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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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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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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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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95화

DUMMY

봄이는 한동안 가만히 쭈그려 앉아 훌쩍대다가 곧 울음을 그쳤다. 잠시나마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나자 그래도 한결 편해지는 것 같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던 상훈은 울먹이는 봄이의 어깨를 팔로 감쌌다.


“봄아, 왜 우리 어머니가 다 무너져가는 이 집을 그토록 안 떠나려는 줄 알아?”


턱을 가슴에 파묻고 있던 봄이가 벌개진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늘 봄이가 궁금해하던 것이었다. 봄이가 작은 집에 처음 왔을 때, 상민과 은신처 문제로 다투던 중년 여성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때의 중년 여성이 확실히 평소와는 다르게 예민하게 반응했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봄이는 끈질기게 이 집만을 고집하려는 중년 여성이 그다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전에 봄이는 한 집에서 길어도 이틀 이상 머무르지 않았다. 아무리 물자나 식량이 많다고 해도 마찬가지였고, 늘 누구에게도 띄지 않은 채 은밀하게 은신처를 옮겨다녔다. 흔적을 남기기라도 했다간 반드시 침입자의 공격이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다.


“그럴 만한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요?”


봄이가 눈물을 그치고 자신을 감싼 상훈을 바라보았다.


“우리 아버지가 이 집을 지키다가 죽었거든.”


상훈은 마치 먼 옛날을 회상하며 추억에 잠기는 노인처럼 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예상치 못한 대답에 봄이는 침이 꿀꺽 넘어갔지만 곧 차분하게 물었다.


“어떻게......죽었는데요?”


“우리 모두가 보는 눈 앞에서 꼬챙이에 목이 뚫려서 죽었어.”


봄이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녀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상훈이 계속 말했다.


“벌써 몇 개월도 더 지난 이야기야. 나랑 상민이가 근처 뒷골목 시장에 잠깐 들렀던 적이 있었어. 아, 물론 그 시장은 오래 전에 사라졌어. 아무튼 그 때는 가을이었는데, 거기에서 마침 남자 몇 명이 모여서 살아있는 닭들을 가지고 내기를 하고 있었어.


내기 방법은 아주 간단했어. 바닥에 줄을 그어놓은 커다란 우리 속에 닭을 집어넣고, 닭이 왼쪽 통로로 빠져나갈지 오른쪽 통로로 빠져나갈지 거는 룰이었어. 마침 우리가 늦게 왔는지 구경꾼들이 아주 많았어. 안 그래도 그 날에 건진 수확이 별로기도 했고, 마땅히 걸 만한 판돈도 없었던 우리는 구경꾼들 사이에 끼어서 그 내기를 구경했어.


그 중에서 내기에서 늘 이기는 녀석들이 있었어. 그 녀석들의 수법이 아무래도 수상해서 내가 잠깐 늘 왼쪽 통로로 빠져나가던 닭을 살펴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닭의 오른발에 조그만 상처가 있었어. 이 사실이 밝혀지자 녀석은 금세 성난 군중들에게 둘러싸였어.


처음에는 차분하게 대화로 풀어나가나 싶더니 난데없이 군중들 중 누군가가 녀석들을 밀쳤어. 점점 몸싸움이 거세지더니 급기야 그 자리에서 패싸움이 벌어지는 지경에 이르렀어. 우리 문을 열어둔 닭들이 정신없이 도망치고 난리도 아니었지. 뒷골목 시장에는 다툼이 벌어져도 아무도 제지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누구도 그 난리에 직접 나서서 말리려 들지 않았어.”


상훈이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기고 나서 다시 말했다.


“우리는 상황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슬그머니 자리를 떴어. 우리야 다른 녀석들처럼 잃은 것도 없고 눈치볼 것도 없었기 때문에 싸움에 휘말릴 필요가 없었지. 그런데 그 때 우리가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게 있었어. 녀석들 중 하나가 우리에게 원한을 품고 몰래 미행을 붙였었나 봐.


며칠 뒤에 다시 집에 돌아가보니 녀석들이 어느새 집에 들어와 어머니와 아버지를 붙잡아두고 있었어. 그 때는 정말 뒤통수라도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어. 놈들은 집으로 들어오는 우릴 보자마자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협박했어. 섣불리 행동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묶여있는 걸 보자 왜인지 모르게 행동이 더 앞섰어. 집 안은 금방 난장판이 됐지.”


분명히 봄이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는 걸 좋아했지만 이번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가슴 한구석이 쓰라렸고 어깨가 뻐근했다.


“녀석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연장을 들고 있었어. 수적으로도 녀석들은 우리보다 두 배는 많았지. 사실 그 때 그 녀석들을 어떻게 쫓아냈는지도 잘 모르겠어. 그저 손에 잡히는 대로 마구잡이로 휘둘렀던 것 같아. 연필이든, 벽돌이든, 유리 조각이든........ 결국에는 어머니를 구할 수 있었는데, 끝내 아버지를 구하지는 못했어. 놈들이 손에 쥔 기다란 송곳이 아버지의 목을 꿰뚫고 들어가는 걸 그저 가만히 보고 있어야만 했지.”


상훈이 잠시 입을 다물자 바람 소리마저 그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하는 것처럼 잠잠해졌다.


“그날 이후로 어머니는 매일 울었어. 한 달이 넘도록 울음을 그치지 못했어. 예전에 정말로 견디기 힘들었을 때는 약을 먹으려고까지 하셨어. 어머니 손에서 약통을 다섯 번도 넘게 빼앗았지. 사실 누군가 말리지 않았어도 어머닌 끝내 약을 드시지 않았을 거야. 소중한 가족을 잃었다는 슬픔은 분명 크겠지만, 결코 남은 가족들을 저버리고 먼저 도망칠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봄이는 그제서야 모든 궁금증이 풀리는 것 같았다. 중년 여성이 상민을 구하러 나가려는 것을 반대한 상훈에게 매섭게 쏘아붙였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구나. 중년 여성에게 가족사진 속 그녀의 옆에서 미소짓고 있던 남성에 대해 물었을 때 그녀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구나.......


“식인종들이 아저씨를 죽이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는 게 그 일인가요?”


“그래, 맞아.”


“그런데, 어떻게 그 놈들이 식인종인 줄 알아요?”


“그보다 더한 자식들이었으니까.”


두 사람은 말을 멈추고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곰팡이처럼 잠식하고 있던 검은 구름이 전부 걷히자 고요한 밤 하늘에 떠오른 달이 심연 속에서 피어오른 한 송이의 꽃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 때 올려다보았던 밤 하늘은 지금껏 봤던 그 어떤 존재보다도 더 높아 보였다.


달빛의 후광을 받아 허공을 질질 끌던 별들도 공허한 어둠 속에 수놓은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지금껏 피할 수 없는 현실에 짓눌려 고개 한 번 쳐들지 못한 채로 폐허가 되어버린 땅바닥만을 기던 소녀에게 그 하늘은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먼 곳을 바라보던 봄이는 이 동네에 처음 발을 딛었을 때 보았던 교회 첨탑이 보였다. 첨탑의 꼭대기에 힘겹게 걸려 있는 십자가에는 빛이 들지 못했지만 어스름 속에서도 윤곽을 잃지 않고 뚜렷하게 나타났다. 그 십자가를 보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어째서 자신을 가족과 떨어뜨려 놓았을까?


봄이는 방금 전까지 아무런 의미도 없이 흘렀던 눈물의 의미를 알 것만 같았다. 꿈에서 처음 만난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 그 그리움이 봄이에게 남겼던 가슴 속 응어리의 존재...... 그 모든 것을 지금 봄이는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감정들이 봄이의 눈 앞에 잠시 나타났지만, 그것들은 금세 잡으려고 꽉 움켜쥔 모래가 주먹 사이에서 흘러내리듯이 전부 녹아내려 버렸다.


봄이는 자신의 처지가 마치 무리에서 떨어져 버린 동물 같다고 생각했다. 무리에서 떨어진 동물이 외로움을 느끼는 것처럼 지극히 정상적인 본능일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너무 차갑기만 한 세상에 익숙해져 버린 탓에, 봄이는 지금 자신이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소망을 모조리 잊고 있었다.


더 이상 가족의 얼굴이 보고 싶다는 어린 소녀의 본능을 강제로 잊으려고 하지 않아도 되었다.


“네가 아까 전에 느꼈다는 감정이 그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이랑 비슷한 게 아닐까 했거든. 그래서 말해주는 거야. 그리고 그 일이 있고 나서 몇 달 뒤에 널 만났지.”


“아저씨.”


봄이가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아저씨가 부러워요. 지켜야 할 사람이 있고, 함께 할 사람이 있고, 늘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있는 아저씨가 정말 부러워요.”


봄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봄이는 빠져나올 수 없었던 갈림길에서 드디어 갈피를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봄이가 선택한 그 결정이 과연 옳은 선택일지는 아무도 몰랐다.


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상훈은 이미 그녀가 무슨 결단을 내렸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상훈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모처럼 모두들 파티 중인데, 주인공이 빠지면 안 되겠지?”


봄이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좋아요.”


* * *


“얘들아, 뭐 하다가 이제서야 돌아와? 아까는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갔어?”


모닥불로 돌아오는 봄이와 상훈에게 중년 여성이 물었다.


모닥불 옆에는 쇠꼬챙이가 잔뜩 쌓여있었고, 탁탁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장작더미 위에는 괴상하게 생긴 덩어리가 기름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아까 맡았던 고소한 향기는 그 덩어리에서 새어나오는 것 같았다.


봄이가 주저앉기도 전에 중년 여성이 봄이에게 꼬챙이를 내밀었다.


“먹어 봐. 기름이 많고 냄새가 좀 고약하긴 하지만 맛이 기가 막혀. 이걸 한 입 먹게 되면 앞으로 다른 걸 먹을 때마다 이 맛이 생각나서 못 견딜 걸.”


상민이 조용히 쭈그리고 앉아서 궁시렁댔다.


“맛이 기가 막히긴 뭐가. 썩은 계란 노른자랑 양말을 동시에 씹는 기분인걸.”


중년 여성이 상민을 째려봤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아주머니가 직접 손질하신 거예요?”


꼬챙이를 받아든 봄이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예전 내 특기이기도 해. 노련한 전문 사냥꾼이라면 출중한 사격 실력 외에도 다룰 수 있는 손재주가 하나 쯤은 있어야지. 내가 이래봬도 그 쪽 방면에선 정말 잘 나갔어. 내가 칼을 집어들면 웬만한 고기는 무조건 그 자리에서 아작이 났지. 같이 하던 녀석들도 모두들 하나같이 입이 닳도록 칭찬했어......그렇지, 자격증도 있는데 보여줄까?”


중년 여성이 그렇게 말하며 코트 주머니를 뒤졌다. 한참을 뒤지던 그녀는 이내 얼굴빛이 어두워지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말을 돌렸다.


“아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줄까? 우리가 입구가 다 날아간 편의점으로 돌아갔을 때 그 녀석은 사실 살아있었어. 방금 전까지 죽다 깨어난 녀석이라기엔 상상도 못할 정도였지. 놈이 피를 줄줄 흘리면서 도망가려는 걸 나랑 상훈이가 겨우 붙잡았어.


총을 세 발이나 맞고도 힘이 얼마나 세던지 상민이까지 달려들었는데도 벅찼어. 어떻게 되어서 잡기는 했는데 그 집채만한 괴물을 여기까지 끌고오는 것도 문제더라고. 결국 녀석을 전부 다 끌고오지는 못했어.”


중년 여성이 입 안에 무언가를 잔뜩 넣은 채로 계속 말했다.


“......단숨에 목을 찔러서 기절시켜야 했는데 잘 안 됐어. 예전 세계에는 가축들을 효과적으로 도축할 수 있는 방법도 정말 가지가지였어. 원래는 이산화탄소로 질식시켜야 하는데 대부분은 전기로 기절시켜 죽였지. 사실 이런 방법은 굉장히 인도적인 편이야. 몽둥이로 때려죽이거나, 아니면 그냥 목을 매달아 죽여버리는 방법도 무척 흔했어. 물론 이렇게 도축을 했다가는 고기의 질을 기대할 수 없기는 해.”


중년 여성이 양 주먹을 꽉 쥐었다가 힘껏 비트는 시늉을 해보였다. 봄이는 더 이상 그녀가 이 멧돼지를 어떻게 요리했는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주머니, 그리고 모두들......드릴 말씀이 있어요.”


결심을 굳힌 봄이가 입을 열었다.


“사실 여기에 처음 왔었을 때부터 고민했었어요. 또 생전 처음으로 절 따뜻하게 받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실감이 잘 안 됐어요. 모두들 너무 잘 대해 주셔서 이 이야기를 꺼내기가 조금 두렵기도 해요. 그렇지만...... 꼭 말해드려야 할 것 같아요.”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모닥불 소리만 들렸다.


“이제 그만 가봐야겠어요. 왠지 전 지금까지 정말로 해야만 하는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늘 바라고 있었던..... 제 간절한 소망을요.”


누구도 봄이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봄이는 울적해지는 기분을 애써 억누른 채로 말을 끝맺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금까지 돌봐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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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101화 20.12.16 64 1 12쪽
103 100화 20.12.11 30 0 13쪽
102 99화 20.12.08 39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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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95화 20.11.28 30 0 14쪽
» 95화 20.11.23 42 0 13쪽
96 94화 20.11.20 41 1 9쪽
95 94화 20.11.19 63 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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