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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1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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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글자수 :
530,484

작성
21.01.0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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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104화

DUMMY

잠시 후 망토 소년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잔 세 개를 들고 돌아왔다. 잔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풍겼다. 봄이는 너무나도 오랜만에 맡아보는 이 향기에 중독되어 영영 이대로 있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염치없지만 뭐라도 보답을 해야만 할 것 같아서. 물론 정수제를 띄운 더러운 물을 펄펄 끓인 인스턴트 커피 몇 잔으로 이 빚을 모두 갚을 순 없겠지만.”


그러나 종민은 커피를 준혁에게 돌려주었다. 준혁이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왜 그래, 의심하는 거야? 내가 먼저 한 모금 마셔보면 믿어주겠어?”


“꼬마, 대접을 할 셈이면 제대로 해야지. 이런 싸구려를 마셨다간 속만 버려.”


“무슨 말인지 알겠군.”


준혁이 다시 망토 소년을 불러 뭐라고 속삭이자 그가 다시 밖으로 나갔다.


“아무리 말해도 부족하지만 정말 모두 갚지 못할 정도로 큰 빚을 졌어. 여기에 있는 동안 필요한 건 뭐든지 이야기해. 이제부터 당신들이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 우리 모두가 전폭적으로 지원할게. 이곳 책임자로서 우호관계를 제안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현명한 판단이로군. 하수도 깊숙한 곳에 틀어박혀서 병정놀이나 하는 꼬맹이들 치고는.”


종민의 비아냥에도 준혁은 웃고만 있었다.


얼마 뒤 망토 소년이 큰 술병을 가져오고 난 후에야 그들은 다같이 한잔했다. 봄이와 은지는 사양하고 정수제 커피를 마셨다. 모래가 씹히는 뜨거운 수돗물에 녹말을 탄 커피 맛이었다. 첫맛은 그다지 좋지 않아서 내뱉을 뻔 했으나 그런대로 마실 만했다. 준혁이 남은 커피를 망토 소년에게 주자 소년은 어쩔 줄 몰라하며 기뻐했다.


“오래되긴 했지만 그런 점이 오히려 좋다는 거야. 탐색조들이 나가서 구해오는 깨끗한 물이나 모래 섞인 음료수는 얼마 못 가서 모조리 상해버려. 특히나 식량같은 건 구해온다고 해도 얼마나 오래 지난 물건인지 모르기 때문에 혹여라도 잘못 먹었다간 큰일나지. 반면에 주류는 그런 게 없어. 물처럼 잘 상하지도 않고,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숙성돼서 오래 보관하기도 좋지. 그럼에도 알콜 도수가 낮은 것들은 해당사항이 아냐. 금방 상해버리고 말지.”


준혁이 말을 끊고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이를테면 예전 세상에서 빼놓을 수 없었던 서민의 술 같은 것들 말이지.”


“뭘 모르는군. 나 때까지만 해도 보드카나 와인 같은 것들은 잘만 마셨어. 혹시라도 우리가.......”


봄이는 토할 것 같은 기운을 간신히 억누르고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하수도 통로에는 불이 켜진 촛불의 개수가 생각보자 많지 않았다. 푸른 전등이 통로 곳곳마다 빛나고 있었고, 그 주변에는 항상 아이들이 모여있었다. 얼마 들어오지도 않는 산소를 빨아들이는 촛불보다 인공적인 푸른 빛이 더 유용하다고 판단한 것일까? 그것보다 이 푸른 전등에는 어떻게 빛이 들어오는 것일까?


봄이의 속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준혁이 말했다.


“처음에 여길 은신처로 삼자고 제안한 건 나였어. 그때는 날 포함해서 세 명뿐이었지. 우리가 여길 처음 들어왔을 땐 빛이 전부 꺼져 있었는데, 다른 한 녀석이 지하 배수구 통로 맨 안쪽에 숨겨진 발전기를 찾아냈어. 상태가 최소 몇 년은 방치된 것 같았어. 도관이 녹슨 건 기본이고 전기 회로조차 거미줄과 먼지에 이리저리 얽혀 전력이 돌아가기만 하면 폭발할 지경이었지. 그런데도 어떻게 건드려서 전력을 돌리는 데에 성공했어. 우리들은 기껏해야 중학생인데다 전기 기술관련 지식은 눈곱만큼도 없었는데도 말이지. 지금 생각하면 그 녀석들이 대단한 거였어. 지금은 초창기 구성원은 나밖에 남지 않았지만.”


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망토 소년도 고개를 돌리고 후드를 푹 눌러썼다.


“예전에, 식인종들과의 싸움에서 총을 맞고 죽은 동생이 있었어. 그 녀석이 나보고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을 직접 쳐다본 적이 있냐고 묻길래 없다고 했지. 그랬더니 자신은 본 적이 있다는 거야. 온통 망막을 손상시키는 반사광 때문에 항상 시력을 조심해야 하는 하얀 세계에서 직접적으로 눈에 자외선을 쬐려고 하다니, 터무니없이 멍청한 짓이지. 그런데도 그 녀석은 그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고 했어.


뭐라고 해야 하나...... 녀석은 지상에서 해야 할 일들을 모두 잊어버리곤 눈이 아플 정도로 태양을 쳐다봤다고 했어.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도, 눈에서 피가 흐를 때까지도 태양을 올려다보는 걸 그만두지 않았어. 내가 크게 꾸짖어도 마냥 즐거운 듯이 싱글벙글 웃기만 했지. 아무리 다그쳐도 말을 듣지 않았어. 그리고 녀석은 내게 혼날 것을 알면서도 늘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지. ‘형, 오늘도 하늘을 봤어. 어제보다 더 맑아서 구름까지 다 보였어.’ 참 이상한 녀석이지? 지하에 있었을 때 전등의 푸른 빛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녀석이었는데.”


준혁이 한없이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누군가가 포대를 걷어올리고 들어와 망토 소년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하더니 망토 소년을 데리고 함께 밖으로 나가버렸다.


“최근 들어 푸른 전등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을 때가 있어. 그럴 때마다 ‘이 발전기는 이제부터 얼마나 더 갈 수 있을까’ 란 생각이 들어. 언젠가 이 곳도 전력이 바닥나고 어둠 속에 묻히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난 혼자서 이 스무 명이 넘는 아이들을 데리고 지상으로 올라가야만 해. 이곳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 나서야만 하지. 이 많은 아이들을 데리고 가려면 물자도 필요하고, 더 많은 것들이 필요해. 지금 우리가 가진 것만으로는 택도 없어. 여기 있는 모든 녀석들이 나만을 믿고 있을 텐데.......”


가만히 듣고 있던 봄이가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네 부모님은 어디 있어?”


“무슨 부모님? 그런 사람 없이 지낸 지 오래됐어.”


준혁이 얼굴을 찡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망토 소년이 다급하게 돌아와 부르자 준혁이 마지못해 일어났다.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뭐 필요한 거라도 있어? 가져다 줄게.”


봄이는 갑자기 아까 전에 자신을 겨누었던 꼬마들의 자동소총이 떠올랐다. 그리고 일전에 들었던 폭력시위의 대혼란 틈에 이 지역 자체가 불법무기 암시장으로 이용됐었다는 종민의 이야기도 떠올랐다. 이 아이들이 태연하게 총기를 소지하고 다니는 것도 분명히 그 이유에서일 것이다. 어쩌면.......


“혹시 가지고 있다면, 이 권총의 탄환을 좀 나눠줄 수 있어?”


봄이가 치마폭에서 권총을 뽑아 준혁에게 내밀었다. 그는 권총을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말했다.


“38구경이라, 확인해 볼게. 더 필요한 건 없어?”


준혁이 포대를 열어젖히고 나가자 잠들었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눈을 떴다. 그러나 아이들은 바로 앞에 앉은 은지가 자신들을 정성껏 간호하고 돌봐주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은지는 마냥 행복한 듯이 웃어보였다.


“정말 의젓하고 믿음직한 아이들이에요.”


봄이는 기운을 차리고 서로 이야기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은지의 눈빛을 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희망에 찬 듯 바라보는 무언가의 감정이 어려 있었고, 입술은 기쁜 것처럼 올라가 살짝 미소짓고 있었다. 자신들이 해야만 하는 일을 했다고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봄이는 이러한 은지의 확고한 사명에 존경심을 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심스러울 정도로 번지는 의구심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언니, 예전부터 궁금했었는데요. 언제부터....... 이런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도와줘야겠다고 마음먹은 건가요?”


봄이가 묻자 은지의 눈에서 타오르던 희망의 횃불이 순식간에 꺼졌다. 약간의 정적이 흐른 뒤 은지가 대답했다.


“말하자면 길어. 정말 정말 긴 이야기지.”


순간 세발탁자에 놓인 촛불이 화르륵 타오르다 꺼졌다. 평소와는 다른 은지의 분위기에 봄이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저, 절대로 씻을 수 없을 옛 과오를........ 속죄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녀의 말을 들은 순간 봄이의 머릿속에서 따끔한 것이 스쳤다. 준혁이 무작정 총을 쏘아대며 울부짖던 아까 전의 일, 트레일러에서 은지와 식인종에 대해 이야기했던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설마, 아닐 거야......


봄이가 재빨리 화제를 돌려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종민이 입을 열었다.


“이봐, 날이 저물기 전에 공원으로 가야 한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 있어?”


“나도 동감이에요.”


봄이는 종민의 말에 찬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벌써 떠나려고?”


해가 지기 전에 공원으로 가야 한다는 은지의 말에 준혁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가야만 할 이유가 있는진 모르겠지만 하필이면 공원으로 간다니, 당신들 지금 공원을 주둔지로 쓰는 녀석들이 누군지는 알아?”


“자경단을 말하는 건가?”


“녀석들이 자기들을 뭐라고 부르던지 난 관심 없어. 놈들이 외부인에게 적대적일지 우호적일지도 모르는 일이야. 섣불리 접근했다가 큰코다칠지도 몰라. 한 번은 녀석들이 자기들 본거지에서 기어나와서 확성기로 떠들고 다니던 걸 본 적이 있어. 뭐라고 했더라? 아무튼 난 녀석들을 믿지 않아. 이 죽은 세계 한가운데서 믿을 사람이 어디 있다고......”

준혁이 아니꼽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자 종민이 끼어들었다.


“내가 듣기론 분명히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가족이 필요합니다.’ 라고 떠들고 다녔을 걸.”


“살인범이 희생자에게 접근할 때 ‘나는 살인자이고, 곧 당신을 죽이겠습니다.’ 하고 말하지는 않지.”


준혁이 종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그는 제법 괜찮은 비유라며 비웃었다. 은지가 말했다.


“우리도 공원 녀석들에게 볼일이 있는 건 아냐. 그저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지나가야 할 동선인 셈이지. 이미 녀석들과 얽히게 되었을 때의 대비책은 마련해뒀어. 그러니 괜찮을 거야.”


“목적지라고? 당신들은 그 목적지까지 왜 가려고 하는데?”


봄이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종민과 은지가 정한 목적지가 자신의 목적지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하수도에 모여 다른 사람들의 도움만을 기다리고 있던 너희들처럼, 이 순간에도 공원 너머에서 누군가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보기 멍청할 정도로 물러터졌군. 그래도...... 당신들은 마음에 들어.”


혼자 중얼거리던 준혁이 봄이에게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 말했다.


“아, 그렇지. 아까 당신이 찾아봐 달라고 요구했던 38구경 탄환 말인데, 동생들을 시켜서 무기고를 다 뒤져봤는데도 찾을 수가 없었어. 미안해. 대신 다른 걸 줄게.”


준혁이 그렇게 말하고는 주위의 꼬마들을 불러 어떤 것을 나눠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꼬마들은 흔쾌히 준혁에게 약 봉투를 넘겼다.


“필요할지 모르겠지만, 신경안정제야. 동생들이 자주 복용하고는 해. 이 죽은 세계에서 시궁창에 처박혀 벌레처럼 연명하려다 보면 가끔 내일이 과연 존재할까 하는 두려움에 빠질 때가 있어. 내일이 만약 존재한다고 해도 분명히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말이야. 누구나 그럴 때가 와. 누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신경이 곤두서고 불안하고 무기력해지지. 힘들 때,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절망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될 때 한 알 삼켜봐. 그래도 부족한 것 같으면 두 알까진 괜찮아. 그 이상은 안 돼. 절대로.”


“잠깐, 지금까지 저 아이들이 이걸 먹었다고? 치사량을 넘기기라도 했다간 어떡하려고......”


“괜찮아, 젊은 누님. 그 정도는 이해해 달라고. 받아둬.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봄이는 얼떨결에 준혁이 건네는 약 봉투를 받아들었다. 그다지 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나 우선 가방에 쑤셔넣었다. 이걸 과연 사용하게 될 날이 올까?


“공원을 지난다고 했지? 공원 너머까지 바래다줄 수는 없지만 근처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사람을 두 명 붙여줄게. 어떻게 생각해?”


“우리끼리만 가는 것보다는 사람이 많은 편이 좋겠지. 그래야 놈들이 섣불리 덤비지 못할 테니까. 어서 출발하자.”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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