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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116 회
조회수 :
14,545
추천수 :
182
글자수 :
530,484

작성
17.11.20 07:40
조회
131
추천
3
글자
9쪽

32화

DUMMY

“누나.”


그 단 하나의 단어를 듣고 난 후, 봄이의 온 몸은 얼어붙어 버렸다. 그것은 너무 갑작스럽게 들린 한 마디였다. 그녀의 머릿속이 뒤틀렸다. 시간은 눈앞에 떠오를 듯 말듯한 기억들을 잡을 생각을 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계속해서 흘러갔다. 봄이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권총을 뽑아 겨눴다.


터널 속은 안개라도 덮힌 듯 바로 앞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바라보는 터널 속은 습기가 차서인지 공기가 메말라 있었다. 또한 그녀의 회중전등은 아직까지도 빛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그녀의 몸 주위를 둘러싼 무엇인가가 그녀의 정상적인 사고를 방해하고 있었다. 어둠에 묻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지만 봄이는 이 맑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아까 전에 느꼈던 극심한 두통의 원인이 무엇인지도 알 것 같았다. 봄이의 머릿속에서 흩어졌던 기억들이 점점 돌아오기 시작하자 그녀는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어둠의 안개 속에서 조그만 소년의 윤곽이 뚜렷하게 보였다. 이제 그녀는 그 목소리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낯이 익은 소년이 봄이의 눈앞에서 웃고 있었다. 예전에 그 소년의 얼굴을 봤을 때는 기분이 나빴을지는 몰라도 이 정도까지는 분명 아니었다. 지금 그녀는 마치 눈앞의 조그만 소년을 두려워하고 있기라도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봄이는 자신도 모르게 소년에게서 떨어지려 뒷걸음쳤다. 하지만 그 후들거리며 움직이던 다리도 얼마 가지 못하고 얼어붙어 버렸다.


“오랜만이야, 봄이 누나.”


소년의 굳게 닫힌 입꼬리가 작게 벌어졌다. 그 목소리는 마치 악마의 속삭임과도 같이 들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봄이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감정이 서로 얽혀 지나갔다. 그 수많은 감정 중에서 그녀의 머릿속을 가장 많이 채우고 있던 감정은 바로 공포였다.


“아직까지도 살아 있다니 대단하네. 혼자서는 이렇게 오래 살아남지 못했을 텐데.”


“도대체 넌 뭐야?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봄이가 용기를 내어 이를 악물고 윽박질렀다. 그러자 소년은 동공 하나 흔들리지 않은 채로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가 누구냐니, 벌써 잊어버렸어? 나야. 보아하니 건강해 보이는데. 지난번에는 내가 좀 심했던 것 같아. 앞뒤 안 가리고 누나를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버렸으니까. 전부 다 내 잘못이야. 그렇지만 나쁜 뜻은 없었어. 그저 끝없이 같은 자리만을 돌며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고장난 물레방아처럼 제자리를 맴도는 누나에게 하나 가르쳐 주고 싶었을 뿐이야.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에 가려 진정한 자신을 잊어버리고 마는 일은 꽤 흔하니까.”


봄이는 소년의 말이 단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봄이의 판단대로라면 지금 그녀의 눈앞에 서 있는 소년은 환각이거나 그런 비슷한 것이었다. 그것은 틀림없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지금 그녀가 처한 뜬금없는 이 상황은 어떤 방향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었으니까.


“터널 끝에서 들린 목소리..... 그건 도대체 뭐였어? 그것도 네가 한 짓이지, 그렇지?”


소년은 잠시 검지손가락을 입가에 대고 곰곰이 생각하는 시늉을 하다가 봄이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비슷하지만 아니야. 사람은 누구나 마음 깊숙한 곳에 자기 자신이 끝도 없는 나락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자각하고 있어. 그리고 그 나락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고 판단하는 그 순간 눈앞에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고 하는데, 그게 실현되는 건 간단해. 자신이 가장 행복했었던 순간, 가장 사랑받았던 순간이 떠오를 때 그것이 자신의 눈앞에서 거짓말처럼 형체로 구현되는 거지. 하지만 그건 꼭 형체가 아닐 수도 있어. 환각일 수도 있고, 환청일 수도 있고,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보이는 누군가일 수도 있지. 아마도 그것도 그 중 하나일 거야.”


“......개소리, 전부 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봄이는 다리에 이어 잇몸마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녀는 소년의 말한 것들의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속에서 딱 하나의 의미를 찾을 수가 있었다. 그것은 어렴풋이 들렸던 자신을 부르는 듯한 엄마의 목소리가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모두 다 나락에 빠진 그녀의 마음 속이 구현해낸 허상이라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허상이라기엔 그녀에게 너무나 또렷한 목소리였다. 그녀를 홀리게 해서 그녀 자신도 모르게 터널 구석으로 이끌려 갈 만큼 감미로웠고, 또 온화하고 따뜻했다. 봄이는 소년에게서 들은 그 사실을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제 지긋지긋했다. 더 이상 그녀 자신이 자신 속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악마들과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천천히 봄이는 권총을 들어 소년을 겨눴다. 그의 말대로라면 지금 봄이의 눈앞에 보이는 소년 역시 그녀의 불안감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래, 잘 생각했어. 전부 없애버려. 눈앞에서 전부 불태워버려. 마음 속에서 끝없이 불어나는 악마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깨끗이 지워버려. 이미 지나쳐버린 잊혀진 추억 따위는 쓸데없이 쌓여 있는 응어리일 뿐이고, 그런 불필요한 감정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걸림돌만 될 뿐이잖아, 그렇지?”


봄이에게는 소년이 말한 마지막 문장이 어딘가 낯익게 들렸다. 누가 했었던 말이었지?


“씨발, 그럼 이것도, 그 목소리도, 내 눈앞에 또렷하게 보이는 너도..... 전부 다 아무 의미도 없는..... 텅 빈 허상이라는 뜻이야?”


봄이는 절규하며 소리쳤다. 동시에 오른손 검지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의 일들을 미루어 보아 그녀는 총성이 들릴 때마다 그녀를 방해하는 장해물들이 모두 깨끗이 정리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 허구의 소년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이 껍데기와도 같은 허상은 사라질 것이다. 지금까지 그녀를 괴롭히면서 길게 이어져오던 트라우마 역시 사라질 것이다. 봄이는 그렇게 믿었다. 믿기 싫었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리볼버의 공이가 움직였다. 실린더가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방아쇠를 당기려는 그 순간, 봄이가 들고 있던 회중전등이 다시 켜졌다.


“봄아, 그만둬!”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시간의 경계를 넘어선 차원 이동을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봄이는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다른 차원으로 느껴졌다. 절망감에 초점을 잃었던 눈동자는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우연히 다시 켜진 봄이의 노란 회중전등 빛 앞에서는 한 남자가 두 손바닥을 펴고 들어보인 채로 그녀의 흔들리는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바로 상훈이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진정해! 나야.”


봄이의 정신이 완전히 돌아왔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지금 당황한 듯이 손바닥을 휘젓는 상훈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동안 봄이는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 총 내려, 일단 진정하라고. 응?”


봄이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재빨리 총구를 내렸다. 상훈은 아직도 총에 겨누어진 후유증이 잊혀지지 않는지 봄이가 총구를 내리고 나서도 한참 동안 놀란 손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제가 잠깐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요.”


상훈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의 목젖 떨리는 소리가 봄이에게까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나마 그제서야 정신 차리기라도 한 게 다행일 테지. 어서 여길 나가자. 더 이상 여기 있다가는 나도 미쳐버릴 것 같아.”


상훈의 그 말에 봄이는 말없이 수긍하고 걸어 나갔다. 그들은 출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끝이 없는 것 같았던 깊고 깊은 터널을 비추는 지평선의 끝에서 한 줄기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빛을 향해 달려 나갔다.


작가의말

꺄아아아아아아앙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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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89 티말
    작성일
    17.11.20 13:56
    No. 1

    용케도 둘 다 살아있네요.
    역시 주인공 보정..이 아니라 뭐가 나오려길래 이러는거려나..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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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95화 20.11.28 30 0 14쪽
97 95화 20.11.23 41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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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94화 20.11.19 62 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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