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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1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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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530,484

작성
17.11.13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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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31화

DUMMY

그들은 높게 올려진 아치형 천장 때문인지 눈이 쌓이지 않아 반들반들한 선로 위를 걸어갔다. 터널 안쪽에는 단 한 군데도 빛이 스며들지 않았다. 선로 바닥에 깔린 자갈더미 속에 파묻혀 있던 나무판자는 물기에 젖어서 눅눅해져 있었다. 그에 반해서 터널 내부 공기는 건조하고 말라 있었다. 터널 오른쪽에 끝없이 뻗은 파이프 도관에서는 이따금씩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소리들은 넓게 퍼지지 못하고 구석에서 흩어져 버렸다. 마치 터널 안에 도사리고 있는 무언가가 그 소리들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봄이는 때때로 들려오는 시궁쥐들의 기분 나쁘게 찍찍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한 쪽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자신과 상훈이 내는 짙은 발자국 소리에 그 소리들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발자국 소리는 바깥에서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끝없는 심연처럼 이어져 있는 터널 안에서는 소리가 벽에 부닥쳐 돌아와서인지 더욱 크게 울렸다. 상훈은 봄이를 앞서가면서 멀리 가지 못하고 그녀가 걱정되는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다가 봄이와 눈이 마주치자 말했다.


“왜, 뭔가 걸리는 거라도 있어?”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봄이가 말을 흐리며 터널 속 먼지가 스며들어오는 코를 소매로 한 번 닦았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자신이 지금 의문을 품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되새겨보았다. 그녀는 분명히 전에 누구에게 백화점에서 상훈에게 했었던 말을 그대로 해줬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실 봄이는 예전에 보았던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환각을 보고 난 다음부터는 그 전의 일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카메라 필름이 끊기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것은 봄이가 난생 처음으로 보았던 환각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봄이는 자신이 환각을 보았는지 안 보았는지조차 잊어버렸다. 만약 환각을 보았다면 왜 보았나? 그리고 누구를 통해 보았나?


순간 봄이는 머리가 띵하고 울리는 것을 느꼈다. 지겹도록 느껴 보았던 두통이었다. 누군가가 마치 귓속을 전동 드릴로 후벼파는 것 같았다. 귀를 찢는 초고음 고주파도 함께 들려왔다. 두통과 동시에 귓속으로 파고들어 삐하고 울리는 고주파가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봄이의 뇌를 더욱 강하게 비틀어서 터뜨리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봄이가 머리를 짚은 채 얼굴을 찡그리며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러자 앞서가던 상훈이 그녀에게서 풍기는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끼고 봄이를 돌아보며 걱정스레 한 마디 던졌다.


“무슨 일 있어? 어디 아파?”


봄이는 여전히 고개를 숙여 얼굴을 찡그린 채로 그에게 손을 내저었다. 괜찮다고 말해주려는 뜻이었지만 사실 봄이는 지금 자신의 표정과 몸짓이 따로 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보다 못한 상훈이 봄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와 중심도 제대로 못 잡는 봄이의 어깨를 잡아주었다.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다. 잘 보이지 않던 앞도 눈동자의 초점이 안정되며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깨질 것처럼 아프던 머리도 어느 정도 나아졌다. 이윽고 그녀는 지끈거리는 머리에서 손을 뗄 수 있었다.


“몸이 안 좋으면 돌아가서 조금 쉬었다 갈까?”


봄이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젓자 상훈이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미리 말해 주지 않았구나. 터널을 지날 땐 항상 조심해야 해. 이런 터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행방불명되는 사람들이 많아. 터널은 어두워서 금방이라도 방향감각을 잃어버릴 수가 있거든. 이상하게도 터널을 걷다 보면 방금 전까지 걸어가던 방향이 다른 방향으로 느껴진다고도 해. 방금 전까지 걷던 방향을 망각한다는 거지. 떠도는 소문에 따르면 터널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저승으로 끌어들인다는 소문도 있어.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지만.... 어떤 멍청이가 그런 되도않는 유언비어를 퍼트렸는지 납득도 안 돼. 아무튼 그러니까 빛이 보이기 전까지는 절대로 걸음을 멈추어선 안 돼. 그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말이야. 알겠어?”


“터널 안에서..... 무언가가 우릴 삼켜 버리기라도 하나요?”


봄이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걸 자각하자 자신도 깜짝 놀랐다. 그 말을 듣고 난 상훈이 오른손을 들어 한 번 휘저었다.


“아니, 확실하지 않아. 저번에 한 번 누가 그랬던 적이 있었지. 글쎄 하루는 내가 근처 역에서 잠깐 쉬고 있었는데 어떤 머저리가 터널 안에 유령이 있다면서 뛰쳐 나오지 뭐냐. 그 녀석 꼴이 말이 아니었어. 원래 역 근처에서 옮겨 다니던 부랑자라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옷도 거의 못 걸친 상태였다고 할까. 마치 누군가에게 옷이 찢기기라도 했던 것 같았어. 그렇다고 스스로 찢지는 않았을 테고. 신발도 한 짝은 어디로 잃어버렸는지 한쪽 발만 신고 있더군. 반 벗은 채로 헐레벌떡 뛰쳐나와서 한다는 말이 터널 안에 유령이 있다라니. 결국 그 녀석 말은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어. 나도 그랬고.”


“그랬었군요.”


봄이는 수다를 늘어놓는 상훈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며 그를 앞질러 걸어갔다. 또 다시 봄이는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 그런 건 신경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이제 몸도 마음도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이런 알 수 없는 트라우마와 안 좋은 기억 속에 휩쓸려 살아가야 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봄이 자신도 몰랐다. 그녀는 앞을 비추려고 치켜든 회중전등이 아주 잘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더욱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상훈은 터널을 걷는 내내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봄이는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그녀가 듣기 싫어서 듣지 않은 것 뿐만은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는 한 걸음씩 걸어 나갈수록 점점 뿌옇게 들리기 시작하다가 이윽고 아예 들리지 않게 되어버렸다. 처음에 봄이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상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봄이는 갑자기 불안감이 물밀 듯 몰려왔다. 머리털이 곤두서고 관자놀이가 흔들렸다. 동시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기도 했다. 봄이는 반드시 앞만 보면서 가야 한다는 상훈의 충고를 잊고 상훈이 없어졌다는 불안감에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봄이야.”


봄이는 순간적으로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봄이는 순간적으로 그가 말한 그 단어가 자신을 두고 한 말인지 잠시 헷갈릴 정도였다. 옅은 남성의 목소리였다. 정말로 오랜만에 남에게 불리우는 자신의 이름이었다. 터널 속의 이상한 기운에 파묻혀서인지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영락없는 상훈의 목소리였다. 상훈은 여전히 봄이의 등 뒤에 있었다.


“한참을 불렀는데 대답을 안 하길래 걱정했잖아. 정말로 무슨 일 있는 거야?”


그의 목소리는 분명히 바로 앞에서 말하는 것임이 틀림없는데도 잘 들리지 않았다. 그의 작아진 목소리를 대신 메꾸기라도 하는 것인지 터널 벽에서 들려오는 공허한 소리가 더욱 더 크게 들렸다. 봄이가 대답을 하려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봄이는 자신의 목소리가 생각과는 완전히 다를 정도로 작게 들린다는 걸 알아챘다. 분명 자신은 말을 했는데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귀에서는 잘 들리지 않았다. 특별히 귀가 먹먹한 느낌이 드는 것이 아님에도 봄이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려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래도 봄이는 상훈이 어딘가로 사라지지 않고 뒤에 있어준 사실에 감사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몇 분을 더 걸어갔다. 봄이가 계속해서 선로를 밟으며 한 발씩 나아가는 도중에 그녀는 무언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무척이나 이상한 기분이었다. 저 끝도 없이 뻗은 칠흑의 골짜기 속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었다. 봄이는 순간 모든 생각의 회로가 정지했다. 끝을 알 수조차 없는 심연의 지평선 끝에서 자꾸만 자신을 정겹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니, 그것은 평범한 소리가 아니라 목소리였다. 그것은 어딘가에서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자신을 정겹게 부르는 듯한 목소리였다......


봄이는 무엇인가에 홀린 듯이 그 목소리를 따라갔다. 그 목소리는 갈수록 점점 작아졌다. 이에 봄이는 작아지는 목소리를 더 크게 듣기 위해 더 빨리 걸었다. 이윽고 그녀는 달리고 있었다. 뒤에서 상훈이 소리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지만 그녀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터널 반대편 끝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따뜻하고 정감 가는 목소리였다. 온화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봄이는 그 목소리가 정말로, 아주 이상하게도 그녀의 머릿속에 익숙하게 남아있는 것을 의식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누구였을까. 혹시 엄마의 목소리였을까?


봄이는 지치는 것도 모른 채 달리다가 멈추어 섰다. 더 이상 익숙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터널 속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수도관 소리만을 울리고 있었다. 봄이는 정신을 반쯤 놓은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머릿속이 해탈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원하던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을 알고 깊은 허무감이 몰려왔다. 하지만 봄이가 그런 걸 생각해내기도 전에, 봄이의 회중전등이 깜빡이며 꺼졌다.


그 순간 봄이의 모든 시간이 정지했다.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봄이는 절망감에 다리를 떨며 전등을 켜기 위해 노력해 보았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온 지구에 자신밖에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봄이는 몰려오는 극심한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조차 흘리지 못할 정도로 경직된 얼굴로 주저앉아 버렸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녀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한 번 다시 들려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온화한 여성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짧고 또렷하며, 청량한 목소리였다.


“누나.”


그 단 하나의 단어를 듣고 난 후, 봄이의 온 몸은 얼어붙어 버렸다.


작가의말

티말님 늘 코멘트 너무감사합니다!


크나큰힘이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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