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116 회
조회수 :
14,547
추천수 :
182
글자수 :
530,484

작성
20.12.07 08:35
조회
37
추천
0
글자
11쪽

10. 종착점

DUMMY

10. 종착점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사람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목과 허리가 부러질 듯이 아프고 속이 울렁거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더 답답했다. 웅크린 채 뜬눈으로 몇 시간을 세운 봄이는 이제 슬그머니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당장이라도 가방을 열어젖히고 싶었지만 잘 열리지 않았다. 가방 위에 무거운 물건을 잔뜩 쌓아둔 모양이었다. 봄이가 힘껏 버둥대자 쌓여 있던 물건들이 요란하게 무너졌다. 드디어 봄이는 바깥 공기를 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가방이 열리자마자 몸 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급속도로 올라왔다. 봄이는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한 채로 땅바닥에 엎드려 정신없이 토했다. 어느 정도 게워내고 난 후 주위를 둘러보자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잠이 덜 깬 눈으로 봄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봄이는 또 토했다.


몸 속을 텅 비우고 나니 구역질이 멎었다. 봄이가 입을 떡 벌리고 황당해하는 남자에게로 비틀거리며 다가가자 남자는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난데없이 소리를 지르며 쏜살같이 달아났다.


분명히 세상 밖으로 나왔지만 온통 어둠뿐이었다. 날이 완전히 저물어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봄이는 온통 쑤시는 목과 허리를 부여잡고 가방을 뒤져 회중전등을 꺼냈다.


봄이는 몇 달 동안이나 번데기를 거쳐야만 성충으로 잉태하는 나방 유충이 떠올랐다. 그리고 짧은 순간이나마 그 과정을 몸소 느낀 기분이 들었다. 24시간조차 채 버티지 못했는데 몇 개월 동안 번데기 속에 있으면 무슨 느낌일까? 봄이는 자신이 나방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회중전등을 켜자 주위가 환하게 드러났다. 철제 격자가 늘어선 화물 컨테이너 벨트에 주인 없는 물건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가방 몇 개는 열린 채로 마구 널브러져 있었다. 아까 전 봄이를 보고 달아났던 남자가 훔치다 만 물건들이 틀림없었다. 봄이도 가져갈 만한 물건이 있나 살펴보았지만 그다지 쓸만한 건 없었다.


아직도 정신이 어질어질한 봄이는 힘겹게 벽을 짚어가며 화물 창고를 나갈 방법을 찾았다. 화물 창고는 녹슨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이걸 보자 봄이는 방금 전 그 남자가 도대체 어떻게 달아난 건지 아이러니했다. 어쩌면 그 남자는 봄이의 망상 속에만 존재하는 환상이 아니었을까?


......인 줄 알았는데 녹슨 자물쇠는 부서져 있었다. 덕분에 봄이는 물건을 챙기고 화물 창고를 나갈 수 있었다.


실내라 하늘이 보이지 않아서 온통 암흑뿐이었다. 봄이에게는 제일 먼저 자신이 올바른 목적지로 온 게 맞는지 확인하는 게 급선무였다. 회중전등으로 벽을 훑어보았지만 불이 꺼진 매점이나 물건을 옮기는 트롤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금 밟고 선 이 땅이 어디인지 알 방법이 없자 봄이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이곳이 봄이가 도착해야 할 목적지가 확실할 가능성은 어디에도 없었다. 천안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곳이라면? 그렇다면 이제 어떡해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봄이의 발에 무언가가 밟혔다. 물컹한 감촉이었다. 그러나 그 물체는 봄이에게 밟히자마자 엄청난 괴성을 질렀다. 놀라 휘청거리던 봄이는 그 물체가 재빠르게 일어서는 모습을 보자 비로소 자신이 밟았던 것이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정체불명의 사람이 소리쳤다.


“이 개 같은 새끼야, 똑바로 보고 다녀야 할 것 아니야!”


봄이는 얼떨결에 그에게 회중전등을 비췄다. 지저분한 재킷을 한 장 걸친 노숙자였다. 그러나 봄이는 그에게 사과를 하기보다는 마침 잘 됐다는 생각이 앞섰다.


“저기, 실례합니다. 여기가 어딘지 아세요?”


뜻밖의 목소리 톤에 노숙자는 잠시 당황해했지만 곧 다시 소리쳤다.


“여기가 어디느냐고?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야? 사람을 밟아놓고 사과는 못할망정 뻔뻔한 녀석이군. 지금 당장 내 앞에서 썩 꺼져.”


“여기가 어딘지 알고 계시잖아요. 대답해 주세요.”


“꼬맹이,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제 발로 기어들어왔단 말이야? 나보고 지금 그걸 믿으라고? 죽기 싫으면 지금 바로 여길 떠나. 그렇지 않으면 분명히 험한 꼴을 당하게 될 거야.”


아무래도 노숙자는 말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봄이가 체념하고 돌아서려는데 노숙자가 말했다.


“잠깐 기다려. 묻고 싶은 게 있어. 넌 사지가 멀쩡해?”


“예, 멀쩡해요.”


“그렇다면 진지하게 충고하지. 지금 당장 여길 떠나. 두 다리가 멀쩡히 붙어있을 때 말이지.”


봄이는 무시하고 되돌아갔다. 등 뒤에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정말로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자세히 보니 노숙자는 두 눈이 없었다.


봄이는 천천히 터미널 입구로 걸어갔다.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빈 환풍기 사이로 빛이 스며들어왔다. 도관에서 흘러나온 물기로 축축한 천장에는 곰팡이가 가득했고, 전등이 비추는 낡은 시멘트 벽면에는 온통 금이 가 있었다. 이 건물은 마지막으로 보수공사를 한 게 언제였을까?


굳게 닫힌 셔터 주변에는 노숙자들이 모여 있었다. 코 고는 소리가 진동했지만 일어나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봄이를 보자마자 일어서서 다가왔다.


“여기서부터는 우리 구역이야. 들어가려면 통행세를 내.”


“여자애잖아. 처음 보는 얼굴인걸.”


어슬렁거리며 다가온 두 무뢰한들이 봄이를 둘러쌌다. 그들에게선 찌든 기름 냄새 같은 악취가 물씬 풍겼다. 봄이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나며 치마폭으로 손을 뻗었다.


“김찬, 이 계집애 붙잡아.”


봄이가 권총을 꺼내려는데 무뢰한들의 뒤에 앉아있던 누군가가 외쳤다.


“이봐, 그 꼬맹이는 그냥 보내 줘. 어차피 얼마 못 가서 죽을 텐데 뭘.”


그러자 봄이에게 손을 대려던 두 무뢰한들은 잠시 고민하더니 곧 순순히 물러났다. 그의 목소리에 사람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마법이라도 깃든 것 같았다.


“꼬맹이, 여기엔 왜 왔나?”


무뢰한들의 뒤에 있던 그림자가 물었다. 그는 봄이가 원래 이곳에 머물러있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


평소의 봄이였다면 눈길도 주지 않았겠지만 무뢰한들에게서 자신을 도와준 보답을 하고 싶은 마음에 기꺼이 대답해주었다.


“만나야 할 사람이라.......”


그림자가 잠시 말끝을 흐리더니 미친 사람처럼 웃어댔다.


“꽤 재미있고 천진난만한 생각이구나. 내일까지 살아있으면 다행인 이 죽음의 땅에서 말이야. 이봐, 들었어? 사람을 찾으러 왔대.”


“그냥 놔 둬. 우리가 왜 저런 코찔찔이까지 굳이 신경써야 해?”


그림자가 외치자 어둠 속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솔직히 말해서 너 같은 녀석은 처음 봐. 보아하니 온 지 얼마 안 된 풋내기인 모양인데 몸소 느껴보기 전까지는 아무리 말해도 모르겠지. 어서 가 봐.”


그대로 지나가려던 봄이는 문득 떠올라서 그림자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딘지 알려 주세요.”


그림자가 입을 다물었다. 봄이의 행동이 믿기지 않는다는 모양이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여긴 정확히 천안 고속버스 터미널이다. 알고 온 것 아니었나? 만약 제대로 찾아온 게 맞다면, 넌 잘못 찾아온 거야.”


봄이는 그제서야 자신이 제대로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안도할 수 있었다.


“고마워요. 또 만나죠.”


봄이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셔터를 열어젖히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 사실 또 만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 * *


드디어 봄이는 그토록 원하던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봄이가 여기 온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그저 어렸을 적 삼촌과 함께 지냈던 곳이 바로 천안이어서였기 때문이었다. 오직 그뿐이었다.


아무런 계획도, 3년은 더 지난 예전 집을 기억해낼 방법도 없었다. 사실 예전 집을 기억해낸다고 해도 삼촌은 분명히 그곳에 없을 것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보기에 멍청하고 무모한 행동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벌써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했거나 이 지역을 떠났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 무작정 찾는 수밖에 없었다.


굳센 각오를 다진 봄이는 지금껏 와본 적 없는 새로운 세계로 발을 내딛었다. 바깥 세상은 이미 저물었지만 곧 동이 틀 모양이었다. 짙은 회색 먹구름이 걸린 하늘에서 미미하긴 했지만 빗방울이 떨어졌다. 산성비 속에서 세차게 몰아치는 찬바람 때문인지 회중전등 빛은 자꾸만 오그라들었다.


비가 그치고 날이 밝기 전까진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것이 현명해 보였다. 그러나 다시 셔터를 젖히고 노숙자들과 무뢰한들이 드글거리는 터미널 입구로 돌아가기는 싫었다. 봄이는 근처에 비를 피할 수 있을 만한 곳이 있는지 살폈다.


텅 빈 터미널을 빙빙 돌던 도중 봄이는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터미널과 몇 미터가량 떨어진 옆 건물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봄이는 몸을 낮추고 귀를 기울였다. 이따금씩 떨어지는 빗소리만 들렸다. 그러나 확실히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기 울음소리 같기도 했고, 그런 아기를 달래주려는 자장가 같기도 했다. 어스름 속 빗소리를 뚫고 울리는 구슬픈 멜로디에 봄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소리의 근원지로 가깝게 다가갈수록 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렸다. 불규칙적으로 울려퍼지는 높고 가냘픈 사람 목소리에 봄이는 그 소리가 아기 울음소리였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 외에도 또다른 소리가 들렸다. 울음소리와는 달리 규칙적으로 한 가지 멜로디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악기 소리, 자장가........


반쯤 깨진 유리 문에 발을 들이고 나서야 봄이는 그 노랫소리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았다. 수십 개의 의자가 나란히 놓인 실내에 촛불이 한 가닥 피어오르고 있었다.


봄이가 전등을 비추자 요란하게 우는 아기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던 어둠 속 남성이 입을 다물었다. 그와 동시에 노랫소리도 그쳤다.


“미안해요. 폐를 끼쳤나요?”


어둠 속 남성이 말했다. 봄이가 비추는 전등 빛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자세히 보니 그는 손에 낡은 통기타를 들고 있었다. 아기는 계속 울고 있었다.


예상외의 광경에 놀란 봄이가 아무 대답이 없자 남자가 말했다.


“요 녀석이 도통 울음을 그치질 않아서요. 폐가 되었다면 자리를 옮겨 드리죠.”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어차피 금방 떠날 거니까.”


봄이가 그렇게 말하며 남자로부터 멀리 떨어진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 글 설정에 의해 댓글을 쓸 수 없습니다.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마지막 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16 113화 21.02.13 31 0 9쪽
115 112화 21.02.05 30 0 15쪽
114 111화 21.01.25 33 0 12쪽
113 110화 21.01.20 53 0 12쪽
112 109화 21.01.15 29 0 11쪽
111 11. 끝나지 않는 밤 21.01.11 48 0 13쪽
110 107화 21.01.08 34 0 12쪽
109 106화 21.01.06 124 1 11쪽
108 105화 21.01.05 32 1 12쪽
107 104화 21.01.03 65 1 13쪽
106 103화 20.12.21 46 0 9쪽
105 102화 20.12.20 27 0 16쪽
104 101화 20.12.16 63 1 12쪽
103 100화 20.12.11 29 0 13쪽
102 99화 20.12.08 38 0 12쪽
» 10. 종착점 20.12.07 38 0 11쪽
100 97화 20.12.02 58 0 13쪽
99 96화 20.11.29 67 0 11쪽
98 95화 20.11.28 30 0 14쪽
97 95화 20.11.23 41 0 13쪽
96 94화 20.11.20 40 1 9쪽
95 94화 20.11.19 62 1 9쪽
94 93화 20.11.17 70 0 13쪽
93 92화 19.11.27 57 0 9쪽
92 91화 19.11.24 57 0 17쪽
91 90화 19.11.23 50 0 26쪽
90 89화 19.11.19 55 0 18쪽
89 88화 19.11.17 52 0 17쪽
88 87화 19.11.16 87 0 19쪽
87 86화 19.11.15 57 0 1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