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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ils 님의 서재입니다.

평행세계에서 조용히 사는 법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콜트1911
작품등록일 :
2020.05.16 15:45
최근연재일 :
2020.06.2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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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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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29. 나는 말로 안 함

DUMMY

29.




호즈 블랑슈, 화이트 로즈, 혹은 시로이 바라.

각 출신마다 부르는 이름은 달랐지만, 뜻은 오직 하나. 바로 이신 국제학교 최고의 명문 클럽인 백장미회였다.

프랑스의 명문가와 일본의 화족(일본 귀족) 출신의 여학생들이 주축으로 만든 백장미회는, 당시 이신에서 가장 고상한 클럽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차를 마시거나 사교댄스를 연습하고, 또 일본식 다도를 배우는 전형적인 귀족 클럽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967년 캐스린 스위처라는 이름의 마라톤 선수가 그 이름도 유명한 보스턴 마라톤을 완주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되지 않았지만, 당시 여성들은 마라톤은커녕 800미터 달리기조차 뛰지 못했다.

특별한 이유 같은 건 없었다. 그저 그 당시 만연하던 성차별이었을 뿐이었으니까.

특히나 마라톤은 그 정도가 심했는데, 오직 남자들만의 스포츠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라톤이라는 종목 자체가 주는 상징성이 어마어마하다 보니, 남성 우월적인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그런 꼰대들이 가득한 마라톤 위원회에서 여자임을 숨기고 몰래 출전한 캐스린을 좋게 볼 리가 없었다.

당연히 그녀를 막기 위해 위원회가 직접 나서서 저지하려 했으며, 또 그런 그들을 막기 위해 코치들이 보디가드를 서야 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캐스린은 많은 사람들의 방해와 도움 끝에, 정식으로 보스턴 마라톤을 완주해낼 수 있었다.


과연 캐스린의 그런 행동이 어떤 나비효과를 가져다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작은 클럽에 엄청난 영향력을 주었다는 것이다.



여성들도 할 수 있다. 더 이상 여성들은 앉아서 차나 마시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게 눈이 뜬 그녀들은, 본격적으로 백장미회의 활동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들이 제일 먼저 주목한 것은 역시나 스포츠였다.

당시 여성들이 차별받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겉으로 드러나는 차별은 부족한 신체 능력에 있었다.

때문에 백장미회는 여성도 육체를 갈고 닦아야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믿었다. 바로 그녀들의 영웅인 캐스린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문제는 종목이었다. 처음에는 일본의 검도나, 프랑스의 펜싱, 그리고 캐스린의 마라톤을 두고 여러 의견이 오갔다. 펜싱은 당연히 프랑스, 검도는 일본, 그리고 마라톤은 다른 기타 나라들이 주장했던 종목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싸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종목이 하나 있었으니, 올림픽의 창시자였던 피에르 드 쿠베르탱이 직접 고안한 근대 5종이 바로 그것이었다.

올림픽의 창시자였던 피에르 드 쿠베르탱은, 나폴레옹의 일화에 영감을 받아, 고대 그리스 올림픽의 종목이었던 고대 5종에서 근대 5종이라는 현대 스포츠를 창시해냈다.


고대 그리스는 심, 기, 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룰 때 완벽한 인간으로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에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5종이야말로 최고의 스포츠라 찬미할 정도였다.

이런 근대 5종은, ‘여성 또한 같은 인간이다’를 주장하는 호즈 블랑슈의 새로운 이념에 딱 들어맞는 종목이었다.

그렇게 호즈 블랑슈는 근대 5종을 시작으로 심, 기, 체 모두를 아우르는 진정한 명문 클럽으로 발전해나갔다.


“근대 5종이라고? 그 힘든 걸 상류층 아가씨들이 했단 말이야?”

“격변의 시대였잖아.”

“그럼 지금도 백장미회에서 근대 5종을 하나?”

“그럴 리가 있나. 너도 봤잖아? 펜싱 대신 롱소드 휘두르는 거.”

“왜 그렇게 된 거지?”

“아 그거? 간단해. 근대 5종을 만들었던 쿠베르탱 그 작자가, 실은 지독한 성차별주의자였거든.”


태영의 말대로였다.

처음 그 문제를 제기한 것은 다름 아닌 한국과 영국 국적의 여학생들이었다. 그녀들은 쿠베르탱이 성차별주의를 넘어 여성 혐오자라는 점을 들고 일어섰다.

이에 백장미회의 프랑스 출신들은 강하게 반발했는데, 일단 올림픽의 창시자이자 영웅인 쿠베르탱을 깎아내린다는 점. 그리고 위대한 황제 나폴레옹과 그 부하의 업적을 다룬 종목을 그런 일로 먹칠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때는 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며, 은근슬쩍 쿠베르탱을 옹호하기까지 했다.

물론 프랑스 측이 주장한 것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과거의 시대를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는 것은, 마냥 현명한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프랑스의 대처가 아쉬웠던 것은, 하필 백장미회는 캐스린 스위처를 보며 대대적인 각성을 했다는 점이다.

적어도 여성 운동으로 깨어난 조직이라면, 쿠베르탱의 흠으로 트집을 잡았을 때 그런 변명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당연히 백장미회는 세 가지 세력으로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는 이미 주축이 된 프랑스인과 일본으로 이루어진 여당 세력.

그리고 그런 여당에 반격을 든, 영국인과 한국인으로 이루어진 쿠데타 야당 세력.

마지막으로 그런 둘 사이에서 중립을 고수하는 미국인들까지.

그야말로 작은 천하삼분지계의 탄생이었다.


“영국이랑 프랑스, 그리고 한국이랑 일본이라.”

“크크큭. 대충 눈치챘지? 프랑스가 너무 안일했어. 아무리 그래도 영국인들 앞에서 위대한 나폴레옹이니 뭐니 할 필요는 없었는데. 내가 장담하는데 쿠베르탱은 핑계야 핑계. 나폴레옹 얘기만 없었어도 그냥 말없이 넘어갔을 걸.”

“한국은 한국대로 불만이었을 거고.”

“당연하지. 우리야 영프가 어찌 됐든 상관없지만, 일본 애들이 프랑스 옆에 붙어서 꿀 빠는 건 영 보기 싫었을 테니까.”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됐지?”

“뭐 나야 자세한 전말은 모르지. 백장미회는 굉장히 폐쇄적이니까. 다만 확실한 건, 그 뒤로 백장미회는 영국과 한국이 차지했다는 거야.”

“프랑스는?”

“프랑스는 펜싱부로, 일본은 다도부와 검도부로 찢어졌고.”

“뭐야? 그럼 영국인이나 한국인은 펜싱부로 못 가는 거야?”

“그럴 리가 있나. 다만 가도 대접받을 생각은 말아야지. 코치부터 시작해 부원들 전원이 프랑스어만 쓰는 곳이니까.”


그 뒤로 호즈 블랑슈는 쿠베르탱의 근대 5종 대신, 과거의 고대 5종으로 방향을 돌리게 되었다.

과거 전사를 육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고대 5종처럼, 말을 타고(승마), 활을 쏘며(활쏘기), 강을 건너(수영), 진격하다가(육상), 전투 끝에(투기) 적의 숨통을 끊어놓는 것이다.

그렇게 호즈 블랑슈의 다섯 가지 종목은 승마, 국궁, 수영, 크로스 컨트리, 그리고 쿼터 스태프로 정해지게 된다.

특히 두 종목인 국궁과 쿼터 스태프는, 각각 한국과 영국을 상징하는 무기로, 노골적으로 호즈 블랑슈의 주축이 어느 나라인지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다만 그녀들이 실수한 점은, 펜싱이나 국궁과는 다르게, 쿼터 스태프는 제대로 뚝배기를 깨버리는 진짜 살상 무기였다는 점이다.

숙련된 봉술가를 초대하여 제대로 배우는 것까진 좋았으나, 육척봉 자체가 위험한 무기이다 보니, 다치는 학생들이 늘어만 갔던 것이다.

결국 호즈 블랑슈에선 이탈리아의 레이피어와 독일의 롱소드를 두고 투표에 들어갔고, 그 결과 독일의 롱소드가 최종 낙점이 된다.


“뭔가 재밌네.”

“처음에는 이탈리아의 레이피어가 유력했는데, 프랑스의 펜싱을 연상시킨다는 여론 때문에 묻혔다나 어쨌다나.”

“프랑스 지우기인가. 현실 정치보다 더 무섭군.”

“뭐, 그렇게 프랑스를 완벽하게 지우려고 했지만, 차마 클럽 이름까진 바꾸지 못했나 봐. 나름 그것도 역사니까.”


이것이 바로 클럽 호즈 블랑슈의 전말이었다.

나름 역사적이고, 나름 비장했으며, 나름 명분도 있었던, 한 편의 정치 스릴러였다.


그렇게 한껏 TMI를 끝낸 태영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감탄사를 내질렀다.


“아, 그러고 보니.”

“음?”

“오늘 함 구경 갈래?”

“무슨 구경?”

“오늘 둘째 주 일요일이잖아. 백장미회는 격주마다 공개 세션을 열 거든. 그리고 재밌는 구경도 할 수 있을 걸?”


뭐가 그렇게 재밌는 구경인지 태영의 입에서 음흉한 미소가 걸렸다.

어쨌거나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안 그래도 과연 호즈 블랑슈의 검술 수준이 어떠한지 궁금했던 이헌이다.


“가지.”

“그래 가자! 이헌 네가 있으니 해코지할 놈들도 없을 테니까.”

“누가 널 해코지해?”

“누구긴 누구야. 발정 난 개새끼들이지.”


태영은 맺힌 게 많은 듯, 욕을 내뱉기 시작했다. 뭔가 사연이 있는 모양인데, 이헌은 굳이 묻지 않았다.

뭔가 태영에게도 사정이 있을 테니까.


그렇게 이헌은 입으로 시발시발 해대는 태영과 함께 이신 국제학교의 구교사로 향했다.




* * *




일요일에는 천하의 이신도 텅하니 비어 있었다. 보통의 학교라면 운동부 학생들이 남아서 연습을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신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휴식을 중요시하는 크리스찬 부장의 지론에 따라, 일요일은 절대 훈련 금지라는 교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지금 필드에는 취미로 운동을 즐기는 일반 학생들만이 조금씩 눈에 띌 뿐이었다.


“이헌아. 너는 주말 되면 주로 뭐했니.”

“그냥 운동하고 먹기?”

“정말 심심했겠다. 너 진짜 조이한테 잘해라.”

“안 그래도 성공하면 열 배로 갚아줘야 해.”

“그래? 그럼 잘해줄 필요 없어. 열 배면 그쪽에서 남는 장사지 뭘.”


태영과 이헌은 시덥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구교사로 향했다.

한쪽은 게임밖에 모르는 금수저 오타쿠, 다른 한쪽은 고아 출신의 운동부라는 안 어울리는 그림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의외의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검술을 좋아한다는 것. 그 어떤 닮은 점도 없는 두 사람이었지만, 검술을 좋아한다는 공통분모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태영은 그 같은 사실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구교사로 가는 길은 험하지 않았다. 과연 이헌이 처음 보고 감탄했던 학교답게, 넓어서 힘들지언정 언덕 때문에 고생할 일은 없었다.

다만 태영은 약간의 산책에도 힘이 드는 듯 땀을 흘리고 있었다. 하기야 하루 종일 앉아만 있는데 체력이 좋을 리가 없었다.


“힘드냐.”

“난 그냥 땀이 많이 나는 체질일 뿐이야.”

“그러냐.”

“너까지 날 그렇게 바라보지 마! 조이라면 친절하게 손수건이라도 건네줬을 텐데!”

“너 남자한테 손수건 받고 싶어?”

“......그건 아니네.”

“그럼 그냥 걸어.”

“예.”


태영은 투덜투덜 거리면서 억지로 더 걸었다.

하기야 가을이 왔다고 하지만, 일교차 때문에 낮에는 아직 더울 시기였다.

게다가 이신이 좀 넓어야지. 이런 쨍쨍한 햇빛에 익숙지 않은 태영으로선 땀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본래 사람이 땀을 흘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 사람의 취향에 따라 땀을 흘리는 이성에게 매력을 느끼는 일도 있었다.

문제는 싫은 사람이 땀을 흘리면, 그것만큼 꼴 보기 싫은 게 없다는 것이다.


“야이 시벌 오타쿠 새끼야. 내가 내 눈에 띄지 말라고 했지. 시발 땀 좀 봐. 냄새난다고!”


아주 지독한 한국말이었다. 다양한 외국어 스타일의 한글리쉬를 듣다, 저런 정통 한국말을 들으니, 오히려 반가울 정도의 화끈한 대사였다.

이헌이 궁금하여 돌아보자 그곳엔 덩치가 큰 한국인 무리 몇 명이 태영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야! 내 말 좆으로 들었냐?”

“오오 중상이 화났다. 저놈 화가 나면 코치도 못 말리는데. 키키킥”


잔뜩 화가 난 것으로 보이는 중상이라 불린 녀석이 한 명. 뭐가 그렇게 웃긴지 실실 웃고 있는 녀석들. 그리고 그런 남학생들 사이에 껴있는 센 화장을 한 여학생들까지.

너무 전형적이라서 이헌은 오히려 녀석들이 반가울 정도였다. 이 학교에도 소위 일진 비슷한 녀석들이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국제학교라길래 흔히 말하는 bully라는 녀석들을 기대했던 이헌이다. 어디 미국 스타일의 일진들은 어떠한지, 무척이나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헌데 정작 이신에 전학을 오자, 불리의 b자는커녕 하나 같이 모범생들 밖엔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불리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미식축구부마저 운동밖에 모르는 건실한 청년밖에 없었다. 당연히 이헌으로서는 실망감이 이만저만이 아닐 수밖에.

헌데 이런 국제학교에서 불리도 아닌, 정통 스타일의 한국 일진을 만나게 된 것이다!

심지어 그들이 입고 있는 재킷은 다름 아닌 이신의 야구부 공식 유니폼이었다.

미식축구부도 못 해낸 일을, 이신의 야구부가 해낸 셈이다.


“야! 야! 대답 안 해? 내가 너 여기에 오지 말라고 했지?”

“우, 웃기네.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는데?”


태영은 나름 용기를 내며 그에게 반항했다.

그 용기는 칭찬받기 마땅하나, 그 모습이 마치 고양이의 성질을 건드린 쥐새끼처럼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태영은 이미 외모부터가 중상이라는 녀석과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루 종일 햇빛이 없는 방안에만 있는 태영이다. 어지간한 북유럽 백인보다 더 새하얀 것은 물론, 남성 호르몬이라고는 단 1g도 느껴지지 않는 전형적인 너드였다.

그에 비해 야구부 녀석들은, 전형적인 운동부 스타일의 상남자들이었다.

거기에 다른 운동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훈련량으로 다져진 야구부 특유의 악바리 근성이, 이미 얼굴과 눈빛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부리부리한 눈썹과 거기에 어울리는 뜨거운 눈빛. 아니면 살벌하다 못해 냉혈하게 느껴지는 찢어진 눈까지.

그야말로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이런 눈빛들을 말하는 것이리라.


“하... 태영이. 우리 오타쿠 새끼가 많이 컸네?”


태영의 반항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탓일까. 처음부터 시비를 걸어오던 중상이라는 녀석이, 뚜벅뚜벅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런 그는 왼손에 차고 있던 황금빛 시계를 풀어, 주머니 속에 넣고 있었다. 마치 옛날 미디어에서나 볼법한 훈육 장면이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서로 말싸움이라면 굳이 끼어들 생각이 없었던 이헌이다. 하지만 이렇게 폭력이 동반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는 법이다.


“어이 거기. 그만하지?”


이헌은 그를 말려보기 위해 차분한 목소리로 그를 불러냈다.

하지만 그런 이헌의 메시지가 들리지 않았던 것일까. 중상은 이헌의 말 따윈 깔끔하게 무시하고 기어이 태영의 멱살을 들어 올렸다.


“어어?”

“시벌놈아 이 꽉 다물어. 저번처럼 부러지기 싫으면.”


강하게 멱살을 쥔 채 태영을 마구잡이로 흔들던 그는, 손바닥을 살짝 오므린 채 높이 들어 올렸다.

놀란 태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폭력에 익숙하지 않은 그로서는, 이런 단순한 행동에도 저절로 몸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감고 기다려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태영이 실눈을 뜨고 보니, 그의 앞에서 실실 웃고 있는 중상의 모습이 들어왔다.


“야, 쫄았냐?”

“뭐? 뭔데!”

“이 새끼 쫄았네. 크큭 그만 쫄아도 돼 병신아. 나도 너 계속 괴롭혔다간 아빠한테 맞아 죽어.”


다행히 중상은 태영을 때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빠 어쩌고 하는 걸 보니, 학교 측에서도 둘의 문제로 상당한 제재를 가했던 모양이다. 아마 경고 차원에서 학부모 소환이라도 했던 거겠지.


“그래도 내 눈에는 띄지마라 이 구타유발자야. 아버지한테 뒤지게 쳐맞는 한이 있어도 너는 졸라 때리고 싶거든.”


허나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중상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태영을 협박했다. 도대체 왜 저렇게까지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지간히 태영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런 중상의 협박에 태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중상의 번들거리는 눈빛이 무서웠던 것도 있었지만, 또 괜히 부모님께 심려를 끼치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태영이 몰랐던 것은, 그에게는 대신 대답해 줄 수 있는 친구가 있었다는 것이다.


“야. 이 꽉 다물어.”


순간, 이헌의 팔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쩌억!]


커다란 마찰음이 구교사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낄낄거리며 웃던 야구부원 전체가 깜짝 놀라 어깨를 떨었을 정도였다.


“커억!”


뺨을 얻어맞은 사람은 당연히 중상이었다.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폭력을 행사하려던 그는, 똑같은 방식으로 되돌림을 당한 것이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이헌은 말로만 하지 않는다는 점이지만.


“크어어어.”

“넌 마음껏 쫄아도 돼. 나는 진짜로 때리니까.”


겨우 손바닥으로 뺨 한 대를 때렸을 뿐이다. 하지만 중상은 그 한 방으로, 눈알이 뒤집혀진 채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이미 그의 얻어맞은 뺨은 시뻘겋게 달아올랐으며, 우뚝 솟아 있었던 코는 이상한 방향으로 휘어져 있었다.

참으로 무서운 한 방이었다.


작가의말

사정이 있어 일요일과 월요일날 휴무입니다. 내일은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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