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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ils 님의 서재입니다.

평행세계에서 조용히 사는 법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콜트1911
작품등록일 :
2020.05.16 15:45
최근연재일 :
2020.06.2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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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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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17. 허약한 몸

DUMMY

17.




이헌이 복싱부에 들어간 이후, 그가 하는 일은 언제나 같았다.

첫날은 상체 훈련을 했으며, 다음엔 하체를 한다. 그러면 이제 휴식이 필요하다면서 다음날에는 아예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이런 운동부원이 어디에 있을까. 아침에 고등학교 본관에 나와 오전 수업만 한 뒤, 대충 한 시간 반 동안 역기를 들다가 바로 기숙사로 들어가 버린다.

그러는 주제에 먹는 건 어찌나 잘 먹는지, 하루 종일 식당에서 사는 것만 같았다.

운동부 학생들은 아침부터 저녁 10시까지 언제나 무료 식사가 가능하다는 점을 이용해, 아주 황제 코스로 벌크 업을 즐기고 있던 것이다.

그런 재밌는 소문이 좁디 좁은 학교에서 퍼지지 않을 리 없었다.

크리스찬 부장과 크리스 감독이 서로 싸워가며 데려온 복싱 장학생이다.

그런데 그런 장학생이 운동도 제대로 하지 않고 먹기만 한다? 그 잘난 크리스찬 부장의 유일한 실패 사례가 아닌가?

이런 재미난 소식은 단순히 운동부 학생들만이 아니라, 코치들과 일반 학생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질 정도였다.

이헌은 본의 아니게 다시 한 번 이신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었다.




* * *




여름이 조금씩 지나고 있었지만, 아직은 무더운 날씨가 지속 되고 있었다.

당연히 이런 쨍쨍한 땡볕에선 야외수업은 금지였다.

사실 원래 이신에는 그런 교칙은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흑색종에 걸리면 책임질 거냐고 항의하는 바람에 생긴, 일종의 백인 맞춤형 교칙이라 할 수 있었다.

때문에 이 시기의 모든 체육 수업은, 수영이나 농구 같은 실내 운동으로 진행되는 것으로 굳혀진 상태였다.


“오우......”

[퓌익!]


어디선가 감탄하는 탄성과 함께 휘파람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전자는 이헌의 몸을 본 여학생들의 감탄사였으며, 후자는 마찬가지로 잔뜩 음흉한 미소를 지은 남학생이 분 휘파람 소리였다.

같은 반 학생이라는 녀석들이 지금, 이헌에게 캣 콜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캣 콜링은 서구에서 자주 자행되는 대표적인 길거리 성희롱이었다.

당연히 주로 당하는 피해자들은 당연히 여성들이었다.

어떤 이들은 길거리에서 여성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것이 자신들의 문화라 우기지만, 그 어떤 여성이 싸구려 휘파람 유혹을 좋아할까?

여기서 더욱 웃기는 것은 반대의 경우도 많았다는 점이다.

모델 같은 남자를 보면 여성들 역시 휘파람을 불거나 노골적인 유혹을 했으며, 심지어 같은 남자들에게까지 휘파람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헌은 캣 콜링이 뭔지도 몰랐다.

타고난 알파 메일의 숙명이라고 해야 할까. 평생 성희롱은커녕 그 비슷한 것과도 연관이 없었던 이헌이다.

애초에 캣 콜링이라는 것은 유럽이나 미국 같은 서구권 문화에서나 있지, 한국에서는 아예 존재 자체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가 설마하니 지금 자신이 성희롱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너. 멍청이야?”


그런 상황을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성희롱을 당하면서도 묵묵하게만 있는 이헌이 답답했던 것일까.

결국 참지 못한 여학생이 나서고 말았다.


“너, 김이헌이라고 했던가.”


이헌은 자신에게 멍청이냐고 묻는 여학생을 바라보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아래 위로 훑어보고 말았다.

눈부시도록 하얀 피부와 어림잡아도 170cm는 넘어 보이는 큰 키. 그리고 그런 체형에 걸맞게 곧게 뻗은 긴 다리까지.

이런 존재감 넘치는 그녀의 자태는, 마치 프로 모델 같은 강렬한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다.

심지어 동양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풍만한 가슴과 가는다란 허리, 거기에 크고 둥그런 골반의 굴곡은, 이헌 같은 남자들에겐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헌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근육에 있었다.

탄력 있는 어깨의 라인과, 그 라인으로 이어지는 팔의 형태는, 결코 웨이트 트레이닝 없이는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잘 봤니?”


하도 노골적으로 그녀의 몸을 살펴본 탓일까. 놀라울 정도로 무표정한 그녀였지만, 말에는 제법 뼈가 있었다.


“미안. 몸이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실수를 했어.”


이헌이 순순하게 사과를 한 덕분인지, 아니면 원래 성격이 그런지 그녀는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순수하게 이헌의 감상평을 물었다.


“그래. 웨이트 트레이닝만 하는 복싱부원이 보기에 내 몸은 어떻지?”

“타고난 가슴 둘레나 골반은 제외하더라도, 수준급의 몸이야. 골반과 대퇴사두근(허벅지 앞쪽)의 경계가 뚜렷한 데다, 살이 찌기 쉬운 부위인 삼두에도 지방이 거의 없어. 혹시 다이어트 중인가? 프로필 사진?”

“다이어트라기 보단 기본적인 식단 관리지.”

“좋아. 이제 전면을 봤으니 후면을 볼까?”

“그동안 실컷 보지 않았어? 하라는 수영은 안 하고 항상 멀리서 구경만 했었잖아?”


여자들은 민감했다. 특히나 자신의 몸을 보는 남자들의 시선 따위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 여인의 일침에 이헌은 이번에도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 둔부도 훌륭해. 화려한 상체를 확실하게 받쳐주고 있거든. 의외로 여자들이 둔부에 근육을 붙이기 어렵다는 걸 생각하면, 네 체질은 축복받았다고 할 수 있지. 이제 남은 것은 등인데, 수영복 때문에 보이진 않지만, 후면 삼각근만 봐도 알 수 있겠어. 더 자세한 건 언젠가 기회가 있겠지.”


언젠가 기회가 있다는 말은 상당히 노골적으로 보였지만, 이헌은 진심으로 순수하게 말한 것이었다.

전생에선 나름 어른이었던 이헌이다. 특히 그녀가 만났던 여인들은 운동을 전문적으로 하는 모델들은 물론, 아름답기로 유명했던 여자 배우들도 있었다.

그랬던 그가 다른 사춘기 남학생들처럼 단순히 가슴과 엉덩이만 보고 달려들 순 없지 않은가.


오히려 이헌이 그녀에게 빠져든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눈에 있었다.

그것은 마치 보석과도 같았다.

쌍꺼풀과 함께 눈동자가 살짝 위로 몰린 그녀의 눈은, 나른하면서도 고혹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내 굉장히 관능적인 이미지를 자아냈다.

물론 그러한 눈은 얼핏 삼백안처럼 보일 수 있어, 지나치게 고고해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헌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녀와 잘 어울린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거기에 그런 고고한 눈빛에 어울리는 오똑한 코와 붉은 입술, 마지막으로 부드럽고 갸름한 턱선까지, 그 모든 것이 손으로 빚은 것처럼 조화로워 보였다.

장담하건대 게임 커스터마이징을 해도 저렇게는 만들 순 없으리라.


그래서였을까. 이헌은 여인의 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헌이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한 것도, 이 눈빛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아무리 그녀가 매력적이라 하더라도, 자신을 멍청이라고 부른 이유는 알아야 했다. 아무렴 이헌은 여자 앞이라고 바보가 되는 종류의 남자는 아니었다.


“그래. 이제 사족은 집어치우지.”

“사족?”

“왜 나를 멍청이라고 부른 건데?”

“하! 이제 와서?”


대화를 나누는 내내 얼음처럼 무표정을 유지하던 그녀였다. 하지만 이헌이 본론에 들어가자, 무척이나 새삼스럽다는 얼굴이 되었다.


“내 몸을 노골적으로 훑길래 너도 즐기는 줄 알았더니.”

“네 몸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남자는 게이거나 성불구자겠지.”


이헌의 말에 납득한 것일까. 그녀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좋아, 그럼 알려주지. 방금 네가 당했던 게 바로 캣 콜링이야.”

“캣 콜링? 그게 뭔데?”

“간단히 말해 성희롱이야.”


아무리 천하의 이헌이라 할지라도 이때만큼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성희롱이란 여성들이나 당하는 성범죄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남자들이라고 해서 성범죄의 피해자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동성범죄부터 시작해, 남자가 남자에게, 혹은 여자에게도 당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성범죄였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한민국의 근육질 남자로 살아왔던 이헌에게, 성희롱이란 단어조차도 생소한 미지의 것이었다.


“성희롱이라고? 내가?”

“정확히는 당한 거지.”

“왜? 어째서? 여자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휘파람을 분 녀석은 남자잖아?”

“원래 이 시기의 남자들은 대부분 멍청하잖아.”

“지금은 부정하기 힘들군.”


방금 그녀의 말은 남자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부정하고 싶었다. 문제는 딱히 반박할 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는 점이지만.

당장 자신에게 휘파람을 분 녀석은, 자신이 옷을 벗고 나타날 때마다 같은 행동을 반복했었으니까.

도대체 왜 그랬을까. 차라리 처음 한, 두 번 그랬다면 이해라도 간다. 실제로 이헌의 몸은, 피트니스에 미쳐있는 어지간한 고등학생 수준과는 궤를 달리했으니까.

하지만 수영 수업만 벌써 4주째였다. 그 한 달이란 시간 동안 저 바보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휘파람을 불러댔던 것이다.


이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이곳을 보며 아직도 낄낄거리는 그 문제의 남학생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까이서 본 남학생은 제법 잘생긴 라틴계 미남이었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올리브를 닮은 탐스러운 머리카락까지.

오죽했으면 이헌 스스로가 지능과 외모는 별개구나 하는 깨달음을 새삼 느꼈을 정도였다.


“야.”

“크크큭. 응?”

“즐거워?”

“아, 아니아니. 여왕님이랑 너랑 제법 잘 어울려서.”


여왕이라는 단어는 한국사람이 듣기에 올드하다 못해 촌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서구권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나름 평범한 표현이었을지 모른다.

헌데 제법 재밌는 표현을 들었음에도, 이헌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눈앞의 학생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안 그래도 이헌은 그 외모만으로 굉장한 위압감을 주는 남자였다.

그런데 그런 남자가 가만히 눈빛을 쏘아보내고 있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경박스러웠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진화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심각한 분위기를 이 라틴계 청년만 몰랐다는 점이다.


“왜 그렇게 심각해? 이봐 킴! 칭찬이야 칭찬. 그리고 너희 둘도 제법 잘 어울려서 그랬어!”

“사실 난 너희들 문화를 잘 몰라.”

“그래?”

“그래서 네가 수영 수업 내내 휘파람을 불어도 아무 생각이 없었거든.”

“헤이. 진정해. 그것도 칭찬이었어. 네 몸이 워낙 좋으니까.”


이헌은 더 이상 듣지 않았다. 대신 그는 라틴계 남학생의 탐스러운 검은색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아악! 뭐 하는 짓이야!”


과연 라틴식 마초가 이런 것일까. 머리카락을 잡힌 그는 본능적으로 이헌의 복부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만약 이헌이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 레프트 블로우는 제법 효과적이었을지도 몰랐다.


“으아악!”


하지만 비명이 나온 것은 오히려 주먹질을 했던 당사자였다. 이헌의 단단한 복부를 함부로 쳤다가 그만, 자신의 손만 다쳤던 것이다.

머리카락을 붙잡힌 남학생은 자신의 왼손을 부여잡으며,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당장 두피도 아파죽겠는데 손까지 잘못됐다. 고통이 분산되다 보니,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지 정신까지 혼란해졌다.

문제는 위아래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 그가 선택한 것은 역시 머리카락이었다.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던 이헌이 기어이 그를 들어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아아! 아아악! 놔!? 이거 놔라?”


남학생은 어떻게든 센 척을 하며 허세를 부렸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물론 더 이상 주먹질은 하지 않았다. 그만 깜빡 잊고 있었는데, 눈앞의 헬창은 사실은 헬창이 아니라 복싱부였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이헌의 손을 풀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끄으윽 아악! 놓으라고!”


허나 그의 약력으로는 이헌의 새끼손가락조차 당해낼 수 없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가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그의 몸은 점점 더 위로 올라가고 있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이 헬창 복서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남학생은 자신이 까치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으어억!”


결국 그는 이헌이 손목을 전력으로 붙잡은 채 여자애 같은 비명을 지르고야 말았다. 기어이 저 미친 헬창 복서가 자신의 몸을 완전히 들어 올린 것이다. 그것도 겨우 한 손으로.


“내 머리! 내 머리!”

“야.”

“아아아악! 머리! 머리!”

“너, 나한테도 그렇게 휘파람 불었을 정도면 여자들한텐 얼마나 했다는 거야?”

“미안! 미안해! 머리카락! 빠진다! 빠진다고!”

“야.”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저 눈을 감은 채, 발버둥을 치던 남학생이다.

하기야 평생을 안락하게만 살아왔을 그였다. 그런 그가 언제 이런 고통을 경험이나 해봤을까.


하지만 이헌이 오른손으로 그의 양쪽 뺨을 강하게 움켜쥔 순간. 그는 처음으로 등골이 오싹 하다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저 단단하고 강인한 손아귀의 힘. 자신의 턱뼈를 부숴버릴 것만 같은 커다란 손가락.

이헌이 마음만 먹는다면, 사람 목숨 같은 건 파리 목숨보다 가벼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러다가 죽는다!


그것은 일종의 생존본능이었다. 정신이 번쩍 든 그는 어떻게든 고통을 수습하면서 이헌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는 볼 수 있었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이헌의 눈을.


“미, 미안해. 정말 잘못했어.”


지금까지 라틴계 남학생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그저 고통에서 나오는 아무 말 대잔치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 그가 건네는 사과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이헌의 눈을 보는 순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에겐 자신이 가진 매력이나, 젊음이라는 이유로 가져왔던 특권 따윈,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만약 여기서 계속 말실수를 했다간, 정말로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잘못했지?”

“미, 미안해. 정말 미안해. 브로!”


진심 어린 사과에 형제라는 말까지 들었다.

나름 재밌는 표현을 들었던 것일까. 이헌은 남학생의 머리카락을 놔주었다.


[쿵!]


남학생은 큰 소리와 함께 단단한 시멘트 바닥에 엉덩이부터 떨어졌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자신도 모르게 엉덩이를 감싸쥐는 사람도 있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당장 그에겐 엉덩이보단 머리카락이 더 소중한 듯했다.


그는 정신없이 자신의 두피를 매만지며 머리카락을 확인했다.

천만 다행히도 그의 머리카락은 무사했다. 이헌이 머리카락을 붙잡고 단번에 뽑아버렸으면 모를까, 사정을 봐주며 천천히 끌어올린 덕분이었다.

다만 이헌의 손아귀에 남아있는 가닥가닥 끊어진 머리카락들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아직 젊으니 겨우 이런 일로 탈모가 오진 않으리라.


“어이 거기! 이제 그만 해라!”


그 모습을 지켜 보던 체육 교사가 뒤늦게 그들의 행동을 제지했다.

진즉에 와서 말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평소 이 라틴계 학생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았다.

아니면 이헌이 어떻게 대처하는지 궁금했거나.


교사의 개입 때문이었을까. 어수선한 수영장 분위기는 금방 풀리게 되었다.

물론 이헌의 눈치를 보며 긴장하는 학생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특히 수영 수업이 있던 날마다 이헌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던 몇몇 여학생들은 알게 모르게 눈치를 봤다.

하기야 그 광경을 보고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건장한 남자를, 그것도 발버둥 치는 남자를 한 손만으로 들어 올린 이헌이었다.

복싱부에서 하라는 복싱은 안 하고 매일 보디빌딩만 한다더니 과연 그 힘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주 작은 사고가 있었지만, 수업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학생들은 열심히 수영을 했고, 이헌은 열심히 구경을 했다.


“왜 수영을 안 하는 거야?”


하지만 그러한 이헌의 모습이 의아했던 것일까. 한 여학생이 질문을 건넸다.

바로 방금 전, 이헌이 성희롱을 당하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진실을 알려주었던 그 여학생이었다.

레인을 쉬지 않고 네 바퀴나 돌고 온 그녀였지만, 안정된 호흡은 그녀의 체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왜 수영을 안 하냐고?”

“그래. 혹시 할 줄 모르는 거면...”

“힘들어서.”

“뭐?”

“오후에 웨이트를 하려면 수영 같은 힘든 운동은 하면 안 돼.”

“힘들다고?”


그녀는 이헌의 몸을 바라보았다.

벌크 업을 진행 중이라서 그런지 데피니션(근육의 선명도)은 선명하지 않았지만, 흔히 말하는 매스(근육의 덩어리)와 세퍼레이션(근육의 분리도)은 대단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이것은 마치 복서가 아니라 가장 이상적인 보디빌더와도 같았다.

그런데 기껏 저런 몸을 하고서 하는 말이 힘들다? 말로만 듣던 풍선 근육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만나본 대부분의 남자들은 언제나 그녀 앞에서 허세를 부렸다.

그것은 그녀가 워낙 대단한 미인이었던 탓도 있었지만, 동시에 뇌와 상관없이 튀어나오는 본능 때문이기도 했다.

원래 짝짓기 시즌만 되면 온갖 허세를 부리는 것이 수컷이라는 존재였다. 하물며 인간에겐 발정기의 한계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그녀는 남자들을 싫어한다기보다는, 이해하는 방향으로 생각해 왔다. 원래 호르몬이란 그런 거였으니까.

그런데 지금 이 남자는 허세를 부리기는커녕, 오히려 엄살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왜. 납득 하기 어려워?”

“내가 듣기로 운동하는 시간도 겨우 한 시간 밖에 안 한다고 했는데.”

“운동은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야. 선택과 집중이 중요한 거지.”

“집중?”

“수영을 하고서도 똑같은 웨이트 프로그램을 돌릴 순 있지. 하지만 나는 한 시간에 걸쳐서 내 모든 집중력을 쏟아붓고 있어. 그런데 거기에 수영이라는 변수가 들어가면, 자칫 잘못하다가 오버 트레이닝이 될 수 있거든.”

“선수 수준의 훈련도 아니고 겨우 체육 시간의 수영인데도?”

“그래. 아직 내 몸은 허약하니까.”

“허약? 네 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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