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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1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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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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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글자수 :
530,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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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9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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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89화

DUMMY

봄이의 몸 속에 흐르던 모든 피가 얼어붙었다. 뇌가 윙윙거리고 내장이 뒤틀렸다. 심장 뛰는 소리가 총소리보다 더 커졌다. 어둠 속 패거리들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재빨리 등을 돌려 달아나야 했지만 봄이의 머리 속에서는 침착함을 잃지 말라고 누군가가 소리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등을 보이고 도망친다면 곧바로 그들은 뒤쫓아올 것이다. 그리고 얼마 못 가 따라잡힐 것이다.


봄이는 잘 보이는 않는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쳤다. 그러자 그들 중 하나가 봄이에게 빛을 비췄다. 봄이가 손등으로 눈을 가리자 또 다른 누군가가 소리쳤다.


“여자애다.”


“그 녀석들이다.”


두 번째 목소리는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패거리들이 봄이에게 달려들었다. 권총을 겨눌 생각도 하지 못한 봄이는 그제서야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봄이는 또다시 운명의 숨통을 짓누르는 지긋지긋한 죽음의 경주를 시작했다. 그때와 같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앞이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봄이의 다리는 그다지 빠르게 움직이지 못했다.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낭떠러지에 발을 헛디디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손을 휘저어도 손아귀에는 어둠만이 잡힐 뿐이었다. 덕분에 봄이는 다섯 걸음도 가지 못해 넘어졌고, 어떤 보이지 않는 강철 같은 물체에 어깨를 부딪히기도 했다. 머리를 부딪혔다면 그 자리에 쓰러져 즉사했을 것만 같은 고통이 봄이의 이빨 사이로 새어나왔다. 어깨를 움켜쥔 채 이를 악물고 힘겹게 다리를 옮기는 봄이에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봄이는 자신이 지나온 길을 기억하지 못했다. 작은 집은 보이지 않았다. 온통 새까만 어둠뿐이었다. 봄이의 눈동자에는 어둠 속을 투시하는 능력이 없었다. 회중전등도 없었다. 자신이 나아가는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진 것인지조차 몰랐다. 방금 지나온 길일 수도 있었고, 어쩌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길일 수도 있었다.


봄이는 밟히는 대로 무작정 나아갔다. 무엇인가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바로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채로 계속해서 달렸다. 막다른 길에 가로막힐 때까지 달렸다. 그러면서도 봄이는 절대로 자신이 막다른 길로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몇 분 동안이나 정신없이 달린 봄이의 체력이 한계에 다다랐다. 폐가 필요로 하는 산소량은 그녀가 아무리 쉬지 않고 호흡한다고 해도 턱없이 모자랐다. 봄이의 등 뒤에서 외치는 고함이 점점 크게 들려왔다. 그러나 봄이에게는 더 이상 뒤를 돌아볼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한 발의 총성이 어둠 속을 꿰뚫었다. 고막을 찢는 총성과 함께 패거리가 들고 있던 횃불 바로 근처에 있던 한 남자가 픽 쓰러졌다. 그렇잖아도 체력이 한계에 달한 채 긴장감에 흠뻑 젖어있던 봄이는 총성을 듣자마자 다리가 풀려 그대로 눈밭 위를 굴렀다.


횃불을 뒤따르던 패거리들 중 총을 든 한 명이 총성이 들린 방향을 향해 몇 발을 쏘았다. 그러자 잠시 잠잠해졌다가 다시 한 발의 총성이 안개를 갈랐다. 이번에도 횃불 근처의 한 명이 단말마를 지르며 주저앉았다. 낌새를 알아채고 나서 놈들이 소리쳤다.


“불빛에 노출된 사람만 공격하고 있다.”


“불을 끈다. 횃불도 버려. 빛 근처로 가지 마.”


이윽고 봄이를 뒤따르던 불빛들이 모두 사라졌다. 정신없이 굴러 흙탕물을 잔뜩 삼킨 봄이가 기침을 하며 일어서려고 했다. 추위에 언 손가락을 움직여 몸을 일으키려 하는 순간 흐릿한 누군가가 다가와 봄이의 손을 덥석 잡아챘다. 놀란 봄이가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곧 그럴 필요는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쉿, 쉿. 괜찮아. 조용히 해. 나야.”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상민의 목소리였다. 그는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말하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나서 일어서질 못하고 있는 봄이의 어깨를 들쳐맸다. 봄이는 순순히 어깨를 내주었다.


“우릴 쫓아오던 불빛들이 사라졌어.”


상민이 부축하자 봄이가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어디에서 쏜 거지? 어디에서 쏜 건지 봤어?”


봄이가 숨을 제대로 고르지도 못한 채 헐떡거리며 물었지만, 상민은 대답하지 않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봄이의 입을 조용히 막았다.


그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조용히 해. 놈들이 아직 여기에 있어.”


그 말에 봄이는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질퍽한 눈더미 속에 반쯤 처박힌 채 꺼져가는 횃불 몇 개가 질식할 것만 같은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가끔 불빛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곧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멀리서부터 울려퍼지던 총성도 자취를 감추었고, 놈들 역시 보이지 않는 저격자를 향해 쓸데없이 탄약을 낭비하지 않았다.


봄이의 눈동자가 서서히 어둠에 적응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적어도 바로 발밑까지는 회중전등이 없어도 나름대로 보였다. 그만큼 봄이의 걸음걸이 역시 아까보다는 훨씬 빨라졌다. 하지만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바스락거리는 사람 발소리가 어디선가 들리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재킷이 바람에 휘날리는 소리도 들렸고, 두런거리는 말소리도 들렸다. 봄이는 그런 소리들이 귀에 들어올 때마다 무작정 그것들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애썼다.


봄이와 상민은 꼼짝없이 거리 한 바퀴를 빙 돌았다. 어둠 속에서 작은 집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짐작이 가는 길은 거의 막다른 길이었고, 우회하려고 하면 놈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면 두 사람은 별 수 없이 피해가야만 했다.


그 순간 번개같은 총성이 다시 한 번 허공에 울려퍼졌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온 감각을 집중했다. 분명히 어떤 곳에서 들렸는데 봄이는 보지 못했다. 이 쪽인가? 아니, 저 쪽인가?


봄이가 두 눈을 부릅뜨고 둘러보는 동안에 세 번의 총성이 더 울렸다. 그제서야 봄이는 총성의 진원지를 눈치챌 수 있었다. 어둠 속에 완전히 파묻힌 조그마한 집 한 채가 총성과 동시에 세 번 번쩍였기 때문이었다. 봄이는 드디어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돌아갈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봄이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상민을 잡아끌고 어둠 속 거리를 가로질러 달렸다. 코앞에 무엇이 가로막고 있는지조차 몰랐지만 무작정 번쩍거리는 작은 집을 향해 달렸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패거리들이 모인 거리를 가로지르자 봄이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절대로 멈추지는 않았다.


이윽고 익숙한 시멘트 담벽이 눈앞에 나타났다. 붉은 스프레이가 정신없이 칠해진 담벽이었다. 봄이는 있는 힘을 다해 담벽 위로 뛰어올랐다.


봄이는 담을 넘기는 했지만 착지할 때 실수로 발을 헛디뎌 꼴사납게 현관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몇 번이나 정신없이 구르고 나서야 봄이는 그대로 드러누워 지금껏 참아온 숨을 천천히 고를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상민도 담을 뛰어넘어 들어왔다.


봄이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작은 집의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젠장, 무사했구나. 다친 덴 없어?”


상훈이 달려나와 그들을 부축했다. 제대로 찾아오기는 한 모양이었다.


“놈들도 총성을 들었으니 곧 놈들이 들이닥칠 거야. 얼른 안으로 들어가서 2층으로 올라가. 분명히 도움이 필요할 거야.”


그렇게 말하며 상훈이 그들의 등을 떠밀었다. 그는 모두가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 나서 현관문을 걸어잠갔다.


봄이는 재빨리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2층으로 향하는 문은 열려 있었다. 봄이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수없이 놓여 있던 불 붙은 양초들은 거의 모두 꺼져 있었다. 창가에는 엽총을 겨눈 채로 창밖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중년 여성이 서 있었다. 바닥에는 아직도 열기가 식지 않은 빈 탄피 몇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엽총을 들고 있던 중년 여성이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로 말했다.


“늦었구나.”


봄이는 그녀의 말 한 마디에 상당한 중압감을 느꼈다. 누군가가 봄이의 귀에다 대고 이 모든 게 전부 자신이 초래한 결과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서서히 자신을 잃어가던 봄이는 이런 생각들을 재빨리 고개를 흔들어 떨쳐버렸다.


중년 여성이 엽총의 노리쇠를 잡아당기며 나지막이 말했다.


“준비해. 아직 끝난 게 아니야.”


* * *


상민이 메고 있던 가방을 벗는 사이 상훈이 2층으로 뒤따라 올라왔다. 그는 상민에게 괜찮느냐고 다시 한 번 묻고 나서 아직 숨을 고르고 있는 봄이에게 말했다.


“그리고 너, 너는 좀 이따가 보자.”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하는 봄이를 뒤로하고 그가 창가로 다가갔다.


“움직임이 보여?”


중년 여성이 여전히 총구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아니, 놈들이 기척을 완전히 숨겼어. 바람이 완전히 그쳐 버렸는데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분명히 이곳 위치는 노출됐을 텐데......”


중년 여성은 총대를 잠시 내리고 코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봄이는 처음으로 그녀가 긴장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안 좋은 예감이 들어. 잠깐 뒤편을 살펴보고 오는 게 좋겠어.”


그녀가 딱히 눈짓을 보내지 않았는데도 상민이 근처 탁자에 놓인 양초를 한 개 집어들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봄이는 조용히 창가에 기대고 앉아있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미칠 지경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가서 놈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상황을 보고 싶었다. 긴장감이 머릿속을 쥐고 흔들었다. 그 때문인지 봄이는 놈들이 탐색을 포기하고 모두 돌아간 건 아닌가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순간 바깥에서 총성이 울려퍼졌다. 그와 동시에 창문이 깨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창문에 덧대어진 나무 판자 하나가 산산이 조각났다. 봄이가 갑자기 시작된 공격에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누군가가 봄이의 머리를 강제로 꽉 눌러 숙였다.


두 번째 총성은 봄이의 머리 위에 있던 창문을 꿰뚫었다. 날카로운 유리조각들이 엎드린 봄이의 등 위로 무수히 쏟아졌다. 봄이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지금껏 끓어오르다가 한순간에 터져버린 긴장감이 봄이의 무의식 속 의지를 순식간에 엄청난 공포로 바꿔놓았다. 연이은 총성과 정신없이 창문이 깨지는 소리에 봄이는 바닥이 꺼져라 엎드린 채로 눈조차 뜨지 못했다.


바로 옆에서 사람들이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봄이는 두 귀를 모두 틀어막아 버렸다. 그 상태로 봄이는 마구 소리를 질렀다. 권총은 꺼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공기마저 꿰뚫는 쇳조각이 날아다니고 죽음의 메아리가 빗발치는 상황에서 이 가엾은 소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봄이는 두 눈과 귀를 틀어막고 꼼짝없이 살려달라고 빌었다. 빌고 빌고 또 빌었다. 질끈 감았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봄이는 방금 전까지 정신을 잃고 소리치던 게 공포에 사로잡혀 울부짖는 소리였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이젠 싫었다. 차라리 그냥 죽어버리고 싶었다. 지금이라도 모든 저항을 포기한 채 두 손을 들어올리고 바깥으로 천천히 걸어나가면 그들이 자비를 베풀지 않을까 하는 역겨운 희망감이 치솟았다. 차라리 제 발로 그들에게 붙잡혀 강간당하는 쪽이 더 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봄이는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 총성이 제발 그쳐 주기만을 바라는 터무니없는 기대감을 품으며 웅크리고 있었다. 지금 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누군가가 봄이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하지만 봄이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역겨운 벌레가 꿈틀거리고 귀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정신 차려!”


누군가가 크게 소리치며 봄이의 어깨를 움켜잡자 그제서야 봄이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봄이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창문은 거의 다 깨져 있었고, 바닥에는 유리조각과 나무 판자 쪼가리가 흥건했다. 바깥을 향해 엽총을 몇 발 쏘고는 재빨리 벽면으로 몸을 피하는 중년 여성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어깨에서 검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놀란 봄이가 재빨리 팔을 휘저으려다 고꾸라졌다. 상훈은 그런 봄이를 붙잡고 창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내던졌다. 봄이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아주머니, 아주머니가.......”


중년 여성이 눈치챘는지 봄이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별 것 아니라는 얼굴로 태연하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괜찮아, 스친 거야.”


어느새 총성을 듣고 달려온 상민이 쏜살같이 응급처치 도구를 가져왔지만 중년 여성은 괜찮다고 말하며 치료를 거부했다. 창가를 향한 총성이 그칠 줄 모르자 그녀가 한탄했다.


“개새끼들, 멈출 줄을 모르는구만. 아예 머리를 못 들게 하려는 속셈이야. 화력이 더 필요하겠어.”


“총을 가진 녀석은 한 명뿐이야. 자동소총 같은데, 어디서 저런 걸 구한 거지?”


“몰로토프를 던져. 될 수 있는 한 멀리.”


중년 여성이 그 말을 꺼내기도 전에 상훈은 이미 촛불로 화염병 거즈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양초의 촛불이 약해서 불이 붙기까지는 아주 오래 걸렸다. 이윽고 거즈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자 상훈은 불붙은 화염병을 한 바퀴 돌린 다음 창밖으로 내던졌다.


쨍그랑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바깥에서 불길이 피어올랐다. 어둠이 잠식하고 있던 대지는 그제서야 날름거리며 알코올을 따라 퍼지는 선홍빛 불길과 함께 차츰 밝아졌다. 예상치 못한 그들의 반격에 놈들이 우왕좌왕하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중년 여성이 재빨리 놈들 중 하나를 쏘아 거꾸러뜨렸다.


화염병 두 개가 더 날아갔다. 거대하고 위대한 불꽃의 장벽이 작은 집 담벽을 중심으로 마치 경계선처럼 화르르 타올랐다. 그러자 놈들은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고 총만 쏘아댔다. 중년 여성의 옆에서 남아있는 총알을 세던 상민이 불안한 얼굴로 소리쳤다.


“총알이 몇 발 안 남았어. 남은 총알은 어디에 있어?”


그가 중년 여성을 돌아보며 말하자 그녀가 대답했다.


“공구 상자에 있어. 그게 아마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봄이는 그들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침착하고 냉정하게 행동했고, 주위를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깟 총소리 때문에, 아가리를 떡 벌린 죽음의 세계의 입구에 발을 들이자마자 기겁하며 울고불면서 도망치려고만 했던 봄이와는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절대로 물러서면 안 된다는 강한 의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봄이와는 다르게, 그들의 눈빛에는 자포자기의 심정이나 두려움에 의한 굴복 같은 심정은 일체 존재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한 채로 버려진 봄이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었던 그들이 지금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위협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깟 죽음이 무서워서 무엇 하나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꼴사납게 주저앉아 울고만 있었나? 지금 그들이 봄이의 멍청하고 무능력한 행동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된다면, 자신을 진심으로 감싸주고 아껴 줄 사람은 이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왜 모르고 있는가?


주저앉아 있던 봄이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일어섰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지만 이를 악물었다. 그들이 설사 이 작은 집에서 최후를 맞는다고 해도, 그들 가족들의 눈동자에 비친 봄이의 마지막 모습마저 은혜를 저버린 채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울기만 하는 겁쟁이로 낙인찍히고 싶지는 않았다.


공구 상자라...... 전에 누군가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분명히 그 때 중년 여성이 했던 말이었다. 누군가에게 2층에 있던 공구 상자를 1층으로 가져오라고......1층으로.....1층........


상민이 일어서기도 전에 봄이가 먼저 양초 하나를 움켜쥐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1층에서도 총성은 여전히 울려퍼지고 있었다. 너무 다급하게 서두르는 바람에 손에 쥔 양초의 촛농이 봄이의 손목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손가락이 말 그대로 녹아내리는 고통에도 봄이는 양초를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한참을 뒤진 끝에 공구 상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공구 상자는 현관문 바로 앞에 놓여 있었다. 봄이는 상자가 열려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무거운 공구 상자를 온 힘을 다해 질질 끌고 2층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그 순간 봄이의 발이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에 걸려 넘어졌다. 들고 있던 양초가 바닥으로 떨어져 꺼져버리고 열려 있던 공구 상자가 엎어져 내용물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봄이는 또다시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흩어진 내용물 중에는 총알이 땡강거리며 굴러가는 소리도 들렸다. 봄이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총알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손아귀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봄이는 자신의 처지를 욕하고 원망했다. 그들 가족에게 절대로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음에도 제대로 도움조차 주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나도 애석하고 무능하게만 느껴졌다. 봄이는 볼품없이 엎어진 채로 어둠 속을 더듬으며 끝없이 자신을 되뇌었다.


나는 겁쟁이가 아니야.


그 순간 어떤 요란한 소리가 또 다시 울려퍼졌다. 하지만 그것은 처음 듣는 소리였다. 무엇인가가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였다. 그리고 봄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듣기 싫었던 소리이기도 했다.


대문에 매달아놓았던 경보 장치가 작동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2층에서 누군가가 다급하게 외쳤다.


“놈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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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103화 20.12.21 47 0 9쪽
105 102화 20.12.20 28 0 16쪽
104 101화 20.12.16 64 1 12쪽
103 100화 20.12.11 30 0 13쪽
102 99화 20.12.08 39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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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97화 20.12.02 59 0 13쪽
99 96화 20.11.29 68 0 11쪽
98 95화 20.11.28 30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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