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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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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23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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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90화

DUMMY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을 듣는 순간 봄이의 머릿속은 완전히 불타버렸다. 봄이의 오그라든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고, 소름끼치는 긴장감에 너무 오랫동안 노출된 나머지 썩어버린 폐가 경련하며 헐떡거렸다. 봄이는 눈앞에서 번쩍거리는 현관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제 곧 저곳으로 놈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이제 저 좁은 문으로 죽음이 물밀 듯이 밀어닥칠 것이다. 죽음의 문이 열릴 것이다.


봄이가 비틀거리며 일어서려는데 누군가가 계단을 빠르게 뛰어 내려왔다. 상훈은 바닥에 엎드린 채 기어다니고 있는 봄이를 일으켜 세웠다.


그가 외쳤다.


“문을 막을 만한 걸 찾아봐. 절대로 이 집 안에 들어오게 해서는 안 돼.”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한 봄이의 생각회로가 빠르게 돌아갔다. 봄이는 차갑게 식은 드럼통 옆에 놓인 가죽 소파를 발견하고 안간힘을 다해 밀었지만 소파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상훈이 재빨리 달려와 거들었다.


봄이는 상훈과 함께 온 힘을 다해 죽음의 문을 강제로 틀어막았다. 이윽고 놈들이 담벽을 지나고 현관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처음 몇 번은 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나더니 곧 그 소리는 문을 부숴버릴 기세로 난폭해졌다. 봄이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꼼짝않고 버텼다. 놈들의 숫자가 정확히 얼마나 많은지는 몰랐지만 봄이가 처음으로 봤던 패거리의 수가 일곱이었으니까, 두 명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고 하면..... 다섯이었다. 여전히 불리했다. 게다가 이것은 어디까지나 봄이의 예상에 불과했다.


놈들이 완전히 작은 집을 포위했다. 사방에서 놈들의 지시가 날아다녔다. 놈들이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공격하려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바깥 세상은 불길에 휩싸여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담벽을 넘어 현관으로 접근하는 불청객들의 실루엣이 더욱 선명하게 비춰졌다.


2층에서는 총성이 계속해서 울렸다. 탄피 떨어지는 소리도 미미하게 들렸다. 그러는 도중 문짝을 부술 듯이 걷어차던 놈들의 행동이 잦아들었다. 봄이는 잠깐 안도하기는 했지만 경계를 늦추지는 않았다. 더 이상 놈들이 공격을 포기하고 돌아갔을 것이라는 희망은 갖지 않기로 했다. 그런 헛된 희망은 얼마남지 않은 봄이의 의지에 물을 끼얹었고, 넘어져 멍이 든 봄이의 다리를 더더욱 무겁게 만들 뿐이었다.


봄이와 문 한 짝만을 사이에 둔 채 마주한 놈들은 싸구려 공포영화에나 나올 법한 멍청한 괴물들과는 달랐다. 놈들은 그저 멍한 눈으로 다리를 질질 끌며 어기적어기적 다가와 문을 두드릴 줄밖에 모르는 좀비가 아니었다. 놈들은 인간이었다. 사냥감이 가득한 작은 집을 포위하고 어떻게 공격할 것인지 계획을 세우는 고도의 지능을 지닌 인간이었다. 봄이와 같은 인간이었다.


현관 너머에서 무엇인가를 강철로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문고리를 부수고 들어오려는 모양이었다. 쇳덩이가 표효하는 소리로 미루어보아 문고리는 이미 걸레짝이 된 것이 분명했다. 봄이는 본능적으로 최후의 방어선이 그다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이내 와장창 하는 쇳소리가 터졌다. 문고리가 떨어져 나간 것이었다. 봄이는 놈들과 부딪히지 않고 사태를 해결할 생각 따위는 이미 체념해버렸다. 봄이는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천천히 권총에 손을 가져다 댔다. 혹시라도 놈들이 조심하지 않고 무작정 집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려고 한다면 언제라도 봄이는 한 발밖에 남지 않은 방아쇠를 당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끝내 현관문이 열렸다. 하지만 놈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놈들의 모습 대신 빛나는 총구가 현관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있을 뿐이었다.


봄이가 반사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엎드리자마자 총성이 실내를 요란하게 흔들었다. 고막이 너덜너덜해지는 진동과 함께 현기증이 올라왔다. 놈들이 퍼붓는 총알 중 약간이 가죽 소파에 가로막혔지만 대부분은 벽에 튕겨져 나갔다.


총성이 사그라들고 나서도 봄이는 섣불리 머리를 들지 못했다. 놈들의 총알에 벌집이 된 소파에서 공기 빠지는 소리만 들렸다. 봄이가 용기를 내어 머리를 드는 순간 때마침 집안으로 침투하려는 놈들 중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봄이는 주저하지 않고 두 손을 치켜올려 놈을 겨누고 발포했다.


탕.


손목이 저리는 반동과 함께 터져나온 총알이 현관에 걸린 거울을 산산조각냈다. 봄이가 가진 권총의 존재를 모르고 침투하려던 놈은 총알이 귓전을 스치자 겁을 집어먹고 재빨리 몸을 숨겼다.


한동안 어느 쪽도 움직이지 않는 대치전이 벌어졌다. 상훈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화염병에 불을 붙였다. 그가 불이 붙은 화염병을 대문 밖으로 던지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한 발의 총성과 함께 상훈의 그림자에서 피가 튀었다.


봄이는 상훈에게서 검붉은 피가 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봄이가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가 비틀거리며 주저앉음과 동시에 놓쳐버린 화염병이 그대로 그의 발밑으로 떨어졌다.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발밑에서 퍼져나가는 불길이 봄이를 덮쳤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솟구친 불꽃이 봄이를 삼켜버리려고 입을 벌린 순간 불길 속에서 누군가가 봄이를 거칠게 밀쳤다.


얼마나 세게 밀쳤는지 봄이는 그대로 튕겨져 나가 엉덩방아를 찧고도 벽에 등을 부딪히고 나서야 멈췄다. 밀쳐진 충격으로 권총이 손에서 떨어져 나가 저 멀리에 떨어졌다. 순식간에 집 안에 치솟은 유독성 연기로 인해 봄이는 숨을 쉬기 어려웠다. 가까스로 가다듬은 호흡은 산소 대신 눈앞에서 타오르는 불길 속 잿더미만을 빨아들였다.


봄이는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정신없이 기침을 하면서도 온 힘을 다해 외쳤다.


“아저씨! 어디 있어요?”


봄이는 자꾸만 눈에 들어차는 유독성 가스를 손으로 휘저었다. 하지만 봄이가 연기를 밀어내려 하면 밀어낼수록 호흡기 속으로 더 많은 연기가 스며들어왔다.


“아저씨, 대답해요!”


봄이가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다 대고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봄이의 간절한 외침은 곧 희망이 사라지고 절망만이 남은 절규로 변해갔다.


“아저씨, 제발!”


“난 괜찮아.”


상훈의 목소리가 불길 속 어딘가에서 들렸다. 봄이는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찾기 위해 애썼다. 봄이가 반쯤 정신을 놓은 채 또다시 그를 부르자 상훈이 대답했다.


“손목에서 피가 조금 많이 나고 죽도록 아프다는 것만 빼면 난 멀쩡해. 아, 지금 보니까 신발에 불이 붙어 있네.”


“어디 있어요. 괜찮은 거 맞아요?”


목이 터져라 소리치는 봄이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현관에서부터 그림자들이 침입했다. 적어도 두세 명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들은 상훈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길다란 무기를 움켜쥔 놈들의 발걸음이 피투성이가 된 손목을 움켜잡은 채 주저앉아 있던 상훈의 앞에서 멈췄다. 그 찰나의 순간, 봄이의 시간이 멈췄다.


봄이는 더 이상 아무런 망설이지 않았다. 망설일 시간도 없었다. 그저 어떻게 잘못되어 버렸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본능에 온 몸을 맡겼다.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자신이 몸의 제어권을 가진건지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봄이는 자기도 모르게 근처에 떨어져 있던 식칼을 집어들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발바닥과 어깨가 불에 타는 고통에도 멈추지 않았다.


불길을 헤치고 놈들에게로 도달한 봄이는 남아있는 모든 힘을 짜내어 놈들 중 하나의 팔뚝에 식칼을 쑤셔박았다. 뒤늦게 봄이의 존재를 알아챈 놈은 곧 엄청난 고통에 비명을 질러댔다.


팔뚝에 찌른 식칼을 뽑아 다시 공격하려던 봄이의 팔이 놈들에게 가로막혔다. 봄이가 가로막힌 칼을 포기하고 다른 팔로 주먹을 치켜든 순간, 봄이의 왼쪽 뺨에 엄청난 충격이 전해졌다.


뇌수까지 전해지는 얼얼한 충격에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곧바로 오른쪽 뺨에 곰처럼 커다란 주먹이 거세게 날아와 때려박혔다. 그러나 이 고통도 잠시 놈들의 다음 공격이 봄이의 코로 날아들었다.


놈이 힘없이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봄이에게서 칼을 빼앗아 들었다. 봄이는 차마 정신을 잃지는 못하고 주저앉아 고통스런 신음만을 흘렸다. 일어서야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팔뚝에서 피를 철철 흘리던 놈들이 마구 흥분해서 소리 질렀다.


“아아, 이런 씨발....... 아프잖아.”


“저 계집애를 잡아. 지금 당장 죽여 버리겠어.”


봄이는 서지도 못한 채 돌아누워 온 힘을 다해 뒤로 물러났다. 불길을 등진 놈의 모습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놈이 움켜쥔 칼날만큼은 불꽃 앞의 그을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예리하게 빛났다. 놈의 팔뚝에서 피가 흘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주춤거리며 힘겹게 물러서는 봄이에게로 한 발자국 다가왔다.


봄이는 패닉에 빠졌다. 지금 자신이 숨을 쉬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봄이는 필사적으로 바닥을 더듬어 손에 쥘만한 무기가 있는지 살폈다. 하지만 지금 손에 잡히는 것은 제목 모를 두꺼운 책 한 권뿐이었다. 아까 폭발의 충격으로 선반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봄이는 책을 집어들어 놈에게로 온 힘을 다해 던졌다. 놈은 무언가가 날아오자 재빨리 두 팔을 들어올려 막으려고 했다. 무거운 책의 모서리가 피가 흐르는 놈의 팔뚝을 강타하자 놈은 또다시 고통을 흘렸다.


봄이의 하찮은 저항에 분노한 놈이 더욱 빠르게 다가왔다. 그는 봄이의 얼굴을 걷어찬 다음 순식간에 덮쳐 칼로 찌르려고 했다. 눈을 반밖에 뜨지 못하고 있던 봄이는 가까스로 놈의 손목을 붙잡았다.


봄이는 눈앞의 적과 죽음의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핏빛으로 빛나는 날카로운 칼날이 봄이의 미간 앞에서 부들거렸다. 놈이 엄청난 소리를 내지르며 칼을 봄이의 가슴에 쑤셔넣으려고 했다. 사실 놈의 팔뚝이 건강하기만 했다면 봄이는 이미 성인 남성의 엄청난 완력을 이기지 못하고 칼에 심장이 꿰뚫렸을 것이다.


꽉 아문 봄이의 이빨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손가락이 부러질 것 같았다. 봄이는 손목에 남아있는 힘을 다해 놈이 든 칼의 궤도를 비틀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오른손을 뻗어 놈의 피투성이 팔뚝을 손톱으로 꽉 움켜잡았다. 놈이 짐승 같은 비명을 질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봄이의 주먹이 고통에 몸서리치는 놈의 얼굴에 한 방을 먹였다. 놈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봄이는 놈의 거대한 몸뚱이를 힘껏 밀쳐냈다. 놈이 팔뚝을 움켜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무릎을 절며 일어난 봄이는 놈의 몸 위에 올라타 놈의 얼굴을 후려쳤다. 놈은 두 팔을 휘젓기만 할 뿐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다. 두 번째, 세 번째 공격이 놈의 안면에 직격했다. 그럴 때마다 봄이의 주먹은 점점 피로 물들어갔다.


네 번째 공격을 하려는 봄이의 주먹이 하늘로 치켜들어진 순간, 봄이의 옆구리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통증이 몰려왔다. 봄이는 모든 행동을 멈췄다. 뭐에 당한 거지? 칼에 찔린 느낌 같지는 않았다. 살을 파고 헤집고 들어오는 느낌은 아니었다. 갈비뼈가 산산조각날 정도로 크나큰 충격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갈비뼈 한 개가 부러져 버렸을지도 몰랐다. 봄이는 두 눈을 부릅뜨고 고통에 맞섰지만 정신력으로는 끝내 육체적 고통을 이길 수 없었다. 봄이의 눈앞이 점차 희미해졌다. 허리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여기서 쓰러지면 안 되는데........


봄이는 꼴사납게 놈의 위에 올라탄 그대로 엎어졌다. 다른 놈들 중 하나가 뒤늦게 동료를 구하러 달려온 것이었다. 한 손에 삼단봉을 든 남자가 가까스로 정신만 붙잡은 채 놈의 위에 엎어져 있는 봄이를 끌어냈다. 쓰러져 있던 놈이 코피가 줄줄 흐르는 얼굴을 움켜쥐고 힘겹게 일어나며 말했다.


“건방진 년, 네 년은 이제 편히 죽을 생각........”


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위층에서 총성 두 발이 울렸다. 한 놈이 쓰러졌지만 팔뚝을 다친 남자에게는 빗나갔다. 놈은 재빨리 근처에 있던 탁자 뒤로 몸을 날렸다.


상민과 중년 여성이 계단에서 내려와 그들을 소리쳐 불렀다.


“형, 봄이야, 어디 있어?”


그러나 상민의 목소리는 점차 거세지는 불길에 파묻혀 사라졌다. 불길이 조금만 더 커진다면 이 작은 집은 완전히 삼켜져버릴 것이다.


봄이는 옆구리에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금방이라도 자기를 죽이려던 놈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봄이는 가만히 드러누워 불타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까 전에 보았던 가족사진에 불이 옮겨붙어 있었다. 사진은 온 몸이 불타는데도 아무런 비명도 지르지 않고 조용히 타올랐다. 사진 속의 두 남자아이의 얼굴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곧 환하게 웃고 있는 부부의 얼굴에도 불꽃이 번졌다.


누군가가 불길 속에서 급히 소화기를 뿌리고 있었다. 또다시 총성이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하지만 봄이는 이제 그런 소리에 귀기울이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일어날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상훈은 괜찮을까? 아주머니는? 갑자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그 허세쟁이는? 이름이 뭐였더라? 상, 상 뭐였는데....... 이윽고 봄이의 귓속에서 맴돌던 총성도 점차 희미해져 갔다.


* * *


“봄이야.”


눈앞에 누군가가 있었다. 탄 냄새가 풍겼지만 불꽃 냄새는 나지 않았다. 아까 전과는 다르게 집 안이 꽤나 어두워져 있었다. 봄이는 지금 자기 어깨를 붙들고 흔드는 이 녀석이 누군지 궁금했다. 익숙한 목소리긴 한데, 이름이 뭐였더라?


봄이가 힘겹게 눈꺼풀을 열자 주위가 차츰 밝아졌다. 봄이가 눈을 뜨는 것을 본 상민이 안도하는 표정을 짓더니 누군가를 소리쳐 불렀다.


“어머니, 봄이가 정신을 차렸어.”


봄이는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신을 잃기 전 자신의 모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누군가의 얼굴도 떠올랐다. 지금은 누워있을 때가 아니었다.


봄이는 자신을 붙들고 있는 상민의 손을 뿌리치고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봄이가 일어나려는 순간 혈관이 찢어지고 근육이 뒤틀리는 고통이 옆구리에 엄습했다.


무릎이 꺽인 봄이가 신음을 토하자 상민이 진정시켰다.


“왜 그래, 다쳤어? 어디가 아파?”


봄이가 눈을 찡그린 채 옆구리를 싸쥐자 상민이 알아차렸다.


“움직이지 마. 구급상자를 가져올 테니까 잠깐만 여기에 있어. 금방 돌아올게.”


상민이 그렇게 말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옆구리는 확실히 미칠 듯이 아팠지만 견딜 수 있을 정도였다. 봄이는 이를 악물고 근처 의자를 붙잡고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러나 꼭 확인해야만 했다.


봄이는 옆구리를 움켜쥔 채 다리를 절뚝거리며 상민이 사라진 방향으로 향했다. 분명히 2층으로 간 것 같았다.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갈비뼈 조각이 심장을 찌르는 고통이 느껴졌다. 봄이는 뼈가 제 자리에 붙어있기는 한지 궁금했다. 무엇보다 2층에 올라가려면 계단을 올라야 했다.


겨우 난간을 움켜잡고 2층에 오르자 양초가 가득한 테이블에 앉아있는 두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봄이가 방금 전까지 그토록 찾던 사람이었다.


중년 여성이 상훈의 옆에 앉아 그의 손등에 붕대를 감아주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칼이나 집게 따위의 공구가 놓여 있었다. 그 외에도 핏자국으로 흥건한 거즈가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봄이는 그의 손목에 박힌 총알을 제거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껏 어두운 표정만을 짓고 있던 상훈의 얼굴이 봄이와 마주치자 애써 펴졌다.


“아, 너였구나. 살아 있었네. 난 괜찮아.”


그가 농담조로 말하며 비꼬았다. 봄이는 그가 억지로 무엇인가를 숨기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봄이는 그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미 봄이는 그가 손등에 총을 맞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분명히 지금 봄이의 옆구리보다 더 아프면 아팠지 덜 아프진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왜 자기 앞에서는 애써 괜찮다고 말하는 것일까?


봄이도 전에 억지로 감정을 숨겼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게 언제인지는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누군가의 집에서 나오기 전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 봄이는 혼자 있었나? 누구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은데......


봄이는 옆구리의 아픔도 잊고 상훈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팔은 물론 손가락에까지 흘렀던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그의 손등을 보자 그 때의 충격이 다시 아른거렸지만, 이제야 마음놓고 안도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그 총알이 그의 손목이 아닌 머리를 꿰뚫었다면 그 때도 지금처럼 안도할 수 있었을까?


봄이는 왠지 모르게 또다시 감정이 복받쳤다. 머릿속에서는 한 가지 단어만 계속 맴돌았다. 다행, 다행이었다. 다행이었다. 다행이었다......


“다행이에요.”


“뭐라고?”


이번에는 그가 대답을 해 주었다. 하지만 봄이는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만족하고 있었다.


“지랄들을 해라.”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봄이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심장이 멎을 만큼 놀란 봄이가 뒤를 돌아보자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들 외에도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정신을 차렸나?”


의외로 중년 여성이 무덤덤하게 맞받아쳤다. 그들의 눈앞에는 얼굴이 피떡이 된 남자 하나가 두 팔이 꽁꽁 묶인 채 분하다는 얼굴로 봄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중년 여성이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가자 그가 피 섞인 침을 그녀에게로 내뱉었다.


“가까이 오지 마.”


자세히 보니 놈의 눈동자는 하나밖에 없었다.


“너희가 전부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 나머지 놈들은 어디 있지?”


중년 여성이 질문하자 그가 두 팔에 묶인 밧줄이 거슬린다는 듯 날뛰었다. 이 밧줄만 없었다면 너희 모두를 단숨에 죽여버릴 수도 있다는 듯이.


“그건 알아서 뭐 하려고? 어차피 너희들도 얼마 못 가 죽을 텐데 뭘.”


남자가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거친 숨을 헐떡였다. 놈의 이마와 입술에 땀처럼 맺힌 붉은 핏방울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봄이는 누가 그에게 그런 짓을 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놈이 부러진 이빨을 우물거리며 다시 소리쳤다.


“이 불쌍하고 가증스런 가족들에게 영원한 저주가 있기를.”


놈이 묶인 몸을 마구 흔들어대자 팔뚝에 선명하게 그인 상처에서 피가 솟아올랐다. 놈의 상처를 보자 지나간 일이 떠올랐다.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려는 듯이 타오르는 불꽃, 불꽃을 뚫고 놈에게 달려들어 칼로 찌른 상처...... 분명 봄이가 냈던 상처였다.


“이놈을 어떻게 할까?”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아서 질문은 공중에서 흩어졌다.


“죽여도 상관없긴 하지만 살려둬봤자 아무 쓸모가 없을 것 같군. 우린 네게 궁금한 것도 없고 캐낼 것도 없어. 또 네놈을 붙잡고 있는다고 해서 네 동료들에게 몸값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포로로서는 완전히 실격이야. 그렇다고 죽여 버린다라...... 제네바 협약에서는 붙잡은 포로를 아무 이유없이 죽이는 건 전쟁범죄라고 하는데 지금은 전시상태도 아니고 네놈도 포로는 아니지. 한마디로 네놈은 붙잡혀서까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놈이라는 거야.”


그 말을 들은 외눈박이가 노골적으로 짜증을 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내가 네놈들의 그 구더기가 가득 찬 머리통에 실낱 같은 자비라도 남아 있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나? 애초부터 난 이곳에 다시 돌아올 때부터 이미 죽었다. 이 부질없는 목숨 하나 때문에 추하게 구걸하느니 차라리 깨끗하게 죽겠다. 난 이미 이보다 더한 일도 겪어 봤고, 드디어 이 껍데기만 남은 삶에 종지부를 찍는다고 해도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나를 불지옥에 떨어뜨리든, 아무것도 입히지 않은 채로 추위 속에 던져놓든, 지금 이 자리에서 총으로 쏴 죽이든 마음대로 해 봐.”


놈이 쉬지 않고 열변을 토해냈다. 봄이는 그가 한 말들을 곰곰이 되짚어보았다. 그는 분명히 자신을 죽여도 상관없다고 말했지만, 봄이는 왠지 그가 필사적으로 살려 달라고 비는 것처럼 느껴졌다. 왜일까?


중년 여성이 그의 대답에 흡족해하며 말했다.


“말은 그럴싸하게 하는군. 어차피 우리도 널 살려둘 생각은 없었어.”


놈의 얼굴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방금 전까지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말한 것과는 정반대의 얼굴이었다.


“그래, 네 말대로 이제 네놈을 죽일지 살려둘지에 관한 토론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이젠 네놈을 어떻게 죽이냐 하는 문제야. 어떻게 할까.......”


중년 여성이 여유를 부리자 놈이 얼마 남지 않은 이를 뿌득 갈며 말했다.


“벌레 같은 새끼들. 날 죽이는 게 지금 와서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네놈들도 결국에는 이 지옥같은 세상에 빌붙은 채로 하루하루 연명하는 기생충에 불과해. 이렇게라도 하면 네놈들이 승리한 것 같나? 인간 시대의 끝자락에서, 영원히 지속되는 끝없는 싸움에 의해 전 세계에 남은 마지막 인간마저 쓰러지고 난 후 치켜드는 최후의 주먹이 의미가 있을 것 같아? 내가 죽는 건 상관없지만 너희들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벽에 가로막혀 모든 희망을 잃고 절망하는 꼴을 보지 못한다는 게 피눈물이 날 정도로 안타깝구나. 그렇게까지 살기 위해 발버둥쳐 봤자 무슨 소용이야? 이런 무의미한 투쟁의 끝에 뭐가 있다고 생각해? 살기 위한 투쟁의 끝에 무엇이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너희들이 저기 밖에 나뒹굴고 있는 불쌍한 녀석들의 몸뚱아리와 다른 게 뭐지? 결국 이 무너져가는 세상에 마지막으로 내린 썩은 동아줄을 붙들고 어떻게든 매달려 있으려는 너희들이 바퀴벌레와 다른 게 뭐야?”


놈이 목에 힘줄을 세우며 고함을 질렀다. 중년 여성은 그 모습을 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했다.


“멋대로 지껄여라. 어차피 금방 끝날 테니.”


중년 여성이 핏자국으로 흥건한 탁자에서 칼을 집어들었다. 놈은 방금 전에 늘어놓았던 말도 모조리 잊고 당황해서 소리 질렀다.


“뭘 하려는 거야?”


“네놈의 불알을 잘라서 입에 처넣어 주지.”


중년 여성이 칼을 들고 놈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놈은 움직이지 않는 두 팔을 마구 휘저으며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하지만 놈에게 단단히 묶인 밧줄이 걸려 있어서 불가능했다. 놈은 갑자기 비굴하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새끼들....... 너희들은 인간도 아니야. 차라리 한 발로 단숨에 죽여 줘........”


“왜, 농담 같나?”


중년 여성이 놈의 가랑이에 칼을 들이댔다. 놈이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고 움직이지 않는 어깨를 마구 들썩이며 경련을 일으켰다. 봄이는 그 광경을 입조차 다물지 못한 채로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봄이의 눈에 비친 두 사람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놈은 끝내 울음까지 터뜨렸다. 놈의 눈동자는 이미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핏기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놈은 이성마저 잃은 채 도무지 사람이 내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기괴한 고성을 질러댔다. 놈의 축축해진 가랑이에서 지린내가 풍겼다. 중년 여성이 그의 바짓자락에서 칼을 거두고 나서도 놈의 울부짖음은 멈추지 않았다. 놈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한 가지 말만을 되풀이했다. 처음에는 비명에 섞여서인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듣자 봄이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죽고 싶지 않아.’


이윽고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던 그는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완전히 졸도해 버렸다. 놈의 거칠고 불규칙적이던 숨소리가 겨우 잦아들고 안정을 되찾았다. 놈이 입을 다물자 온 세상이 조용해졌다. 다 깨져버린 유리창 너머에서 찬바람이 불어왔고, 불어온 바람 소리는 고스란히 봄이의 귓전에서 울렸다. 창밖에서 바람과 함께 스며든 어둠이 탁자 위에 놓여있던 촛불 한 개를 꺼뜨렸다.


봄이는 초라하게 나자빠져 있는 외눈박이 남자를 처량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도저히 아까 전까지만 해도 목숨을 걸고 칼을 마주한 상대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손목에 단단히 묶인 밧줄을 끊어버릴 듯이 움켜잡고 있던 놈의 손아귀에서 힘이 완전히 빠져나간 것이 보였다.


“죽일 가치도 없는 놈이었어.”


봄이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하지만 봄이에게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 녀석을 어쩌면 좋지?”


어느새 지켜보고 있던 상민이 물었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길바닥에 누워있는 놈들의 동료 곁으로 내다 버려. 그거면 충분해.”


중년 여성이 그렇게 대답하고는 몸을 홱 돌려버렸다.


봄이는 불꽃이 완전히 사그라든 바깥 세상을 창밖으로 내다보았다. 멀쩡한 창문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시렸다. 바람 소리와 함께 앙상하게 깨진 창틀이 너덜거리며 휘날리는 소리만 들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 지평선 너머에 걸린 빛이 보였다. 그 빛은 지평선을 따라 늘어선 얼음 건물들 주변에서부터 밝아지더니 한 점도 없어 보였던 구름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지옥같았던 지난 날의 기나긴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동이 트고 있었다.



< 8. 작은 집 전투 > 마침.


작가의말

감사합니당.

이 작품은 어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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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111화 21.01.25 34 0 12쪽
113 110화 21.01.20 54 0 12쪽
112 109화 21.01.15 29 0 11쪽
111 11. 끝나지 않는 밤 21.01.11 49 0 13쪽
110 107화 21.01.08 35 0 12쪽
109 106화 21.01.06 125 1 11쪽
108 105화 21.01.05 33 1 12쪽
107 104화 21.01.03 66 1 13쪽
106 103화 20.12.21 47 0 9쪽
105 102화 20.12.20 28 0 16쪽
104 101화 20.12.16 64 1 12쪽
103 100화 20.12.11 30 0 13쪽
102 99화 20.12.08 39 0 12쪽
101 10. 종착점 20.12.07 38 0 11쪽
100 97화 20.12.02 58 0 13쪽
99 96화 20.11.29 68 0 11쪽
98 95화 20.11.28 30 0 14쪽
97 95화 20.11.23 41 0 13쪽
96 94화 20.11.20 41 1 9쪽
95 94화 20.11.19 63 1 9쪽
94 93화 20.11.17 71 0 13쪽
93 92화 19.11.27 58 0 9쪽
92 91화 19.11.24 57 0 17쪽
» 90화 19.11.23 51 0 26쪽
90 89화 19.11.19 55 0 18쪽
89 88화 19.11.17 53 0 17쪽
88 87화 19.11.16 88 0 19쪽
87 86화 19.11.15 58 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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