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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ils 님의 서재입니다.

평행세계에서 조용히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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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트1911
작품등록일 :
2020.05.16 15:45
최근연재일 :
2020.06.2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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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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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쪽

15. 상대적 박탈감

DUMMY

15.



모두가 숨을 죽였다.

그도 그럴 수밖에.

어디 듣도 보지도 못한 동양인 신입생이 지금 감히 하늘과도 같은 감독님께 반기를 들었다.

그것도 그냥 항명 수준이 아닌, 거의 프래깅(아군 살해, 주로 상관 살해가 많다)에 가까운 반란 행위였던 것이다.


“언터처블이라고?”

“그래 그겁니다.”

“잠시만 기다려라.”


크리스 코치는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번역 어플을 켰다. 아무래도 둘 사이에 통역이 끼어서 대화하는 게 영 불편한 모양이었다.

한국에 오면서 제법 비싸게 주고 구입한 유료 어플은, 과연 그 가격만큼이나 제 기능을 제대로 발휘해주었다.


“네가 지금 체육부 부장을 믿고 까부는구나.”

“그게 조건이었습니다. 난 건들지 말라는 조건.”


크리스 코치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패기 넘치는 것은 좋았으나, 결국 상대는 애송이였다. 지금 눈앞의 녀석이 얼마나 순진한지 지금의 대화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걸 믿었다니. 순진하기는.”

“순진?”

“네가 크리스찬 부장에게 무슨 꼬드김을 당했는지 모르겠지만, 복싱부의 감독은 나다. 모든 결정은 내가 내리지.”

“이거 뭐지. 프런트와 감독의 권력 싸움 그런 건가?”

“그 프런트에서 날 모셔왔다. 전권은 내가 가지고 있어.”


크리스 코치의 말에 이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암, 제대로 된 감독이라면 프런트의 위세 따윈 무시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이 백인 코치가 제대로 된 감독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이헌에게 필요한 것은 페이스메이커 코치였지, 스승 같은 게 아니었다.


“이거 뭔가 착각을 하신 것 같은데.”

“뭐라?”

“내가 지금 증량을 하는 건 감독님을 위해섭니다.”

“나를 위해서?”

“지금 이곳 복싱부에 남는 체급이 헤비급밖에 없다고 들었는데, 아닙니까?”

“그래 맞다.”

“그래서 감독님 실적 올려주려고 일부러 남는 자리 간 겁니다. 원래는 사람이 많이 없는 슈퍼헤비급(91kg 이상)으로 가려 했는데, 마침 이곳에 덩치 큰 녀석 한 명이 있다 들어서요. 저기 저놈인가?”


이헌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엔 아까 전, 샘이라 불렸던 흑인이 열중쉬어 자세를 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100kg 가까이 나가 보이는 그는, 이헌이 마음에 안 드는지 콧김을 내뱉으며 살벌하게 노려보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눈빛에도 이헌은 안타깝다는 듯 그를 다독일 뿐이었다.


“너무 그러지 마. 다 너를 위해서니까. 내가 슈퍼헤비급으로 가면 너는 강제로 체급을 내리거나, 종목을 바꿔야 하거든.”


이헌의 그 말은 기폭제가 되고 말았다. 아무리 샘이 한국말이 서툴다 하더라도, 지금 저 말을 못 알아들을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너! 나와!”


샘은 파이터이자 투사였다. 그는 싸우는 자였지, 도망가는 자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항상 무모한 싸움에 도전했던 무하마드 알리의 팬이기도 했다. 그 말인즉, 이렇게 대놓고 시비를 걸어오는 자에게 절대 도망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헌은 절대로 상대를 모욕하거나 도발하기 위해 저런 말을 내뱉는 건 아니었다.

그저 언제나처럼 그는 진실만을 이야기했다. 다만 그는, 그 진실을 좋게 포장하는 성격이 아니었을 뿐이다.


그리고 때로 진실은 잔혹한 법이다.


“정말? 나랑 싸워도 되겠어?”

“감독님! 허락해주십시오! 저런 애송이에게 진짜 복싱을 보여줘야 합니다!”


샘은 이헌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감독에게 외쳤다.

키 196cm에 평체 100kg. 원래부터 이신 국제고의 학생이 아닌, 크리스 감독이 직접 데리고 온 유망주.

당연한 얘기지만 크리스 감독이 그를 데리고 온 이유는, 한국 같은 좁은 지역의 챔피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의 목표는 세계였다. 영광스러운 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함과 동시에 그 화제를 발판삼아 화려한 프로 데뷔를 꿈꾸고 있었다.


“샘.”

“예! 감독님!”

“보여줘라.”


감독의 허락이 떨어졌다. 이제 저 우물 안 개구리에게 교훈을 새겨 줄 일만 남았다.

샘은 글러브를 착용하고는 곧바로 링 위로 올라가더니, 이헌을 가리키며 곧장 손가락질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이헌은 알 수 없는 기시감에 휘말려야 했다.

데자뷰가 이런 것일까. 분명 이 비슷한 걸 저번에도 했던 것 같은데.

막 떠오르면서도 떠오르지 않을 것 같은 데자뷰에 고통받던 그는, 약간의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기억해낼 수 있었다.


“후우......”


이헌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자신은 크리스찬 부장의 테스트를 통과했다. 그런데 또 다시 같은 패턴으로, 테스트를 치르게 된 것이다.

그것도 외부인도 아닌, 내부인에게.


“이걸 어쩌나.”


이헌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설마하니 복싱부 감독이 저렇게 꽉 막힌 FM 군인 같은 스타일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른 팀 감독들은 크리스찬 부장 한 마디에 꼼짝을 못한다고 하던데, 이 양반은 감독으로서의 프라이드가 보통이 아닌 듯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 테스트를 볼 때부터 저 감독도 데려갔어야 했다.


문제는 여기서 빼기엔 지금까지 너무 큰소리를 쳤다는 점이다.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이헌으로선 저 어린 녀석의 도발을 받아줘야 했다.

결국 이헌은 머리를 긁적이며 감독에게 묻는 수밖에 없었다.


“감독님.”

“뭐냐.”

“한 가지 묻죠.”

“말해봐라.”

“저 위에 있는 녀석, 멘탈은 어떻습니까.”

“멘탈? 정신력 말이냐?”

“네. 대충 그거요. 멘탈 스트렝스.”

“문제없다.”

“확실합니까?”


이헌의 목소리는 마치 진정으로 걱정하는 듯한 말투였다.

스카우터도 아니고 이제 곧 링 위에서 맞붙을 상대가 멘탈을 걱정한다?

이는 당사자로서는 굉장히 자존심 상하는 발언이었다.

당연히 위에 있던 샘의 눈빛은 한층 더 살벌하게 변해 있었다.


허나 크리스 코치는 그런 이헌의 말에 순간 여러 가지 상념에 빠졌다.

결국 복싱이라는 것은 재능 싸움이었다. 그리고 샘은 지금까지 단 한 번의 패배도 없던 선수였다.

그는 천재였다. 그 하늘이 물려준 재능에, 압도적인 피지컬까지 물려받았다.

잠들어있던 사자에게 전투 기술을 가르치면 이렇게 되는 것일까.

감히 고등학생 수준에선 샘을 당해낼 자가 없었고, 그렇게 그는 아시아 최강자가 되어갔다.

그런데 그런 샘이 패배한다면? 자신과 같은 또래에게 무참히 패해 자존심이 무너져버린다면? 그것도 자신보다 훨씬 가벼운 녀석에게?

크리스 코치는 갑작스러운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샘과 비슷한 체급의 선수와 깨진다면 상관없을 터였다. 오히려 자신이 본 샘이라면 더욱 절치부심하여 더욱 열정적으로 훈련에 임하겠지.

하지만 상대는 자신보다 작고, 몸무게도 적게 나가는 동양인이라는 점이었다.

몸무게는 아무리 좁게 잡아도 15kg 이상 차이. 거기에 키는 10cm가량이나 차이가 났으며, 심지어 인종마저도 동양인이었다.

동양인에 대한 편견? 솔직히 말해서 크리스 코치는 그런 편견은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다.

각 인종마다 유리하고 불리한 운동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복싱이나 종합격투기나 같은 종목에선 두각을 나타내는 동양인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그들 대부분이 경량급이라는 점은 있었지만, 그것은 그 체급이 가장 흔한 체격이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오히려 동양 쪽에서 중량급 선수가 나오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인프라와 정보의 부재였다.

운동신경이 좋고 체격이 좋은 선수들 대부분은 야구 쪽으로 빠진다. 워낙 인기 있고 돈이 되는 스포츠인데다가, 청소년 인프라도 그쪽으로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당장 양궁의 경우만 봐도 인프라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실제로 대한민국이 활을 잘 쏘는 건, 단순히 이들이 활의 민족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대한민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가르치는 방식이 탁월했을 뿐이었다.

당장 유능한 한국 코치들이 세계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다른 나라 역시 비슷한 수준으로 올라온 것만 봐도 그 진실을 알 수 있었으니까.

코치는 냉정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종이라는 편견 대신, 각 개인에 맞는 트레이닝이 중요한 법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코치가 아닌, 선수 개인의 입장이라면 어떨까. 특히 흑인이라는 이유로 알게 모르게 차별과 편견을 당했던 당사자라면?


흑인이라는 이유로 더 유리하다.

흑인이라서 더 잘하는 것이다.

흑인만 아니었다면 내가 더 잘했을 것이다.


특히 샘은 복싱의 재능을 개화하면서 차별보다는 편견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것은 그를 시기하는 자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굴레였다.

문제는 샘이 과연 그 굴레를 극복했는지, 아니면 잠식을 당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하필, 그의 상대는 김이헌이었다.

그의 사전엔 적당히는 없었다. 설사 상대가 초등학생이라도 전력을 다하는 것이 김이헌이라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헌은 저 커다란 놈의 멘탈을 걱정할 수밖에. 부디 크게 넘어져도 일어설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렇게 이헌이 링 위로 올라가 막 글러브를 착용하려던 순간이었다.

적막이 흐르는 체육관 뒤쪽에서, 불청객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철컹]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바로 크리스찬 부장이었다.



* * *



“아이고 감독님 제가 너무 늦었습니다.”


크리스찬 부장은 한국식으로 인사하며 크리스 코치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 그의 인사는 언뜻 보기에는 저자세였지만, 그렇다고 절대 비굴하게는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이신이라는 거대한 제국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자세를 낮춘다는 것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 사정이 무엇인지 크리스 감독이 모를 리가 없었다.

저 건방진 동양인 꼬맹이 때문이겠지.


“아이고? 부장님도 이제 한국 사람 다 됐군요.”

“하하 그렇습니까. 한 번 습관이 되고 나니까, 이보다 더 좋은 표현이 없더군요.”

“그리고 늦지 않았습니다.”

“네?”

“이제부터 좋은 구경이 시작될 겁니다.”


크리스찬 부장은 처음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체육관을 둘러보던 그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이런 실수가 있을 수 있나.

그는 자신의 안이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헌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아니, 자존심이 강하다 못해 오만할 정도로 프라이드가 높았다.

문제는 그런 이헌만큼이나 크리스 코치 역시 자존심이 강하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크리스찬은 그런 둘을 아무런 완충장치도 없이 붙여 놓고 말았다.

장담하건대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둘 중 하나는 부러질 터였다.

그리고 그것은 크리스찬 부장이 원하는 결과가 결코 아니었다.


“잠시만!”


크리스찬 부장은 헐레벌떡 링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이헌에게 다가가 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이헌아. 그러지 말자. 여기 다니는 동안 얌전히 운동만 하겠다고 약속했잖아.”

“그 대신 간섭은 없기로 한 거 아니었습니까?”

“그야 그렇지.”

“그럼 확실하게 교통정리 좀 해주시죠. 전 페이스메이커 코치가 필요한 거지, 굳이 코칭은 필요 없거든요.”

“알지. 잘 알지.”


크리스찬 부장은 어떻게든 이헌을 진정시키려 했다.

당장 이헌이 테스트를 보고 난 뒤, 전도유망했던 두 명의 복서가 어떻게 됐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던 크리스찬이다.

성 요한의 기대주였던 박도현과 다니엘이 그날 이후로 복싱을 그만두게 되었다.

당장 둘은 대학교의 이름을 달고 막 프로 준비를 하던 기대주였다.

특히 다니엘의 경우 베테랑 선수들과의 스파링에서도 좋은 결과를 낸 데다, 뛰어난 피지컬만큼 비례하는 복싱 스킬로 HBO에서도 주목하던 신예였다.

그리고 이헌은 그런 기대주 둘을, 하루아침에 은퇴를 시켜버렸다.

크리스찬은 전율했다. 동시에 불쌍한 두 범부를 충분히 이해했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과 마주쳤을 때, 자신의 재능에 절망하는 자들은 어느 분야에서든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문제는 그 절망하는 자가 자신의 선수여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특히 그 선수가 저기 코너에 있는 새뮤얼 잭슨이라면?

크리스찬으로서는 더더욱 말릴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 감독이 직접 데리고 온 샘은 자신은 물론, 학교에서도 크게 주목하고 있는 진짜였으니까.


“이헌아. 일단 내려가 있어. 내가 감독님하고 이야기 나눠 볼 테니까.”

“정말로 내려갑니까?”

“제발 부탁이다. 응?”


결국 이헌은 크리스찬의 간곡한 부탁에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헌은, 크리스찬 부장에게 따끔한 한 마디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크리스찬 부장님.”

“왜.”

“그냥 서열 정리하게 놔두는 게 더 좋았을 겁니다.”


링 밖으로 내려가던 이헌은 그렇게 말하고선, 아예 체육관을 나가버렸다.

이제 교통정리는 크리스찬 부장의 손에 달렸다. 완전히 정리가 될 때까지 자신 같은 모난 돌은 잠시 빠져주는 게 맞았다.


그렇게 사상 초유의 폭탄이 사라지자 모두의 이목이 크리스찬에게 집중되었다.

여러 가지 감정들이 담긴 눈빛이었다. 특히 이신 복싱부 최고 유망주였던 샘의 눈빛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언제나 복싱부의 최대 기대주는 샘이었다. 크리스찬 역시 샘을 제일 아꼈으며, 보석을 다루듯 그를 케어해주었다.

그런데 지금, 그런 크리스찬 부장에게 새로운 보물이 생긴 것이다.

크리스 감독으로서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샘의 박탈감을 모를 그가 아니었으니까.

결국 상처 입은 자신의 선수들을 위해서 감독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부장.”

“예 감독님.”

“설명이 필요합니다.”

“좋습니다. 그럼 따로 이야기를 나눠보죠.”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 작성자
    Lv.57 고기졓아
    작성일
    20.05.27 20:01
    No. 1

    상대적 박탈감 하니 그거 생각나네요. 아랍에 슈퍼카 3대 갖고있는 사람이 자기가 너무 가난해서 불행하다고 인터뷰 한 것.. 와이프는 슈퍼카포함 차만 15대였... 배부른 놈들끼리 붙으면 둘 중 하나는 먹힐 수 밖에 없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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