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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ils 님의 서재입니다.

평행세계에서 조용히 사는 법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콜트1911
작품등록일 :
2020.05.16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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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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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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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마스터

DUMMY

22.



페이튼과 마이크의 열렬한 구애 덕분이었을까. 결국 페이튼은 이헌에게서 오후 미식축구부의 훈련에 참가하겠다는 약속 받아낼 수 있었다.

신이 난 페이튼이 감독에게 보고를 하러 간 사이, 이헌은 어느새 루틴처럼 되어버린 교내 산책에 나섰다.

이신 국제학교는 어지간한 대학교보다 훨씬 큰 규모를 자랑했다. 거기에 각 종목마다 필드와 체육관이 지어져 있는 것은 물론, 공원에 가까운 조성으로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당연히 처음 이신 학교에 온 사람들이나 신입생들은 까딱 잘못하면 길을 잃기 일수였기에, 이신의 지도가 그려진 팸플릿을 반드시 들고 다녀야 했다.

때문에 이헌은 점심 후 항상 산책을 하며 교내 곳곳을 누볐다. 이런 좋은 동네의 좋은 장소의 공기는 기회가 있을 때 잔뜩 마셔줘야 했으니까.

특히 오늘 가는 곳은 과거에 구 교사가 있던 장소로, 대부분의 시설이 노후화하여 곧 리모델링에 들어간다는 곳이었다.


보통 이런 곳은 불량학생들이 모여서 담배를 피우곤 하는 것이 클리셰가 아니던가. 교사들의 눈이 미치지 않는 한적한 곳을 골라 비행을 저지르는 것이야 말로 불량 학생들의 의무인 것이다.

솔직히 말해 이헌은 그런 불량학생들과 만나보고 싶었다.

과연 이신의 일진들은 무슨 꼴을 하고 있을까? 혹 대마초를 기본으로, 기타 위험한 마약이라도 하는 게 아닐까. 어찌됐든 이 세계는 미쳐 있으니까.

어쩌면 미드에서 보던 것처럼 미식축구 선수들이 전형적인 Bully가 아닐까?

아니다. 여기는 명문 국제학교였다. 특히 크리스찬 부장과 마이크 감독 밑에 있는 미식축구 선수들이 음지에서 대마초나 피우는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길을 걷던 이헌이었다.

그런데 그는 문득,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익숙한 소리에 자신의 귀를 쫑긋거렸다.

그것은 이쪽 세상에서는, 특히 이런 학교에서는 절대 들릴 수가 없는 특유의 타격음이었다.


[툭! 툭! 툭!]


이 소리를 어찌 이헌이 잊을 수 있을까.

그것은 철검이 펜싱 마스크에 부딪칠 때마다 나는 특유의 둔탁한 소리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펜싱을 하는 소리인 줄 알았다. 마침 학교에 펜싱부도 있다고 하니, 이 근처에 펜싱 클럽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둔탁한 소리는 절대 펜싱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적어도 과거에 죽어라 검을 휘두르며 대련을 했던 이헌이, 그런 착각을 할 리가 없었다.


그렇게 소리의 흔적을 따라 추적을 하던 이헌은, 기어이 그 장면을 보고야 말았다.

머리를 풀어헤친 한 여인이 롱소드를 들고 있는 모습을.

단순히 그냥 들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더미를 향해 열렬히 솔로 드릴(반복훈련, 보통은 초식, 카타, 형, 플러리쉬, 등 검로 연습을 뜻한다)을 하고 있는 광경을 말이다.

그것은 참으로 기이한 장면이었다.

먼저 왜 저런 마이너한 검술이, 이신 국제학교 같은 메이저 학교에서 펼쳐지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더 기이한 것은, 지금 롱소드 검술을 펼치고 있는 여인이었다.


혹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검을 휘두르면서 눈물을 쏟아내는 모습이, 너무나도 이질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럴 수도 있다. 세상은 요지경이라고, 여고생 롱소드 검객이, 하필 오늘 실연을 당해 눈물을 흘리며 검을 휘두르는 장면을, 우연히 자신이 볼 수도 있겠지.


그러면서도 또 웃긴 것은 솔로 드릴이 제법 수준이 높았다는 점이다. 저렇게 질질 짜면서도 보법과 검로가 혼연일체가 되는 것이, 기가 막힐 정도로 제대로였다.

그런 괴상한 광경에 이헌은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고 말았다.


“뭐야 저게?”



* * * * *



흔히 귀족 스포츠하면 뭐가 떠오를까.

일단 이헌이 알고 있는 종목들만 대충 나열해보자면 승마, 폴로, 조정, 럭비, 그리고 펜싱이 있었다.

특히 펜싱은 프랑스에서 온 검술이라는 점과, 일대일의 결투라는 점에서 귀족과 맞닿은 부분이 많았다.

아무리 시민혁명으로 인해 계급사회가 무너졌다지만, 프랑스를 향한 유럽의 시선에는 질투와 동경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프랑스 스타일의 검술은 분명 매력적인 것이었으리라.

특히 결투문화가 바뀌면서, 상대의 목숨 대신 빠르게 피를 볼 수 있는 펜싱의 방식은 스포츠로서도 각광을 받았다.


결국 살아남는 무술이란 얼마나 스포츠화가 되었느냐에 달린 것이다.

검도 역시 검술을 버리고 도장 문화를 선택하며 살아남았으며, 유술 또한 유도로, 그리고 펜싱 역시 부상을 최소화하면서 올림픽으로 살아남았으니 말이다.

그러니 상류층 학교에서 펜싱 수업을 한다는 것은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롱소드라니? 이 서양식 양손검술은 이미 한 번 맥이 끊겼던 과거의 검술이지 않은가. 스포츠로써도 활용이 안 되는 것은 물론, 한 번 맥이 끊겼던 만큼 취미로 즐기는 사람 역시 극소수였다.

솔직히 말해 좋게 포장해야 취미이자 복원이었지, 지나가던 일반인이 보기엔 괴상한 방식으로 검을 휘두르는 오타쿠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전생에서는 검술이라는 종목이 메이저로 올라가면서 대접이 좋아졌지만, 지금 이 세계는 그런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왜 그런 검술을, 그것도 이런 귀족 학교의 학생이 롱소드를 휘두르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연히 이헌으로선 인지 부조화를 느낄 수밖에.


무엇보다도 지금 상황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은,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검을 휘두르고 있는 저 여인이 바로 우서희였다는 점이다.


아니 왜? 왜 펜싱이나 검도가 아니라, 어찌하여 롱소드란 말인가.


차라리 펜싱이나 검도였다면 이헌은 백 번 양보할 수 있었다.

드라마 같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재벌가의 특유의 비정하고 날카로운 이미지에는, 투박한 운동보다는 검도 같은 것이 더 어울렸으니까.

하지만 절대 롱소드는 아니었다. 롱소드는 상류층 여식이 취미로 가질만한 그런 이미지가 아니었다.

편견이라 해도 좋았다. 당장 이헌이 그렇게 느끼겠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더군다나 롱소드 같이 뒤늦게 복원이 된 검술은, 90%의 사기꾼들과 10%의 미친자들이 이끌어 가는 하드코어 검술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귀족에겐 하드코어 이미지는 어울리지 않는 법이다.


“이 세계는 정말 미쳐 돌아가는군.”


이헌은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런 이헌의 말을 받아주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닌가.


“어떤 점이 그러니?”


여인의 목소리는 저음이면서도 나긋했다. 무슨 특이한 주파수라도 있는지, 가만히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착각이 들었다.

이헌이 옆을 바라보자 그곳엔 눈웃음을 지으며 이헌을 마주 보고 있는 한 미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헌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차분히 인사를 건넸다.


“안녕?”

“안녕.”

“네가 그 유명한 전학생이구나? 이름이 김이헌이라고 했던가?”

“그래.”

“반가워. 나는 클로디아 이사벨 리폴이라고 해. 클로디아라고 불러줘.”


클로디아는 고혹적인 눈빛과 함께 악수를 건넸다. 그러자 이헌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와 손을 맞잡은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그녀는 흔히 말하는 히스패닉계 백인 혼혈로, 탐스러운 흑발과 함께 촉촉한 커피우유색 피부를 지닌 미인이었다.

아름답고 부드러운 외모는 물론,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까지. 그야말로 히스패닉계 여성의 장점이란 장점은 모조리 합쳐놓은 듯한 외관이었다.

그런 미인의 악수 요청을 무슨 배짱으로 거절할 수 있을까.


“클로디아.”

“그래. 네가 우리 서희를 울린 거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하하하. 대단하네. 서희를 울린 남자는 네가 처음이거든.”

“뭐, 영광이군.”

“좋아. 너 마음에 들었어. 그런데 말이야... 아까 했던 말은 무슨 뜻이야?”

“내가 뭐라고 했었지?”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며?”

“아...”


자신이 말해놓고서도 잊어버린 이헌이었다.

하기야 클로디아 같은 여자를 눈앞에서 봤는데, 마냥 냉정을 유지하는 것도 남자로서 할 행동이 아니었다.

당황도 좀 해주고, 말도 더듬어주는 리액션을 보여줘야, 조금은 인간적이지 않을까.

사실 얼마 전에도 우서희를 정신없이 바라보다가 살짝 망신을 당했던 이헌이 아니던가.

그 장소가 수영장이었다는 핑계와 함께, 당사자인 서희가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 줘서 다행이었지, 솔직히 그땐 이헌도 꽤나 식겁했었다.


“별거 아니야. 왜 이런 상류층 학교에 다니는 여자가, 다른 무술도 아닌 롱소드 검술을 익혔는지 궁금했을 뿐이니까.”

“어머? 유럽 검술에 대해 조금 아나 보네?”

“그냥 조금 관심이 있거든.”


사실 조금 관심이 있는 편이 아니었다.

그의 정체성은 복싱도, 레슬링도, 미식축구가 아닌, 바로 검술에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이헌에게 검술을 익힌 미녀란, 참을 수 없는 유혹과도 같은 것이었다.



* * *



“서희야.”


눈물과 함께 전신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검을 휘두르던 서희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는지, 클로디아는 손수건을 꺼내 서희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하지만 잔뜩 눈물을 흘렸던 것과는 다르게 서희의 목소리는 평소의 그녀만큼이나 차분했다.


“클로디아.”

“그렇게 슬펐어?”

“내가 못나서 우는 거야.”

“아니야. 넌 못나지 않았어.”


클로디아는 우서희의 말을 부정하며 위로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말이 우서희의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서희의 눈물은 단순히 이헌에게 패배했기 때문에 흘렸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천재라는 종자들이 어떻게 평범한 사람들을 짓밟고 파괴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흘리는 절망에 가까웠다.

하지만 우서희는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클로디아에게로 화살표를 돌렸다.


“그런데 클로디아.”

“왜?”

“여긴 남자 금지인 거 알잖아?”


우서희는 이헌에게 특별히 감정 같은 건 없었다. 다만 그녀가 나무라는 것은, 이곳 호즈 블랑슈는 금남의 구역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그런 소리는 듣지도 못했던 이헌이다.


“남자 금지?”

“그래. 호즈 블랑슈는 오직 여성 회원만 발을 들일 수 있어.”

“요즘 세상에 남녀차별? 헌법재판소에 소라도 넣어야 하나?”


이헌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의외로 우서희의 얼굴은 심각했다.

지금까지는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던 그녀였다. 당장 패배의 눈물을 이런 외진 곳에 와서 흘리는 것만 봐도, 그녀의 성격이 어떠한지 알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런 서희가 이곳 호즈 블랑슈가 연관이 되자,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낸 것이다.


“김이헌은 내가 초대한 손님이야.”

“손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헌데 클로디아의 한 마디에, 서희의 살벌했던 눈빛이 거짓말처럼 녹아 없어졌다.

그 모습이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괜히 이헌이 다 민망해질 정도였다.

이 여자 둘이 자신을 가지고 노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신 학교 사람들은 하나 같이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물론 이런 오해는 이헌이 귀족이나 상류층 사회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탓이다. 특히 ‘손님’과 ‘초대’에 관해선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신의 명예와 명성이 걸린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과거 조선시대에선 양반가에서 쓰는 돈 대부분이, 손님 대접으로 인한 비용이었을 정도였다.


아무리 호즈 블랑슈가 금남의 구역이라 해도 같은 멤버인 클로디아의 초대를 받은 이상, 이헌은 손님으로서 대우받을 권리가 있었다.

덕분에 이헌은 클로디아 같은 미인에게서, 평생 맛보지도 못했던 영국 스타일의 차와 쿠키를 대접받는 호사를 누렸다.

사실 이헌은 차 같은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괜히 더 풍취가 더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잠시 후, 간단하게 샤워를 마친 서희가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는 덜 말렸는지 촉촉하게 젖어 있었는데, 그 모습이 참 야릇해 보였다.

샤워를 하고 나온 우서희는 클로디아의 따뜻한 차를 한 입 마시고는, 이헌에게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그래, 여긴 왜 찾아온 거지?”

“말은 바로 해야지. 나는 그냥 산책 중이었으니까.”

“하긴, 너는 전입생이었지. 이곳은 처음인가?”

“이신에 금남의 구역이 있다는 건 듣지 못했거든.”


이헌의 말은 타당했다. 클로디아 역시 이헌의 설명을 듣고선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해주었다.


“크리스찬 부장이 굳이 거기까지 설명해주진 않았을 테니까.”

“그럼 클로디아 너에게 묻지. 김이헌은 왜 초대한 거야?”


우서희의 다음 목표는 클로디아였다. 말만 들어보면 무척이나 날이 서 있는 듯한 대화였다.

하지만 우서희는 그저 궁금했을 뿐, 특별히 클로디아를 책망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녀의 백옥과도 같은 피부와 도회적인 느낌이 그러한 분위기를 만들었을 뿐이었다.


“왜 초대했냐고?”

“그래. 네가 남자를 초대한 건 오랜만이잖아.”

“그냥 여러 가지로 궁금했었어. 개인적으로 난 복싱을 좋아하잖아.”

“그렇지. 너는 복싱을 좋아하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헌이 궁금해하더라고.”

“뭐를?”

“왜 네가 정통 독일식 검술을 펼치고 있는지.”

“그렇군. 하긴 호즈 블랑슈라는 이름을 가진 주제에 펜싱 대신 독일 검술을 하고 있는 것도 웃긴 일이지.”


이헌은 호즈 블랑슈가 뭐하는 이름인지도 몰랐다. 다만 뭔가 프랑스어 느낌이 충만했고, 프랑스 하면 펜싱이었으니, 대충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우서희의 말은 계속되었다.


“궁금하지?”

“음?”

“비밀의 구역과 거기에 기거하는 여인들. 그리고 날카로운 칼까지. 어때,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들이잖아.”


과연 이헌은 우서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이곳은 남자들이 환장할만한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비밀이 휩싸인 구교사와 그곳에 있는 아름다운 여인들. 거기에 그녀들이 휘두르는 날카로운 칼까지.

남자로서 어떻게 이런 곳을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그래, 김이헌. 너는 검술에 관심이 있니?”


이번엔 클로디아가 물었다. 특유의 가라앉는 눈과 나긋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여간 여우가 아니었다.

이헌은 바보가 아니었다. 이런 여자에 대해 잘 알면 알았지, 모를 정도로 경험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국 알면서도 당하는 것이 남자라는 존재가 아니던가. 과거 세상을 지배했던 것은 남자였을지 몰라도, 결국 그 남자를 무너뜨렸던 존재는 여자였다.

괜히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검술?”

“그래 검술. 아무리 네가 운동을 잘해도 검술은 다를 걸? 눈앞에서 검이 휙휙 왔다갔다 하는 게 여간 무서운 게 아니거든.”


클로디아의 말에 우서희가 미소를 지으며 긍정했다.


“하긴. 의외로 남자들은 검술을 익히기 적합하지 않았지. 투쟁심이 너무 강해서 꼭 사고를 내거든.”

“맞아. 초보자끼리 어설프게 휘두르다가 꼭 다치곤 하더라.”

“보통 그런 애들은 일주일도 가지 못했지만.”


여인들의 말에 이헌은 내심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남성호르몬이 만들어내는 남자들의 투쟁심은, 격투기나 구기운동 같은 스포츠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지고 싶지 않다는 투지가 향상심을 이끌어내면서 실력을 일취월장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술은? 검술은 절대 그런 식으로 발전할 수 없다. 지겨울 정도로 기초를 다지고, 지루할 정도로 천천히 해야 발전하는 것이 바로 검술이었다.

아무리 연습용 검을 다룬다지만, 그것 역시 철로 만들어진 흉기였다. 상대를 이기고자 몸에 긴장이 들어가는 순간, 결국 사고는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그렇게 한쪽이 부상을 입고 나면,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고 만다. 피해자든 가해자든, 심지어 구경꾼들조차도 일종의 외상후 스트레스를 입으며 검을 놓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이헌도 검술에 흥미가 있니?”


클로디아는 다시 한 번 이헌에게 물었다.

묘하게 끈적하고 농염한 말투였다. 보통 남자들이었다면, 관심이 없어도 있다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하지만 이헌은 굳이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검술에 흥미가 있냐고?

장담하건대 이헌은, 이쪽 세상에서 그랜드마스터(대사부, 일대종사)라는 칭호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현대 검객들이 함부로 마스터 칭호를 받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검술을 실전으로 증명해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설사 주위에서 떠받든다 하여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뛰어난 명사라 할지라도, 스스로 마스터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순간, 바로 사이비 취급을 받을 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이헌은 아니었다.

그는 바로 얼마 전, 진검으로 사람을 베어 넘겼다. 그것도 그냥 일반인들도 아닌, 권총과 산탄총으로 무장한 마피아들을 상대로였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헌이 이쪽 세상에 오게 된 이유 역시, 진검승부 때문이 아니던가.

심지어 그 숭부는 자신에게 모든 것을 전수해주었던 스승과의 목숨을 건 결투였었다.


과거 이헌의 전생에서는 제 2의 철기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것은 가히 검의 전성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마 근대화 이후, 이렇게까지 검이 각광을 받았던 적도 드물었으리라.


당연하지만 그 결정적인 원인은, 다름 아닌 자본의 힘에 있었다.

이헌의 스승이 열었던 토너먼트의 규모가 커지면서, 완전히 프로 스포츠로 자리를 잡았던 덕분이었다.

처음 상금 100만 달러로 시작했던 토너먼트는, 종국에는 다른 프로 시합 못지않은 대규모 이벤트로 발전해나갔다.

스포츠와 자본이 만나는 순간, 그 분야에 전문가들이 생기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복싱이나 종합격투기가 자본과 결합하며 폭발적으로 발전한 것처럼, 검술 역시 같은 절차를 밟아 나갔던 것이다.


검의 시대였던 만큼, 검에 미친 사람도 많았던 세상이다. 그 신드롬이 어찌나 과격했던지, 결투 문제가 또 다른 사회 현상이 됐을 정도였다.

그것은 이헌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그 역시 그랜드마스터라 불리는 스승님을 죽이기 위해 검을 휘둘렀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미친 세상에서, 이헌과 같은 생각을 가졌던 검객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이헌의 삶은 결투이자 혈로였으며, 투쟁의 연속이었다. 토너먼트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미친놈들 사이에서, 이헌은 살아남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장장 5년이라는 세월이었다. 그 5년이란 시간 동안 목숨을 잃지 않고 살아남았을 때, 이헌은 비로소 스승님에게 찾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장담하건대, 이 세계에서 이헌보다 검으로 실전 경험이 많은 자들은 없을 것이다.

지금 눈앞의 여인들이야 평생 알 수 없겠지만.


“흥미야 있지. 너희 말대로 나도 남자거든.”


그렇게 말한 이헌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끝이 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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