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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1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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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44
추천수 :
182
글자수 :
530,484

작성
17.10.04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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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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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9쪽

24화

DUMMY

그녀는 금방이라도 자신이 경솔했음을 인정하고 만 사실에 치를 떨며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짓고는 힘없이 말했다.


잠시 동안 안 그래도 조용하던 그들이 밟고 서 있던 죽음의 땅이 더욱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봄이는 어렵게 한 마디를 꺼낸 후 마음속에서 물밀 듯이 터져나오는 울적한 감정에 눈을 똑바로 뜨지도 못한 채 여전히 지면을 향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녀는 상훈과의 시선을 최대한으로 피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녀의 말을 들은 상훈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 잠깐 동안의 얼어붙은 분위기를 녹인 건 상훈의 땅이 꺼져라 내쉬는 한숨 소리였다.


“네 입에서 그런 소리까지 나오게 될 줄이야. 그런 단어는 모르는 거 아니었나?”


“제가 경솔했던 걸 인정하고 사과드리는 겁니다. 지금까지 베푸셨던 호의는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아저씨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 은인이시니까요. 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어요. 아저씨한테는 제가 완전히 짐짝으로 느껴졌겠죠. 매번 가는 곳마다 발목만 잡고, 어쩌다 진심으로 성의를 표시했을 때도 제가 거부했던 거 알아요. 솔직히 지금 전 아저씨 속마음을 이해 못하겠어요. 첫 만남부터 날카로웠죠. 두 번째 만났을 때도 곤혹을 겪던 절 구해주셨죠. 그런데 아저씨가 절 세 번째 구해주셨을 때까지 저는 아저씨를 위해서 해준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도 저는 솔직히 얘기해서 그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어요. 사실 전 죄책감이 뭔지도 자세히 몰라요. 그런데 이상하게...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봄이는 자신이 외부인에게 이렇게까지 길게 말했던 적이 있었나 생각하고 내심 스스로 깜짝 놀랐다. 그녀는 다음 해야 할 말이 좀처럼 머릿속에서 떠오르지 않아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빙빙 돌렸다. 봄이가 말하던 입술이 답을 내지 못하고 닫혀갈 때쯤 상훈이 입을 열었다.


“발이 떨어지도록 부리나케 달려와서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냐?”


그 말을 들은 봄이의 머릿속이 얼어붙었다. 봄이는 사건을 예방하지 못하고 저질러 버렸다. 봄이는 분명히 자기가 스스로 벌인 잘못을 모두 인정했다. 하지만 그녀가 스스로 저지른 잘못에 용서를 구하고 그로 일어날 모든 후폭풍에 책임을 진다고 해도 해도 쫓기는 신세가 되어버린 상훈이 입은 피해가 원래대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사죄하면 모든 게 다 부드럽게 풀릴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눈앞에 있는 자신을 세 번이나 도와준 이 남자는 자신을 이해해주리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가 내뱉은 차가운 한 마디가 두부에 깊숙이 박히는 것 같았다. 동시에 방금까지 불안하긴 했지만 정상적으로 호흡하던 폐가 찌릿하고 저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자신이 별 생각 없이 저질렀던 일들이 남에게 돌이킬 수 없는 내외적 손상을 입혔다고 생각하자 그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봄이는 자신으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봤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에 해당하는 사람은 깊게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바로 그녀의 눈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이었다.


“...그렇겠죠.”


봄이가 말을 듣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말했다.


“쉽게 용서받을 수는...없겠죠. 제가 이렇게 줄줄이 늘어놓아도 아저씨가 마음에 안 든다면 어쩔 수 없는 거겠죠. 그렇지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힘없이 말하는 봄이에게 상훈이 몇 걸음 다가왔다. 몇 발자국이 아니라 봄이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봄이는 늘 상훈과 거리를 두고 이동해서인지 잘 몰랐지만 코앞에서 보는 상훈의 얼굴은 상당히 높아서 봄이가 그와 눈을 마주치려면 고개를 추켜올려야 했다. 그가 팔을 들어올리는 동시에 그의 깎다 만 턱수염이 입술을 따라 움직였다. 그의 큰 손바닥은 이내 봄이의 머리 위로 내려왔다. 동시에 봄이는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도 보았다.


“고작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거였어? 이 귀여운 녀석아.”


봄이는 당황해서 자신이 잘못 들었던 건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자신의 정수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바닥의 감촉을 느끼고 나서야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상훈을 마주보는 봄이에게 그는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처음으로 코앞에서 보는 그의 얼굴은 광대뼈가 안으로 들어가서인지 상당히 핼쑥해 보였다. 그의 짧은 턱수염이 올라간 입꼬리를 따라 휘어졌다. 봄이는 아무런 생각도 못한 채 몇 초 동안이나 기쁘다는 듯 미소짓는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때 봄이가 느낄 수 있었던 건 그의 따뜻한 손바닥의 온도 뿐만은 아니었다.


한동안 정신줄을 놓고 멍하니 있던 봄이는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돌아옴을 자각함과 동시에 봄이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상훈의 손을 팔로 밀어냈다. 자신의 자존심을 한 수 접어서까지 상훈에게 사죄를 하려고 했던 봄이였지만 속에서 무엇인가가 요동치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에 이끌렸는지 더 이상 자신의 무방비한 머리를 다른 사람이 쓰다듬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나빴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봄이는 얼굴이 시뻘개져서 뒤로 몇 발자국이나 빠르게 물러나며 소리치듯 말했다.


“장난치지 마세요! 전 진지하다구요!”


“미안하지만 나는 안 진지하거든.”


“아저씨 진짜 소름돋을 정도로 오글거리는 거 알아요?”


“그래? 나는 네가 했던 말이 더 오글거리는 것 같은데.”


봄이의 얼굴이 증기가 새어나올 정도로 뜨겁게 달궈졌다. 두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고는 두 손을 들어올려 손목뼈가 휘어질 정도로 마구 손사래를 쳤다.


“대, 대체 무슨 말이에요? 제가 한 말 듣긴 한 거예요?”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는 봄이를 쳐다보던 상훈은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고 차마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쿡쿡댔다. 그러자 봄이는 달아오른 눈으로 상훈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상훈은 정신없이 웃음을 참느라 자신을 노려보는 봄이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봄이가 상훈을 진정시킬 대화거리를 찾으려는 찰나 상훈이 정신이 덜 풀린 눈으로 봄이를 한 번 쓱 쳐다보고는 봄이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럼 난 간다.”


겉으로는 점잖은 듯이 말하는 상훈이었지만 봄이는 그가 아직도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봄이는 자신이 자존심을 버리면서까지 힘들게 꺼낸 말들이 물거품이 되어 흩어져버리는 허탈감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신경질을 내며 상훈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내 말 끝까지 듣고 가요! 그러니까 내 말은...”


봄이는 상훈이 자신의 말을 맞받아칠 줄 알고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상훈은 다급하게 자신을 가로막는 봄이의 얼굴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자 다음에 할 말을 준비해놓지 않은 봄이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봄이는 높은 목소리로 흐렸던 말끝을 다시금 크게 강조했다.


“그러니까, 제 말은....”


“할 말도 딱히 없어 보이는데. 할 말 끝났으면 이제 비켜줄래? 빨리 가야 해서 말이야.”


“대체 가긴 어딜 간다는 거예요?”


정곡을 찌른 상훈의 한 마디를 받아치지 못한 봄이가 말꼬리를 돌렸다. 그걸 눈치챈 상훈은 답답하다는 듯이 대충 대답했다.


“잊어버렸냐? 네 가방 찾으러 가잖아.”


방금 전까지 얼굴을 달구며 성질을 내던 봄이의 입은 꽉 닫혀버렸다. 상훈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채로 꼿꼿이 서 있던 봄이의 어깨를 가볍게 짚고 그녀를 지나쳐갔다. 봄이는 자신을 지나쳐 간 상훈의 등을 보았다. 하지만 그의 어깨는 방금 전까지와는 느낌이 어딘가 달랐다. 더 이상 그의 어깨는 쓸쓸하게 움츠러들지 않았다. 발걸음도 어딘가 가벼워 보였다. 상훈은 점점 봄이에게서 멀어졌지만 봄이의 기분은 아까와는 다르게 조금도 답답하지 않았다. 울적하지도 않았다. 지면에 고정이라도 된 듯 움직이지 않던 자신의 두 다리는 이번에는 깃털이라도 된 듯 쉽게 움직였다. 다 죽어가던 그녀의 얼굴에는 밝은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더 이상 차들이 다니지 않는 얼어붙은 도시의 큰길에 꽂혀 있던 반쯤 휘어진 볼록거울에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걸어가는 한 남자와 점점 멀어지는 남자를 쫓아 달려가는 한 소녀가 비춰지고 있었다.


작가의말

즐거운 추석 되세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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