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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1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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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530,484

작성
17.11.24 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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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DUMMY

터널을 달려 나오는 동안 봄이는 그 어떠한 감정의 동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방금 막 터널을 빠져나와 가쁜 숨을 고르고 있던 봄이는 단 몇 초 전에 자신이 겪었던 일들이 모두 다른 차원에서 벌어졌던 일처럼 느껴졌다. 봄이는 평행세계라는 것을 믿지는 않았지만 지금 봄이가 밟고 서 있는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의 또 다른 자신을 그대로 지켜보기라도 했던 것 같았다. 마치 영화를 보고 난 다음의 느낌이었다.


그 정도로 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봄이의 머릿속을 고통스럽게 조이는 계기가 되었던 그 사건 이후 잘 기억나지 않던 기억들이 소년을 보고 나서야 가물가물하게나마 떠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봄이에게는 터널 속의 그 소년이 자신의 자아가 분리되어 떨어져 나온 망각의 조각이었는지, 절대로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냉혹하고 무자비한 현실의 일부분이었는지는 도저히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멈춰서 숨을 고르는 봄이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던 상훈이 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의 말투는 아까 전 봄이를 진정시킬 때처럼 침착하고 설득적이지 않았다. 무엇인가의 계기에 의해 몸 속이 뒤틀리기라도 한 듯한 목소리였다.


“이 녀석, 대체 뭐 하는 짓이야? 위험하잖아! 그 상황에서 갑자기 총은 왜 꺼내든 거야? 네가 방금 얼마나 위험한 행동을 했는지는 알아?”


봄이는 상훈이 입을 열자 분명히 예전처럼 안도의 한 마디를 해줄 것이라고 잠깐 동안 생각했다. 아주 잠깐 동안. 예상과는 다르게 그녀를 크게 꾸짖는 상훈의 목소리에 놀란 봄이는 눈을 크게 뜨고 그의 눈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네 머릿속은 어떻게 되어먹은 거야? 내가 그래서 말했잖아. 절대로 터널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나갈 동안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한눈 팔면 안 된다고. 네가 아까 한 행동 때문에 나는 물론이고 너까지 크게 위험해질 뻔했어.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환각이라도 보는 거야? 머릿속에서 네 자신이 죽고 싶다고 소리치기라도 하든?”


상훈은 절제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매우 화가 난 표정을 하고 말했다. 봄이는 아무 표정도 없이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는 있었지만 그가 왜 자신에게 소리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상훈이 벙찐 얼굴로 자신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는 봄이를 보며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안 되겠다. 네 자신이 스스로 절제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웬만해서는 그 총은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 총은 나한테 넘기는 게 좋겠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떨리긴 했지만 굳게 닫혀 있던 봄이의 입이 열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표현하고 있었다.


“뭐라고요? 안 돼요.”


봄이의 말을 듣고 나서도 상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봄이가 줄 생각을 하지 않자 그녀를 재촉하기라도 하듯 더욱 손을 깊숙이 내밀었다.


“지금까지 계속 봐 왔지만 넌 아직 그 총을 사용할 준비가 안 됐어. 내가 가지겠다는 게 아니야. 잠깐 맡겨 두라는 거야. 네 중요한 판단을 흐릴 정도로 안에 도사리고 있는 그 무엇인가를 완전히 제어할 수 있기 전까지만 나한테 맡겨 두라는 소리야. 네가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하고 침착한 결단을 내릴 수 있게 될 때가 되면 그 때 돌려줄 테니까.”


“안 돼요. 그런 입에 발린 말로 절 꾀어내려 들지 마세요. 이건 이미 제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 줬어요. 제 몸의 일부나 마찬가지라구요. 저한테서 이걸 빼앗는다는 건 내가 그 미친 놈들한테 어떻게 되든지 상관 없다는 뜻이랑 다를 게 없어요. 내가 만약 이걸 갖고 있지 않아서 아까 그 놈들한테 붙잡혔다고 생각해 봐요. 난 지금쯤 어떻게 됐겠어요? 아저씨가 지금까지 내가 겪어왔던 끔찍한 일들을 알기나 해요?”


상훈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건 변명이 될 수 없어. 네가 지금까지 겪어온 아픔을 알기나 하냐고? 지금 네가 말하고 싶은 건 자신은 이만큼 많이 괴로우니까 그 아픔을 겪어보지 않은 난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냐?”


“아저씨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는 거예요? 내가 그 날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나서 아무도 없는 쓸쓸한 눈밭에서 혼자 주저앉아 있을 때, 아저씨는 그 때 내 옆에 있었나요? 내가 집을 잃고, 먹을 것도, 마실 것도 모두 잃은 채 바깥으로 강제로 내쫓겼을 때, 나는 길거리에 쭈그려 앉아서 잠도 제대로 못 잔 채 도둑질이나 다른 더러운 짓을 해가면서까지 살아남으려고 애썼어요. 다른 어떤 건 어찌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 오직 살아가겠다는 곧은 집념만을 굳게 되새기면서 살아왔단 말이에요. 어떤 절망이 닥쳐도,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을 때도 난 눈물을 삼키며 절망을 딛고 올라섰어요. 이 넓은 세상에 혼자 남았다는 외로움,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는 좌절감, 이렇게 살려고 노력해봤자 결국 결말은 하나일 뿐이라는 운명을 알게 되었을 때의 그 기분을 알아요? 세상에서 잊혀지지 않으려고 아무리 발버둥쳐 봐도 전부, 모두 다 부질없고 무지한 운명에 대한 하찮은 변명거리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의 그 절망감을 조금이라도 알고 계시냔 말이에요!”


봄이는 지금까지 목에 걸린 채 내뱉지 못했던 말들을 한숨에 모두 털어놓았다. 그녀의 호흡이 불규칙적으로 이어졌다. 얼마나 감정이 북받쳤는지, 봄이는 자신의 가슴 속에서 무엇인가가 쾅쾅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가 자신의 몸속에서 심장을 주먹으로 계속 내리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상훈은 진심을 다해 소리치는 봄이를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봄이는 숨을 고르고 나서 다시 말했다. 다시 말을 이어가는 소녀의 목소리는 소리치던 아까와는 달리 어딘가 애절해 보였다.


“.....죄송해요. 아저씨가 말해 주려는 의미가 뭔지도 알겠고, 아저씨가 내가 혹여나 미치지는 않을까 걱정해서 해 주시는 말인 것도 알겠어요. 그렇지만 제 말에 후회는 없어요. 이 총은 저와 아저씨가 처음 만났던 그 순간보다 더 훨씬 전에 주운 물건이에요. 그 누구에게도 이걸 섣불리 넘겨 줄 수는 없어요. 그 때 정말 우연하게, 몇 억분의 일의 확률을 뚫고 이 권총을 줍게 되었을 때부터 제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던 걸지도 몰라요. 전 이걸 주운 순간부터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찾았어요. 내가 이 무자비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이요. 더 이상 절 이 세상에 서있을 수 있게 도와준 희망을 빼앗지 말아 주세요. 설령 그게 부질없고, 아저씨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하찮은 희망일지라도요.”


대화가 끝나고 그들은 서로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에 따라 이어지는 차가운 정적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천장이 뚫려 있는 선로 위에서 몇 분씩이나 더 가만히 서 있었다.


“....희망이라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메말라 있던 정적을 깬 사람은 상훈이었다. 그의 목소리 역시 아까와는 다르게 낮게 깔려 있었다.


“희망이라고? 희망? 이미 몇 번씩이나 사람의 생명을 앗아갔을 그 역겨운 살상무기가?”


봄이는 반론하려고 입술을 우물거렸지만 이상하게도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상훈이 잠시 뜸을 들이고 나서 말했다.


“뭐, 좋아. 누군가에게는 부질없는 게,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것일 지도 모르지. 네가 홧김에 쐈다는 그 가엾은 녀석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는 것처럼 말이야.”


봄이는 그 말을 듣자 갑자기 화가 치밀어올랐다.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죄책감의 굴레에 빠져 고통스럽게 허덕이고 있는 자신을 가지고 놀기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말하고는 상훈은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봄이는 걸음을 떼지 않았다. 그가 몇 걸음 더 걸어가면서 말했다.


“무엇인가를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시키고 의지하는 건 좋지만, 넌 지금 그 역겨운 악마에게 의지하고 있는 게 아니야. 네 자의지로 그 권총에 의지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소리야. 무슨 뜻인 줄 알아?”


봄이가 대답하지 않자 상훈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쳐 계속 걸어가며 말했다.


“침식당하고 있다는 뜻이야. 그 악마에게. 너의 몸과 마음 모두가.”


하늘 위에서부터 봄이의 뺨에 약한 한 줄기 느낌이 전해졌다. 그녀는 자신의 뺨에 손을 대 보았다. 손가락에 물기가 묻어 있었다. 젖은 손가락을 한동안 쳐다보고 나서야 봄이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비가 오는구나.”


주위는 어느샌가 어두워져 있었다. 태양은 이미 하늘을 가득 메운 먹구름 뒤에 가려져 있었다. 하늘에 내려앉은 거대한 먹구름은 미세한 태양열조차 새어나오지 않을 정도로 꽉 막혀 있었다. 빛이 완전히 잠식되어 버린 터널 주위는 금세 어두워져 버렸다.


“다음 역 플랫폼에 도착하면..... 비를 조금은 피할 수 있을 거야.”


상훈이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봄이도 그의 뒤를 따랐다.






천둥 치는 소리가 들렸다.




<유령 도시> 마침.


작가의말

33화예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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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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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89 티말
    작성일
    17.11.24 17:40
    No. 1

    그때의 기억을 제대로 기억해 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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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101화 20.12.16 63 1 12쪽
103 100화 20.12.11 29 0 13쪽
102 99화 20.12.08 38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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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97화 20.12.02 58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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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95화 20.11.28 30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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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94화 20.11.20 40 1 9쪽
95 94화 20.11.19 62 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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