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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116 회
조회수 :
14,526
추천수 :
182
글자수 :
530,484

작성
18.04.23 03:37
조회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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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8쪽

62화

DUMMY

봄이는 눈을 감은 채로 모든 생각을 비우고 온 몸으로 느껴지는 감촉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하지만 너무 깊은 감각을 집중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서인지, 그녀는 등 뒤에서 접근하는 그림자를 알아채지 못했다.


누군가가 봄이의 등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벤치에 등을 기댄 채로 무방비하게 앉아있던 봄이는 예상하지 못한 위협에 화들짝 놀라 휘청거렸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비명을 지를 뻔 했지만 그 찰나의 시간동안 최고조에 달했던 긴장감은 봄이의 목청마저도 꽉 조여버렸다. 그녀가 죽을 각오를 하고 등 뒤를 돌아보고 나서야 그 각오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것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상훈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얼음 벤치의 뒤를 돌아 봄이의 옆에 풀썩 앉았다.


“무슨 생각해?”


봄이는 자신의 옆에 아무런 거리낌없이 앉아있는 상훈을 보고 기겁했다. 그렇지만 딱히 일어서서 피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녀는 왠지 자신을 놀라게 한 상훈에게 화가 나기보다는 자신을 놀라게 한 사람이 상훈이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먼저 느꼈다. 그런 묘한 느낌이 들자 봄이는 누군가가 자신의 머릿속을 조작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봄이가 대답하지 않자 상훈이 건넨 말은 목적지를 잃고 흩어져 버렸다. 상훈 역시도 특별히 대답을 재촉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잠깐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앉아만 있었다. 어딘지 모를 어색함이 감돌았다. 다행히도 벤치가 넓었기 때문에 지금 상황이 영 불편했던 봄이는 상훈에게서 조금 더 떨어져 앉을 수 있었다.


봄이는 무릎을 벤치 위로 올려 끌어안았다. 그 순간만큼은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만 생각할 수가 있었다. 봄이는 그렇게 혼자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것을 즐겼다. 그리고 이런 심적 여유는 때때로 그녀에게 도움이 되었다. 그녀가 다른 사람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냉담해질 수 있게 도움을 주었고, 그녀가 스스로 세운 철저한 개인주의적 성향을 유지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봄이의 이러한 꽉 막힌 심리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혐오하기도 했지만, 그녀 자신에게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수단이었다.


참다 못한 봄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왜 나오셨어요. 추운데.”


상훈은 마치 봄이의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던 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냥 뭐, 바람도 쐴 겸.”


봄이에게는 상훈의 말이 어딘가 얼버무리는 것처럼 들렸다. 봄이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눈썹을 약간 찌푸렸다.


“나 때문에 나온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상훈이 대답을 끝마치자 또 다시 그들의 소통은 끊겨버렸다. 봄이가 이번에는 끈질기게 입을 열지 않자 상훈이 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혹시 말이야, 봄아. 만약에 내일 가족들 소식을 듣게 된다면 어떨 것 같아?”


상훈이 간단하게 던진 그 짧은 한 마디가 봄이의 가슴 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아직 미처 아물지 못한 상처를 찌르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가족들에 대해서는 고민이 산더미만큼 쌓여 있었다. 봄이는 카메라 필름 끊기듯 홀연히 사라져버린 가족들의 흔적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 흩어지듯 조각나 버린 이 옅은 기억의 조각들을 끼워맞추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봄이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긴요. 무진장 반갑겠죠. 너무 반가워서 심장이 멎어버리면 어쩐다.”


봄이는 그렇게 말하며 무릎을 꿈틀거렸다.


“궁금한데 네 가족 이야기나 좀 해 봐. 가족들과 함께 보낸 추억이라던가,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이라던가. 그런 거 있잖아.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도 기억하려고 최대한 노력해 봐.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거야?”


봄이는 상훈의 말을 끝까지 다 듣고 있다가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입술에서 스며나온 입김이 그녀의 시야를 가릴 정도로 퍼졌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아저씨가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몰라도 나한테서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기대하고 계신다면 아쉽지만 포기해요. 다른 사람 비위나 맞춰주고 있는 데에는 소질 없으니까.”


“그런 게 아니야.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면서? 그러니까 한번 떠올려보자는 거야. 어렸을 때 함께 살았다면서? 그렇다면 분명히 어딘가에 기억이 남아있을 거야. 네 의식 저편에서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숨어있을 지도 몰라. 어쩌면 그 기억이 네 머릿속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옮겨갔을 수도 있지만, 그걸 떠올릴 수 있는 녀석은 너밖에 없어. 나도 아니고, 그 영감도 아니지. 오직 너 뿐이라는 소리야. 안 그래?”


봄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내려다보자 구멍 난 검은 방한용 스타킹 틈새로 삐져나온 무릎이 보였다.


“그래요, 이런 건 나밖에 기억 못하겠죠. 그런데 그거 알아요? 난 솔직히 가족이란 게 뭔지도 모르겠어요. 뭔지도 모르겠는데, 가끔씩 나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칠 때도 있고, 눈물이 날 때도 있어요. 나는 내 몸이 왜 이러는지도 몰라요. 그런데도 그 일만 생각하면..... 머릿속이 뒤엉키는 것만 같아요. 참 바보 같죠? 자신이 찾고 있는 가족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면서 아무런 계획 없이 찾아 나서는 꼴이라니. 물론 아저씨는 이러는 날 이해 못 하겠죠. 아저씨의 곁에는 늘 누군가가 있었을 테니까.”


봄이는 말을 잇다가 또 다시 울컥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재빨리 그 감정을 털어 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방금 했던 말들을 곱씹어보다가 ‘그 일’ 이란 게 거슬렸다. 잠깐,‘그 일’ 이란 게 뭐였지?


봄이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상훈이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가족이 뭔지 모르겠다는 말이지?”


봄이는 강한 긍정을 표현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렇다면 네 삼촌이란 분은 어떤 분이셨어?”


상훈의 말이 끝나자마자 봄이가 대답했다.


“그걸 말이라고 해요? 그야 당연히 삼촌은 내 하나밖에 없었던 보호자예요. 유일하게 날 이해해주는 사람이었고, 내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어요. 부모님이 무슨 이유에서였는지는 몰라도 자신에게 맡겨진 나를 돌봐 주셨던 단 하나뿐인 사람이었다구요. 더 이상.......”


봄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훈이 입을 열었다.


“잘 알고 있네. 그런 게 가족이야.”


봄이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모든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상훈이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머지는 다음에 얘기하자. 너도 내일 소식 확인하려면 일찍 자두도록 해. 저번처럼 늦잠 잤다가는 그냥 놔두고 갈 거야.”


상훈이 그렇게 말하고는 벤치를 지나 어디론가로 걸어갔다. 봄이는 돌아가는 상훈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는 목구멍으로 계속해서 침이 넘어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상훈의 모습이 더 멀어지기 전에 그녀는 그의 등 뒤에다 대고 말했다.


“아저씨.”


상훈이 발걸음을 멈추고 봄이를 돌아보았다.


“그럼 아저씨는..... 내가 가족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사실 봄이도 자신이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말투는 어딘가 기대가 실려 있었고, 어딘가 아련하기도 했다.


“글쎄, 조금 아쉬울지도.”


상훈은 짧게 대답하고 나서 다시 어디론가 향했다.


작가의말

후후후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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