 군데의 공간으로 변했다.


이윽고 조각들이 허공의 빈 공백을 완전히 메꾸자 어떤 장소가 봄이의 눈앞에 펼쳐졌다.


작지만 아늑한 방이었다. 촛불은 켜져 있지 않았지만 주위가 상당히 밝았기 때문에 빛은 필요 없었다. 일어서자마자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창문은 커튼에 가려져 있었고, 한쪽 벽 모퉁이에 걸린 시계가 조용히 째깍거리고 있었다.


봄이의 바로 옆에는 방금 전 그녀를 깨워 준 사람이 서있었다. 그 사람의 얼굴은 지워져서 잘 보이지 않았으나 봄이는 그 사람이 자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봄이는 조심스럽게 얼굴 없는 남자가 내민 손을 잡았다.


남자의 얼굴에는 이목구비가 없었다. 봄이는 예전에도 그 소름끼치는 얼굴을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이 얼굴 없는 남자가 내민 손이 마냥 따뜻하게만 느껴졌다.


봄이는 얼굴 없는 남자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움켜쥔 그의 손바닥 감촉만큼은 그가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느껴졌다. 남자의 얼굴은 온통 새카맣게 칠해져 있었지만, 봄이는 왠지 그가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자 봄이의 기억 속에서 누군가가 한 명 더 나타났다. 그 역시도 얼굴은 알아보지 못할 만큼 지워져 있었다. 두 번째로 나타난 사람은 키가 작고 머리가 길었다. 봄이는 밝고 은은하게 번지는 순백색의 방 한가운데서 그들과 마주섰다.


그 다음 장면들은 마치 영화 필름처럼 지나갔다. 기억의 조각들이 만들어내는 영화가 시작되고 나자 봄이는 방금 전까지 서있었던 자신의 몸이 마치 영화를 보듯 공중에서 내려다보이기 시작했다.


봄이의 눈앞에 내려다보이던 또 다른 자신은 얼굴 없는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들은 모두 즐겁게 대화하고 있었다. 기억 속에서 보이는 자신은 웃고 있었다. 그러나 필름이 한 장면, 한 장면 넘어갈 때마다 봄이는 무언가가 이상해져 간다는 것을 느꼈다.


다음 장면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사람이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도형의 끝 점들이 서로 뒤집히듯 봄이의 봄이의 기억 속 공간도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천천히 지나가던 기억 속 장면들이 갑자기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지나쳐갔다.


평화롭던 영화 필름이 검게 그슬려 사라지더니 난데없이 피가 튀었다. 동시에 봄이가 서 있던 순백색의 공간에 순식간에 핏자국이 칠해졌다. 그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핏자국은 빠르게 봄이를 덮쳐왔다. 아무런 음지조차 없이 눈부시게 밝기만 했던 순백색의 공간이 소름끼칠 정도로 새빨간 피의 공간으로 변하기까지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억 속 공간이 점차 무너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자, 뒤틀린 기억 속 공간은 봄이가 아까 전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 스쳐지나갔던 주마등과 겹쳤다.


그 순간, 봄이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마치 어둠이 내려앉은 어스름이 사라지고 동이 트는 새벽녘 하늘처럼, 얼굴이 지워졌던 두 사람의 얼굴이 봄이의 눈앞에서 일순간 떠올랐다. 워낙 한순간이라 제대로 기억하기는 힘들었지만 틀림없었다. 틀림없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봄이는 그토록 ‘찾던’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 * *


봄이는 눈을 떴다. 누군가가 짙은 어둠 속에서 양초 접시를 들고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만 일어나, 이 잠꾸러기야. 온 세상이 끝나버릴 때까지 잠만 잘 셈이야?”


상훈의 목소리였다. 상훈은 들고 온 양초 접시를 봄이의 머리맡에 내려놓고는 봄이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상훈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고 만 사람처럼 놀란 표정을 지으며 봄이에게 물었다.


“봄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봄이는 눈앞의 남자가 뜬금없이 왜 그렇게 동요하는지 알지 못했다.


상훈이 놀라는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너......울고 있잖아.”


그의 말에 봄이는 자신도 모르게 손등으로 눈가를 쓸었다. 손등에는 물기가 흥건했다. 두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아무 것도 아니에요. 잠깐만......”


봄이는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상훈을 밀쳐내고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봄이의 돌발행동에 당황한 상훈이 그녀를 붙잡아보려고 했으나 봄이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봄이는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소매로 훔치면서 달렸다. 봄이는 방금 전에 자기가 꾸었던 꿈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상하게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꿈에서 무엇을 보았지? 누구를 보았나? 그 해답 없는 질문의 답을 누구에게도 듣지 못한 채로 봄이는 작은 집에서 뛰쳐나갔다.


착잡한 심정으로 문을 열어젖힌 봄이의 코끝에서 고소한 향기가 풍겨왔다. 고기 굽는 노릇노릇한 향기였다. 봄이의 눈 앞에는 중년 여성과 상민이 타오르는 모닥불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중년 여성이 봄이를 보자 말했다.


“딱 맞춰서 일어났네. 봄아, 이리 와서 봐봐. 이게 뭔지 알아? 네가 오늘 낮에 잡은 멧돼지야. 예전에 시골에 있었을 때 도축을 했었던 기억을 떠올려서 그런대로 요리한 거라 맛은 좀 별로지만 최고야. 안 그래도 깨우려고......”


하지만 봄이는 더 듣지 못하고 그들을 지나쳐 달려갔다.


봄이는 숨이 차서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달리다가 발을 헛디뎌 그만 자빠지고 말았다. 몇 번이나 구르던 봄이는 그대로 드러누워 어둠이 깔린 밤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어둠이 시작되는 하늘의 끝자락으로부터 내려앉은 어스름 속에서 큰 보름달이 빛나고 있었다. 달빛은 봄이가 드러누운 대지의 표면을 여기저기 핥다가, 한 입 베어 문 솜사탕 같은 검은 구름 뒤로 모습을 감췄다.


가슴이 답답했다.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본 기분이었다. 방금 전에 자신이 보았던 게 무엇이었는지, 무엇 때문에 이리도 슬픈 감정이 복받쳐 흘러내리는지 도저히 알지 못했다. 왠지 모르게 외로워졌다.


자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핏빛으로 물든 기억 속에서 자신은 그 얼굴 없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나? 만약 지금 다시 기억 속으로 돌아간다면 그때는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흐르던 눈물은 달리는 도중에 다 말라버려 눈동자가 건조했다. 눈물자국으로 붉게 튼 뺨이 추위에 아려왔다. 재킷도 챙겨입지 못하고 셔츠 차림으로 달려나온 봄이의 몸이 칼바람에 휘말렸다. 온 몸이 얼어붙는 추위에도 봄이는 꼼짝하지 않은 채로 눈을 감았다.


몇 분 동안이나 고민에 잠겨 있던 봄이가 눈을 뜨기도 전에 누군가가 봄이의 옆에 다가와 앉았다.


“너, 자꾸 멋대로 튀어나가는 것 좀 고쳐야겠다.”


그 말을 듣자 그제서야 봄이가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소매가 찢어진 봄이의 분홍색 후드 재킷을 손에 들고 있었다.


“네게 또 무슨 이변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을 보고 도망치는 도둑고양이처럼 자꾸만 네 멋대로 이리저리 튀어나가다간 위험해.”


그렇게 말하며 상훈은 봄이에게 후드 재킷을 내밀었다.


“아저씨.”


봄이가 말했다.


“내가 방금 전에 뭘 봤는지 알아요? 생각은 잘 안 나는데 되게 신기한 꿈이었어요. 처음 보는 방에 누워 있는데 어떤 사람들이 두 명 들어왔어요. 나는 그 사람들을 본 적이 없는데 그 사람들은 나를 본 적이 있었나 봐요. 그 사람들이 내 손을 잡고 어디론가 데려갔어요. 그리고는 나한테 무슨 기억들을 보여줬는데, 뭐였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요.”


“그 사람들은 누구였는데?”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나한테 기억들을 하나둘씩 보여주더니 갑자기 끊겨 버렸어요. 뭐 때문에 기억의 절반이 날아갔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사람들의 얼굴이.........그러니까........”


봄이가 잠시 말을 멈추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이야기했다.


“그리웠어요. 그랬던 것 같아요. 분명히 처음 보는 사람일 텐데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모르겠어요. 전 그 사람들의 얼굴을 본 적도 없어요. 처음 보는 얼굴이었어요. 분명히 처음.......분명히......처음 보는 얼굴이었을 텐데.”


봄이는 갑자기 울컥해져서 빨갛게 퉁퉁 부어오른 눈가를 소매로 비볐다.


“도대체 그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그렇게 말하고는 눈물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봄이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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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95화 20.11.28 30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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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94화 20.11.19 63 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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